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高祖 | 曾祖 | 祖 | 父 |
구진 | 지하 | 계우 | 윤적 |
자(字) 인보(仁甫) 호(號) 조계(棗溪)
눌재(訥齋) 박상(朴祥) 문하
1513년 진사(進士) 급제. 1516년 문과(文科) 급제
승문원(承文院) 주부(主簿). 검열(檢閱) 대교(大校) 역임
형조(刑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참판(叅判), 대사간 대사성
진위사(進慰使)로 중국 방문
능성현령(綾城縣令), 한성좌윤(漢城左尹) 관찰사(觀察使).
고운(高雲), 고맹영(高孟英), 기대승(奇大升)과 친교
고택(古宅) : 광주시 민속자료 1호. 현재 이장우 가옥
배(配) : 안동권씨(安東權氏) 승의랑(承議郎) 승금(承金) 녀(女)
묘소(墓所) : 광주시 동구 운림동 선산, 간좌(艮坐) 쌍조(雙兆)
묘표(墓表) : 12대손 인직(寅直) 술(述)
신도비(神道碑) : 회당(晦堂) 윤응선(尹膺善) 찬(撰)
ㆍ子 함(涵) 견하(見下)
ㆍ子 담(湛) 출(出) 천종(千鍾)
ㆍ子 엄(淹) 견하(見下)
ㆍ女 이홍명(李洪命))
ㆍ女 이두남(李斗南) 주부(主簿)
ㆍ女 유몽필(柳夢弼) 문화인(文化人) 현감(縣監)
ㆍ女 박민고(朴敏古) 충주인(忠州人) 감역(監役)
부친 눌재(訥齋) 박상(朴祥)은 학행이 뛰어나 이조 판서로 추증(追贈)을 받았다.
[실록자료]
◈ 중종 15년 1520년 10월 25일
기사관 정만종(鄭萬鍾)이 아뢰다.
◈ 중종 15년 1520년 10월 25일
사관 정만종이 기사만 해야 하는 데 스스로 계사하였다. ‘사관을 비천(祕薦)한 일을 대간이 그르다고 의논하였으니 신은 매우 미안합니다. 전에는 혹 이런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습니다.’ 하였다.
◈ 중종 15년 1520년 10월 25일
시종한 좌우가 전의 사관의 잘못에 관해 논계한 것과 정만종(鄭萬鍾)의 의견은 다르다 이르다 전교하였다.
◈ 중종 15년 1520년 10월 27일
의금부에서 대교 정만종(鄭萬鍾)의 죄를 조율한 사실을 아뢰다
◈ 중종 20년 1525년 2월 21일
정만종(鄭萬鍾)을 세자 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로 삼았다.
◈ 중종 20년 1525년 7월 15일
정만종(鄭萬鍾)·박홍린(朴洪鱗)을 정언으로 삼았다.
◈ 중종 20년 1525년 8월 8일
정언 정만종(鄭萬鍾)이 전일에 시강원 관원이었으므로 지금 모두 추고 받고 있는데, 대간(臺諫)은 추고 받으면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 중종 21년 1526년 5월 11일
사헌부에서 정만종(鄭萬鍾)은 6품이 된 지 겨우 17개월 밖에 안 되었습니다.
◈ 중종 21년 1526년 5월 16일
정만종(鄭萬鍾)·김우증(金友曾)의 일을 아뢰었다.
◈ 중종 22년 1527년 6월 26일
정만종(鄭萬鍾)을 지평(持平)에 제수(除授)하였다.
◈ 중종 22년 1527년 8월 12일
지평(持平) 정만종(鄭萬鍾) 등이 아뢰기를, 지난날의 풍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 고치지 않는다면 끝내 죄를 주어야 고칠 수 있다.’ 하였습니다.
◈ 중종 22년 1527년 8월 16일
정만종(鄭萬鍾)을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에 제수하다
◈ 중종 23년 1528년 2월 8일
금부의 변봉의 공사에 대한 전교. 정만종(鄭萬鍾)이 몰래 사주하여 말을 냈을 것이라고 했다.
◈ 중종 23년 1528년 3월 5일
정만종(鄭萬鍾)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제수하였다.
