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08월 08일 수요일 / 인천국제공항(仁川國際空港) 내몽고(內蒙古) 향발
* 오후 7시 30분 인천국제공항 집결 - 인원 점검 및 출국을 위한 제반 업무
* 오후 9시 20분 인천국제공항 이륙 (대한항공 KE 9865 전세기)
▶밤 11시 중국 네이멍구자치구(內蒙固自治區) 후허하오터(呼和浩特) 국제공항 도착
2007년 8월 8일, 중국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후허하오터(呼和浩特)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 11시였다.(중국시간 밤 10시) 몽고의 남부지역인 이곳은 1947년 8월 8일에 중국의 네이멍구자치구로 편입되었다. 그래서 오늘이 바로 그 역사적인 60주년 기념일인 것이다. 후허하오터 국제공항은 자치구 성립 60주년에 즈음하여. 모든 공항 시설을 새롭게 건설하여 일주일 전에 개통하였다고 한다. 후허하오터(呼和浩特)는 몽골어로 ‘푸른 성(城)’이라는 뜻이다. 옛날 초원의 한 마을이 중심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몽골의 문화적 역사적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 곳, 지금은 현대적인 건물과 고층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르며,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 공항의 입국 수속에 2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처리가 서투르기도 하지만, 아직 손님을 배려하는 마인드가 갖추어 지지 않았고,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慢慢的)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참으로 지루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 공항에는 현지 가이드인 두 아가씨가 몽골 전통복장을 하고 우리를 맞이했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공항을 나오니 네이멍구(內蒙古)의 밤은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숙소인 홀리데이인 호텔(Holyday Inn Hotel, 假日酒店)에 도착하니 현지시각으로 새벽 1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 2007년 8월 9일 목요일 : 몽골의 대초원(大草原)에서
▶ 몽골 대초원을 향하여
- 오전 09:00 홀리데이인 호텔 1층의 뷔페식당에서 조식(朝食)을 한 후, 짐을 꾸려서 준비된 버스 편으로 내몽고 대초원으로 이동하였다.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101번 도로를 따라 인산(陰山)산맥의 큰 고개를 넘었다. 내몽고의 시골 소도시인 무천(武川)을 경유하여 거근타라(格根塔拉) 대초원의 한 마을(관광촌)에 도착했다. 그 곳에 이르는 연도(沿道)의 산야는 비가 거의 오지 않은 탓인지 건조한 토사암반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어디를 가도 냇물마저 메말라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 ‘투리걸’이라는 초원의 마을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경, 차에서 내리니 몽골 전통복장을 한 처녀와 총각이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우리를 환영한다. 작열하는 태양의 불화살 속에서, 차에서 내리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술을 한 잔씩 권하는 의식이다. 긴 비단포를 손 위에 얹고 그 위의 술잔에 술을 부어 한 잔씩 권한다. 우리는 가이드의 사전 가르침대로, 엄지와 무명지를 모아서 술을 찍어 튕기듯 하늘에 한 번, 땅에 한 번 뿌리고, 그리고 술을 권한 처녀의 이마에 한 번 찍고 단숨에 마셨다. 만남의 기쁨을 하늘과 땅에 감사하고 환대하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의미라고 했다. 오늘은 초원에서 일박(一泊)을 하게 되므로 숙소를 배정받았다. 몽골의 전통가옥인 겔이었다. 2인1실, 두 개의 침대와 화장실, 샤워장이 곁들여 있는 현대식 겔이었다. 한 가운데 징키즈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 거근타라(格根塔拉), 몽골의 대초원(大草原)
- 점심 식사, 끈기 없는 쌀밥과 양고기 특유의 노린내가 풍기는 현지식으로 식사를 한 후, 일부의 사람들은 현지 민속마을 탐방하고 우리 일행 몇몇은 초원을 트래킹했다. 그 동안 말로만 듣던 몽골초원, 장대하고 완만한 둔덕이 둔덕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물결이 넘실거리듯 광활한 대지였다. 연중 강수량이 아주 적어 건조하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초원에는 흙바닥 위에 엉성한 풀포기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질긴 생명력이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대초원의 푸른 풀밭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광활하게 펼쳐진 시계(視界)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에서 아득한 지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날씨는 뜨거웠다. 순백의 구름이 유유히 떠가는 하늘은 원색의 파란 빛깔로 눈이 부셨다. 비록 보기에 엉성한 풀밭이지만, 군데군데 양떼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끊임없이 풀을 뜯고 있었다.
- 모든 시간이 정지된 듯한 한가로운 초원의 한 복판에서 나는 뭔가 허전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득한 지평선, 그 한 가운데 서 보니 ‘저기 풀을 뜯는 한 마리의 이름 없는 한 마리의 양이나 내가 뭐가 다를 것인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보란 듯이 사는 우리들 일상이 그냥 아련할 뿐, 주위에는 나와 아무 것도 연관되는 것들이 없는 대지의 한 복판, 존재의 고독이 강하게 느껴지는 광야이다. - ‘사랑한다!’ … 저 티 없이 맑고 투명한 하늘빛과 아득한 대지 앞에서, 하나의 작은 생명의 목소리로 조용히 되뇌어 본다. 완만하고 밋밋하게 이어지는 언덕과 언덕을 타고 넘으며 하늘의 구름과 초원의 바람을 가른다. 아아, 대초원(大草原)이여, 이 원시의 공간에 홀로 서니 인간의 오욕칠정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고 많은 인간의 욕망도, 문명의 어떤 우쭐한 멋도 다 무색해지는 이 원초적 공간에서 인생, 가장 절절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것마저 저 초원의 지평처럼 요원한 그 무엇일 따름이었다. 실존의 아픔이 온몸이 저리게 다가왔다.
