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9:15~30)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그를 아내로 삼고자 지참금 대신
7년의 노동을 한다.
7년이 지나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고자 하나
라헬의 아버지 라반은
라헬의 언니 레아를 몰래 동침하게 하는
기만을 자행한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관습상 동생을 먼저
시집보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변명한다.
거기에 추가적인 노동을 조건으로 걸어
그것을 완료하면 라헬을 준다고 한다.
정직한 사람들의 길을 가리는 대부분의 경우는
사람들의 욕망이다.
돈에 대한 것이든, 권력에 대한 것이든,
쾌락에 대한 것이든, 명예에 대한 것이든
각각 다른 듯 일맥상통하고 연결되어 있는
그 욕망의 자극성에 붙잡혀
공의와 사랑을 뒤로 던져 버린다.
그리고는 그들(나를 포함한)이 욕망을 우선시함으로써
선을 파괴하는 것을 솔직하게 시인하지는 않고
그럴듯한 변명과 논리를 만들어
진실을 흐릿하게 만든다.
사람은 그런 논리와 핑게를 떠올리는 머리가 발달했다.
만약 한 명의 공의를 따르는 이와
다른 한 명의 욕망을 따르는 이가 마주할 때
무심한 제 3자는 그들 모두의 그럴 듯한 논리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시간이 갈수록 소음과 찡그린 얼굴과
투쟁의 분위기가 싫어서
모두를 부정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욕망을 따르는 자가 원하던 길이다.
물론 이분법으로 한 명을 공의를 따른다고 단순하게 정의했으나
그렇게 분명하게 나누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공의를 추구해도
사랑이 기반이 되지 않으면 내밀하게는
욕망을 따르는 이와 다르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따르고 온전함이 있다 가정해도
욕망을 따르는 이들을 세상에서 극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최근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이 하는 행위는 참으로 이색적이다.
독재정권을 비롯하여 지난 수 십년간은
내밀하게 비리를 저지르고서 쇄뇌하고 영약하게 대중들을 속여왔지만
이번 일은 삼척동자가 봐도 단순하게 아닌 일을
온갖 유치한 수준의 논리로 방어막을 치고 있다.
그만큼 리더가 어리석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단순한 일조차 저렇게 거짓의 장막을 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거짓과 속임수로 살아왔을까?
이번 일을 통해서 만인이 알고
조금 더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학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저렇게까지 해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30%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 중에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는 또 한가지는
야곱이 라반에게 당하는 기만이
야곱이 형 에서를 기만한 것에 대한 보응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번 고난을 통해서 야곱은 자신의 과거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앞서 묵상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의 행동 전부가 미화되거나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했다.
분명 '구별'할 것은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은 허허실실..
우리를 매우 관용적으로, 수용적으로 대하시는 듯 보이지만
눈 높이 교육일 뿐
결국은 우리를 '천국 백성의 자격'이라는 변함 없는 기준으로
성숙시키시는 과정을 밟으시는 분이시다.
마치 꼭 해야 하는 구구단을 극렬히 거부하는
어린 아이에게 지금은 구구단을 강요하지 않고
수수깡으로 하나하나 설명해 주시나
결국에는 구구단을 다 외우게 하는 것처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생각보다 구구단이 어렵지 않았음을 고백할 정도로
은혜롭게 이끌어 주실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