◈ 중종 23년 1528년 3월 17일
헌납(獻納) 정만종(鄭萬鍾)이 아뢰었다. 그러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중종 23년 1528년 5월 18일
헌납 정만종(鄭萬鍾)이 전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중종 23년 1528년 6월 3일
대사간 이귀령이 헌납(獻納) 정만종(鄭萬鍾)은 전일 신을 논박할 때 종시 의논에 참예했던 사람인데, 논박받은 것이 오래되지도 않아 다시 동료가 되게 되었습니다.
◈ 중종 23년 1528년 8월 14일
헌납 정만종(鄭萬鍾)은 아뢰기를, "요사이 백성의 원망과 고통이 한 가지 일만이 아닌데, 군사들을 보면 그런 고통이 더욱 심합니다.
◈ 중종 23년 1528년 9월 3일
사간 오준(吳準)·헌납 정만종(鄭萬鍾)·정언 임붕(林鵬) 김치운(金致雲) 등이 의논드렸다. "제릉·영릉에 한 번도 친제(親祭)하지 않으셨으니 참으로 궐전이 됩니다.
◈ 중종 23년 1528년 10월 4일 임인 1번째기사 /
헌납(獻納) 정만종(鄭萬鍾)이 아뢰기를, "서정하는 일을 외인(外人)은 다 모르다가 요즈음에야 비로소 들었으므로 양사(兩司)는 아직 모여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 중종 23년 1528년 10월 15일
헌납 정만종(鄭萬鍾)·정언 김치운(金致雲)이 아뢰었다. "올봄에 이미 식년시(式年試)가 있었고 가을에 또 별시(別試)를 크게 거행하였는데 이제 또 여기에 와서 시취하니, 이것은 진실로 잦습니다.
◈ 중종 25년 1530년 9월 20일
능성 현령(綾城縣令) 정만종(鄭萬鍾)으로 하여금 추문하도록 했으나 정만종(鄭萬鍾)이 즉시 따져서 추문하지 않고 여러달을 지체하였다.
◈ 중종 25년 1530년 11월 21일
정만종(鄭萬鍾)을 사헌부 장령에, 성윤(成倫)을 헌납에 제수하였다.
◈ 중종 25년 1530년 12월 28일
사간 이언적(李彦迪)과 장령 정만종(鄭萬鍾)이 전의 일에 대해 의논드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중종 26년 1531년 1월 11일
장령 정만종(鄭萬鍾), 지평 김치운(金致雲)이 아뢰다.
◈ 중종 26년 1531년 1월 23일
장령 정만종(鄭萬鍾), 지평 송인수(宋麟壽)와 김치운(金致雲) 등이 체직을 아뢰다.
◈ 중종 26년 1531년 2월 5일 경신 1번째기사 1531년 명 가정(嘉靖) 10년
정만종(鄭萬鍾)에게 장령을 제수하다.
◈ 중종 26년 1531년 2월 20일
헌부가 족친책과 관련하여 장령 정만종(鄭萬鍾)·지평 송인수·김치운을 체직시키도록 청하다
◈ 중종 26년 1531년 윤6월 15일
정만종(鄭萬鍾)을 사헌부 장령에, 조인규(趙仁奎)를 시강원 필선에, 김희열(金希說)을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제수하였다.
◈ 중종 26년 1531년 10월 10일
정만종(鄭萬鍾)을 사헌부 장령에, 김미(金亹)를 사간원 헌납(獻納)에 제수하였다.
◈ 중종 26년 1531년 11월 18일
장령 정만종(鄭萬鍾)이 아뢰다.
◈ 중종 28년 1533년 2월 22일
헌부가 이장을 탄핵하니 전교하다. 정만종(鄭萬鍾)은 구종(丘從)입니다.
◈ 중종 28년 1533년 3월 5일
의금부가 이장의 장가를 서계하니 전교하다. 정만종(鄭萬鍾)은 구종(驅從)이 됩니다.
◈ 중종 29년 1534년 8월 27일
장령 정만종이 승지 주서 등이 밀부를 잘못 기입한 사건에 대해 아뢰다
◈ 중종 29년 1534년 10월 18일
정만종(鄭萬鍾)이 아뢰다.
◈ 중종 29년 1534년 11월 6일
정만종(鄭萬鍾)이 체직하라는 명이 없었다고 아뢰다.
◈ 중종 29년 1534년 11월 18일
정만종(鄭萬鍾)과 황기(黃琦), 지평 이이(李頤)가 아뢰다.