어느 날 내가 눈을 떴을 때
사방이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놀랐다
어떻게 사방에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지평선의 충격은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데 아득한 곳에 선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직선이 아니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커다란 선은 둥글었고
그 텅 빈 원 속에
원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 최승호의 시 「지평선」중에서
▶ 초원에서 말타기
- 오후 5시, 초원(草原)에서 말 타기를 했다. 나는 일행 중에 제일 먼저 말 위에 올랐다. 누런색이나 흑갈색이 대부분인 말 가운데서 하얀 갈기를 멋스럽게 휘날리는 백마(白馬)를 골라서 올라탔다. 여성을 포함하여 대부분이 초보자이므로 붉은 비단의 전통복장을 한 원주민이 전후좌우에서 행렬을 인도하고 말을 이끌어 주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이내 말고삐를 넘겨주었다. 오래 전 제주도 여행에서 말 탄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말타기에 금방 적응되었다. 약 2~3km 정도 떨어진 원주민 마을을 왕복하는 여정인데, 중간 이후부터는 제법 속도를 내며 달릴 수 있었다. 말타기는 매력적인 운동이다. 두 발을 등자(鐙子)에 고정시키고, 오른 손 말고삐로 말 엉덩이를 내리치니 말이 발걸음을 가볍게 움직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말이 요동칠 때마다 엉덩이를 살짝 들고 움직이는 말 등의 리듬을 맞추어 달리니 아주 경쾌한 기분으로 속력을 낼 수 있었다. 광활한 초원에서의 승마! 얼마나 기대했던 일이었던가. 그 통쾌한 기분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늘 답답하고 비좁은 느낌으로 사는 우리들 도시인의 삶을 생각하면, 이렇게 거리낌 없이 내달릴 수 있는 초원의 질주는 참으로 즐겁고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를 달렸을까. 몇 개의 언덕을 넘어가니 집 한 채가 있었다. 가축을 사육하기도 하지만 관광객들을 상대로 부업을 하고 있었다. 집 옆의 초원에선 몽골 전통의복을 빌려주거나, 순하고 털이 뽀얀 새끼 양을 빌려 주고 사진을 찍게 한다. 물론 유료다. 필자도 새끼양이 하도 예뻐서 녀석을 안고 두어 방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리고 원주민 집에 들러 양젖을 발효시켜 만든 차와 치즈 과자 등 간단하게 다과를 대접받았다. 해가 서쪽 언덕 가까이 기울기 시작할 무렵 귀로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서의 말타기는 제법 자신감이 붙어 아주 유연하게 달릴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속도감이 붙으니 그 상쾌한 기분을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기분이 호쾌하여 소리 내어 환호했다. “야~! 와~! 오와~ 우우!” … 출발점에 다시 돌아왔다. 말에서 내리기가 아쉬웠다.
▶ 대초원을 물들이는 저녁노을
- 서쪽 언덕 위에 뽀얀 구름이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옆으로 퍼진 새털구름 사이로 태양은 온 하늘을 선홍빛으로 물들여, 그 빛살이 워낙 강렬하여 눈을 바로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선도 높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붉은 기운이 천지에 가득했다. 초원 한편에서는 관광객을 위한 마장마술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늘 밤 초원에서 유숙하는 모든 관광객들이 나와서 구경을 했다. 약 10여명의 원주민 기수(騎手)들이 말을 타고 나와 유목민 특유의 능숙하고 능란한 기술로 경주를 벌이기도 하고, 말을 달리며 말 옆으로 몸을 내려굽혀 땅에 놓인 돈을 주워 올리는 재주 등 갖가지 묘기를 보였다. 환호가 터져 나오고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왁자한 가운데 초원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작열하던 8월의 태양도 저 능선 너머로 그 자취를 감추고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가며 사위는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 저녁식사는 ‘수바루’, 몽골 전통의 양고기 찜 요리였다. 그리고 밥을 곁들여 양고기 감자탕 등 몇 가지 다양한 요리가 원탁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비위가 약한 분들은 집에서 가져 온 김이나 김치, 고추장 등을 곁들여 먹기도 하고 어떤 분은 컵라면 하나로 어려운 고난(?)을 극복하고 있었다. 필자 또한 입맛이 썩 내키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 중에는 현지의 모든 문화를 몸으로 부딪쳐 보아야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는 평소의 생각대로 주어진 음식을 주저 없이 먹었다. 전혀 다른 풍토 속에서 이루진 음식 문화이므로, 그것이 수천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오면서 형성된 그 특유의 향내(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그들도 이 음식을 먹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면 결코 못 먹을 것은 아닌 것이다. 오늘은 우리 일행 이외에 중국인, 일본인들이 함께 겔 식당 안에서 여러 개의 원탁의 테이블에 나누어 앉아 식사를 했다.
▶ 초원(草原)의 밤, 뜨거운 열기의 캠프 파이어
- 그리고 양고기 바비큐 파티! 잘 구워진 양 네 마리가 중앙의 식탁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촌장인 듯한 분이 몽골복 정장차림으로 나와 의식을 진행했다. 양고기를 나누어 먹기 전에 치루는 전통 의식인 것 같았다. 희생된 양의 혼(魂)을 달래는 것인가. 그가 주문(?)을 외며, 각 팀에서 대표로 나온 사람으로 하여금 양(바비큐)을 향하여 술을 들어 올린 후 절을 올리기 하고, 그 술을 마시면 주례자가 고기 한 점을 베어서 절한 사람의 입에 넣어 준다. 몇 사람을 번갈아 가며 네 마리의 양을 위하여 진혼식을 거행하고 난 후, 바베큐는 여러 토막으로 나누어 각 테이블로 분배되었다. 물론 48도 빼주(牌酒, 빼갈)가 더불어 날아다니고, 주최 측에서 준비한 가무단이 노래와 춤을 곁들이니 그 여흥이 고조되어 갔다. 그들의 노래는 애절하면서도 어쩌면 흥겹게도 들리는 초원의 가락이었다. 그들의 열정적인 노래는 만장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전통복의 예쁜 몽골 아가씨가 식탁을 순회하며 술을 따르기도 했다. 우리 일행 중 몇몇 분이 앞으로 나가서 춤을 추었다. 그 중에 조원의 K교장 선생님은 못 말리는 기분파인 듯했다. 방현의 M교감도 애교스런 몸짓으로 춤을 추었다. K 교장은 반주기기에 ‘아리랑’을 신청하고 온 몸으로 열창함으로써, ‘아리랑’을 몽골초원에 데뷔시키고, 장내의 분위기를 한층 고양시켰다. 그리고 또 “베이징 올림픽, 파이팅!”을 외쳐 중국인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 칠흑같이 캄캄한 밤, 초원의 캠프 파이어! 불은 사람을 흥분하게 만든다. 불은 사람의 마음을 원초적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고 뜨거운 내면의 용암을 폭발하게 만든다. 겔 촌의 한 가운데 광장에 캠프 파이어가 마련되어 있었고, 젊은 청년 가무단이 역동적인 춤을 추면서 화려한 점화식을 거행했다. 불은 인간의 감성에도 불을 질렀다. 