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因緣·佛緣
민 병 삼
내가 전주역에 내렸을 때는 4 시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전주를 두어 번 왔었지만 역사를 새로 옮긴 후로는 처음이라, 크게 뚫린 길이랑 주위의 넓은 공터가 눈에 너무 낯선 모습으로 닥가와, 감자기 마음이 황량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2 월 초승의 매운 바람이 회오리치며 바짓가랑이에다 먼지를 뽀얗게 뿌려놓고는 맴처럼 달아나버려, 광장 한가운데 서 있은 나를 더욱 난감하게 만들었다.
도시이기는 마찬가지인데도 서울에서보다 더한 추위를 느끼는 것은 오직, 객지인 탓이라고 생각하였다.
시골사람들이 새 차를 타면 몸에 부스럼이 돋는지, 시골 어디를 가나 폐차 직전의 낡은 버스만 털털거리고 달렸다.
아직 포장이 안된 길을 달릴 때는 차가 너무 흔들려 마치, 몸이 마디마디 부서져 의자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될 것 같은 불안한 느낌마저 들었다.
버스가 얼어붙은 호수를 끼고 연기처럼 먼지를 싸며 모악산 품으로 기어들었다. 차에서 내렸을 메는 마치, 밀가루포대를 짊어졌던 것처럼 온몸이 먼지투성이었다.
나는 몇 개의 여관을 기웃거려보았으나 시설이 너무 낡아, 아무래도 잠잘 곳으로는 적당치가 않았다. 마을 전체가 관광객 유치를 위한 재개밭 지구로 묶여 곧 헐리게 된다며, 숙박업소마다 보수를 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민박하는 집을 물어 들어갔다. 이미 날이 어두워서 확연하게 볼 수는 없었으나, 연중 한철 손님을 받기 위해 세운 듯한 일(一)자 가옥이었다.
어쨌든, 여관보다는 훨씬 깨끗했다.
“며칠이나 계실랍니까?”
오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주인여자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며 물었다.
“글쎄요……·한 열흘 쯤 있을 예정입니다만…….”
“휴양 오셨읍니까?”
“글을 몇 줄 쓸 겸, 절 구경 좀 하려구요.”
서울에서 연탄냄새만 맡다가 오랜만에 솥잎이랑 창작 타는 연기에 젖으니, 아득하게 고향을 느끼게 하였다.
장작을 너무 많이 태운 탓에, 아랫목은 엉덩이를 댈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뭐니뭐니 해도,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시골 인심이다 생각하니, 얼었던 몸이 녹으면셔 마음이 솜처럼 포근해왔다.
손깍지를 베고 잠시 누워 있으니, 앞냇가에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선잠에서나 들을 수 있는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처럼 귀를 간지럽혔다.
나는 정말로 나그네가 되어, 갑자기 고독 말고도 서러운 감정까지 목을 비틀어
눈물을 글썽이게 하였다. 나그네의 설움인가 싶었다.
나는 빛이라곤 별빛밖에 없는 깜깜한 길을 더듬어, 식당과 잡화상들이 양쪽으로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직, 초저녁인데도 식당마다 술손을 맞고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고, 그저 개들만이 탁자 밑에서 배를 붙이고 누워 있었다.
한 집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치 큰 공을 약간 눌러세운 것같이 똥똥한 주인 여자가 하품을 하며 방에서 나왔다. 나는 연탄난로를 끼고 앉아 소주 한 병과 안주를 주문하였다.
골목의 먼지를 핥으며 지나가던 바람이 꼬리를 휘둘러, 잠시 유리문을 시끄럽게 흔들어놓곤 사라졌다.
주모가 탁자에 술과 안주를 내려놓고는 어깨를 떨며 다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아무려나, 나는 썰렁한 홀을 지키고 앉아 소주나 털어넣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 객지의 밤 모든 것이 나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말아,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역시 선잠이었던지, 이튿날 새벽 꿈결에서 범종 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
을 깨었다. 중생의 번뇌를 소멸시킨다는 의미로 서른세 번을 타종한다더니,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종소리가 울렸다.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잠까지 설친 탓에, 목도 뻣뻣하고 숙취까지 있어, 식당에 가서 술국만 한 뚝배기 마시고 나왔다.
