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낙지 이야기/청묵
엊 그제, 겨울 외투를 사 입을 요량으로 인터넷을 뒤지다가, 부천 고강동의 의류 상설 매장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매장 근처에 사는 지인을 불러 내어 옷을 고르는 눈을 빌리기로 하여 거의 헐값, 단 돈 구만원에 맘에 드는 반코트를 걸쳐
입고, 황송하게도 점심 식사 까지 대접을 받는다.
식당 입구의 야트막한 솟을 대문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머리를 숙여 현관을 들어 서고도 한참이나 높은 곳에 추녀는 매달려
있다. 부디칠까 하는 괜한 의심을 하고는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본다. 첬 대면 부터 머리를 조아리게 하다니, 참 이상한 집 이다.
낙지 요리를 연상하자니 매운 맛 부터 지레 겁을 먹는다. 매운 맛에 유난히 약해, 무교동 낙지 골목에 라도 간 날 저녁에는
밤새 위통에 데굴데굴 구르던 기억에 쭈뼛거리지만, 호의도 그렇고 빈약한 주머니 생각에 못 이기는 척 따라 들어 간다.
낙지가 착하면 얼마나 착할까?. "착하다 했으니 설마 오늘 밤에 또 고생을 각오해야 하는 것은 아닐테지". 불안을 떨치기로
마음 다지기도 전에 김이 모락거리는 낙지 볶음이 버얼건 자태를 내 보이며 지글 거리는 무쇠 불판에 얹혀 온다.
현관을 지니칠 때 대형 수족관에 오글오글 꼬물 거리던 낙지를 꺼내어 대형 도마 위에서 손질하는 광경을 보며 들어 왔는데,
아마도 방금 그 낙지였던 듯 모락거리는 김위에 버얼건 양념 옷을 입은 탱글탱글한 낙지의 속살이 마냥 뽀얗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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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 모락 거리는 낙지 볶음과 냉면 대접에 적당히 담긴 흰 쌀밥괴 데친 콩나물이 따라 오는 것으로 보아 비벼서 먹으라는
뜻 인게 분명하다. 빨간 양념과 흰 쌀밥 그리고, 뽀오얀 낙지 속살에 콩나물의 색감이 조화가 잘 어우러지며 식욕을 자극하
기에 충분하다. 쫄깃하고 부드러운 낙지의 식감이 목 넘김을 한껏 여유롭게 한다. 보통의 낙지 전문 식당의 경우 한 점 낙지 맛
을 느끼기도 전에 매운 맛의 심한 자극에 괴로워 해야 했는데. 비벼서 먹지도 않고 안주 삼아 술 한 순배를 하는 동안 까지도
맵기 보다는 그저 부드럽고 신선한 느낌에, 함께한 지인은 괜찮냐며, 나를 살핀다. 아직까지는 아무 반응도 없는 점으로 보아
방심을 한 사이 올 것이 온 듯, 머릿속 부터 식은땀이 나더니 결국 이마에서 콧잔등 으로 쉴새 없이 땀이 흘러 내린다.
맵다고 느낄 때 한 숨 돌리고 땀을 닦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매운 기가 사라지고 다시 젓가락을 들이 댄다.
가만히 요리를 들여다 보니 통상 어느 집에나 있을 법 한 양념일 뿐, 아마도 특별한 이 식당 만의 양념의 비법이 숨어 있는
듯 하다. 매워 보이면서도 당장의 자극이 없고 알싸하게 고통스럽다 가도 먹기를 그치면 이내 말끔히 상쾌한 개운한 뒷 맛
이 따라 오는, 희안한 카타르시스를 맛 보게 한다. 매운 맛은 속성상 중독 처럼 젓가락을 끓어 들이는 마력을 가졌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맛은 매운데 자극이 없고 그 자극 조차도 순간을 지나면 사라진다는 특이한 낙지요리의 비법이 있는 것
은 분명해 보인다. 한가지 더 희안한 것은 불판이 다 식어도 낙지는 전혀 뻣뻣한 느낌이 나지를 않는다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불기가 가시면 볶음 요리란 뻣뻣해 지게 마련 인데도 여전히 부드러운 채로 식어 간다는 점은 믿기 어려웠다.
분명 무슨 조리의 노 하우가 있지 않고 서는 이럴 수 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머릿속의 불을 식히며 식당 내부를 둘러 보니 참 정갈하고 깔끔한 느낌이다. 소모임에 알맞을 만한 크기의 방 부터 많은 인원
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홀 까지, 황토 벽에 고급 한지 도배를 해 놓아서 도란도란 담소와 식사가 적당히 어울릴 것 같은 느낌
이다. 찬 기운이 식당 내부로 들지 못 하도록 입구로 부터 몇 겹의 바람막이 비닐 커튼을 해 두는 센스도 참 돋보였다.
따뜻한 봄 부터 추워 지기 전 까지 대문 안의 야외 좌석도 나름 운치가 있을 것 같다.
함께 식사를 한 지인께 좋은 식당을 안내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잠시 산책을 하는 동안 내내, 흐뭇한 행복감이 밀려
온다. 좋은 옷을 싸게 사고, 비록 팔천원 밖에 가지 않는 낙지 요리 이지만 수 만원의 성찬 보다도 값지고 맛있는 행복을 대접
받았으니 오늘의 점심 , 내가 맛 본 최고의 낙지 볶음 이었다. 참으로 착한 낙지였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