◈ 중종 30년 1535년 3월 21일
유생들의 조정 비방 사건에 연루된 김희년의 공초 내용.
정만종(鄭萬鍾)·신석간(申石澗) 등은 대간을 출입하면서 인물을 논박함이 너무 심하였습니다.
◈ 중종 30년 1535년 6월 16일
정만종(鄭萬鍾)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하다
◈ 중종 30년 1535년 7월 1일
집의 정만종(鄭萬鍾), 장령 이이(李頤) 등이 사직하면서 아뢰다.
◈ 중종 30년 1535년 10월 15일
집의 정만종(鄭萬鍾), 장령 이이(李頤)와 지평 조사수(趙士秀) 등은 아뢰기다.
◈ 중종 30년 1535년 10월 15일
천변과 관련하여 집의 정만종(鄭萬鍾)은 아뢰다.
◈ 중종 30년 1535년 10월 18일
집의 정만종(鄭萬鍾)·장령 이이(李頤)와 임붕(林鵬)·지평 정희렴(鄭希廉)이 아뢰다.
◈ 중종 31년 1536년 1월 11일
집의 정만종(鄭萬鍾)은 아뢰다.
◈ 중종 31년 1536년 5월 22일
집의 정만종(鄭萬鍾)가 학교에 대해 아뢰다.
◈ 중종 31년 1536년 6월 4일
집의 정만종(鄭萬鍾)가 헌부 서리의 죄와 관련된 자들의 체직을 건의하다
◈ 중종 31년 1536년 6월 11일
집의 정만종(鄭萬鍾), 채무택이 헌부 서리의 형신과 시종에 대한 분분한 의견이 있음을 아뢰다.
◈ 중종 31년 1536년 6월 16일
대신들이 안행량 공사와 정만종(鄭萬鍾)의 서용을 서계하다.
◈ 중종 31년 1536년 8월 26일
경연에 나가 대열할 때 군사 징발과 관련하여 사간 정만종(鄭萬鍾)이 아뢰다.
◈ 중종 31년 1536년 10월 3일
김안로가 이순 등의 체직·사헌부 상소·신하의 임용 등에 관해 아뢰고 정만종(鄭萬鍾)이 이순과 박성량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중종 31년 1536년 11월 15일
송겸·유세린·정만종(鄭萬鍾)을 응교에 제수하였다.
◈ 중종 31년 1536년 12월 3일
정만종(鄭萬鍾)을 홍문관 응교에 제수하였다
◈ 중종 31년 1536년 윤12월 25일
정만종(鄭萬鍾)을 사헌부 집의 관직을 제수하다.
◈ 중종 31년 1536년 윤12월 26일
문례관(問禮官) 정만종(鄭萬鍾)은 이제 대간이 되었다.
◈ 중종 31년 1536년 윤12월 26일
정만종(鄭萬鍾)을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박세옹(朴世蓊)을 지평(持平)에, 조사수(趙士秀)를 헌납(獻納)에 제수하였다.
◈ 중종 31년 1536년 윤12월 27일
정만종(鄭萬鍾)은 이미 대간이 되었으니, 외방에 오래 있을 수 없다."하였다.
◈ 중종 31년 1536년 윤12월 27일
정만종(鄭萬鍾)은 대간으로 부를 수 없으니, 예조 정랑(正郎)으로 직함을 가차해야 하겠다.
◈ 중종 31년 1536년 윤12월 27일
정만종(鄭萬鍾)·조사수를 하유하여 올라오게 하다.
◈ 중종 32년 1537년 1월 17일
사간 정만종(鄭萬鍾), 장령 한숙(韓淑), 권응창(權應昌), 이팽수(李彭壽) 등이 아뢰다.
◈ 중종 32년 1537년 1월 22일
사간 정만종(鄭萬鍾)이 역참(驛站)에 대해 아뢰다.
◈ 중종 32년 1537년 2월 21일
정만종(鄭萬鍾)을 홍문관 전한에, 신거관(愼居寬)·박세옹(朴世蓊)을 장령에 제수하였다.
◈ 중종 32년 1537년 4월 9일
지제교(知製敎) 정만종(鄭萬鍾)이 지어 올린 일본국(日本國)에 답하는 서계(書契)를 가지고 정원에 전교하였다.
◈ 중종 32년 1537년 4월 10일
임금이, 정만종(鄭萬鍾)이 지은 일본국에 답하는 서계(書契)를 삼공 및 예관 등에게 내리다.
