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台山은 淸秋를 이고 처마 끝은 굽어보고 불태산은 청추를 이고 처마 끝은 굽어보고 마주 한 瑞石山은 霜楓을 입고 일어선다. 마주 한 서석산은 상풍을 압고 일어선다. 累千年 길이 우뚝할 祠宇 復元을 기리는 듯 누천년 길이 우뚝할 사우 복원을 기리는 듯
東方의 빛고을에 터를 잡은 그 슬기로 동방의 빛고을에 터를 잡은 그 슬기로 邦土 가득 崇嚴한 人本의 씨를 뿌려 방토 가득 숭업한 인본의 씨를 뿌려 名華를 꽃피운 偉業에 온 누리가 燦然하다. 명화로 꽃피운 위업에 온 누리가 찬연하다.
門望의 크나큰 山脈 代를 이은 名相巨卿 문망의 크나큰 산맥 대를 이은 명상거경 閥閱로 兀然히 빛을 더하는 巨儒碩學은 벌열로 올연히 빛을 더하는 거유석학은 族人과 萬姓諸族이 우러러 받드느니 족인과 만성제족이 우러러 받드느니
光榮은 우리의 洪福, 河海 같은 祖先의 蔭德 영광은 우리의 홍복, 하해 같은 조선의 음덕 山野를 누비면서 흘러가는 강물이듯 산야를 누비면서 흘러가는 강물이듯 金光彩 눈부신 血脈은 靑史에 永遠하리. 금광채 눈부신 혈맥은 청사에 영원하리.
氏名 위에 드날리는 禮文宗家 海東門閥 씨명 위에 드날리는 예문종가 해동문벌 始原이며 뿌리 없는 江과 나무를 보았는가. 시원이며 뿌리 없는 강과 나무를 보았는가. 祖上의 거룩한 勳業은 보배로운 우리의 자랑 조상의 거룩한 훈업은 보배로운 우리의 자랑
新祠에 香 피우고 敬虔하게 무릎 꿇고 신사에 향 피우고 경건하게 무릎 꿇고 羅拜하고 獻酌하는 그 至誠에 感悅하여 나배하고 헌작하는 그 지성에 감열하여 王胤의 榮華를 버린 祖靈神도 歆響하리. 왕윤의 영화를 버린 조령신도 흠향하리.
子路의 孝心을 빌어 고이 여민 옷깃에 자로의 효심을 빌어 고이 여민 옷깃에 公古리 맑은 숨결로 스며드는 그윽한 遺香 공고리 맑은 숨결로 스며드는 그윽한 유향 宇內를 흠뻑 적시고 만 가슴에 차고 넘친다. 우내를 흠뻑 적시고 만 가슴에 차고 넘친다.
平良 그 天賦의 稟性 召命처럼 받아 들고 평량 그 천부의 품성 소명처럼 받아 들고 章理로 다스린 삶 列先祖의 값진 遺跡은 장리로 다스린 삶 열선조의 값진 유적은 祠壇의 꽃잎에 맺힌 구슬이듯 玲瓏하다. 사단의 꽃잎에 맺힌 구슬이듯 영롱하다.
復元에 목 메인 情 하늘도 無心치 않아 복원에 목 메인 정 하늘도 무심치 않아 元德을 베푸신 恩義 日月처럼 환한 둘레 원덕을 베푸신 은의 일월처럼 환한 둘레 記念頌 音律을 타고 黃金물결이 출렁인다. 기념송 음율을 타고 황금물결이 출렁인다.
念念인들 어찌 잊으리. 無量한 그 恩澤을 염염인들 어찌 잊으리. 무량한 그 은택을 頌할수록 겨운 慕情 붉게 타는 이 聖地를 송할수록 겨운 모정 붉게 타는 이 성지를 祝望의 蒼蒼한 來日 열고 섰는 平章祠를. 축망의 창창한 내일 열고 섰는 평장사를.