호남지방에서 제일 오래 된 사찰이라는 안내판을 읽으며, 나는 모악산 깊은 품에 안겨 있는 금산사 경내로 들어갔다. 삼사백 미터 쯤 되는 진입로에는 〈히마라야시다〉라는 나무들이 마치, 고옥의 처마처럼 늘어서 있었다.
본당인 듯한 3충 구조의 웅장한 미륵전에는 키가 자그마치, 서른아홉 자나 되는 본존의 미륵 입상이 서 있어, 허리를 제끼지 않고는 불상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장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위용에 그만 압도당하여, 나도 모르게 합장을 하곤 무릎을 꿇어야 했다.
십여 개가 넘는 법당이랑 석탑들을, 안내판을 읽으며 돌아보는데도 두 시간이나 넘게 걸렸다.
눈이 올 것 같은 춥고 음산한 날씨에 너무 오래 서성거린 탓인지, 아니면 아직도 몸에 술독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몸이 갑자기 피곤하였다.
나는 숙소로 내려와 따끈따끈한 방바닥에 등을 붙였다. 곧 잠이 스며들 것 같이 온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하였다.
이튿날 아침, 나는 다소 가뿐해진 몸으로 본찰 근경에 있는 암자들을 찾아나
섰다.
밤새 내린 눈으로, 법당의 지붕마다 마치 솜을 펴놓은 것처럼 눈을 소복하게
이고 있었고, 경내에 주종인 벚나무는 꽃이 만개하였을 떼의 그 황홀함을 재현
하는 듯 눈이 부셨다.
초행길이라 그런지, 암자까지 이르는 데 십리는 족히 되는 듯 싶었다. 평지를 지나 〈심원암(深遠庵)〉이라는 안내판이 박힌 산길을 오를 때는 눈에 미끄러저, 힘들여 오른 길을 되내려가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나뭇가지를 잡으면서 간신히 암자에 다달았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퇴락한 고옥 한 채와 석물들이 세월을 입고 묵묵히 서 있어, 산골을 타고 내려온 바람소리는 마치, 그들의 한숨 짓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여승들만 기거하는 곳이라 하여, 법당이 서 있는 뜰을 조십스럽게 올라셨다.
건물 한쪽 벽면에 가부한 중의 뒷모습이 서투른 솜씨로 그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림 옆에는 짤막한 시구 몇줄이 적혀 있었다.
누더기 까까머리로
올연히 앉았으니
부귀니 영예니 구름 밖에 꿈이로다.
부처님 계신 곳에
만고 광명은 대천세계를 비추이네.
먹묵이 전혀 바래지 않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근년의 솜씨인 듯 싶었다.
어설프기는 하나, 누구인지 속세를 며난 이의 글이라 생각하며 나는 거듭하여 읽었다. 그때, 안으로부터 염불 외는 여승의 청랑한 목소리와 함께 목탁소리가 흘러나왔다. 염불 외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것은 경전이 아니라, 여승 자신이 손수 쓴 벽면의 시구를 암송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어, 혼자 웃었다.
나는 석간수를 먹기 위해 공양간이 있는 뜰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물
을 떠 먹을 만한 그릇이 없어서 공양간으로 갔다. 공양을 짓는 중인지, 아궁이
에는 장작불이 타고 있었고, 행자인 듯한 여인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 고사리를
다듬고 있었다.
나는 다른 암자를 둘러보기 위해, 뜰에 난 석계를 내려가다가 잠시, 몸을 돌려 벽면의 시구를 또한번 올려다보았다. 그때, 염불 외는 소리가 그치고 잠시 불상올 모신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왜소한 체구의 여승 하나가 마루로 나왔다. 내가 그에게 눈길을 돌리차 그도 나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내가 여승의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계단에서 뒤로 넘어질 뻔하였다. 여승 역시 몸을 굳힌 채,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주연씨가……·?”
나는 급히 뜰로 올라갔다.
“선생님께서 어떻게, 여길……·?
그녀는 신도 신지 않은 채 뜰로 내러와, 내 앞에 합장을 하고 몸을 깊히 숙였다.
“도대체, 그 모습이 어찌 된 일입니까?”
내가 그녀의 손을 잡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녀는 숙인 고개를 들지 않고 그저, 나무관세움보살만 되풀이 욀 뿐이었다.