◈ 중종 32년 1537년 4월 16일
정만종(鄭萬鍾)·신영(申瑛) 등이 함께 의논해서 간의대 등의 일을 했었습니다.
◈ 중종 32년 1537년 5월 4일
직제학 정만종(鄭萬鍾)등이 천릉 전에 관원을 벌할 것을 건의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 중종 32년 1537년 5월 19일
정만종(鄭萬鍾)이 한의 위양 오제묘와 같은 것으로 소격서와 태율전이 해당된다고 하다.
◈ 중종 32년 1537년 5월 25일
승지 정만종(鄭萬鍾)이 황득정 등의 옥사에 대해 아뢰다.
◈ 중종 32년 1537년 6월 8일
승지 정만종(鄭萬鍾)은 아뢰다.
◈ 중종 32년 1537년 6월 26일
승지 정만종(鄭萬鍾)이 희릉의 천광 때 동참한 사람과 불참한 사람을 서계하고 아뢰다.
◈ 중종 32년 1537년 7월 14일
헌부가 세자의 아헌을 못하게 할 것과 승지 정만종(鄭萬鍾)의 파직과 추고를 아뢰다
◈ 중종 32년 1537년 7월 15일
헌부가 정만종(鄭萬鍾)·신한의 일을 아뢰고 조사우에 대한 개차도 아뢰다
◈ 중종 32년 1537년 9월 4일 정만종(鄭萬鍾)을 승정원 우부승지에, 허자(許磁)를 동부승지에 제수하였다
◈ 중종 32년 1537년 10월 24일
우부승지 정만종(鄭萬鍾) 에게 이르기를, ‘남들은 비록 김안로에게 품의하지만, 나도 육경의 지위에 있는데 어찌 꼭 품의하겠는가.’ 하였습니다.
◈ 중종 32년 1537년 11월 4일
승지 정만종(鄭萬鍾)이 의금부에 구속된 별감(別監) 조수진(趙守眞)의 추안을 입계하였다.
◈ 중종 32년 1537년 11월 7일
참찬관 정만종(鄭萬鍾)이 아뢰다.
◈ 중종 32년 1537년 12월 6일
승지 정만종(鄭萬鍾)이 전옥서(典獄署)에 갇힌 전 유원 첨사(柔遠僉使) 최수천(崔守川) 의 추안(推案)을 진계(進啓)하였다.
◈ 중종 33년 1538년 3월 22일
김안국(金安國)이 수석을 차지했는데 말1필을 하사하게 하고, 차석인 정만종(鄭萬鍾) 이하에게는 아마를 하사했다.
◈ 중종 33년 1538년 4월 20일
제술에 입격한 우승지(右承旨) 정만종(鄭萬鍾),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 이윤경(李潤慶)은 사의(蓑衣)와 궁자(弓子)를 하사했는데 차등을 두었다.
◈ 중종 33년 1538년 12월 6일
정만종(鄭萬鍾)을 형조 참판에, 민제인(閔齊仁)을 승정원 동부승지에, 원계채(元繼蔡)를 홍문관 부제학에, 정세호(鄭世虎)를 대사성에 제수하였다. 【특지(特旨)임.】
◈ 중종 34년 1539년 2월 14일
이조 참판 정만종(鄭萬鍾)을 진위사(陳慰使)로, 예조 참판 심연원을 진향사(進香使)로 파견하였다. 장성황후(章聖皇后)가 붕서하였기 때문이다
◈ 중종 34년 1539년 4월 21일
연이은 사신 파견으로 인한 문제점과 재변 및 양계의 피폐함을 진위사 정만종(鄭萬鍾)에게 듣다.
◈ 중종 34년 1539년 4월 28일
진향사 정만종(鄭萬鍾) 이 돌아오면 회가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나 8월 중에는 필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 중종 34년 1539년 7월 15일
중국에 간 사신 정만종(鄭萬鍾) 에게 황제가 연회를 베풀어줄 때, 광록시(光祿寺)가 음식을 제공하는데 매우 풍족하고도 깨끗하게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 중종 34년 1539년 7월 21일
정만종(鄭萬鍾)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그의 말을 들어보고 가부를 결정함이 옳을 것이다.