2002년 10월 김 영 휘
* 名華(명화) : 명문의 별칭
* 門望(문망) : 가문이 좋고 인망(人望)이 있는 것
* 閥閱(벌열) : 문의 오른쪽 기둥을 閥(벌), 왼쪽의 기둥을 열(閱),
옛날 공적을 적어 문에 걸어둔 사(여기서는 기둥을 의미함)
* 羅拜(나배) : 여럿이 늘어서서 함께 절함
* 王胤(왕윤) : 임금의 자손
* 公古리 (공고리) : 악기의 일종, 銅鈴(동령) 50개를 한 줄에 꿴 것
* 平良(평량) : 공평하고 선량함
* 章理(장리) : 밝은 이치
* 宇內(우내) : 온 세상
△ 평장사 전경
△ 평장사에서 바라본 무등산
보본숭현(報本崇賢)과 양육인재(養育人材)의 도장(道場) "평장사"
사우란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집을 말한다.
이 곳 평장사는 광산김씨 후손들이 시조 신라왕자공 김흥광에 대한 추원보본의
도를 성경의 예로써 받들고 양육 인재를 위한 강학도장이다.
사우는 설립목적이나 기능, 명칭상에서 서원과 그 성격이 크게 구별된다.
예컨데 서원이 양육인재와 사문진흥에 목적을 두고 강학의 기능을 담당하였음에
반하여 사우의 경우는 이러한 교육적 기능보다는 보본숭현의 구현에 더욱 비중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기 이후부터 서원이나 사우는 모두 조선시대 양반들이 그들의
사회적 기능을 유지 보강하려는 같은 목표를 가진 것이었으므로 점차 그 엄격한
구별이 무너져갔다.
호남지역의 서원, 사우 건립은 전국 총 건립수의 20%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시기별로도 전라도가 선조 현종대에 전국 평균 사우점유율 34%를 휠씬 넘는 42%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나, 숙종 - 정조대의 평균 56%를 크게 상회하는 65%에 달하는
점에서 돋보여진다.
이같이 서원보다 사우의 점유율이 높다는 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서원과 사우의
구분이 모호해졌다는 사실과 서원보다는 사우의 경우 문중적인 성향의 인물제향이
상대적으로 많다고 볼 수 있으며, 대원군이 섭정하면서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없애고 설치를 엄금하고, 축소정비정책에 따라 더욱 심화되었다.
가례에 의하면 사우는 반드시 앞을 남쪽으로 하고 뒤를 북쪽으로 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우의 건축공간은 반드시 축을 형성하였고 중요한 건물은 축을 중심으로 하고
주변의 건물을 좌우에 배치하여 건물의 위계성을 갖추도록 하고 있다.
평지에 세워지는 경우는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면서 축을 꺽던가, 아니면 축을 변형
하여 병렬형 등으로 자연지세와 어울리도록 하였다.
평장사는 전통 유교 건물로써 권위를 강조하여 정면 상부에 시조공 사우를 정점으로
하여 내삼문, 취사당, 광일문을 무등산 정상과 일직선 축으로 하고 주변의 시설물은
상호 대칭을 형성하여 위계성을 갖추었다.
△ 평장동 유허지
1. 광산김씨 시조공의 사우 평장사(光山金氏 始祖公의 祠宇 平章祠)
이 곳 평장동은 한국전통 명문가의 얼과 혼이 살아 숨쉬는 광산김씨 발상지이다.
시조 신라왕자공 김흥광이 신라의 종말을 예지하고 왕자의 지위를 버린 채 이 곳에
둔세우거하여 후손들의 번영을 마련하여 주신 개기 유허지이다.
성조의 개기 이래 후손 중에서 평장사가 많이 나와 세상 사람들이 이곳을 평장동이라
부른다.
평장동은 노령산맥 태조봉을 조산으로 하여 서남으로 수백리 굽이쳐 내려온 산맥의
정기가 불대산 소조봉에 이르러 기와 창을 세워 놓은 듯한 서른 여덟 개의 장군봉으로
웅대하게 둘러 싸여 힘차게 뻗어 내려와 평장사에 이르러 기맥이 응결하고 장엄하게
우뚝 솟아있는 호남의 명산 서석산을 안대하여 수백리를 흘러온 황룡강 물과 서로
만나 함께 안고 흘러가니 산맥과 물줄기가 살아서 움직이는 형상이다.
시조공의 사당을 중심으로 좌우로 산맥이 다시 갈라져 백호의 줄기는 여덟겹이오,
청룡의 줄기는 일곱겹으로 그 형태를 보면 전체가 태극형을 이루고 좌우 청룡 백호의
날개가 균형을 맞추었으며, 주위의 산맥과 봉우리가 모두 명산으로 금태산, 서석산,
양림산, 삼각산, 건지산, 환등산, 삼선산 등이 우뚝 솟아있고 문필봉이 겹겹이 쌓여
있다.
