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쥬신제국사3/15-야뫼도백제의 남부여 다물전쟁 지원>
☯ 왜도의 야뫼도백제, 남부여 잔존세력의 다물전을 지원
서기 661년 5월. 부여 다물군의 사령관인 복신은 다장부(多蔣敷)를 나대진(娜大津)으로 파견하였다. 때마침 중대형의 지휘로 야뫼도[大和]군의 출병 준비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비운의 여왕 보황녀(寶皇女)는 68세의 늙은 몸으로 멀고 먼 규슈까지 와서 출정을 준비시키고 있었으나, 깊은 마음의 상처를 이기지 못하여 심한 중병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이 때 본국에서 다장부가 새 소식을 갖고 왔다는 말에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를 만났다.
♬(말풍선)
“천황 마마! 이제 우리 부여는 망했나이다. 매국노인 임자(任子)의 무리가 신라 김유신 패와 내통하여 나라를 팔았으며, 그래도 혼자 힘으로 부여를 당할 수 없었던 소인배 신라인들은 바다 건너 당적(唐敵)을 끌어들여 무려 35만의 대군으로 부여성을 노리고 덤벼들었사옵니다.
때마침 간신 임자의 무리가 왕의 신임을 받는다 하여 대다수의 장군들이 벼슬을 반납하고, 그들의 출신지역으로 돌아가 버려서 적군을 방어할 병력을 동원할 수가 없었나이다.”
“장군 의직과 계백 등이 죽기까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의 치욕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어 결국 부여성과 ᄀᆞᆷ나루마저 적에게 유린당하고 말았나이다.” (이상 다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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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의자왕은 어찌 되었는가?” (제명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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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께서는 ᄀᆞᆷ나루로 몸을 피하셨는데, 매국노 임자(任子) 무리가 왕을 위협하여 할 수 없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으며, 결국 부여성으로 끌려 오셔서 실라의 김춘추와 당적 소정방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의 의식을 행하였고, 지금은 태자 융과 함께 당경(唐京)인 장안(長安)으로 끌려 가셨나이다.”
“천황마마! 지금은 다행이도 복신 장군께서 다시 일어나 다물군(多勿軍)을 조직하고 흩어진 부여의 엣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주류성을 비롯하여 두시이옥성, 진현성 등을 탈환했고, 도침과 흑치상지, 상여, 지수신 등의 장수들이 4만 명의 병력으로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분투하고 있나이다.”
“그러나 나라에 천황이 안 계시므로 하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할 방법이 없사옵니다. 따라서, 복신 장군께서는 풍장 왕자님이 되돌아오셔서 천황위에 올라 부여를 되살려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상 다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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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 중 다행이로다. 풍장은 곧 본국으로 돌아가 천황이 되어 갈 길 잃은 부여의 백성들을 이끌어 하루 속히 부여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것이다. 특히 ᄀᆞᆷ나루의 고천원(高天原)은 시조 비류 천황과 소서노(召西奴) 어라하, 천조(天照) 어라하의 혼령을 모신 우리 부여인들의 성지이다. 만약 그 곳을 잃으면 우리 조상들의 혼령은 어디서 쉴 것이며, 나라의 제사는 또 어떻게 모실 것인가?” (제명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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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상상했던 것보다 사태가 훨씬 더 나빠져 있구나! 물론 내가 가야지. 가서 백성도 구하고, 고천원도 구하고, 나라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겠지.”
“천황 마마!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제가 곧 본국으로 돌아가서 당장(唐將)을 사로잡아 장안에 가 계신 아바마마와 교환하도록 하여 부여의 역사를 다시 영광스럽게 만들어 놓겠나이다.” (이상 풍장 왕자)
너무나도 기가 막힌 부여의 소식에 늙고 병들어 지친 제명천황은 깊은 충격의 늪에 빠져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조상의 혼령을 모신 ᄀᆞᆷ나루[熊津]의 신수두, 고천원(高天原)은 일본 땅에 와 있는 모든 백제인들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마음의 고향이었다. 조상들에게 제사를 모실 수 없다면, 일본 땅에 이민해온 백제인들의 뿌리가 뽑히는 것과 같으므로 매우 심각한 사태였다.
남부여 무왕(武王)의 딸로서 정략에 이용되어 일본 황실로 시집을 왔다가 남자들의 정권 싸움에 또 다시 이용되어 여자의 몸으로 일본의 여단군(女檀君)인 황극천황(皇極天皇)으로, 또 다시 제명천황(齊明天皇)으로 두 번에 걸쳐 천황위를 역임했던 풍운의 여인 보황녀(寶皇女)!
이제 68세의 늙은 몸으로 조국 남부여를 잃고, 오빠 의자대왕을 잃었으며, 그녀의 의자를 받쳐주던 ᄀᆞᆷ나루의 고천원마저 잃었으니, 그녀의 모든 것을 잃고 만 것이다.
그녀는 이제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중신들을 불러 놓고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말풍선)
“나의 사후(死後)에 태자 중대형은 천황위의 계승권을 잠시 보류하고, 부여 용(勇)과 협력하여 부여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모든 힘을 기울여 풍장의 다물 전쟁을 돕도록 하라! 어떤 고통이 있더라도 고천원을 지켜야 한다.” (제명천황 보황녀)
☯ 야뫼도[대화] 제명천황 죽고, 풍장은 남부여 다물전 전장으로
부여 풍장은 되돌아가 다물 전쟁을 이끌 것이고, 고천원을 다시 찾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풍장의 동생 부여 용(勇)으로 하여금 야뫼도[大和]를 지휘하여 모든 지원을 다하도록 했다.
