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사진: pexels.com |
전쟁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 온 공로로 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콩고 출신 의사 데니스 무퀘게는 다음과 같이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 상은 아주 큰 의미가 있는데 비록 세계가 우리를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드디어 세계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가을부터 전 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미투운동은 드디어 세계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각계각층에서 미투운동이 확산되면서 어떤 이들은 ‘과연 교회에도 미투운동이 가능할 것인가?’ 의문을 가졌고, 또 다른 이들은 기대를 품었다.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기독교여성상담소에서 ‘교회 성폭력’을 명명하고 정의한 지 20년이 되었다.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은 교회 성폭력이라 이름 붙이기 전에도 저질러지고 있었지만 교회 안에서 성폭력은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죄’였다. 고통과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피해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들은 가해 목사와 교회에 의해 쫓겨나고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난날 교회는 피해 여성들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은 어떠한가? 성폭력 피해자들이 교회에서 자신의 피해를 호소할 수 있을까? 교회는 피해자들의 호소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교회에서 미투, 위드유는 가능한가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에서는 올봄 성폭력 근절을 위한 공개 강연 워크숍을 “하나님 가라사대 #미투”라는 제목으로 진행했다. 하나님께서 성폭력 피해자들과 함께 ‘#미투’(나도 당했다)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녀들을 대신해 ‘#미투’ 하신다는 고백이었다. “나도 고발한다. 나도 이제야 힘겹게 말한다.” 교회는 피해자들을 위한 이 하나님의 호소를 들을 귀가 있을까?
교회 성폭력 피해자들의 미투에 응답하여 주요 교단 교회 여성들의 위드유 움직임이 일어났다. 성폭력 예방과 대처 매뉴얼들을 만들고 성폭력 피해자 회복을 위한 예배를 함께 드리고, 피해자 지원 시위도 했다. 교회에서 성폭력 예방교육을 의무화하는 법과 정책이 통과되어서, 성폭력 예방교육 강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사실 교회 성폭력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징계를 명시한 교회법 제정 활동이나, 교단 안에 교회 성폭력 대책을 위한 조직을 구성하자는 제안은 수년 전부터 꾸준히 해왔다. 그러나 미투운동에 탄력을 받아 이제는 그 제안이 받아들여질까 기대했던 사안들이 여전히 반대에 부딪쳤다. 반대 이유는 공식적인 기구가 설치되고 법이 제정되면 교회에 성폭력이 많이 일어나는 것처럼 인식되어 선교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다.
이렇듯 교회는 여전히 피해자들이 침묵하기를, 그 일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란다. 피해자의 고통과 호소에 귀를 막는다. 가해자일지언정 목회자가 더 귀하고 교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언컨대 2차 가해가 가장 심한 곳이 바로 교회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교회인가. 성폭력에 대한 교회의 인식은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법과 제도를 바꾸는 사람은 교단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며 그들은 대부분 남성 목회자와 장로다. 그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교회 성폭력 근절은 너무도 먼 이야기가 된다.
성폭력 예방교육, 무엇을 교육하는가 그런 차원에서 성폭력 예방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그간의 성폭력 예방교육이라 하면 여성들을 대상으로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하는’ 교육이었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조심하며, 싫다고, 아니라고 말하는 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교육은 성폭력이 일어났을 때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빌미로 작용하기도 했다. 왜 조심하지 않았나, 왜 거부하지 못했나를 묻는 2차 가해가 발생한 것이다.
요즘은 좀 달라졌다. 특히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은 가해자가 되지 않는 교육, 즉 어떤 행동이 성폭력(성희롱)인지 학습시키고 성폭력 가해자가 되지 않는 쪽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남성들의 반발이 심하다. 남성들이 속한 그룹에서 교육을 할 때면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과 반발이 “왜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하는가?”이다.
성폭력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죄를 범할 수 있다. 남성 여성을 떠나 우리는 모두 잠재적 가해자다. 어떤 형태로든 힘을 가진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상처를 줄 수 있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힘의 논리가 적용되는 철저히 위계적인 사회다. 위계 사회에서는 힘 가진 이들이 하는 어떤 행동들은 힘없는 이들에게는 곧 폭력이다. 힘을 갖지 못한 이들은 피해를 입고도 항변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갖기 어렵다. 힘 있는 이들은 스스로 성찰하지 않으면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히고 상처를 주고도 알지 못한다. 성찰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가해자가 된다. 그렇기에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과거 형법에 성폭력은 ‘정조에 관한 죄’로 분류되어 있었다. 성폭력 피해자는 정조를 잃은 것으로 여겨, 죄는 가해자가 졌음에도 오히려 피해자가 수치를 겪었다. 그러다 1995년 형법 개정을 통해 ‘강간과 추행의 죄’로 제목이 바뀌었는데, 성범죄 처벌 규정으로 보호하려는 대상이 ‘정조’가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자신과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기본적인 권리로서 “개인이 사회적 관행이나 타인에 의해 강요받거나 지배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지나 판단에 따라 자율적이고 책임 있게 자신의 성적 행동을 결정하고 선택할 권리이다.”
누구든 어떤 성적 행동에 대해서 상대방의 동의를 분명하게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성폭력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의 인식은 성폭력 법을 적용할 때 ‘(의미 있는) 동의’를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가해자의 물리적 폭력이나 피해자의 저항 유무로 범죄 유무를 가늠하려는 경향이 크다. 이런 인식의 차이 때문에 해결이 어려워진다.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는 것은 이 인식 차이를 줄이기 위함이다.
