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개념
철학뿐만 아니라 인문학의 중심 과제 중 하나는 ‘자아의 개념’이다. 인문학에서는 탐구의 주체인 자아가 동시에 탐구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 결과는 객관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또한 자아의 개념은 주로 인격적 차원에서 통용된다. 가령 어떤 인간을 개별화해 그를 한 인격체로 파악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의 자아를 거론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비슷한 고대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노예 출신의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토스(Epictetus)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분별하고 할 수 있는 일만,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가르침으로써 도덕적 의무에 자아의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그리스도는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는 자아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가르침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자기를 온전하게 인식한 사람만이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고 그렇게 한 사람만이 자기의 이웃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으며, 결국 진정한 의미로 행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아 인식을 강조한 현철들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 혹은 국가와 민족, 인류를 염두에 두지 말라고 가르친 것은 아니다. 개인의 행복은 물론, 사회의 복지나 인류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그 구성원 각자의 문제의식과 실천 의지가 필요한데, 이것은 결국 자아의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 인식의 구조
자아는 나의 욕구와 능력과 의무라는 세 변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삼각형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삼각형의 모습과 크기를 파악하는 것이 곧 자아의 인식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은 우리가 역경에 처했을 때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욕구를 충족시킬 능력이 없거나 주위의 여건이 허락하지 않을 때, 그 윤곽이 더욱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무엇을 원했었는지 분명해지며, 또한 그것이 자기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혹은 자기가 처한 입장에서 허용되지 않기 때문인지 등이 비로소 더욱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특히 역경에 처했을 때 자아가 욕구와 능력과 의무라는 세 요소로 구성돼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자아의 인식에 어떠한 역할을 하며 또 실제로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자아의 인식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제기함으로써 그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질문의 모호성과 추상성 때문에 항상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이 질문을 자기의 욕구와 능력과 의무를 묻는 세 가지 질문,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나눠 제기하고 또 거기에 각기 따로 답변을 마련함으로써 우리는 문제의 성격을 좀 더 구체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답변의 한계도 더욱 분명히 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자아 인식의 구체화
우선 첫째 질문인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를 살펴보자.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말해서 ‘욕구로서의 자아’를 확인하는 일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고 불합리한 일도 아니며 용이한 일은 더구나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어떤 것을 경험해 보지 않는 한 그것이 진정으로 자기가 원했던 것인지 확인하기가 어렵고, 너무도 자주 자기가 원하는 것쯤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두 번째 질문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보자. 우선 자기의 능력을 가늠하는 일은 자기의 욕구를 확인하는 일 못지않게 경험에 의존한다. 사실 어떤 일을 내가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 일을 경험한 다음에야 판가름이 나게 마련이다. 물론 우리는 현재나 미래의 능력을 과거에 지니고 있었던 능력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나의 능력을 평가함에 있어서 또 하나의 어려운 점은 어떤 것을 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개입된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자 할 때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서둘러서 행동으로 옮기는 경향도 바로 이 강한 욕구 때문이다.
자아의 인식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의무 혹은 당위의 문제이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소극적으로 “나는 무엇을 해도 되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양자가 모두 욕구와 능력의 문제처럼 내가 독단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고 또 자기가 가장 잘 판단할 입장에 있지도 않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또는 어느 정도 해 낼 수 있는지의 문제는 물론 완전히 알 수는 없다고 해도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고 또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다. 그러나 의무에 관한 내용은 나 자신 보다는 남이 더 잘 알 수도 있는 사항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이야말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윤리적 자아의 인식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 인식은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분단의 시대에 서둘러 종지부를 찍고 싶은 우리 민족에게, 그리고 특히 동서와 고금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이 땅의 한국인에게 더욱 절박한 과제다. 우리의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온갖 요소가 우리들 각자에게 고질병처럼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삼각형으로 표시된 자아 인식의 구조와 그 분석은 가족적 차원이나 국가적 차원, 그 밖에 어떤 공동체적 차원에서도 공동체적 자아의 인식을 시도하는 데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우리의 민족적 자아는 국경의 의미가 약해지는 세계화 시대에 우리 민족이 한반도의 남쪽이든 북쪽이든 그밖에 어디에서 흩어져 살든 상관없이 통합의 원리로서 작동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완전한 답변을 얻지 못하더라도 내가 누구인지를 계속 묻는 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냉혹하고도 집요한 요청 앞에 너무 당혹해 할 필요는 없다.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나를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작 부끄러운 일은 내가 누구인지를 묻지 않는 것이,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서 반성된 삶을 살지 않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이렇게 내가 누구인지를 계속 묻고 또 그것을 묵묵히 실천에 옮기는 한 우리는 또한 “일흔 살이 되니 하고 싶은 대로 하나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라고 말한 공자에게 떳떳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찌할까, 어찌할까를 묻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판적 합리주의자로서 과학정신을 체득해 오류를 인정하고 열린 자세를 견지하는 한 현대인으로서나 한국인으로서 격동의 시대를 무난하게 극복하고 폭풍 치는 언덕을 무사히 통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