불대산 봉우리를 봉황의 머리에 비유하여 전체의 전경을 봉항이 알을 품고있는 형상
으로 표현하여 비봉포란형이라 하며, 용혈사수를 두루 갖춘 용진혈적으로 절의와
공명이 끊이지 않을 비기에 전하는 호남 제일의 명당이다.
풍수학의 극치를 자랑하는 평장사는 원경에서 바라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올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고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조망은 점승적 최고조의 자연 풍광으로
조화의 섭리와 관용의 이치를 일깨워주는 호연지기 양생의 최적의 명소이다.
△ 신라왕자공 유허지 산세도
2. 광산김씨 발상지 평장동의 연혁(光山金氏 發祥地 平章洞의 沿革)
평장동은 신라 무주의 서일동이니 본래 백제무진주인데 신라가 병합하여 도독을
두었고, 경덕왕 16년에 무주로 다시 부르게 되었다. 진성왕 6년에 견휜이 웅거하며
후백제라 칭하고 도읍을 전주로 옮기니, 궁예가 고려 태조 왕건을 정기태감으로
삼아 수군을 거느려 공략하고 주계를 정하였는데 성주 지훤이 굳게 지켜 불항하였다.
태조 19년에 이르러 견훤이 아들 신검을 토벌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후 고려 태조 23년(940)에 광주로 고쳤다. 성종 14년에 주를 낮추어 자사를
두었고, 뒤에 다시 낮추어 해양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고종 45년에 공신 김인준의
외향으로 지익주사로 승격하고 광주목으로 하였다. 충선왕 2년에 다시 낮추어
화평부라 하였고, 공민왕 11년에 다시 무진부로 바뀌었는데 고려 혜종의 휘를 피하여
무(武)자를 무(茂)자로 고쳤으며, 공민왕 22년에 다시 광주라 하여 목사를 두었다.
조선조에도 그대로 부르다가 조선 세종 12년에 다시 무진군으로 낮추었다.
문종 원년에 다시 광주목으로 복구했고, 성종 20년에 광산현으로 낮추었다가, 연산
7년에 다시 광주라 하여 목사를 두었으며, 인조 2년에 광산현으로 낮추었다가,
이조 12년에 주로 다시 하였다. 숙종 27년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숙종 33년에 다시
광주로 복구되었다.
조선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나주부 관할의 광주군이 되었으며
1935년 광주가 부로로 승격됨에 따라 광산군이 되었다가 1910년 경술년 왜정 때
현재의 담양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곳 지명의 시원은 본래 백제 무진주에 소속된 마을이었고, 통일신라 때는 무주
서일동으로 불리워 오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1,200여년전 신라말에 광산김씨가 이
곳에 살면서 고려 초기에 평장사가 많이 나와 평장동으로 불리게 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후 왜정 때 화아로 동명이 바뀌었으나, 광산김씨들의 동명 복원운동에
의하여 1924년 평장동으로 환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광일문에서 바라본 취사당과 평장사
3. 명문화벌 광산김씨(名門華閥 光山金氏)
광산김씨 역사는 평장동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역사는 천년이 넘고, 지금의
후손이 백만을 헤아린다.
장구한 역사의 변천속에서 영욕과 부침을 거듭하면서 명문화벌로 성장 발전 하였다.
시조 할아버지 김흥광은 장차 국란을 예지하고 왕자의 지위를 버린 채, 이 곳
평장동에 둔세우거 하시어 후손들의 번영을 마련하여 주셨다. 할아버지의 음덕에
기인하여 후손들이 번창하여 삼한갑족, 명문거족, 예문종가로 자리매김되고 있으며,
명신거유와 충의열사들이 줄을 잇고, 동방이학의 종사 문안공 김양감 선생님,
조선예학의 태두이며 기호학파의 거두이신 사계 김장생 선생님이 유학의 대통을
계승하고 국민순화와 학문발전에 크게 공헌 하였다.
광산김씨 조상님들은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속에서도 대의와 명분을 생명력으로 하여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한 명문의 전통은 역사속에 찬란하다.
