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복고(琴復古)
[본 관] 봉성(鳳城,봉화)
[생졸년] 1549년(명종 4)~1631년(인조 9) / 壽 82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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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조 학사집(鶴沙集)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 금공 묘갈명 병서(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琴公墓碣銘幷序)
공은 성이 금씨(琴氏), 이름이 복고(復古), 자가 호여(皥如), 본관이 봉성(鳳城,봉화)이다. 삼한 공신(三韓功臣) 금용식(琴容式)과 고려 학사(學士)금의(琴儀)의 후손이다. 고조 금회(琴淮)는 은진 현감(恩津縣監)을 지냈고, 증조 금계(琴啓)는 군위 현감(軍威縣監)을 지냈고, 조부 금원수(琴元壽)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의 품계를 하사받았다.
부친 금인(琴軔)은 성균관 진사이고, 모친 우계 이씨(羽溪李氏)는 참봉 이장(李樟)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기유년(己酉年,1549, 명종 4)에 영천군(榮川郡) 도촌리(道村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 5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었고, 조금 성장하자 영민하여 학문을 좋아하였다.
25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신묘년(辛卯年,1591, 선조 24)에 조정에서 한 도(道)의 도시(都試)를 경주(慶州)에 따로 마련하였다. 공이 응시하여 2등을 하자 회시(會試)에직부(直赴)하라고 명하였으니 재주와 명성이 매우 자자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진(義陣)에서 노고를 다하였고, 경자년(庚子年,1600, 선조 33)에 강릉 참봉(康陵參奉)에 배수되었으며, 갑진년(甲辰年,1604, 선조 37)에 선무 원종훈(宣武原從勳)에 참여하였다.
신미년(辛未年,1631, 인조 9)에 공의 나이가 83세인지라 임금이연신(筵臣)의 주청에 따라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에 제수하였다. 이해 8월 모일에 집에서 임종하고, 10월에 봉화(奉化) 풍정(楓井)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선영이 있는 곳이다.
아, 공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두텁고 행실이 엄정하였다. 임진년(壬辰年,1592, 선조 25)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 전쟁으로 혼란한 와중에도 오히려 예법에 따라 상례를 거행하였다. 항상 어머니가 일찍 별세한 것을 슬퍼하고 매번 제사를 올릴 때마다 애모(哀慕)가 지극하여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선조의 제사를 받들 때 삼가지 않는 자는 후손이 반드시 번성하지 못할 것이니 너희들은 경계하라.”라고 하였다.
성품이 엄하고 굳세어 착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자기 몸을 더럽히는 듯 여겨 고을 사람들이 숙연히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착한 사람을 표창하고 어진 이를 본받음에 있어서 구분하여 처리하였다.만취(晩翠) 김개국(金蓋國)과 물암(勿巖) 김륭(金隆)의 효행 표창을 주청하였고,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 선생,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선생, 백암(栢巖) 김륵(金玏) 선생의 사당을 건립하는 일은 공이 모두 온 고을의 논의를 조절하여 절충하였다. 공이악(惡)을 미워함은 짧게 말하고 선(善)을 좋아함은 길게 말한 것이 이와 같았다.
도촌(道村)은 예로부터 풍속이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진사공(進士公부친 금인)이 와서 살면서부터 비로소 문학(文學)을 가르쳤다. 공이 만년에 같은 마을 유림의 여러 어른들과 함께 논의하여 구만(龜灣)의 서쪽에 학사(學舍)를 세우자,현송(絃誦)의 성대함이 영저(嶺底)에서 으뜸이었다.
학문을 숭상하고 학교를 일으킨 공로가 어찌 크지 않은가? 대개 공은 덕이 두텁고 재주가 많았지만 불행하게도 한창 나이에 큰 난리를 만나 십 년 동안 오히려 안정되지 못하였고 끝내 이처럼 어긋나 곤궁하게 노년을 마치게 되었으니, 천명이다.
첫째 부인 옥천 전씨(沃川全氏)는 요절하여 후사가 없고, 둘째 부인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참봉 남계홍(南繼洪)의 따님으로 3남 2녀를 낳았다. 첫째 시영(是詠)은 직장(直長)을 지내고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충달(忠達)은 문과 급제하여 도사(都事)가 되었고 차남은 신달(信達)이고, 딸은 김시업(金是𩑃)에게 시집갔다.
둘째 시조(是調)는 문과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내고 딸 둘을 두었는데 박안현(朴安鉉)과 정인함(鄭仁涵)에게 시집갔다. 셋째 시해(是諧)는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5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순달(舜達)ㆍ석달(碩達)ㆍ성달(聲達)ㆍ귀달(貴達)ㆍ학달(學達)이고 그중에 성달은 부사(府使금시조)의 후사가 되었다. 딸은 배유장(裵幼章)ㆍ이극철(李克哲)ㆍ황창원(黃昌遠)에게 시집갔다.