늘씬하게 잘 생긴 몽골청년의 사회로 흥겨운 노래와 춤이 공연되었다. 집단가무는 몽골의 전통춤이 아닌 발랄한 몸짓의 디스코 스타일이었다.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진홍색 비단의 몽골 전통의상을 입은 얼굴이 희고 예쁜 소녀가 등장했다. 그 유연하고 아름다운 춤사위는 단연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모았다. 먹이를 본 짐승들처럼 사내들이 그녀의 주변에 몰려들어 몸을 흔들기도 했다. 디스코 스타일의 음악이 고음으로 터져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으로 쏟아져 나와 자기 스타일의 춤을 추고 희락하며 아우성이다. 괴성이 터져 나오고 광기어린 몸짓과 뜨거운 열정이 초원의 밤을 뒤흔들고 있었다. 부루스곡이 나오면 그 방면에 능숙한 청춘노소 남녀가 어울려 그윽한 춤사위로 즐거움을 나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광란의 춤, 그 중에서도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앳되게 생긴 원주민 소녀가 섹시 스타일의 격정적인 춤을 추고 나왔다. 아주 날렵하고 세련된 춤사위였다. 그때, 빙 둘러선 사람 속에서 운동모자를 눌러 쓰고 연둣빛 티셔츠를 입은 한 사나이가 앞으로 치고 나갔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듯도 한데 운동모자를 눌러쓴 관계로 정확하게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터지는 음악은 격정적이었고 그의 춤은 역동적이었다. 몸의 분위기로 보아 오래 전에 많이 추었던 세련된 춤이었다. 유연하고 놀라운 춤 솜씨였다. 온몸을 떨고 흔들고 치고 빠지고 찌르고 당기고 때리고 솟는다. 음악은 끝날 줄 몰랐다. 사나이는 숨이 목에 차오르는 듯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원주민 소녀는 가볍고 날렵한 몸매만큼이나 경쾌했다. 만인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힘차고 능숙하게 춤추는 사나이를 본 어느 외국인 여성이 좇아 나와 사나이의 모자를 뒤로 돌려 씌웠다. 얼굴 좀 보자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몰려들었다. 이 대목에서 그만 둘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춤은 거의 20분에 가깝게 계속되었다. 그것도 전신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혼신의 춤이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힘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뒤 한참 동안 이어지는 춤판은 그의 역동적이고 발랄한 춤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멋지고 아름다운 앙상블이었다. 원초적인 감성이 뜨겁게 피어나는 초원의 불꽃, 그것은 대지의 뜨거운 열락이었고, 인간의 또 다른 절규 같은 몸짓이었다.
▶ 대초원(大草原)의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
- 캠프 파이어를 끝내고 겔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우리는 옷을 따뜻하게 갈아입고 초원으로 나갔다. 한 여름이지만, 초원의 낮은 뜨겁고 밤은 추웠다. 건조하고 일교차가 큰 것이 기후의 특징이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초원의 별 바라기’는 여행 전부터 기대했던 일 중에 하나였다. 룸(겔50동) 메이트인 H과 바로 옆 동(棟)의 K공의 S선생, 그리고 한 동 건너 47동에서 오늘밤 동숙하는 S관광고의 B샘과 S여중의 Y샘이 동행했다. 일행은 언덕을 넘어 겔 촌의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은 곳까지 나아갔다.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무인지경이었다. 어두운 초원의 풀밭 위에 다섯 명이 자리 잡고 앉았다. 사위는 깜깜했다. 어두울수록 별은 빛난다. 이제 하늘의 별들이 제 빛의 질량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큰 별, 작은 별, 때로는 띄엄띄엄, 때로는 촘촘하게 온 밤하늘에 가득하고, 우리들의 이마 위로 그 수많은 별들이 자욱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 한 가운데를 가로지는 별무리의 줄기가 바로 ‘미리내’, 그 은하수가 아닌가. 사방의 지평선이 검은 실루엣으로 깔려 있고 그 위의 검푸른 밤하늘에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이 또렷하게 빛나고 있다. 그 맞은편에는 W자 모양의 카시오페아 오성(五星)이 반짝인다. 그 두 성좌 한 가운데 북극성(北極星)이 중심을 잡고 있으니 그 곳이 우리 지구의 정북(正北)이 될 것이다. 북극성은 우리나라에서 볼 때보다 훨씬 지면에 가깝게 내려앉아 있었다. 우리나라와는 위도와 경도상의 위치가 달라서 그렇겠지만, 여기에선 별들이 한층 가깝게 다가와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렇듯 선명한 명도 대비가 어찌 하늘의 별빛만이겠는가. 우리 도시인들은 이미 오래 전에 별을 잃어버렸다. 문명의 현란한 불빛 아래에서 서로 서로 뜨거운 욕망의 간(肝)을 꺼내놓고 살다보니 어디 별 따위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자연성을 상실한 인간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했던 고향의 별빛도 우리들의 뇌리에 아득하지 않은가. 문득 ‘자연의 순수성을 상실한 인간은 결국 죄악과 파멸이 이른다’고 한 장자크 루소의 말이 떠올랐다. 별밤이 아름답다. 저렇듯 광대무변한 우주 공간에도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 차 있다.
- 나는 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밤하늘에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별이 있듯이, 지상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늘의 별처럼 지상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하나의 별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 멀리 있는 사람 모두 나와 더불어 빛나는 하나의 별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제 몫의 빛과 존재의 무게를 지니고 있지요. 부모, 자식, 형제, 친지, 동료, 스승, 제자, 친구… 모든 사람이 다 나의 별인 것이다. 나도 하나의 별이니, 그대 또한 소중한 존재의 별이다. 오늘 밤 별을 바라보며 나를 둘러싸고 있는 멀고 가까운 존재의 별들을 생각해 본다. 그 별들이 있음으로 하여 나 자신 또한 빛날 수 있음이니 다시 한 번 그들을 소중하게 아끼고 사랑하며 더불어 그들을 위하여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
- “어머, 저기, 별똥별이 떨어지네!” Y샘이 경이로운 목소리로 탄성을 질렀다. B샘이 말했다. “떨어지는 별을 바라보며 자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데요.” 소녀 같이 순정한 목소리가 아름다웠다. 내가 말했다. “이쯤 되면 아름다운 청년 윤동주의 시심이 아닐는지요.” 별 하나에 소망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소중한 사람을 담는 마음, 야심한 대초원의 한 가운데서 잠시나마 얻은 순수성을 생각하며 유객(遊客)의 허전한 마음이 충만해 왔다.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초원의 별밤을 가슴에 담고, 생애 최초로 초원의 겔에서 잠이 들었다.