만약 일본 땅에서 태어난 중대형이 천황위를 계승할 경우, 남부여의 다물전에 혹시라도 게을리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배려에서, 제명천황(보황녀)은 부여용으로 하여금 전시정부(戰時政府)를 만들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다물 전쟁에 투입하도록 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제명천황(齊明天皇)의 죽음으로 풍 왕자의 귀국길은 약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풍 왕자는 복신 장군의 조카인 다장부(多蔣敷)의 여동생과 결혼하였다. 이제 제명천황의 유언에 따라 일궁부의 왕자 용(勇)이 중대형의 도움을 얻어 천황위에 올랐고, 정부는 전시 체제로 돌변하였다. 야뫼도 측의 신정부 인사발령을 끝마친 왕자 풍은 드디어 귀국길에 올랐다.
왕자 풍장은 야뫼도 대장 아운비라부(阿雲比邏夫)와 함께 1천 명의 정예병을 뽑아 데리고 떠났다. 동생인 왕자 용이 천황위에 있고, 대신들의 대부분이 백제인인 야뫼도 정부에서 강력한 지원이 있을 것이므로, 왕자 풍의 입장에서는 어찌하든지 다물군의 힘을 하나로 모아 야뫼도의 주력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 남부여 다물군의 승전 확대와 남방 당군의 고립
야뫼도[大和]에 가 있던 풍 왕자가 야뫼도군 1천 명을 거느리고 조국의 다물 전쟁에 뛰어들기 위해 현해를 건너오는 동안 본국에서는 복신 장군의 지휘 아래 다물군의 눈부신 승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 동안 임시 수도인 주류성(周留城)을 비롯하여 임존성(任存城), 그리고 주변의 지라성(支羅城), 급윤성(及尹城), 진현성(眞峴城), 가림성(加林城), 옹산성(甕山城), 윤(尹), 대산(大山), 사정(沙井), 남곡(南谷), 정현(貞峴), 두릉(頭陵) 등을 모두 다물해 내었으므로 이제 다시 옛 부여 왕조를 일으킬 희망이 밝아 보였다.
《당시 남부여 다물군이 탈환한 성과 지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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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성(扶餘城): 당(唐)의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소재지로서 당장(唐將)유인원(劉仁願)이 점령하고 있었다.
다물군의 완전한 포위망 속에 갇힌 유인원은 할 수 없이 동맹국인 실라의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당군이 이 땅을 계속 점령하려는 눈치가 보이자, 지금까지의 동맹국이었던 실라는 당군의 고통과 희생을 지켜보면서도 그들을 부여군으로부터 구해주는 데 아주 인색하였다.
이제부터 실라는 당군을 새로운 적으로 생각하여 그들을 이 땅에서 몰아 낼 전략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니, 당군의 전력 약화를 오히려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 당군, 북방군의 가우리전선과 남방군의 남부여 다물전선 모두 패퇴
이제 나·당(羅唐) 연합군의 공격에 의하여 남부여가 멸망했다고 생각되었던 이 전쟁은 돌연 복신을 위시한 부여인들의 끈질긴 반격에 부딪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당군은 왕성인 부여성을 비롯하여 ᄀᆞᆷ나루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백마강의 하구가 주류성에 의해 차단되어 본국(당)으로부터 해상 보급을 받을 수가 없었고, 북쪽의 칠갑산과 동쪽의 계룡산이 부여에 탈취되어 숨도 쉴 수 없게 역 포위당하고 말았다.
때 마침 북방 전선으로 지원 공격에 나섰던 소정방군도 가우리 남생 군의 교묘한 용병술에 걸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어서 웅진도독부의 고통을 구해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결국 당(唐)으로서는 신라의 꾀에 빠져 쓸데없는 희생만 치르며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웅진성과 부여성으로 통하는 모든 육로(陸路)는 다물군에 의하여 철저히 봉쇄당하였고,,,,
백마강의 하구도 다물군의 철통같은 봉쇄망에 걸려서 바다로 통하는 모든 수송로마저 단절되어, 웅진도독부의 군사들은 비참한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 더 이상 실라를 동맹군으로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수만 명의 당나라 군사의 희생을 치르며 탈취한 이 땅을 포기할 수는 더욱 없었다.
드디어 모든 상황을 분석 판단한 유인원은 당왕(唐王)에게 사태를 보고하고,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미 설필하력의 북방군은 가우리의 남생 군에게 풍비박산으로 깨어졌고, 가우리의 서울 펴라를 급습해 보았던 방효태도 그의 13명의 자식들과 함께 몰살당하였다.
불과 3개월 만에 의자왕을 잡은 소정방의 신화도 지금 남펴라 작전에서 가우리군에게 역 포위당하여 굶주림에 허덕이며 그 끝이 처참하게 되었다.
이제는 믿었던 동맹국 실라도 과연 동맹국인지 아니면 이미 적국으로 변해 버렸는지 도대체 그 행동이 애매모호하였다. 결국 실라에게 속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천하제일의 대국이라고 기고만장했던 대당제국(大唐帝國)이었으나, 북방의 패자 가우리에 연전연패의 치욕을 감수해야 했고, 이제는 숨이 끊어진 줄 알았던 오랜 전통의 부여가 다시 살아나 오히려 전승국의 병사들을 곤경에 몰아넣고 있으니, 당왕 고종은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했다.
그래서 또 다시 예비군이 총동원되었고, 5만 명의 증원군이 준비되었다.
서기 662년 2월. 제1차 증원군이 옹진도독부의 유인원을 구하기 위하여 황해를 건넜고, 5월엔 제2차 증원군이 대거 파병되어 유인원 구출작전으로 변경하고 있었다.
당왕(唐王) 고종(高宗)은 제3차 증원군이 마련되는 대로 이번에는 실라마저 공격하여 그들의 배신행위를 철저히 응징하리라 맹세하였다. §
2020.6.24.편집
一鼓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