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비지스 (야드비가 1374-1399)는
1374년 헝가리의 부더에서
폴란드 국왕 루드비크의 딸로 태어났다.
야드비가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오스트리아 왕국의 공작 빌헬름과 약혼을 하게 되었고,
어린 소녀는 점점 빌헬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폴란드 왕실 의회는
그 결혼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야드비가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에
야드비가의 원의를 필수적인 요건으로 고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폴란드 왕실 의원들은
이 결혼을 반대하였고,
차후 결혼을 하였을 때 자연적으로 맺어지게 되는
오스트리아 왕국과의 동맹관계에도 반대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왕실 의회 의원들은
야드비가에게 개인적인 의사를 물어보거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이 약혼을 파기시켜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빌헬름 공작은
야드비가와 함께 폴란드 왕국에서 달아나려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나중에는 무력으로
왕실 의회 의원들을 복종시키려고 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1384년 10살이 된 야드비가는
아버지 루드비크 국왕의 뒤를 이어 폴란드의 여왕이 되었다.
야드비가는 여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빌헬름과 결혼하려던 생각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오로지 폴란드 백성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고
전적으로 그 뜻에 순명하기로 결심하였다.
1386년, 야드비가는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
(후에 부아디수아프 2세 야기에우오가 됨)
대공과 결혼하였다.
그리하여 두 나라는 정치적으로 동맹관계를 맺게 되었고
야드비가는 이 두 나라를 위하여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야드비가는
결혼식을 앞두고 두꺼운 검은 베일로 온몸을 감싼 뒤
크라쿠프에 있는 대성당으로 갔다고 한다.
그 대성당에서 폴란드의 이 어린 여왕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삶 안에서
여왕으로서의 직무에 온전히 충실할 수 있도록
은총과 용기 그리고 결단력을 주실 것을
하느님께 간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겠다는 상징으로
십자가로 온통 수놓은
검은 베일을 대성당에 벗어 놓았다고 한다.
야드비가는 어린 소녀였지만,
여왕으로서
그리고 많은 신하들이 모여 있는 궁중의 책임자로서
일생동안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의 무거움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야드비가가 크라쿠프 대성당에서 간절히 기도한 것은
바로 자신과 폴란드 백성 위에 세워진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하겠다는 표시였다.
야드비가와 요가일라 대공과의 결혼식은
당시 모든 세인들의 관심이 집중된 최고의 예식이었다.
그러나 야드비가는
이 결혼을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위하여
새로우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헌신하는
큰 희생으로 여겼다.
1377년, 요가일라 대공은
리투아니아의 왕인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리투아니아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자기 사촌인 비타우타스 공과 강력한 대결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함으로써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고,
폴란드의 국왕이 되었다.
또한, 리투아니아 왕위 계승자로서
그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 때까지 이교도였던 요가일라 대공은
자신이 만일 야드비가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자신과 전 리투아니아 백성이 세례를 받겠다는 데 동의하였다.
그리고 애초에 야드비가와 결혼하기로 하였던
오스트리아의 빌헴름 공작에게도
응분의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야드비가와 요가일라 대공은
그 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야드비가의 도움으로 요가일라 대공은
리투아니아의 전 백성과 함께 영세를 하였다.
그리하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양국을 공격하려던
튜턴 기사단(독일 기사단)은
이교도인 왕과
이교국(異敎國)을 정벌하겠다는 명분을 잃어 버렸다.
왜냐하면 이교도였던 요가일라 대공과
리투아니아의 백성 모두 세례를 받았기에,
그들은 더 이상 이교도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리투아니아 왕국은 백성 전체가 영세를 한 후,
즉시 전 유럽에서
가장 신앙심이 깊은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조금의 흔들림 없이 신앙심을 확고하게 지켜 내려오고 있다.
야드비가 여왕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왕권과 재능
그리고 자신의 전 생애를 봉헌하였기 때문에
이에 감동한 교황 보니파시오 9세는
크라쿠프 대학교에 신학부를 신설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야드비가 여왕은
그리스도를 간절히 섬기려는 열정으로
많은 나라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야드비가 여왕은 1399년 7월 17일,
맏딸을 분만하다가 그 딸과 함께
크라쿠프에서 사망하였다.
1896년, 교황 레오 13세는
야드비가가 여왕으로서의 책무와 왕실 책임자로서
감당하여야 할 모든 업무들을
매우 헌신적으로 수행하였음을 기리면서
복녀로 선포하였다.
1997년 6월 8일,
크라쿠프의 블로니아 에스플라나데에서
폴란드 국민 중
독실한 가톨릭 신자 150만 명 이상이 운집한 가운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야드비가 여왕을 성녀로 시성하였다.
교황은 성녀가 된 폴란드의 자랑스러운 여왕을 기리며,
시성식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어 주는 이 우대한 인물을 바라보면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울 수 있도록
특별한 은총을 주신 하느님의 크신 섭리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야드비가 여왕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
그리스도와 사람들을 향한 사랑,
신앙과 지식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매일의 양식과 입을 옷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위대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모범적인 선행이 피어나
자유의 은사가 주는 기쁨이 완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교회와역사, 번역 송영웅 바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