올림픽 이야기
성화(聖火)
정의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의 신전에서 태양으로부터 채화하여 올림픽경기가 개최되는
주경기장의 성화대에서 경기가 끝날 때까지 타오르게 하는 불.
내용
채화식이 거행되는 장소는 그리스 남쪽 펠로폰네소스 반도 엘리스지방의 피자티스에 있는
헤라신전이며, 채화된 횃불을 올림픽의 개최지로 옮긴 뒤 릴레이로 봉송하여 주경기장에
점화하게 된다.
이러한 의식은 고대 올림픽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인간만이 이용할 줄 아는 불은 성스러운
상징으로 떠받들어졌으며 제우스신에 의해 4년마다 한 번씩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채화되는
것으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근대 올림픽이 처음 시작된 1896년부터 1924년 제8회 파리올림픽 때까지는 성화에
관계되는 의식이 없었다.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올림픽에서 처음 성화로 올림픽경기장을
밝혔으나 성화대가 따로 마련되지 않은 채 횃불처럼 꽂혀 있었으며, 성대한 성화봉송식 같은
의식도 갖지 않았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때 처음으로 높은 성화대가 마련되었고, 그리스에서부터 베를린
까지 3,000㎞의 거리를 많은 주자에 의해 성화를 봉송하는 의식이 실시되었다. 당시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했던 독일은 히틀러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히틀러를 추종하는 나치스 참모본부
에서 성화봉송과 성화대를 만드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성화대를 만든 것은 나치스의 절대 권력을 나타내기 위함이었고, 그리스로부터 인근 7개국을
거쳐 독일까지 성화를 봉송하도록 한 것은 제2차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펼쳐질 독일군의 공격
루트를 사전에 답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올림픽 성화는 그 뒤 평화의 상징으로 세계 인류의 마음을 밝혀주고 있으며, 1964년
부터는 동계올림픽에서도 성화봉송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55년 제36회 전국체육대회 때부터 이상백(李相佰, 제2대 한국IOC위원)의
제의로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성화를 채화, 전국체전이 벌어지는 주경기장까지 봉송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올림픽헌장 제63조에는 성화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올림픽성화를 경기장까지 운반하는 책임은 그 해 올림픽조직위원회에 있으며, 올림픽 성화의
봉송 여정 및 도착에 관련되는 식전은 관계 NOC(국가올림픽위원회) 주관으로 거행된다. 다만,
올림픽 프로토콜을 지켜야 하며 상업적 광고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특별한 허가가 없는 한 올림픽 성화는 1개여야 하며, 성화는 주경기장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장소에서 타올라야 한다.
가능하면 성화대를 경기장 밖에서도 볼 수 있도록 건설하는 것이 좋다.”
성화(聖火) 봉송(奉送)의 역사
그리스 신화에서 불은 태양의 모조품이다.
신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그리스의 주신 제우스는 자신의 이복동생인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이 갖고 놀던 불을 인간들에게
몰래 훔쳐다 준 것에 분노해 프로메테우스를 산꼭대기 바위에 쇠줄로 묶어 둔 뒤 매일 독수리
에게 간을 뜯기는 고통을 체험하도록 했다.
끊임없는 욕정과 번식으로 살아가는 제우스는 누나 데메테르와 동침해 딸 코레를 얻는데, 코레는
페르세포네라는 지하 세계의 여신이 된다.
제우스는 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딸 페르세포네를 사랑한 나머지 뱀으로 변신해 페르세포네의
음문을 통해 들어가 임신을 시켜 아들 자그레우스를 낳았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자그레우스를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헤라는 악명 높은 티탄들을 시켜 제우스가 동굴에 숨겨놓은 자그레우스를 죽게 한다.
이 사실을 안 제우스는 분노를 참지 못해 번개를 던져 티탄들을 재로 만들었는데, 재 속에 사랑과
아름다움의 상징인 자그레우스의 선과 무시무시하고 흉측한 티탄들의 악이 함께 어우러졌다.
프로메테우스는 빗방울이 잿더미에 떨어지자 그것을 반죽해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들에게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는 이유다.
성화 및 봉송의 기원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은 신들을 위한 제전이었다. 당시에 경기장에 불을 피워놓았는데, 바로
프로메테우스가 인간들에게 선물한 불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대 올림픽 성화(聖火,
Olympic Flame 또는 Olympic Torch)의 탄생 배경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열렸던 올림픽과 네메아, 델피, 이스트미아 등 어떤 제전에서도 성화 봉송
(Torch relay)은 없었다. 다만 성화를 들고 달리는 행사 람페데로미아(Lampadedromia)가
있었는데, 프로메테우스 등 특정한 신을 추모하기 위한 종교적 의식이었다.