겨레의 스승을 제사하는 문묘배향 18현 중 광산김씨 조상님이 두 분이나 되고, 또한
부자 명현으로 유명하다.
종묘에 배향된 보익공신이 세 분이고, 전국 쉰한개의 서원에서 여든두 분의 조상이
배향을 받고 있다.
"삼정승이불여일대제학" 이라는 대제학이 열한 분이며, 예문관 홍문관 양관 대제학이
일곱분이고, 형제대제학, 삼대대제학 배출가문은 유일하게 광산김씨뿐이다.
상신으로는 고려조 12평장을 비롯하여 조선조에 영의정이 두 분, 좌의정이 한 분,
우의정이 두 분이며, 관리의 표상인 청백리가 네 분이고, 인재의 등용문인 호당이
세 분이며, 부조묘가 열세 분, 시호를 받으신 분이 쉰여섯 분이다.
등단에 오른 대장이 아홉분이요, 임금앞에서 경서를 강의한 경연관이 열두 분이며,
조선조 문과 급제자가 이백예순다섯분이다.
인후온화한 부덕이 조선 제일의 왕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생을 마친 숙종 왕비
인경왕후와 여원동정 연합군 창설시 소용대장군 우부도통 문숙공 김주정과 군함 900척
건조의 총책 양간공 김연,
국왕의 시호에 충성충자를 붙여야했던 속국의 진공사 신분으로 원나라 황제와 당당히
맞선 문정공 김태현, 무소불위한 부패권력을 응징한 김광철, 요승 신돈을 죽이기 위해
결사체를 만들었다가 오히려 해를 당한 김정과 김흥조,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김약시와 김자진,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위난을 구하였던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장군과 근시재 김해 의병대장을 비롯하여
병자호란 임진왜란 등 외세의 침략과 숱한 국란의 현장에서 순절로 충절을 지킨 수
많은 조상님과 음률에 밝아 아악을 정리한 김첨,
인수방에서 살았다하여 인수체로 불리우는 조선의 명필 자암 김구, 어머님을 위하여
유배지에서 구운몽을 쓰고 임금의 방탕함을 바로잡기 위하여 사씨남정기를 쓰는 등
충효를 위한 목적소설로 우리 근대 소설 문학사에 찬연한 업적을 남기신 서포 김만중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동방의 화벌 명문가이다.
* 삼정승불여일대제학 : 정승 세 명이 대제학 하나만 같지 못하다.
* 여원동정연합군 : 고려와 원나라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사
* 불사이군 :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기 않음
* 무소불위 : 모든 것을 다할 수 있음.
△ 유허비각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 기념물 200호)
4. 시조공의 유허비와 비각● 유허비(遺墟碑) : 서기 1737년(영조 13년)에 사계 김장생의 현손 참찬공
퇴어자 김진상과 지추공 김진동, 봉사공 김복택, 현감공 김성택이 호남 제종과
입비를 추진하였다.
1739년 수비와 함께 비각을 준공하고 참찬관 퇴어자 김진상이 유허비 음기를 지었고,
통덕랑 김회풍이 명을 지었다.
비각 안의 비는 2002년 1월 12일 전라남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200호로 지정되었고,
유허지 7,145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확정되었다.
평장동 유허비는 좌대와 비신,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다. 높이 249cm, 너비 75cm의 비
전면에는 "신라왕자유허비" 라 하였고, 앞면 오른쪽에 "유허비명" 이란 제하의
119자의 내용이 쓰여 있으며, 왼쪽에 비를 세우는 일에 참여한 4명의 이름과 관직,
이름 등 26자가 각인되어 있다.
뒷면에 김진상이 쓴 "유허비음기" 라는 제목하에 180자의 내용과 23자의 세운 시기와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遺墟碑銘(유허비명)
우리의 시조할아버지는 신라의 왕자로서 국운(國運)이 기울어질 때
이곳에 둔거하시니 명철(明哲)하신그 지감(知鑑)을 성조(聖朝)에서 찬미하였다.
빛을 감추고 덕(德)을 쌓아 후손(後孫)에게 끼치어 팔세(八世)의 평장(平章)이
동사(東史)에 빛난다.
