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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원문보기 글쓴이: 모봉형진
서호 용정(西湖 龍井) - 열 여덟 그루의 어차(御茶) 이야기 |
아름다운 항주(杭州) 서호(西湖)가의 수많은 산들 중에 사봉산(獅峰山)이 있다. 사봉산 아래에 호공묘(胡公墓) 앞에는 울타리가 쳐진 속에 "18그루의 어차"가 현지 차농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 이 18그루의 어차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청나라 건륭(乾隆) 황제 시대에 오곡이 풍성하고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자, 건륭황제는 궁궐생활을 참지 못하고 천하를 주유하고자 하였다. 한번은 그는 항주에 이르러 서호경치를 유람하다가, 양주 태감에게 평소에 가장 즐겨 마시던 차나무를 직접 보고자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지방의 하급 관리들은 물론 그 곳 산사(山寺)의 늙은 스님까지도 황제의 방문에 긴장하였는데, 황제가 방문하면 휴식하며 차를 마실 준비를 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황제는 대소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봉산을 찾았다. 길위에서 사봉산의 웅장한 자태, 맑은 용정의 샘물, 푸른 녹색잎들이 이어지는 다원(茶園)에서 광주리를 메고 차를 따는 소녀들의 모습. 도처에서 지저귀는 산새들과 독특한 향기를 뿜어내는 꽃들, 건륭황제는 대자연의 절경에 도취되어 오랫동안 산속을 배회하다가 태감의 청에 마지못해 호공묘에 도착하게 되었다. 노화상은 가장 향기로운 차를 다려서 황제에게 올렸다. 황제가 잔속의 차를 들여다보니 찻물은 비취색이고 잎들은 물 속에서 곧게 서 있는 모습이 차의 싹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고 너무 아름다웠다. 한 모금을 마시니 맑은 향기가 피워 오르며, 뒷에는 감칠 맛이 돌면서, 입안에는 방향이 가득했다. 황제는 스님에게 "이 차는 무슨 차며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고 물으니, 스님은 "이것이 바로 서호의 용정차 중에서 가장 진귀한 사봉용정(獅峰龍井)이라는 차인데, 사봉산 위의 차밭에서 따온 여린 싹으로만 덖어 만든 것입니다" 라고 아뢰고 나서, 황제에게 직접 제다하는 과정을 보여 드렸다. 건륭황제는 용정차를 만드는 수고로움과 정밀한 기술에 감동을 받았다. 황제가 제다 참관이 끝나고 호공묘에 돌아오면서, 묘 앞에 십여 그루의 차나무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마침 새싹들이 돋아나고 그 모양이 마치 참새의 혀 같았다. 황제는 곧 팔을 걷고 시골소녀의 차따는 모습을 흉내내면서 직접 차를 따기 시작하였다. 그가 한참 차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태감이 달려와 황태후께서 급병이 나서 황급히 북경으로 돌아가야 하다고 아뢰었다. 황제는 급한 마음에 따던 차 싹을 옷소매에 집어넣고 황궁으로 향하였다. 며칠 뒤에 도착하니 황태후는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후는 원래 큰 병이 아니었고, 단지 산해진미를 너무 과식하여 간에 화기가 올라와 눈이 붉게 충혈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다 황제인 아들이 돌아오자 기뻐서 병도 거의 나은 듯 했다. 황제는 마음이 급해졌다. 어머니의 환우를 듣고 급히 오다보니 선물을 챙기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도 가만히 맡아보니 어디서 맑은 향이 나는 것이었다. 소매에 손을 넣어 보니 사봉산에서 따온 찻잎이 만져졌다. 차잎은 이미 몇일이 지나 말라 있었다. 황제는 차잎을 꺼내면서 "어마 마마, 이것은 제가 직접 사봉산에서 따온 용정차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태후는 "오, 이 차는 향기가 참 좋군요. 요 며칠 동안 입술이 메말라 있었는데 빨리 우려서 맛을 한번 봅시다" 하고 말했다. 황제는 급히 궁녀를 불러 차를 우리게 하였고, 태후는 천천히 차를 음미해 보았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차를 마시자마자 황후의 몸은 날아갈 듯이 편안해졌다. 사실 이 차는 품질이 좋아 맑은 향기가 마시기 좋게하면서 기름기를 없애 소화작용을 도와 주었다. 또한 태후는 보고 싶던 황제가 돌아오고 몸소 딴 차를 마시게 되니 더욱 차의 효험이 있었을 것이다. 태후는 아주 기뻐하며 " 폐하, 이 차는 신선차이에요, 신선들의 단약(丹藥)처럼 영험해서, 이어미의 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하였어요 "라고 했다. 황제는 그 말에 몹시 기뻐하며,그 자리에서 칙서를 내려 호공묘 앞의 차나무를 황실 차나무로 봉하고, 사람을 파견해 관리하도록하였다. 또한 해마다 채취되는 차잎은 따서 태후에게만 드리도록 했다. 그 당시 호공묘 앞의 차나무가 모두 열 여덟 그루였기 때문에, "열 여덟 그루의 어차(御茶)"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