성폭력 예방교육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기본 권리를 배우는 일이다. 타인과 관계에서 친밀성을 유지하면서도 어떻게 경계선을 지킬 수 있는지, 어떻게 좋고 싫음을 스스럼없이 표현하고 동등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지를 배운다. 존중과 소통은 평등한 관계에서 가능하다.
특히 성폭력 예방교육에서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성차별에 주목한다. 성폭력 가해자의 대부분이 남성이고 피해자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성적으로 불평등하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권위적이고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폭력이 쉽게 용인된다. 성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여성은 쉽게 대상화되고 착취당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매스컴에 오르내린 성폭력 가해 목사들은 피해 신도들에게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했다. 그들은 교회에서 가부장적 권위를 성적으로 남용했다.
|  | | ▲ 성폭력 가해 목사들은 피해 신도들에게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으며, 교회 안에서 가부장적 권위를 성적으로 납용했다. (사진: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페이스북) |
교회에서 하는 성폭력 예방교육 교회에서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는 경우 평등 교육뿐 아니라 성교육이 포함되어야 한다. 성교육은 성에 대한 가치관과 윤리 의식 등을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장이다. 한동안 교회에서 성교육이라 하면 ‘혼전순결교육’이 전부였다. 혼전순결서약식이 유행처럼 번졌다가 많은 부작용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청소년들로 하여금 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해주고 가치관을 함께 고민하기보다 오히려 성에 대해 억압하고 죄책감만 심어주는 부정적 영향을 남기고 말았다.
이제 교회는 성에 대해 혼란 상태가 된 듯하다. 성윤리라는 것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지켜나가는 일, 자신과 상대방을 존중하고 관계의 신의를 지키는 일, 몸과 영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일 등 기독교 성교육에서 익히고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은데 그동안 교회는 그 책임을 방기했다.
화장실 불법 촬영, 청소년 성매수, 데이트 성폭력, 온라인 성희롱 등 최근 신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폭력, 성적 비행 사건들을 접하면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성에 대한 어떤 잣대도 갖지 못한 채 청소년기를 보내고 신학교에 와서 아무런 성찰의 기회도 없이 목회자라는 권위를 갖게 될 때 그들이 어떻게 자신과 신자들을 성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지켜갈 수가 있을까. 교회에서 성적인 가치관을 논하고 성윤리를 구축한다는 것은 매우 영적인 일이다. 성과 영성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 내가 속한 교단은 성폭력 혐의가 있는 목사가 감독에 당선되어 매우 혼란스런 상황에 처했다. 이번에 당선된 감독들 중 성폭력까진 아니더라도 성 문제에 연루된 감독이 몇 명 더 있다는 소문도 돈다.
실제로 교회나 목회자 그룹에 성폭력 예방교육을 나가 보면 목회자 성폭력 또는 성적 비행에 대한 구체적인 제보를 여러 건 받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자정 능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치리할 의지도 능력도 없고, 무엇보다 영적인 권위를 상실했다.
미투의 영성 미투운동을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고 말하면 지나칠까? 미투운동은 ‘듣는 일’이다. 들어 주는 이가 없으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과 온몸을 다해 듣는 일은 공감과 자비를 행하는 일이다. 그것은 애초에 교회의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는 늘 하나님을 들어야 한다. 약한 자의 신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 고통당하는 이와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을 들어야 한다. 형제 자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들어야 한다. 온몸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들어야 한다.
온 마음과 온몸을 다해 듣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경청할 때는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내 생각이나 판단을 갖고 있을 때는 상대방을 들을 수 없다. 내 감정이나 욕구도 내려놓고 상대방에게 온전히 집중해야 들을 수 있고 그럴 때 공감이 가능하다. 결국 듣는 일은 자기를 비우는 일이다. 자기 비움, 이것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하신 일이다. 예수님은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온몸으로 들으시고 몸을 던져 응답하셨다.
미투운동에 동참한다는 것은 제자 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목소리조차 낼 수 없이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온몸으로 듣는 일이며, 이것은 자기 비움의 실천이다. 그렇기에 교회 성폭력 피해자에게 귀를 기울이는 일은 영적인 일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다. 온전히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온전히 받아 모시고 그의 다스림 안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일이다.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들어가는 일은 하나님 외에 어떤 존재도 나를 통제하거나 다스릴 수 없음을 고백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모든 이가 평등하고 평화로운 나라이다. 그 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다.
치유와 화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교회의 성폭력근절운동과 예방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 과제로 선포되어야 마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치유와 화해로 드러난 바, 구체적으로 성폭력 피해자의 치유와 교회 공동체의 치유 그리고 가해자의 교정과 치유에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고려하고 실천해야 할 일이 있다.
우선, 피해자의 말을 비판 없이 들어 주고 피해자 편이 되어 함께 있어 주는 일, 전문적인 치유와 돌봄을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한다.
둘째, 성폭력 피해가 발생한 교회 공동체의 치유와 화해를 위해서도 힘써야 한다. 전체 회중으로 하여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히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폭력 예방교육을 공식적으로 실시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피해자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가 갈등과 혼란을 겪고 있으므로 중재와 회복을 위해 전문가를 파송하여 일정 기간 공동체와 교인들을 돌아보고 교인들이 스스로 공동체를 새로이 세워 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
마지막으로, 가해자가 잘못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고 대가를 치르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바로 알고 잘못된 행위에 책임질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정의가 구현되어야 진정한 치유와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통치자가 되시며, 영적 지도자의 권위는 오직 위임받은 힘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권력 가진 자의 경건 생활은 필수다. 힘의 불균형과 힘의 남용은 불의이며, 그런 불의한 교회 구조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교회 성폭력 근절과 예방 운동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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