아름다운 그 지명(地名)도 실로 이러한 까닭이다. 팔백년을 내냈어도
유허(遺墟)는 남아있어 은은히 보이는 듯 하고, 그 상모(想謨)하는 마음 끝이 없다.
종인(宗人)들과 의논하여 돌을 세워 기록하니 맑은 향기와 유구한 자취가
보이는 듯 감돌고, 불대산(佛臺山)을 배경(背景)으로 서석산(瑞石山) 바라보니
영험(靈驗)한 산 정기(精氣)와 지운(地運)이 응기(應起)하여 보호(保護)한다.
백천만년의 역사속에 길이 전하리라.
- 1739년 김 회 풍 -
△ 유허비각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 기념물 200호)
●유허비각(遺墟碑閣) : 1739년 유허비와 동시에 건립하였다. 이 비각은
전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로 화려하고 우아한 이익공과 팔작지붕의 형식이고
부연을 단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 충렬왕 때 황대전고공 김이가 쓴 "광산현제영시서" 와 조선 성종 2년인
1471년 김현뢰가 쓴 "평장동휴허서" 에도 이곳이 광산김씨의 세거지임을 적고 있다.
특히 김현뢰의 유허서에는 평장동의 촌토척지도 모두 광산김씨의 세전지물이
아닌 것이 없다 하였다.
♣ 유허비는 한국 씨족의 발생사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사료이다. 특히 향토사의
입장에서 한동네의 지명이 결정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전남지방 성, 본관 발생에 대한 연구자료로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는데 중심역활을
중채가 하였고, 관련 자료 제공은 선술이 하였다.
△ 평장사(平章祠)
5. 평장사(平章祠)
평장사는 광산김씨 시조공 신라 왕자 김흥광을 매년 음력 시월 초하루에 백만의
후손들이 모여 음덕을 기리고 제사 모시는 사당이다.
후손된 자 조상을 봉양함은 강상의 법도이고, 성경의 예로써 중히 함이 인륜의
도리이다.
또한 명문의 시조공 향례는 사우봉향이 예에 합당하다.
광산김씨 조상님들은 1722년에 건사 발의를 하고, 1786년에 완공하여 이름을
"종사당"이라 하고, 1796년에 문안공을 설향하였다. 발의 후 준공까지 64년이며,
준공 후 봉향까지 10년이다.
74년에 걸려 이룩한 감격의 첫 봉향이었으나, 당년에 모함 당하여 수 많은
조상님들이 옥고를 치루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광주목사에게 단자를
올리고, 부월을 무릅쓰고 정조에게 김필중 외 176명의 조상님들이 가전상소까지
올리면서 이듬해 1797년 시조공을 봉안하였던 통한의 역사가 평장지에 구구절절
하다.
광산김씨 조상님들이 그토록 정성을 다하여 이룩했던 사우봉향이 당시의 법도와
세속이 혼탁하여 존속되지 못하고 훼철이라는 슬픈 과거의 역사속으로 묻혀버린
채 불가피하게 차선으로 선택 하였던 단제봉향이 1920년 설단 이래 장장 82년
동안 지속되었다.
2002년 도유사 황수가 시조공 사우복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제단터에 옛
사우를 복원키로 하고 종인들의 정성을 한데 모아 조상님들의 유훈을 받들어
대물림된 유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평장사"라 이름 하였다.
이로써 광산김씨 통한과 비원의 세월 280년의 역사를 마감하였다.
시작과 완성의 늦음이 당시의 시류와 세속에 연유함이었으나, 이제 본말을 바로
하여 예문종가의 위상을 명실상부하게 당당히 하였다.
♣ 평장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원형 섬돌 초석위에 원주를 세운
맞배집 형태의 유교 전통 사우 양식이다.
복원의 간역에는 총괄에 영호, 의전에 영원, 홍보에 윤중, 재정에 만진 등
부유사들이 담당하였고, 건사에 이사회 의장 평호, 감역에 감사 충식,
실무간사에 전곡유사 선술이 역활을 분담하였다.
재원 조성에는 영호의 역활이 컸었다.
△ 평장사 : 시조왕자공 대제 봉행 모습
6. 광산김씨 선대제단(光山金氏 先代祭壇)
● 제단 : 이 제단은 길수 도유사가 취사당에서 모시던 2세이하 13세 조상님을
제단에서 모시기위하여 1998년 후손들의 성금을 모아 설단하였다.