1896년 아테네에서 부활된 제1회 올림픽에서는 성화가 재현되지 않았다. 근대올림픽이 부활된지
32년이 지난 1928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9회 대회에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성화 봉송(Olympic Torch Relays)은 8년 뒤인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에서부터
시작됐다. 성화 봉송의 첫 제안자는 스포츠역사가이며 1931년 베를린의 올림픽 유치에 기여했던
칼 디엠(Carl Diem)이었다. 그는 올림픽이 유치된 뒤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다, 대회조직위원장인
테오도르 레발트(Theodor Lewalt)가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히틀러에 의해 위원장
직에서 쫓겨나자 1935년부터 위원장을 맡았다.
디엠은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올림피아에서 성화를 채화한 뒤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베를린까지 3187㎞의 거리를 각국의 올림픽위원회에서 뽑은
3331명의 주자가 11박12일에 걸쳐 성화를 들고 이어 달려 8월1일 개회식 때 성화대에 점화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디엠의 이 제안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즉각 수용했고, 이로써 올림픽
의 성화 봉송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성화 봉송의 코스가 디엠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독일 나치군이 고안했다는 설도 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이 코스의 역순을 통해 점령을 확대해나갔기 때문이다.
또 성화가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지나갈 때 이에 항의하는 소동이 있었지만 경찰
당국에 의해 저지돼 불상사는 없었으며, 무엇 때문에 항의가 나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좋지 않은 소문의 밑바닥엔 올림픽 성화 봉송의 시작이 2차 세계대전의 전범자인 히틀러와
이로 대표되는 군국주의적 파시즘의 홍보 수단이었다는 비판 의식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성화 봉송 1952년부터 의무화
2차 대전의 발발로 올림픽은 베를린대회 이후 1940년과 1944년을 건너뛰어 12년 만인 1948년
런던에서 개최됐다. 당시 IOC는 ‘정치와 스포츠는 별개다’라는 기본이념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전범국인 독일과 일본을 올림픽에 초청해야 할 것인지가 고민거리였다.
또 영국은 독일과 일본의 대회 참가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해 결국 IOC는 두 나라를 올림픽에
초청하지 않기로 했다.
또 성화 봉송 시행을 놓고 “나치스의 아이디어를 모방하는 것은 수치”라는 일부 IOC 위원들의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IOC 위원들이 성화 봉송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여
런던 올림픽에서도 성화 봉송은 진행됐다.
올림피아에서 채화된 성화는 군함으로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에 상륙했고,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를 거친 뒤 1948년 7월28일 런던에 도착했다.
IOC는 1951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총회에서 성화 봉송을 올림픽 헌장에 정식으로 규정했고,
이듬해인 1952년 헬싱키 올림픽대회부터 의무적으로 시행했다.
고대 올림픽 성화 제식의 역사는 기원전 5~6세기 경으로 추산된다.
화덕 또는 화덕의 여신 헤스티아(Hestia)를 상징해 채화의 의식에는 11명의 순결한 처녀들
(Vestal virgins)이 참여하며, 오목 거울로 태양의 빛에서 얻은 불이 성화봉에 담겨져 아테네로
이동한 뒤 올림픽 개최도시의 주경기장으로 봉송된다.
이 의식은 모두 그리스올림픽위원회(Hellenic Olympic Committee)가 주관한다.
그러나 2004년 근대 올림픽을 처음 개최한 뒤 108년 만에 다시 올림픽을 유치한 아테네는
올림픽 개최의 발자취를 추적한다는 취지에서 그동안 올림픽 열렸던 22개의 도시를 모두
돌아보는 봉송을 거행했다.
봉송 거리가 역대 최장인 8만6000㎞에 달했다.
그런데 4년 뒤 중국은 자신의 국운을 전 세계에 떨치려는 듯 무려 13만7000㎞의 구간에서
봉송을 진행시켰고, 역대 가장 많은 잡음을 남겼다.
성화 봉송의 본래 취지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베를린 대회에서 보여진 것처럼 인류의 우정과
평화보다는 정권과 그 국가의 홍보수단으로 전락할 때 공포의 기억으로 남게 된다.
올림픽 역사가들은 크룹회사가 만든 성화봉이 거쳐간 그 흔적에 크룹회사의 탄환들이 전쟁을
통해 지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베이징올림픽 역시 이런 점에서 석연찮은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 또 로스앤젤레스대회가 봉송을
상업적으로 이용했듯이, 여전히 봉송은 그런 부정적인 면에서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 신화 속에 나타난 신과 인간의 모든 갈등과 죄악, 사랑과 염원 등이 오늘날 올림픽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화(聖火) 봉송(奉送)의 역사 (올림픽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