“말씀 좀 해주오. 어찌 된 일인지.”
그러나 그녀는 마치 그대로 석상이 돼버린 듯 꼼짝않고 서서, 뜰에다 방울방울 눈물만 떨어뜨리고 있었다.
나도 설움이 목구멍까지 북받쳐 눈물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돌연 몸을 돌리더니, 조금 전에 나왔던 방으로 다시 뛰어들어갔다. 그리곤 이내 목탁소리가 경내를 혼들어놓았다. 아울러 그녀의 울부짖은 듯한 염불 외는 소리가 목탁소리를 누르고, 골짜기에 끝없는 산울림을 만들어내었다.
5 년 전, 내가 서른일곱의 나이로 대학원을 마치고, 몇 개 대학에 강사로 나갈 때였다. 앞으로, 계속 대학에 머물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박사과정을 밟지 않고는 안 될 전망이어서, 나는 제 2 외국어로 한문을 선택하여 그 준비를 하였다. 마침, 여름방학 동안 홍릉에 있는 세종대왕 기념관내에서 논어와 맹자의 특강이 있다고 하여, 나는 매일 저녁마다 강의를 들었다. 수강생들은 대개 나 같은 경우이거나, 제 코스의 대학원생들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명의 남녀 중들이 나와서 강의를 들었다.
수강생들이 너무 많은 탓에, 강사는 항상 마이크를 앞에 놓고 강의를 하였다. 그러나 기계 성능이 좋지 않아, 중간 이후에 앉은 사람들에겐 강의 내용이 뚜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저마다 몇 분쯤 먼저 나와, 앞자리를 잡기에 종종 경쟁을 하곤 하였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행동이 굼뜬 편이어서, 앞자리를 차지한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대개, 앞자리에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차지하였다. 거의 지정석처럼,
그 자리에는 언제나 같은 여자들이 앉아 있곤 하였다.
나는 하루, 마음먹고 30분쯤 일찍 나가서, 앞줄 맨 끝에다 자리를 잡았다. 조금 후에, 작은 체구에 머리를 짧게 커트한 여자가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대학원생쯤 돼 보이는 또랑또랑하게 생긴 여자였다. 그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쉬는 시간에도 별로 나가는 일이 없고. 옆자리에 고정적으로 앉은 여승과 늘 자분자분하게 얘기나 나누고 있는 편이 많았다.
아무래도 그녀와 사귀어, 내가 미리 오지 못하는 경우, 옆에다 자리를 잡아 놓으라고 부탁을 해야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혹시 나를 던적스러운 사내로 취급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접근하기가 망설여졌다.
생각끝에, 나는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자동판매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한 개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
그녀는 급작스러운 내 행동에 당황했던지, 나를 한동안 멀뚱하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한 잔 더 뽑았읍니다.”
“왜, 저한테……·?”
“우선, 드세요.”
“잘 마시겠읍니다만…….”
그녀는 마치, 위해물이라도 든 것처럼 커피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약이라도 탔을가봐 그러세요? 제 것과 바꿀까요?”
나는 내 커피잔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아녜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옆으로 빼었다.
“사실은요, 지금 드신 커피가 약간 성가신 미끼가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아직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돌려놓
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여기에, 꽤 일찍 나오시는 것 같은데요, 내일부터 제 자리까지 좀 맡아주십
쇼.”
“네에?”
“그대신요, 쉬는 시간마다 제가 커피는 사겠읍니다.”
“저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데요?”
“그럼, 콜라.”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쿡〉소리를 내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웃음을 참느
고 어깨까지 출렁이고 있었다.
“승낙하신 걸로 믿겠읍니다.”
“그건 어렵지 않은데요, 만일 제가 늦는 날은 어쩌지요?”
나는 속으로 ‘아쭈, 요것 봐라.’ 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저, 또랑또랑한 줄만 알았던 그녀의 눈에서 새롭게, 촉촉한 애수의 분위기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전날, 미리 예고만 해주시면 이튿날은 제가 일찍 나오지요.”
“그러시겠어요? 그렇다면 내일 당장인걸요?”
“좋습니다. 내 일도 오늘처럼 일찍 나오죠.”
나는 그녀와 급거히 가까운 사이가 되어, 거의 쉬는 시간마다 잔디밭에 앉아
한담을 나누곤 하였다.