현재 16위를 모시고 있다.
△ 제단(祭壇)
● 모선문 : 모선문은 선대 조상님을 사모한다는 똣의 제단 출입문이다.
1998년 설단과 동시에 지은 건물이다.
△ 모선문(慕先門)
△ 취사당(聚斯堂)
7. 취사당(聚斯堂)
취사당(聚斯堂)은 양육인재를 위한 강학의 도장이다. 그리고 광산김씨 종중의
종사를 논의하는 화합의 장소이다. 취사라 함은 모든 후손은 이리로 모이라는
뜻이다.
취사당은 전면 5칸, 측면 2칸, 전 후퇴의 건물로 장대석 기단위에 디딤돌 초석이
놓이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으며, 이익공 형식의 겹처마 건물로써 지붕은 팔작
지붕을 하고 있는 유교 전통 서원 강당 형식의 건물이다.
1849년 승지공 재경이 광주목사 재임시 4칸 사옥을 만들어 비각을 수호케
하였으나, 어느 때 훼철되었는지 알 수 없고, 1885년 재경의 아들 윤현이
광주목사 재임시 종회소가 없음을 개탄하고 솔선 봉금을 희사하고, 호남 제종의
협조를 얻어 당우 10칸, 고사 8칸, 문랑 5칸을 강사부지에 설립키로 하고 문헌공
영수가 취사당이라 명명 하였다.
1888년(고종 25년) 5월에 상량문을 찬하고, 참판공 영목이 기하고, 판서공 수현이
발하고, 윤현공이 자서하였는데, 윤현이 준공을 못하고 남원으로 전임함에 따라
장성군수 오현이 계승하고 유사 상수, 수익, 용현, 제응 등이 간역하였다.
1892년(고종 29년)에 준공하여 의성현령 윤현, 이조판서 수현, 선공감역 형수가
취사당 서를 쓰고, 홍주목사 오현, 이조참판 명묵, 사헌부감찰 진현, 병마절도사
중현 외 상수, 기현, 용현이 취사당 기를 썼다. 이때부터 취사당 입규를 정하고
중삼중구일에 후손들이 모여서 숭조목족을 위한 종사회의를 시작하였다.
1948~1949년 평장동이 입산인들의 소굴이 되어 주민 소개와 함께 가옥 훼철 계획
이었는데, 광주 영중, 용주의 주선으로 취사당이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1950년 입산인들이 취사당에 연료를 쌓고 불태우려 하던 중 평장동에 사는 기수가
생명을 불구하고 나무단에 뛰어들어 이곳에 불을 지르려면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설유하여 소각을 면하였다.
1984년 도유사 관순, 중수위원장 용순, 집행위원장 희수가 평장동 성역화 사업을
시행하면서 대우그룹 김우중의 헌성에 의하여 취사당을 옛모습 그대로 이축하여
지금의 수존재로 보존하고 현재의 취사당을 중건하였다.
△ 취사당(聚斯堂)
♣ 문헌상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 평장동에서 광산김씨의 종사는 1600년대 말,
170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고, 취사당의 종무는 1892년 건물 준공과 동시에
취사당 입규를 정하고, 1912년에 경유사, 향유사 제도를, 1935년에 취사당
입규를 고쳐 평장동 종약으로 변경하여 체계를 갖추어 오다가 1967년에 현대식
광산김씨 대종중 종규를 제정하고 1986년, 2001년, 2004년에 개정을 통하여
현행의 종규로 운영되고 있다.
중삼중구일 :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
△ 경모재(敬慕齋)
8. 경모재(敬慕齋)
경모재는 시조공의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관리하는 곳이며, 현대에 와서는 종무
관리 사무실로도 병용되고 있다.
경모라 함은 공경하고 사모한다는 뜻이다.
추원하고 보본하는 마음도 여기에 있으니 시조 왕자공을 경모하는 집을 창건하고
경모재라 편액하였다. 광주지방법원장 연수가 기문을 지었다.
이 경모재는 전면 3칸, 측면 1칸, 전퇴의 건물로 건계를 통해 기단을 오르게 되어
있고, 기단은 장대석 기단으로 다듬돌 초석을 하고 굴도리 가구를 가진 팔작지붕의
겹치마 형식의 건물이다.
