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5-7
전남 강진, 완도, 해남, 순천
※ 도자기의 고장 강진 : 도자기는 질그릇의 도기와 사기그릇의 자기를 합쳐 부르는 말로 흙으로 만든 기물을 총칭한다. 도자기는 굽는 온도에 따라 토기, 도기, 자기로 구분한다. 토기(土器)는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섭씨 700~1000도 정도에서 굽는데 유약을 입히지 않아 물이 스며나오는 경우가 많다. 도기(陶器)는 섭씨 1000~1100도에서 구으며 유약을 입히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토기보다 단단해 물이 스며들어도 밖으로 새나가지는 않는다. 자기(瓷器)는 초벌구이한 도기의 표면에 유약을 바른 후 밀폐된 가마에서 섭씨 1300도 안밖의 고온으로 다시 구운 그릇을 말하며 두번 구운 덕분에 도기보다 더 단단하며 표면에는 얇고 투명한 유리질막이 생기게 된다. 자기 이름 붙이는 방법은 자기의 종류 + 무늬 표현 방법 + 무늬 종류 + 그릇의 모양 순으로 붙인다.
강진 백련사. 만덕산 백련사 일주문. 고려시대 요세가 천태종을 기반으로 백련결사를 일으킨 사찰이다. 조선후기 백련사 초의선사는 추사 김정희의 절친으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차를 제주 유배지에 보내주곤 하였다. 다산 정약용이 이곳에서 유배생활할때 혜장선사, 초의선사와 자주 왕래했다고 한다.
전남 강진 다산초당. 강진 만덕산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백련사에서 가까워 걸어서 갈 수 있다. 다산초당은 조선 후기의 위대한 실학자인 정약용이 천주교에 연루되어 귀양살이 한 곳이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관리생활을 하던 정약용은 천주교 박해사건에 연루(황사영 백서 사건)되어 이곳에 온 것이 1801년이었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임금에 오르자 정권을 잡은 벽파는 다른 당파를 몰아내기 시작하는데 첫번째가 천주교도를 핍박하는 것이었다. 형인 정약종은 천주교 신자로서 처형을 당했고, 중형 정약전(흑산도에서 자산어보 집필)과 함께 나주 삼거리까지 와서 형은 흑산도로, 자신은 강진으로 갈라져 유배생활을 시작하였다. 본래 다산은 강진읍 동문 밖에서 기거했으나 먼 친척(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가 정약용의 외증조부이다)이 되는 해남 윤씨 윤단의 배려로 이곳에 자리를 잡고 제자를 양성하며 불후의 명저인 3부작(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을 완성한다. 다산은 정약용의 호이기도 하지만 차나무가 많았던 이곳 만덕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강진에서 총18년을 유배살이하면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여유당전서 등 500여권의 책을 집필하였다. 정약용은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학문적, 인간적으로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그림 그리기도 열정을 보였는데 1813년 그린 "매조도(梅鳥圖)"는 부인이 보내준 해진 치마 6폭을 오려, 거기에 그림을 그려서 딸에게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1794년 정약용은 정조의 명령으로 2년 6개월 만에 수원 화성을 완성했는데 유형거, 거중기, 녹로 등을 개발하여 혁신적인 건축기술을 보였다. "화성성역의궤"나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따르면 정조는 화성에 대한 애착이 많았으며 이곳에 자주 행차하여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곤 하였다.
백련사와 강진만. 아름드리 배롱나무(백일홍나무). 백련사에서 본 강진만.
강진만과 가우도. 강진은 고려시대 고려청자를 만드는 관요가 있던 지역이라서 가우도 집트랙 승강장도 도자기 모형으로 되어있다. 우리나라에는 400여 곳의 옛 가마터가 남아 있는데 그 중 전남 강진군 대구면 일대에만 180여개의 가마터가 있다. 예부터 좋은 흙과 물류에 유리한 바닷길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를 지배하던 몽골이 다량의 고려청자를 반출하자 도공들은 만들기 쉬운 분청사기를 주로 제작하였다. 15세기 전후 만들어진 "분청사기 선무늬병"과 15~16세기 "분청사기 모란무늬병"의 문양은 대담함의 극치로 평가된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들이 바닷가에 자주 출몰하자 도공들은 내륙으로 피하게 된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내륙으로 이동한 도공들은 그때부터 조선 백자를 만들어 냈다.
강진만 가우도 짚트랙.
다산황토방.
완도 장보고동상. 해상왕 장보고. 청해진은 9세기 전반인 통일신라시대 장보고가 당의 해적활동을 근절시킬 목적으로 828년(흥덕왕 3년)에 청해에 군사를 주둔시킬 것을 주청하여 허락을 받아 설치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근거지로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당나라·일본과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했다. 청해진은 일종의 해상왕국이었다. 축적된 부와 군사력으로 장보고는 중앙정부의 권력전에도 관여하여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로 들이려고 한 시도가 진골귀족의 반대로 무산되자 장보고는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고, 청해진이 생긴지 13년 만인 846년 부하였던 염장에게 살해당했다. 그뒤 청해진은 무역 활동이 이어졌으나 851년(문성왕 13년)에 철폐되었으며 그 주민을 벽골군(碧骨郡:지금의 김제)으로 이주시키면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청해진의 위치는 완도 본도에서 170m 정도 떨어진 장도인데, 섬 둘레를 외성과 내성으로 축성한 흔적과 목책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사적 제308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장도에는 장보고를 모신 당집이 하나 있는데 이 당집에는 맷돌이 하나 남아 있으며 이 맷돌은 중국 산동성에 있는 법화원에 있는 맷돌과 똑같다고 한다. 법화원은 장보고가 신라인들의 무역과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중국에 세운 절이다.
완도수목원.
강진 석문공원.
순천 낙안읍성. 낙안읍성은 고려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흙으로 벽을 쌓기(토성) 시작한 것이 시초가 되었으며 조선 초기 돌로 쌓았다고 한다. 이후 1626년 (조선 인조 4년) 낙안군수였던 임경업 장군이 다시 돌로 쌓고 규모도 크게 넓혔다. 낙안읍성 뒤로 보이는 산은 금전산. 임경업 장군과 누나는 왜적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건설적인 내기를 했다고 한다. 임장군이 마을 주위로 성을 쌓는 동안 누나는 낙안 마을에 주둔해 있는 병사들의 군복을 만들기로 하였는데 누나가 그 많은 옷을 다 만들때까지 동생인 임장군이 성을 완성하였다는 소식이 없자 누나는 다 지은 옷의 옷고름을 하나하나 뜯어 다시 달기를 되풀이하였다. 마침내 임장군이 성을 다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 누나는 끝내 임장군의 옷고름만은 달지 않고 남겨두어 동생에게 일부러 져 주었다고 한다. 임경업 장군의 착한 누나. 임경업 장군 출생 이야기 : 한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던 총각 임씨는 먹을것이 떨어져 경기도 광주에 사는 친척집으로 식량을 얻으러 가는 도중 길을 잃어 한밤중에 외딴집에 혼자사는 아가씨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그 처녀는 오백년 묵은 암구렁이였다. 구렁이는 내가 죽어 하늘로 오르면 비늘 세 개가 떨어지는데 그 자리에 당신의 무덤을 쓰면 훗날 나라를 구할 유명한 장수가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총각은 처녀가 알려준데로 유언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 자손으로 임경업이 태어난 것이다. 지금 남한산성 서쪽에 임경업 조상의 묘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