◈ 중종 34년 1539년 7월 22일
정만종(鄭萬鍾)이 귀국하거든 상의하여 사은사를 보내는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 중종 34년 1539년 7월 24일
도중에서 혹 정만종(鄭萬鍾)을 만나면 그 소식을 탐문하고 강을 건너지 않았으면 되돌아올 것이지만 만일 강을 건넜으면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 중종 34년 1539년 7월 30일
정만종(鄭萬鍾)을 예조 판서에, 유인숙(柳仁淑)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제수하였다.
◈ 중종 34년 1539년 윤7월 27일
등과록(登科錄)을 이번에도 보내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만종(鄭萬鍾)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중종 34년 1539년 8월 6일
상이 진위사(陳慰使) 정만종(鄭萬鍾), 진향사(進香使) 심연원(沈連源), 진하사(進賀使) 홍신(洪愼)을 사정전에서 인견하고 하문하다.
◈ 중종 34년 1539년 9월 20일
저번에 정만종(鄭萬鍾)이 돌아올 때, 군량(軍糧)을 한때는 대주더니 한때는 먼 곳에서 운반해서 대주겠다고 하므로, 정만종(鄭萬鍾)이 양식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핑계로 받지 않고 왔다고 한다.
◈ 중종 34년 1539년 10월 24일
동지중추부사 정만종(鄭萬鍾), 우윤 신광한(申光漢) 등이 입시했다.
◈ 중종 34년 1539년 11월 17일
정만종(鄭萬鍾)을 한성부 우윤에, 신광한(申光漢)을 경기 관찰사에 제수하였다
◈ 중종 35년 1540년 4월 4일
정만종(鄭萬鍾)을 경기 관찰사에, 이홍간(李弘幹)을 사헌부 집의에, 이황(李滉)을 정언에 제수하였다.
◈ 중종 35년 1540년 4월 11일
경기 관찰사 정만종(鄭萬鍾)을 인견(引見)하고 하교하다.
◈ 중종 35년 1540년 6월 21일
정만종(鄭萬鍾)이 장계(狀啓)를 올리다.
◈ 중종 35년 1540년 11월 18일
경기 관찰사 정만종(鄭萬鍾)이 생원 엄용순과 박민헌의 효성에 대한 장계를 올리다.
◈ 중종 35년 1540년 12월 25일
관찰사 정만종(鄭萬鍾)이 전최(殿最)를 엄하게 하지 않은 것 때문에 송서(送西)되었다.
◈ 중종 36년 1541년 1월 17일
경기 감사 정만종(鄭萬鍾)은 이것을 애매하게 아뢰었으니 이 역시 잘못되었습니다.
◈ 중종 36년 1541년 12월 24일
황해도 관찰사 정만종(鄭萬鍾)의 서장을 대신들에게 내리며 이르다.
◈ 중종 37년 1542년 11월 4일
이언적(李彦迪)을 의정부 우참찬에, 정사룡을 예조 판서에, 정만종(鄭萬鍾)을 한성부 좌윤에 제수하였다.
◈ 중종 37년 1542년 12월 1일
정만종(鄭萬鍾)을 호조 참판에, 한숙(韓淑)을 사헌부 대사헌에, 이황(李滉)과 송세형(宋世珩)을 장령(掌令)에 제수하였다
◈ 중종 38년 1543년 12월 22일
충청관찰사 정만종(鄭萬鍾) 경기 관찰사 홍섬(洪暹).의 계본에 따라 모두 정문하고 복호하라고 예조에 내리다.
◈ 중종 39년 1544년 4월 19일 정해 3번째기사 /
충청도 관찰사 정만종(鄭萬鍾)의 서장을 내리면서 여역에 대한 중국 약재를 보내라고 이르다.
◈ 중종 39년 1544년 5월 1일
가뭄에 들었는데 여러한 일들은 감사(監司) 가 마땅히 힘을 다해서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행공 추고(行公推考)하라." 충청도는 정만종(鄭萬鍾), 함경도는 김섬(金銛)이다.
◈ 중종 39년 1544년 6월 24일
정원에 전교하여 충청도에 표류한 자를 의금부에 압송하는 도중 잘 돌보게 하고 고칠 약과 치료할 사람도 곧 보내어 중도에서 병이 없도록 하라." 충청도 관찰사는 정만종(鄭萬鍾).
◈ 중종 39년 1544년 7월 24일 신
표류한 중국인의 처리를 잘못한 충청도 관찰사 정만종(鄭萬鍾)을 추고토록 하다.