1956년(도유사 연수) 유사들은 재숙하고 제수 장만할 곳이 없음을 걱정하고 경모재
창건을 결의하고 봄에 기공하여 동년 8월에 준공하였다. 이때 나주 동수가 거금을
헌성하고, 당유사 영만, 동석이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84년 도유사 관순, 중수위원장 용순, 집행위원장 희수가 평장동 유허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재일교포 영희 헌성에 의하여 경모재를 개축하였다.
△ 경모재(敬慕齋)
△ 수존재(修存齋)
9. 수존재(修存齋)
수존재는 종직자들과 참제자들이 숙박과 식당으로 겸용하는 시설물이다.
수존재는 본래 취사당 건물이었으나, 1984년 현 취사당 중건시 원형대로 이축하여
수존재라 편액하고 순택이 기문을 지었다. 이 수존재는 전면 5칸, 측면 2칸,
전 후퇴로 석축 계단을 통해 오르게 되어 있다. 가구 형식은 굴도리 형식으로
팔작지붕에 홑처마를 하고 있다.
△ 수존재(修存齋)
♣ 현대사회의 삶의 질 수준에는 매우 미흡하고 열악한 시설물이다.
그러나 광산김씨는 이를 고집한다.
선대 조상님의 삶을 후손들이 실제체험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10. 장수각(藏守閣)
장수각은 창고용도의 시설물이다.
1980년 일본 거주 종친 창휘, 경친, 정화, 장규, 용하, 만택, 승오, 효택, 석중,
용문 등의 성금으로 신축하였다. 1988년 폭우로 인하여 심한 훼손을 입었으나
동경종친회의 도움으로 복구하였고 1998년 성역화사업시 보수 하였다.
△ 장수각(藏守閣)
△ 광일문(光一門)
11. 광일문(光一門)
광일문은 평장동 취사당 정문이며 평장사 외문이다.
광일문은 솟을 삼문의 형식으로 2개의 계단을 오르면 다듬돌 초석이 놓이고,
그 위에 원주가 놓이게 된다. 이 문은 3문으로 되어 있는데, 취사당으로 들고,
날 때에는 우입좌출 또는 동입서출 즉, 입구에서 볼 때에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는 왼쪽 문으로 나와야 하며, 가운데 신문으로 일반인들이
출입하지를 못한다.
평장사 내삼문 출입도 이와 같이 한다.
1985년 당시 도유사 관순의 헌성금에 의하여 건립하였다.
△ 광일문(光一門)/단청 전의 모습
△ 홍살문(紅箭門)
12. 홍살문(紅箭門)
홍전문은 홍살문이라고도 한다.
2005년 유물전시관과 동시에 세운 건물로 광산김씨 시조공의 신주를 봉안한
신성한 지역임을 의미하는 유교적 시설물이다. 따라서 이곳을 찾은 방문객
모두는 경건한 마음과 정숙한 행동이 현대 문화인의 예절이라 하겠다.
△ 홍살문(紅箭門)
△ 홍살문(紅箭門)
♣ 홍살문은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정면 입로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으로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이 없이 붉은 살을 죽 박는 것이 특징이다.
△ 내삼문(內三門)
13. 내삼문(內三門)
내삼문은 광산김씨 시조 할아버지의 신주를 모신 신전 출입문이다.
26개의 통석계단을 오르면 다듬돌 초석위에 원주가 세워진 솟을 삼문과 3문
형태의 유교 전통 양식으로 2002년 평장사와 함께 지은 건물이다
△ 내삼문(內三門)
♣ 광산김씨의 성을 가진 모든자 할아버지 신전앞에 머리 숙이라,
그리고 감사하라, 성도 이름도, 가지고 있는 모든것 할아버지 음덕에
기인함이다.
△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
14.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
유물전시관은 광산김씨 조상님들의 유품과 자료를 모아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조상의 얼과 혼을 확인하고 유훈을 이어받아 자자손손에게 명문의 명예와
사명감을 고취 함양 시키기 위하여 2004년 경석 도유사 때 지은 건물이다.
2004년 경석 도유사는 평장동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사회 의장
중채를 위원장으로 선임하고 전곡유사 택을 간역으로 위촉하여 사업을 추진하면서
사재 5천만원을 출연하여 자체지원부담금을 마련하였다.