▶ 대초원에서 맞이하는 <일출(日出)>의 장관
- 새벽 05:30분에 기상했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서다. 사위는 아직 캄캄했다. 몇몇 사람들도 겔 문을 열고 나왔다. 어제 별 바라기를 했던 다섯 명도 어김없이 초원으로 나왔다. 해 뜨기 전 초원은 쌀쌀했다. 진한 어둠 속에서 동쪽의 완만한 언덕으로 올라갔다. 밤새 이슬이 내렸는가. 땅바닥이 촉촉한 느낌이었다. 하늘을 보더라도 비가 내렸을 리는 없었다. 얼마를 지났을까. 저 멀리 지평선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대초원의 새날이 열리는 여명(黎明)이 시작되고 있었다. 워낙 건조한 시공이라 하늘은 맑고 쾌청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지평선 위로 붉은 기운이 서서히 짙어지기 시작했다. 선선한 바람결이 옷깃에 스며들어 왔다. 초원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전신주 하나가 실루엣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그것이 또 다른 분위기의 풍경이긴 해도 해돋이를 보는 데는 장애물이므로 전신주를 지나 앞으로 나아갔다. 밝은 햇살이 부챗살처럼 지평선 위로 뻗쳐오르기 시작한 뒤 얼마 안 있어 눈썹같이 빠알간 태양의 윗부분이 수줍은 듯 고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원융한 그 실체를 밀어올렸다. 눈이 부셨다. 지평선 위로 깨끗하게 떠오르는 일출의 광경을 바라보기는 난 생 처음이다. 동해의 해맞이는 바다의 운무로 인해, 지리산 천왕봉의 일출은 운해로 인해 늘 제대로 그 모습을 보지 못했었다. 오늘은 그 아쉬운 기억이 말끔히 사라졌다. 카메라를 가지고 나온 최창수 님과 스스로 사진전문가라고 말하는 조원의 K교장 선생님이 여러 컷의 해돋이 사진을 찍어 주었다. 사실 진정힌 해돋이는 지평선 위에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심평선(心平線) 위에 떠오르는 것을 … .
▶ 대초원의 질주, 아침 공기를 가르다
- 아침 06시 30분, 대초원의 신선한 아침공기를 가르며 달리기를 했다. 8시 아침 식사 시간까지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으므로 우리는 초원의 아침 마라톤을 하기로 했다. 대학 동기인 룸메이트 K는 마라톤에 심취해 있는 친구였다. 알고 보니 지난 4월, ‘2007-아디다스 MBC 한강마라톤’에서 나와 같이 뛰었었다. 언뜻 본 것 같기도 한 유니폼의 ‘하남시 헐레벌떡’이 자기가 속해 있는 마라톤 클럽이라고 했다. 둘이는 금방 의기투합했다. 조금은 쌀쌀한 바람결이었지만, 둘이는 산뜻한 마라톤 복장으로 갈아있고 초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의 따스한 온기가 등에 내려앉았다. 처음엔 추위를 걱정했으나 언덕 위를 달려 오르다 보니 금방 온몸이 훈훈해지고 얼마 안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해를 등지고 서쪽 언덕으로 올라가 겔 촌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아오기로 하고 초원을 내달렸다. 여느 때하고 다른 신선하고 색다른 질주의 체험이었다. 그런데 다른 때하고는 달리 오늘은 숨이 매우 많이 차올랐다. 여기가 해발 1,000m의 고원지대이기도 하지만, 연일 음주한 탓도 있고, 간 밤 잠이 부족한 때문일 것이다.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오니 약 5km 정도는 달린 것 같았다. 뛰고 나니 기분이 매우 좋았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아침 식사를 했다. 삶은 계란과 빵, 우유 그리고 스프와 같은 국물로 된 간단한 초원식이었다. 입맛은 전혀 아니었지만 하루의 여정을 생각하여 열심히 먹어두었다.
▶ 다시 후허하오터시를 향하여
- 일행은 아침 9시에 모여 전체 기념 촬영을 끝내고 어제 온 길을 따라 다시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로 이동했다. 몽골초원의 한 복판을 가로질러 오면서 이 광활한 땅의 척박한 생명성을 생각하며 많은 아쉬움을 느꼈다. 연간 강우량이 충분하지 않아 초원은 그렇게 싱그럽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몇 십리를 달려야 한두 집 보이는 초원의 풍경이 너무나 쓸쓸한 삶을 연상케 했다. 저 기약 없이 막막한 초원에서 양떼를 키우며 살아가는 사람들, 사람 만나기가 그리 쉽지 않는 생활 구조가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생의 시간에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처럼 삶도 또한 아득하게 느껴졌다.
▶ 청대(淸代)의 <장군아서(將軍衙暑)>
-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로 들어오니 오전 11시 30분이었다. 일행은 곧바로 청대(淸代)의 <장군아서(將軍衙署)>로 직행했다. 청(淸)나라 조정은 북쪽 변방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하여 베이징(北京)에서 장군과 군사를 파견하여 이곳을 다스리게 했다. <장군아서>는 이 지역을 다스린 장군의 군영이고 관아(官衙)였다. 무려 132간이나 되는 방대한 규모로 지어진 집인데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청대의 가옥 구조나 가구 생활의 소도구는 물론 벼슬아치들의 관복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정사(政事)를 보는 중앙의 정청(政廳)을 비롯하여 대장군 부부의 거실과 침실, 그리고 서재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결국 중국(淸)나라 중앙정부가 변방의 몽골족을 다스리기 위하여 끊임없이 진력한 유적이었다. 원래 이 땅의 원주민인 몽골족은 지금 자치구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형식적인 자존을 지켜 나갈 뿐 모든 경제의 중심은 주민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漢族)이 잡고 있다. 도시의 모든 간판은 상단에 작은 크기의 몽골어로 표기하고, 그 아래 크게 한자로 명기해 놓았다.
- 오늘 점심은 호시(呼市) 당위원회 앞, 청성항(靑城巷)에 위치한 <香猪坊>(일명 ‘돈카페’)라는 한식집에서 삼겹살을 구웠다. 삼겹살은 그 두께가 종이 장처럼 얇아 한 접시를 구워도 먹을 것이 별로 없었다. 몇 점 상추에 쌈을 싸서 된장찌개를 곁들여 공기밥 하나를 비웠다.