두 딸 중에 장녀는 제용감 정(濟用監正) 이정번(李廷蕃)에게 시집가서 3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병(柄)ㆍ과(𣏾)ㆍ휴(𣐾)이고 딸은 박정망(朴廷望)ㆍ황우청(黃又淸)ㆍ황영(黃栐)ㆍ남선(南𡾮)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생원 손약(孫禴)에게 시집가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회종(會宗)은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이 되었고 차남은 명종(命宗)이고 딸은 생원김강(金綱)에게 시집갔다. 내외(內外)의 증손과 현손 남녀가 모두 백여 명이다.
공이 돌아가신 지 지금 30여 년이 되고 남부인(南夫人)이 돌아가신 지 지금 76년이 되었다. 남부인의 묘소는 공의 묘소 뒤에 있는데, 모두 비석이 없다. 진사공(進士公아들 금시해)이 공의 행실을 기록하고 장차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하여 비석을 세우려 하니 훌륭한 아들이라 말할 수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여든 넘게 살고백여 명 후손 두었으니 / 大耋百孫
공이 능했던 바는 하늘의 일이고 / 公之所能者天也
소과로 낮은 벼슬을 하였으니 / 小科一命
공이 능하지 못했던 바는 사람의 일이다/ 公之所不能者人也
청산의 비석에 향기가 남아있으니 / 靑山片石兮留賸馥
천년만년 불초한 자들을 꾸짖으리라 / 千秋萬世兮不肖者之呾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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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금의(琴儀):
1153~1230. 본관은 봉화(奉化), 초명은 극의(克儀), 자는 절지(節之)이다. 삼한 공신(三韓功臣) 금용식(琴容式)의 후예이다. 어
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문장에 능하였고, 강직하여 뜻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철태수(鐵太守)라고 하였다. 여러 번 지공거
(知貢擧)가 되어 명사(名士)를 많이 배출하니 당시 ‘금 학사의 옥순 같은 문생[琴學士玉筍門生]’이라 하였다.
[주02] 직부(直赴):
이전의 시사(試射)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전시(殿試) 또는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는 것을 뜻한다.
《銀臺條例 兵攷 式年武科殿試》
[주03] 연신(筵臣):
경연(經筵)이나 서연(書筵) 등에서 경전(經傳) 등을 강론하는 신하를 이른다.
[주04] 만취(晩翠) 김개국(金蓋國):
1548~1603.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제(公濟),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1591년(선조 24)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정랑
을 거쳐 군수를 지냈다. 저서로《만취일고》가 있다.
[주05] 악(惡)을 …… 것:
《춘추》소공(昭公) 20년 조에 “조나라 공손회가 몽에서 나와 송나라로 달아났다.[曹公孫會自鄸出奔宋]”라는 경문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춘추공양전》에서 공손회가 모반을 했다가 망명했는데도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현자(賢者)인 희시(喜時)의 자
손이기 때문에 숨겨준 것이라고 한 뒤에 “군자가 선한 일을 칭찬하는 것은 길게 하고, 악한 일을 비평하는 것은 짧게 한다.
그리하여 악한 일을 비평하는 것은 당사자의 몸에서 그치고, 선한 일을 칭찬하는 것은 자손에게까지 미친다. 공손회는 바로 현자의
자손이기 때문에 군자가 그를 위하여 숨겨준 것이다.[君子之善善也長, 惡惡也短. 惡惡止其身, 善善及子孫. 賢者子孫, 故君子爲
之諱也.]”라고 하였다.
[주06] 현송(絃誦):
수업하고 송독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시경》을 배울 적에 거문고 비파 등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로 불렀는데 이를 현가(絃歌)라고
하고 악기의 반주 없이 낭독하는 것을 송(誦)이라고 하였으며, 이 둘을 합하여 현송이라고 칭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주07] 김강(金綱):
1609~1669.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치정(致精), 호는 우미(迂未)ㆍ우수(迂叟)이다. 1635년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을 하였
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김곤(金錕)ㆍ나이준(羅以俊)과 함께 성균관(成均館) 대성전(大成殿)에
안치된 오성(五聖)의 위패를 옮겼다. 이후 공적을 인정받았고, 학문과 행실이 독실하여 당대 학자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
《우미선생실기(迂未先生實紀)》 2권 1책이 있다.
[주08] 여든 넘게 살고:
원문의 대질(大耋)은 해가 기울듯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년기를 이르는 말로, 흔히 80세를 이른다. 금복고는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주역》〈이괘(離卦) 구삼(九三)〉에 “서산에 해가 기우는 형상이니, 질장구 치고 노래 부르지 않는다면 이는 노년을 한탄
함이니, 흉하다.[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라고 하였다.
[주09] 공이 …… 일이다:
소식(蘇軾)의〈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공이 능한 바는 하늘의 일이고 능하지 못한 바는 사람의 일이다.[公之所能
者天也, 不能者人也.]”라고 하였다. 사람들을 감화시켜 신망을 얻음은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인데 이러한 일은 잘하고, 조정에서 높
은 벼슬에 오르고 편안히 작록을 누림은 인위적인 것인데 이러한 일은 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古文眞寶 後集 卷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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