추진위원장 중채는 정앙정부와 전라남도, 담양군으로부터 사업비 8억여원을
지원받아 2004년도에 유물전시관, 홍살문 건립, 우물복원, 광일문 앞 진입로를
박석으로 시공하였고, 2005년도에 경내 담장공사 및 화장실을 신축하고 사적비를
이축하였다.
이상의 성역화 사업을 시행하면서 수 많은 후손들이 스스로 동참하였다.
특히 지역국회의원 효석의 성심과 공헌이 매우 컸으며, 경기도 포천 용근,
대영의 사업비 4천만원 상당의 헌성으로 광일문 앞 석재 식수 조경공사와
마을어귀에 평장사 입구 표석을 세웠다.
후속사업으로는 평장사, 유허비각, 내삼문을 단청하고 유허지 시설 화재예방을
위하여 임도개설과 함께 유물전시관과 대칭의 위치에 예문교육관을 신축하여
장학사업과 함께 양육인재에 매진하고 30만평의 종중 임야 활용 방안을 마련하여
이를 실행함으로써 광산김씨 위상을 제고할 것이다.
△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
△ 평장사 묘정비(平章祠 廟庭碑)
15. 평장사 묘정비(平章祠 廟庭碑)
묘정비는 2002년 시조왕자공 사우를 복원하고 세운 비로써 묘정내의 유일한 비다.
평장사를 오르는 계단 밑 취사당과 경모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묘정이라 함은 평장사 경내의 경계를 말함이며, 담장으로 구분한다.
비신은 6척으로 운두구좌형이다.
비문의 내용은 시조 왕자공 사우복원에 대한 동인과 전말을 기록하고 있다.
글은 황수가 짓고, 글씨는 영원이 썼다.
△ 평장사 묘정비(平章祠 廟庭碑)
♣ 운두구좌 : 구름 형태의 머릿돌에 거북형태의 받침돌
△ 평장사 묘정비(平章祠 廟庭碑)
△ 사적비(事跡碑)
16. 사적비(事跡碑)
사적비는 광산김씨들이 시조공 유허지 성역화 사업을 시행하면서 세운비로
광일문 문앞 정원에 세웠으나, 2005년 노수 도유사가 성역화사업을 시행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축하였다.
- 1976년 유허보존실적비
- 1985년 평장동유허비
- 1987년 광산김씨 대종각 건립기적비
- 1982년에 시작하여 1984, 1986, 1988년 평장동 단소중수사업 추진임원명단비
- 1989년 광산김씨 평장사 세수사적비
- 1996년 평장동 진입로 확포장공사 준공사적비
- 2000년 평장동 유허지 성역화사업 준공사적비
- 2002년 평장사 사적비가 있다
17. 관리사(管理舍)
관리사는 유허지 관리사옥이다.
1984년 유허지 성역화사업으로 구 관리사가 철거되고 없어진 것을 1994년 도유사
거중이 군부대 사격장으로 편입된 종토보상금과 후손들의 헌성금으로 신축하였으나,
1998년 길수 도유사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면서 이를 철거하고 이 자리에 상계
조상 제단을 설치하고 관리사를 현재의 장소에 새로이 지었다.
△ 관리사(管理舍)
18. 평장사 안내 표석
△ 평장동 동구비
● 평장동 동구비 : 1920년 강진의 직현이 사재로 평장동 입구에 동구비를
세웠다.
△ 광산김씨 발상지비
● 광산김씨 발상지비 : 1996년 장성 흥식과 광주 용수, 봉수 형제가 사재
2,000만원 상당을 출연하여 평장동 입구에 비를 세워 세인들에게 광산김씨
발상지임을 알리었다.
△ 평장사 입구비
● 평장사 입구비 : 1006년 경기도 포천 용근, 대영이 사재를 출연하여 세운
평장사 안내표석이다. 비신은 3.3m의 높이, 자연석 옥돌이다.
19. 화장실(化粧室)
성지순례자들의 편익을 위한 시설물이다.
1998년 광일문 우측 경모재 아래쪽 경내에 신축하였으나 2002년 성역화사업
마스터플랜에 따라 2005년 노수도유사가 성역화사업을 시행하면서 이를 철거하고
광일문 우측, 현재의 위치에 신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