▶ <왕소군(王昭君)의 묘(墓)>
- 식사 후 일행은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 남서쪽 6km 쯤 되는 지점에 위치한, 중국 역사상 4대 미녀 중의 한 사람인 왕소군의 묘(墓)를 찾았다. 묘는 그 높이가 무려 180m에 이르러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왕소군(王昭君)은 중국 한나라 말[前漢末] 원제(元帝)의 궁녀로서 흉노(匈奴)와의 친화정책을 위해 흉노의 왕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강제로 시집을 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전한의 원제는 자신의 시중을 들 궁녀를 선택할 때 화공이 그린 초상화를 보고 채택 여부를 정했다고 하는데, 궁녀로 채택되길 원하는 많은 여인들이 화공에게 뇌물을 주곤 했다. 그런데 오직 왕소군만이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를 괘씸하게 생각한 화공이 그녀의 모습을 아주 추하게 그려 황제에게 바쳤다. 그녀는 물론 궁녀로 선택되지 못했고, 후에 흉노에서 여인을 요구했을 때 뽑혀 보내졌다. 후에 원제가 그녀의 실물을 보고 그 절세(絶世)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안타까워했으나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원제는 크게 후회하고 그녀를 그린 화가 모연수를 참형에 처했다. 강제로 떠나간 왕소군은 말 위에서 비파를 뜯으며 원한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때 왕소군이 부른 노래의 내용이 '왕소군원가(王昭君怨歌)'라는 가사로 전해져 많은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렸다. 이 왕소군 묘는 가을이 되어 모든 풀들이 누렇게 변해도 이 무덤의 풀만은 파랗게 그래도 있어 '청총'(靑塚)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점차 전설화되어 후세에 널리 퍼졌고 시와 희곡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억울하게 흉노에게 시집을 가 비운의 삶을 산 그녀의 역사적이고도 드라마틱한 슬픈 이야기는 중국이 오랑캐들을 달래기 위한 화친정책 때문에 생긴 비극이라 할 수 있겠다. 인생의 무상이 어디 멀리 있는 것인가. 저렇듯 푸른 무덤 하나로 남은 인생, 살아 있음으로 당신은 지금 아름답다. 아아, 고운 얼굴이여!
* 저녁 6시, 저녁식사 시내 <科牛貴賓樓(과우귀빈루)>(3층)에서 : 쇠고기·양고기 샤브샤브
□ 2007년 8월 11일 (토요일) :
▶ <고비사막>과 <징키즈칸릉(陵)>을 찾아서
- 아침 8시 정각, ‘홀리데이인 호텔’ 출발, 일행은 서둘러 원행(遠行) 길에 올랐다. 고비사막과 징키즈칸릉(陵)을 관람하기 위해 왕복 600km가 넘는 장거리를 달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 버스는 호시(呼市)에서 경납고속(京拉高速)을 타고 내몽고 3대 중공업 도시인 바오더우시(包頭市)까지 내달렸다. 이 도로는 베이징(北京)에서부터 출발하여 내몽구자치구의 동서를 관통하는 고속도로이다. 우리 일행이 고비사막이 있는 서쪽 바오더우시을 향하여 달리는 130여 km 내내, 도로의 오른쪽은 인산산맥(陰山山脈)의 장대한 줄기가 나란히 달려가고 있었다. 내몽고 한 가운데 위치하여 동서로 뻗어있는 해발 2,000m의 장대한 산줄기이다. 산은 나무 한 그루 없는 거대한 회갈색의 험상궂은 암괴(巖塊)가 대맥(大脈)을 이어가고 있었다. 결코 나무가 자랄 수 없는 산이었다. 그 삭막함이란!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그냥 가만히 있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어느 산비알에는 ‘환청산(還淸山)’(푸른 산을 만들자!)이란 구호를 큰 글씨로 새겨놓고 산록의 아래쪽, 도로 주변에 나무를 심어가고 있었다. 척박한 땅이지만 계획적인 조림사업은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바위산을 푸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인산산맥 아래 고속도로의 좌측은 광활한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도 가도 끝없는 옥수수 밭이었다. 일행은 고속도로 합소해복무소(哈素海服務所, 註 휴게소) 에서 잠시 쉬었다가 일로 질주해 갔다. 버스는 ‘포두동(包頭·東)’ 나들목[立交]에서 국도로 내려갔다.(am 09:25) 그리고 바오더우(包頭)시 외곽의 늪지대 한 가운데로 난 국도를 따라가다가 다시 고속[包武高速] 도로로 진입했다. 얼마를 가지 않아 버스는 황하대교(黃河大橋)를 건너고 있었다.(황하 T.G. am 09:50) … 아아, 고비사막에서 발원하는 황하는 한강만큼이나 큰 강폭에 누런 황톳물이 넘실거리며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고비사막의 황사를 실어가는 강물이니 한결같이 누런 색깔이다. 오죽하면 ‘백년하청(百年河淸)’이란 말이 생겨났겠는가. 그러나 ‘黃河母親’(황하모친), 중국인들은 황하를 이렇게 부른다. 그들에게는 어머니의 강이다.
얼마가지 않아 관전방(關磚坊) 나들목에 이르러, 차는 허술한 지방 국도로 내려섰다. 드디어 고비사막의 모래 언덕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버스는 철로 아래 차 한 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협소한 굴다리를 지나 약 3분 정도 들어가니 고비사막에 다다랐다. 오전 10시 30분, 입구에는 엉성하게 세워진 네모난 문루가 세워져 있는데, 그 상단에는 ‘庫布其沙漠旅游景區’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 기둥에 ‘喜接四海貴賓’/‘笑迎五湖游客’(여러 곳에서 오신 모든 귀빈과 관광객들을 기쁘게 맞이하며 환영한다)이라고 씌어 있었다. 사막도 저들에게는 밑천 안들이고 돈을 벌어들이는, 기막힌 수입원의 관광지인 것이다.
▶ 아아, 고비 사막(沙漠) -
- '고비(庫布其)'라는 말은 몽고말로서 '풀이 자라지 않는 거친 땅'이라는 뜻이다. 내몽고는 전체 면적이 118만km²(동서 1600km, 남북 500~1000km)로서 한반도 전체면적의 약 5.4배에 이를 정도로 광활하지만 이 중 50% 이상이 모래, 잡석 등의 불모지로 형성되어 있고 지금도 계속해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앞으로 전체 면적의 90%까지 사막화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래 언덕만이 물결치듯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봄철 우리나라에 날아오는 황사가 바로 이 고비사막의 모래 먼지이니, 참으로 아득하고 막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이 고비사막은 중국이 세계 3번째로 유인 우주선 ‘신주(神舟)’을 발사하여 성공적인 귀환을 이루어낸 곳이 아닌가. 이 사막이 우리에게는 우리의 숨통을 죄는 재앙(災殃)의 근원지이지만, 그들에게는 새로운 우주시대를 개척(開拓)해 나가는 신천지인 셈이다. 사막의 황무지에서 새로운 우주시대의 장을 열고 있는 중국이다. 반세기 동안의 사회주의의 장막을 걷고 그들은 무한 우주를 향하여 도약하고 있다.