◈ 중종 39년 1544년 8월 1일
정만종(鄭萬鍾)에게 전교하였다. 중국인이 선전관 이승서에게 준 잡물의 처리를 의논하다.
◈ 중종 39년 1544년 12월 28일
동지중추(同知中樞) 정만종(鄭萬鍾)을 평안도에 보내 순찰하고 양전(量田)하게 하였다.
◈ 중종 39년 1544년 12월 29일
정만종을 예조 참판으로, 이해(李瀣)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 중종 실록 부록 /
편수관 명단 정만종(鄭萬鍾) 가선 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 신 유진동(柳辰仝) 가선 대부(嘉善大夫) 등 ...
◈ 인종 1년 1545년 1월 5일
우의정 윤인경 예조 참판 정만종(鄭萬鍾) 등이 의논하여 시호를 정하다.
◈ 인종 1년 1545년 1월 6일
시호를 중조로 고치는 것에 관해 관찰사 정만종(鄭萬鍾)에 전교하다.
◈ 인종 1년 윤1월 22일
대간이 능호와 전호의 변경에 대해 정만종(鄭萬鍾) 등이 아뢰다.
◈ 인종 1년 1545년 4월 9일
영의정 윤인경 예조 참판 정만종(鄭萬鍾) 등이 조서를 맞이할 예를 의논드리다.
◈ 인종 1년 1545년 4월 11일
감사 鄭萬鍾)도 문서를 만들어 서울로 올려보냈으나 아직도 신원(伸冤)하지 못하였습니다.
◈ 인종 1년 1545년 4월 13일
대사헌 송인수 특진관 정만종(鄭萬鍾) 등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에 대한 상소
◈ 인종 1년 1545년 4월 17일
특진관 정만종(鄭萬鍾)은 아뢰다,
◈ 인종 1년 1545년 4월 26일
참판 정만종(鄭萬鍾), 참의(參議) 김익수(金益壽)등이 계(齋戒)하는 날이므로 살피게 하라고 말하고 추고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였다.
◈ 인종 1년 4월 27일
예조 참판 정만종(鄭萬鍾), 대사헌 송인수(宋麟壽) 등이 문안하다.
◈ 명종 즉위년 1545년 10월 8일
이유의 체포를 게을리한 안변 부사 이구에 대해 함경 감사 정만종(鄭萬鍾)에게 추문할 것을 명하다.
◈ 명종 2년 1547년 6월 26일
정만종(鄭萬鍾)을 동지중추부사로, 이몽린(李夢麟)을 함경 북도 병마 절도사로, 김로(金魯)를 첨지중추부사로 삼았다.
◈ 명종 2년 1547년 8월 12일
함경 감사 정만종이 도내 수재 상황을 보고하다.
◈ 명종 2년 1547년 9월 9일
함경도 관찰사 정종만이 함흥 등지의 수해에 대해 보고하다
◈ 명종 2년 1547년 윤9월 27일
조강에 나가자 특진관 정만종(鄭萬鍾)이 함경도 역로의 쇠잔에 대해 아뢰다.
◈ 명종 3년 1548년 2월 17일 갑자
정만종(鄭萬鍾)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 명종 3년 1548년 3월 20일
조강에 나가 경상 감사 정만종에게 구휼에 힘쓰라고 하다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 명종 3년 1548년 8월 20일
구황에 힘쓴 김해 부사 김수문·현풍 현감 신난무에게 상을 주게 하다. 본도 감사 정만종(鄭萬鍾)의 장계에 의한 것이다
◈ 명종 6년 1551년 2월 12일
조강에 나가자 특진관 강현이 정만종과 친한 보우를 내쫓아 하늘의 재변을 막자고 하다.
◈ 명종 7년 1552년 6월 7일
정만종(鄭萬鍾)은 재상인데도 요승을 만나자 친척처럼 환대하였다.
◈ 명종 20년 1565년 11월 18일
정만종(鄭萬鍾)의 아들인 지평 정엄(鄭淹) 외에, 대사헌 박순 이하와 대사간 박응남 이하에게 아울러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교정하고 댓글에 오류 말해주세요
|
첫댓글 조계 정만종이 보우대사를 천거했는데 성재 정이주는 성균관 유생 대표로 보우대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함
정이주 편에서 수록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