하루는 그녀가 커피를 들고 와서, 실은 이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어떻게요?”
“선생님이 쓰신 시를 몇 편 읽었거든요.”
그러면서 그녀는 문예지에 발표된 내 시 제목을 몇 개 더듬거렸다.
“그리구요, 작년에 인사동에 있는 카페에서, 시인과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지요? 실은, 저도 그 자리에 참석 했었거든요.”
“그래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아는 체를 했지요?”
“진작 인사를 할까 했는데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제가 우쭐할까봐서요?”
“그런 가봐요.”
“이제 보니, 아주 능청스런 여자였군요.”
“어머, 아네요. 제가 얼마나 솔직한 여자라구요?”
그녀는 〈솔직〉에 힘을 넣으며,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녀는 짐작한 대로, 대학원 한 학기를 마친 학생이었다. 게다가 나처럼 국문학을 전공한다고 하였다.
“시를 쓰게요?”
“아네요. 실은, 소설을 몇 편 썼었는데요, 신춘문예에 두 번 낙방하고는 그만 뒀어요. 그래서 소설연구나 할까 해요.”
우리는 강의가 끝나면 가끔, 근처 생맥주집에 들러 목을 축일 때도 있었다. 어딘가, 새침했던 첫인상과는 달리 의외로 활달한 성격을 지녔고, 그녀 말대로
매사에 솔직한 쪽이었다. 어떤 때는 너무 당돌하게 나와, 나를 가끔 당혹하게 만들 때도 있었다. 맥주보다는 소주가 입에 맞고, 겨울에는 정종과 꼬치안주가
제맛이라고까지 하여, 때때로 나를 편안하고 즐겁게 하였다.
8 월 말에 종강하였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인사동에 있는 토속음식 점으로 갔다. 종강파티라는 명목이었다.
“하 주연씨를 알게 돼서, 이 여름을 지루하지 않게 보냈읍니다.”
나는 그녀의 잔에 술을 가득 부어주었다.
“저두 선생님과 친하게 돼서 좋았어요.”
우리는 잔을 서로 부딪치며 ˙미소를 나누었다.
“앞으로, 누구의 소설을 연구할 생각입니까?”
“글쎄요……·욕심으로는, 이효석의 소설을 연구하고 싶지만요…….”
그러면서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이효석의 생가가 있던 봉평을 한번쯤은 가보셔야 되겠군요.”
“그냥, 벼르고만 있어요.”
“제가 안내할까요?”
“선생님은 가보셨어요?”
“두 번, 메밀꽃 필 때를 맞춰서 갔었지요. 한번은 학생들이랑 갔었고, 한번은 혼자 갔었지요.”
“정말, 안내 좀 해주시겠어요?”
“원하신다면, 기꺼이.”
“약속을 할까요. 선생님? ¨
“그럽시다. 추석 전후로 해서 가면, 꽃이 한참 좋을 땝니다.”
“친구랑 함께 가도 되지요?”
“좋으실 대로.”
나는 수첩을 꺼내어, 금 토 이틀 통안 강의가 없는 추석 다음 날에다 표시를 해두고, 마장동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였다.
10 시에 약속했는데, 그녀가 늦게 나와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그녀는 30 분이 지나서야 헐레벌떡 달려왔다.
“죄송해요, 선생님. 친구를 기다리다가 늦었어요.”
“그런데 어째 혼잡니까?”
“고, 맹추 같은 애가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못 간대잖아요.”
“그랬군요……· 혼자라도 가시겠읍니까?”
나는 그녀가 혼자라는 데에, 약간 신경이 쓰였다.
“그럼요.”
세 시간이 더 걸려 장평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다시 봉평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서울에서 너무 늦게 출발한 탓에, 봉평에 도착하니 3 시 반이 넘었다. 아무래도 일정이 빡빡할 것 같았다.
우리는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생각하며, 이효석의 생가가 있었던 곳으로 걸어갔다. 허 생원이 동이의 등에 업혀 건넜던 큰 냇가를, 다리 위로 지나면서
우리는 잠깐 웃었다.