- 고비사막, 열사(熱砂)의 모래밭이다. 그 앞에 드디어 내가 섰다. 등에는 따가운 원시의 햇살이 독화살처럼 내리 꽂히고, 달아오르는 나의 가슴은 막막하고 답답했다. 간간히 건조한 사막의 바람결이 가볍게 옷깃을 파고들기도 했다. 재미로 올라탄 낙타의 등, 사진도 찍으며 호기를 부려 보지만, 여기는 결코 우리가 즐거워 할 수만 없는 문제의 땅이다. 낙타를 타고 한 줄로 늘어서서 사막 위를 걷다보면 마치 옛 원정길을 떠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무거운 마음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 넓고 광활한 땅, 쓸모가 있으면 있는 대로, 쓸모없으면 없는 대로 우리에게 고통으로 다가오는 사막인 것이다.
- 고비사막 입구 <몽고파오(관광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원탁의 중국 음식 … 오늘은 한국에서 먹는 중국음식에 가까운 맛으로 그런대로 먹기가 괜찮은데, 어디서 나왔는지 마늘장아찌, 깻잎, 순창고추장 등이 식탁에 등장했다. 이웃의 초등학교 식탁은 늘 왁자하다. 어제 저녁 샤브샤브 식당에서부터 시작된 원탁 돌리기 놀이가 유별난 재미를 자아내는 모양이 다. 물론 거기에는 K교장과 거기에 호응하는 발랄한 여샘들의 기분이 작용한 것 같았다. 넌지시 건너다보니 원탁을 돌려 술래를 만들고 술을 권하고 마시고 또 돌리고 웃는다.
- 13:00, 점심 식사 후, 일행은 여기 고비사막에서 150km 가량 떨어진 아얼다스(鄂얼多斯)에 위치한 징기즈칸 릉(陵)을 답사하기 위해 서둘러 출발했다. 사막으로 들어온 길을 다시 나와 관전방(關磚坊) 나들목[立交]에서 포무고속(包武高速, 包頭→茂名) 도로를 타고 일로 남으로 향했다. 고속도로에 올라서니 오른쪽에 <珦沙灣 / 2007 沙雕藝術展>이라는 대형 광고판이 눈에 들어온다. 고비사막(珦沙灣)의 모래를 자원으로 예술조각전을 열어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래저래 모래는 돈벌이가 되는 것이다. … 얼마를 갔을까. 鄂얼多斯시로 나가는 이자호(耳字壕, T.G./I.C.)를 지나고, 14:00 정각에는 바오더우시(包頭市)에서 99km 떨어진 동승(東勝 T.G./I.C.)를 통과했다. 버스는 쉼 없이 고속도로를 달렸다. 드디어 14:40, 징키즈칸 능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성릉(成陵)’ 수비참(收費站, T.G.)에 진입했다. 바오더우시 기점으로 153km 떨어진 곳이었다.
▶* <징기즈칸(成吉思汗) 능원(陵園)>에서
- 징기즈칸 능원은 방대한 영역에 조성된, 주위보다 약간 높은 평원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몽골 아얼다스(鄂얼多斯) 이진후오루오기(伊金霍洛旗) 경내에 위치해 있다. 능원 초입의 기념탑에서부터 본전(本殿)이 이르기까지는 하나의 언덕을 타고 넘어야 한다. 눈짐작으로 약 2km가 넘는 왕복 4차전 도로 폭으로 주도(主道)를 닦아 놓았다. 그것이 너무 길어서일까. 그 중간쯤에 주차장을 조성해 놓고 별도로 길을 내어 각종 차량들이 들어가도록 해 놓았다. 능전 입구는 5층 건물 이상 되는 높이의 백색 대리석으로 축조된 장대한 ‘능원문패루(陵園門牌樓)’를 세워 놓았다. 좌우 한 칸씩을 거느린 3칸짜리 문루로, 우리나라 소슬대문이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문루를 지나면 바로 말고삐에 푸른 비단을 두르고 멀리 초원을 응시하고 있는 마상(馬上)의 징기즈칸 동상(銅像)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푸른 하늘 위로 솟구친 그 당당한 기상이 놀랍다. 지금으로부터 800년 전 몽골초원을 평정하고 ‘칸(Khan)’에 오른 그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은 물론 서쪽으로는 페르시아와 유럽, 그리고 북쪽으로는 러시아까지 그의 권역으로 삼았으니, 그의 위세는 실로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 정전(正殿)에 오르는 길, 중간 중간 넓은 평단이 있기도 하지만 그 계단의 수는 총 아흔아홉 단이라고 했다. 이는 상계(上界)의 ‘구구중천(九九重天)’에 이르는 길임을 상징하는 것이란다. 이 완만한 계단을 따라 300여m 정도 올라가면 세 채의 정전(正殿) 건물이 그 위용을 드러내는데, 팔각의 기와지붕 위에 몽고파오를 본뜬 돔을 얹은 형태이다. 칸의 좌상(坐像)의 모신 본전은 2층 팔각지붕에 돔을 얹었고, 좌우의 것은 단층 팔각에 돔을 앉혀 놓았다. 가운데 본전의 외실은 '칸(Khan)'의 소상(塑像)좌정하고, 뒤로 돌아 들어가면 내실인데, 칸에게 제사를 올리는 영령(英靈)의 성지(聖地)이다. 제단에는 세 채의 몽고파오가 설치되어 있다. 가운데는 칸의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고 좌우에는 그 왕비들의 영실(靈室)이다. 그 앞에 타오는 불을 800년 동안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는 불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징키즈칸의 실제 무덤이 어디인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그 당시는 밀장(密葬)의 관습에 따라 그 위치를 정확히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징기즈칸이 중국 내륙으로 군사를 이끌고 직접 남진할 때, 이곳을 지나면서 주위의 풍광을 보고 심히 감동하여 머물러 살기를 언급했었다고 한다. 이 원정길에서 결국 ‘칸’이 중국의 간쑤성(甘肅省)에서 죽게 되자 그 시신을 모시고 몽골로 귀환하게 되었다. 그런데 시신을 실은 수레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수레가 멈추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곳 어딘가에 밀장을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의 이곳은 몽골의 영토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 땅이다. 1947년 이래 ‘내몽고자치구’라는 이름으로 중국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몽골족의 세계적인 영웅인 징기즈칸을 한족(漢族)의 중국이 귀하게 떠받들고 거창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古老神奇的成吉思汗陵園 是蒙古民族的祭祀文化和 民俗文化的神聖搖籃…’이라고 이 능원을 중심으로 몽골의 전통문화를 성화(聖化)하고 있는 것이다. 몽골 땅을 자기 영토로 만들었고, 한때 자기들을 지배했던 몽골의 영웅을 자기들의 문화 영역으로 끌어들여 문화적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능원은 징기즈칸의 35대 후손들이 보호 관리하고 있는데 중국 정부는 이들은 국가공무원으로 우대하고, 능원 조성과 관리에 막대를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사에서 불세출의 영웅으로 기록되는 징기즈칸(成吉思汗), 그의 무덤을 이용하여 중국은 막대한 관광 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내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겨냥해서 대대적인 능원 확장·개축공사를 마무리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곳을 ‘全國重點文化保護單位’, ‘中國AAAA級旅游景區’, ‘中國旅游勝地四十佳’, ‘全國百家愛國主義敎育基地’로 지정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관광객을 유치하는데 총력을 집중하고 있다. … 대초원의 바람을 가르며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이여! 아아, 허무하게 굴러가는 역사(歷史)의 수레바퀴여!
- 원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북쪽 유목민족(遊牧民族)의 남침을 막기 위한 대사업이었다. 한족(漢族)은 남쪽에서 농사를 짓고 정착하며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지만, 늘 북쪽 유목민족들이 자신들의 것을 탐낼까 두려워하며 살았다. 한족은 유목민족이 영원히 지금의 몽골 밑으로 내려오지 않기를 소원했다. 반면 척박한 땅이지만 가축과 그 가축에게 먹일 풀을 따라 자유롭게 이동하며 지냈던 북쪽 유목민족들은 다만 조금 더 풍성한 풀이 나는 곳을 원했다. 그리하여 후에 칭기즈칸(成吉思汗)이 된 자, 테무진(鐵木眞)이 남하한 땅이 바로 지금의 내몽고 북쪽 후룬베이얼(呼倫貝얼)이다. 세계 최대 제국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 칭기즈칸(成吉思汗, 1162~1227), ‘영광(榮光)의 첫 장(章) - 몽골 대제국 역사’
- 몽골의 바이칼호수 부근 태생(1162년)으로 전해지는 테무진(鐵木眞)이 후룬베이얼(呼倫貝얼, 외몽고 접경의 내몽고 북부 도시)을 차지하게 된 것은 1201년과 1202년에 두 차례 있었던 전쟁을 거치면서였다. 당시만 해도 왕의 칭호는커녕 일개 부족장 정도의 세력을 지니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두 전쟁을 거치는 동안 몽골족의 큰 세력이었던 토그릴, 케레이트족, 나이만왕국, 자무카 등을 차례로 패배시키거나 굴복시키고, 전 몽골족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1206년 테무진(鐵木眞)은 오논 강변에서 열린 부족장들의 회의에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전 세계의 제왕’ 칭기즈칸(成吉思汗, Chinggis Khan)으로 추대된다.
- 칭기즈칸은 후룬베이얼을 비롯한 내몽고 지역을 바탕으로 몽골족 내 새로운 조직을 재정비하고, 초원 밖 출정 준비를 마친다. 10진법 체제로 새롭게 구성된 칭기즈칸의 군대는 그의 정복에 기꺼이 동참할 사기 충만한 병사들로 가득했다. 더군다나 후방 보급도 필요 없는 유목민의 장점까지 더해 칭기즈칸의 군대는 세상이 끝나는 그곳까지 정복하고 또 정복하며 내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로부터 25년 후, 1227년에 칭기즈칸이 죽었을 때 몽골제국의 역사는 베이징에서 서방 카스피해까지 이르렀다. 그 후에도 몽골제국은 페르시아와 러시아까지 영토로 삼았다.
▶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 <홀리데이인 호텔> 숙소로 귀환
- 오후 4:30 <징키즈칸 능원(陵園)> 출발
- 오후 4:45 성릉(成陵) T.G.→ 포무고속도로(上行)→ 아진(阿鎭)→ 동승(東勝):鄂얼多斯
- 오후 6:45 바오더우(包頭) 시내 진입 → 6:55 <復正飯店>(저녁식사, <李昭霞生日慶典>)
- 저녁 7:45 복정반점(復正飯店) 출발→ 8:15 包頭·東 T.G (呼市 130km, 베이찡 605km)
- 저녁 10:00 호시(呼市) T.G. 도착→ 저녁 10:30 <홀리데이인 호텔> 도착
▶ 저녁 10:30 호화호특시 뒷골목 <야시장(夜市場)> : ‘설화’ 맥주와 즐거운 어울림!!
- 오상수(계성여고), 이경희(현강정보), 김성수(경기기공), 최창수(한강전자), 노용덕(오산중) 등 다섯이서 도시의 뒷골목 투어에 나섰다. 어둑한 시장 골목길은 양고기 꼬치구이의 연기와 냄새가 자욱한 노점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이었다. 오늘은 먼 길을 왕래했다. 칼칼한 목을 축이기에는 시원한 맥주가 제격이었다. 그 유명한 칭다오(靑島) 맥주는 4위안(圓)이고, 이곳의 대중적인 설화맥주는 2위안이었다. 중국 맥주는 우리의 것보다 싱거운 듯하나 담백한 맛이 있었다. 일행은 학교생활과 여행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2007년 8월 8월 12일 (일요일) : <오란부 기념관>과 <내몽고 박물관> 관람
▶ 탐방 제4일
- 8월 12일 일요일, 어제 일정이 너무 늦게 끝난 관계로, 오전 시간은 숙소인 <호텔>에서 각자 휴식을 취했다. 낮 12시에 <大江南北호텔>의 大飯店에서 스촨요리(四川料理)로 점심식사를 했다. 내륙 깊숙한 스촨성에서 발달한 요리는 지독하게 짜고 매운 게 특징이다. 비교적 얼큰한 것을 좋아하는 나도, 고추는 매워서 눈물이 났고, 혓바닥은 빠지는 듯 얼얼했다.
▶ <오란부(烏蘭夫)의 동상(銅像)과 기념관(紀念館)> (13:00~, 烏蘭夫公園)
▷ 오란부(烏蘭夫)는 누구인가? 기념관의 동상 아래에 적힌 한문을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는 이 지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오란부(烏蘭夫) 동지(同志)는 오랜 경력(經歷)과 수많은 경험(經驗)을 지닌 공산주의(共産主義) 전사(戰士)로서, 당(黨)과 국가(國家)의 우수(優秀)한 영도자(領導者)이며, 걸출(傑出)한 무산계급(無産階級) 혁명가(革命家)이고, 탁월(卓越)한 민족공작(民族工作)의 영도인(領導人)이시다.’
- 그는 가난한 몽골 초원에서 태어난 몽골인(蒙古人)으로서 일찍이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마오쩌둥(毛澤東)의 투쟁 노선에 따라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하였으며 일찍이 모스크바에 유학하여 이론적 사상적 무장을 철저히 한 사회주의 지식인인 동시에 투쟁가이다.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설립(設立)의 장본인(張本人)이며, 중국(中國) 국가 부주석(國家副主席)을 지낸 인물이다. 말하자면 내몽고 출신의 위대한 영도자, 공산주의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기념관은 후허하오터시 중심에 자리 잡고 있은 광활한 오란부 공원 안에 조성되어 있었다. 전면 광장 중앙에 거대한 크기의 동상을 세워져 있고, 그 뒤편에 위치한 기념관도 어느 나라 국가 원수 못지않은 규모와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 오후 14:00 ~ <몽골민속공예품 공장(工場)> 견학 및 공예품(工藝品) 쇼핑
▶ 오후 16:00~18:00 <내몽고박물관(內蒙古博物館)>
-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적 깊이와 정신의 현주소를 알아보려면, 그 나라의 박물관을 가 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한 민족과 한 국가의 저력과 미래의 비젼이 온축(蘊蓄)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몽고박물관>은 내몽고자치구 성립 60주년을 기념하여 세련된 현대식 디자인으로 지은 방대한 규모의 새 건물이다. 이번(2007년 8월 1일)에 개관했다. 전면에서 보아 건물은 좌우의 양 날개가 휘어져 올라가듯이 우아한 곡선미와 날렵한 비상(飛翔)의 미(美)가 살려 내고 있었다. 건물 하나하나가 절묘하고도 아름다운 질감을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마주 보듯 다르게 앉은 양 건물 사이의 비대칭적 조화가 이색적이었다. 박물관에 들어가는 입구는 좌우 두 건물 사이의 2층에 광장이다. 넓은 전시실을 편리하게 관람하도록 배려해 놓았다. 두 건물 아래 전면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좌우의 계단 위에 파란 잔디를 조성하고, 가운데는 중앙의 넓을 계단 한 가운데는 몽골초원을 상징하는 유연한 곡면의 잔디를 깔아 놓아, 화강암 건물의 회색과 초원의 녹색이 아주 잘 어울리게 형상화해 놓았다. 우아하고 깔끔하다.
- 그리고 중앙 계단의 가운데 풀밭에는 엄청난 크기로 글씨로 ‘1947 - 2007’을 돌판으로 부조(浮彫)시켜 놓았는데, 내몽고자치구 성립의 60주년을 경축함과 동시에 박물관 개관의 역사적의 의미를 새기는 표현인 것이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 이미 소수민족이 되어버린 원주민(몽골인)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동시에 내몽고의 중국화에 대한 자축(自祝)인 것이다. 그들 몽골인의 정신과 문화를 중국 역사의 한 부분으로 융화시킴으로써 저들의 중화주의(中華主義)를 고착시키고자 하는 저의가 작용한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융화정책은 이미 여러 공정(工程)을 통해 지금도 무섭게 진행되고 있다.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서북공정과 티베트 합병의 서남공정은 이미 완료되었고, 그리고 우리나라의 직접적으로 이해(利害) 관계가 있는 동북공정은 지금도 야심만만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저들의 저의는 중국이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잡고 대국의 꿈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참으로 착잡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박물관 내부 구조와 전시물의 배치도 아주 그 방대한 규모였고 내용면에서도 매우 짜임새가 있었다. 그들이 의도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2층에서 3층까지는 시간적 인 순서에 따라 배치하였다. 수천만 년 전의 공룡시대에서부터 새로운 우주시대의 장(章)을 연 현대의 첨단 과학에 이르기까지, 연대기적으로 문화와 생활의 진화 과정을 깔끔하게 전시해 놓았다. 유인우주선 ‘신주(神舟)’의 발사와 성공적인 귀환이 바로 이 내몽고의 사막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위층에는 주제별로 전시실을 배치해 놓았다. 가령 그림, 글씨, 의복, 산업, 공예 등으로 분류하여 배치하였고, 그리고 몽골 지역의 각 민족 단위로 전시실을 배려하여 그들의 생활과 주거, 의복, 의례 등을 한 자리에서 일목요연하게 관람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즉 이 지역에 주거해 온 돌궐족, 타타르족, 흉노족, 어웬키족 등 모든 북방 민족을 각각 독립된 전시실로 배정하여 시설해 놓았다. 그들 소수 민족들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중국의 역사의 한 장으로 편입시켜 놓은 것이다.
박물관은 크게 유목민족풍정관, 고생물화석진열관, 역사문화진열관, 혁명문물진열관 등으로 구분된다. 공룡이나 매머드 화석을 비롯하여 약 50만 년 전의 다이요문화(大演文化) 출토품과 네이멍구자치구 소수 민족들의 생활 도구, 수렵 도구, 민속 악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진선비귀의후(晉鮮卑歸義侯)의 ‘금인(金印)’, 진선비솔선중랑장(晉鮮卑率善中郞將)의 ‘은인(銀印)’은 귀중한 보물로서 눈길에서 놓치기 아까운 것들이었다. 그리고 각 전시실마다 2~3명의 깔끔한 몽골전통의상을 차려 입은 해설자[娘子]를 배치해 놓아 작품을 관람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2시간 동안, 장구한 세월동안 이 초원에서 이루어진 문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다. 시간이 부족했다. 그들의 다양한 문화적 유물을 두 시간 동안에 본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많은 것을 느꼈다. 전시물 하나하나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감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내몽고는 이미 몽고(蒙古)가 아니라 중국(中國)이라는 것이다.’
* 18:30 저녁식사 : <향저방(香猪坊)> 돈카페 삼겹살(한식) :
- 저녁 식사 후 서문의 이종범 교장선생님과 기념 촬영을 했다. 몽골초원에서, 일찍이 등산에 오랜 경력을 지닌 관계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지금도 1970년대부터 전문산악인을 길러 내는 한국등산학교의 부교장을 맡고 계신 분이다. 그 당시 우리 호산아(好山兒) 멤버와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어 이야기가 많이 통했다. 그리고 역시 조원의 K교장 선생님은 열정적이고 초능력을 지닌 기분파이다. 우리 여행단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온몸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첫댓글 마치 제가 다녀온듯한 착각으로 읽었습니다...자세한 묘사와 세세한 기록에 감사드립니다..내내 건강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