나는 돌아갈 막차 시간을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 하였다. 그녀가 따라오기에 벅찬 눈치였으나, 나는 모르는 척 하고 앞만 보고 걸었다. 잘못 늘쩡거리다간,
객지에서 난처한 하룻밤을 보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당도했을 때는 떠날시간 20분 전이었다. 시장기를 느껴도 감히 식당에 시선조차 둘 여유가 없었다.
“선생님. 내일, 강의 있으세요?”
“강의는 없지만, 이것이 막차라고 해서……·서울에서 더 일찍 약속할 것을 잘못했어요.”
“저 때문에 늦은 거예요. 〈메밀꽃에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 구경을 못하게 된 것이 안타까워요. 그 달빛이 정말, 숨을 막히게 하는지 보고 싶어요.”
그녀가 고개를 떨구고는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구두코로 흙을 팠다.
“그래도 괜찮겠읍니까?”
그녀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 발장난만 하였다.
“좋아요, 그럼."
나는 정말, 계획에 없었던 그녀의 손을 잡고,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내가
어떻게,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우선, 요기부터 해야지요? ”
그러자 그녀가 그 또랑또랑한 눈으로 마치, 내 눈 속을 파고들 듯이 한동안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가 너무 당돌하지요?”
하며 그녀가 아직도 하얗게 긴장해 있는 나의 굳은 표정을 달래듯 입을 열었다.
“주연씨가 나보다 더 솔직해서, 실은 내가 부끄러워하는 중입니다.”
“아네요. 그런 생각 갖지 마세요.”
우리는 식사를 주문해놓고, 먼저 소주병부터 깠다.
“자아, 가산 선생을 생각하며, 한잔 듭시다.”
우리는 주로 이효석의 작품 얘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소주 두 병을 비웠다. 나는 사실, 그녀와 함께 메밀꽃밭에 쏟아질 달빛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흥분해 있었다.
달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우리는 낮에 갔던 코스를 천천히 되밟아 걸었다. 소설 표현이 머릿속에 인두자국처럼 박혀서 그런지, 메밀꽃밭에 쏟아진 달빛을 정말 소금 뿌린 것처럼 절감하였다.
“저 달빛에 정말, 숨이 콱콱 막힐 지경이에요. 선생님. 제 생애에 이런 아름다운 밤을 다시는 맞을 수 없을 거예요. 달빛 뿌린 이 꽃밭에서 차라리 죽고 싶군요.”
등을 보이고 섰는 그녀가 어쩌면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녀가 잠시, 어깨를 떨었다. 아마도 푸른 빛이 도는 달빛이 그녀의 어깨를 떨게 했는지도 모른다.
달이 자꾸 기울어 갔다.
우리는 온 길을 되돌아 냇가에 섰다.
“주연씨. 제가 업어드릴까요?”
나는 냇물의 깊이를 가늠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동이가 되고 싶으세요?”
우리는 다리 밑으로 내려와 물 앞에 섰다. 나는 바짓가랑이를 걷고, 발을 물에 넣었다. 섬찍하리만치 뼈가 저려왔다.
“자아, 업히세요.”
나는 그녀를 가볍게 업고 천천히 내를 건넜다. 물은 생각보다도 깊어, 허벅지를 삼키는 곳도 있었다.
“선생님 등이 참 따뜻해요.”
그녀가 등에 볼을 태고 조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를 보고, 지하에서 가산 선생이 웃겠읍니다.”
“선생님은 시인에다가, 소설적 사내로서의 기질도 있으신 분예요.”
“업혔다고, 칭찬해주는군요.”
“제가, 선쟁님을 여기서 더 좋아하면 안되는메…….”
그녀가 긴 한숨을 섞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라고 했읍니가? 지금.”
“아네요, 아무것두.”
물을 건너자, 그녀가 손수건을 내어 젖은 다리를 닦아주었다. 젖은 바짓가랑이 속으로 바람 한줄기가 샅에까지 뒤지고 나갔다. 쩔렁하니 감자기 한기가 왔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잠간 안아드리면 안돼요?”
그녀가 갑자기 내 턱밑을 파고들었다. 나는 잠시 가슴을 떨었다.
“허락해주세요.”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달빛 그림자가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다. 왜소한 그녀가 품안에서 새처럼 몸을 떨었다. 나는 입술을 열어 그녀를 깊게깊게 받아들였다.
어느덧 시간이 11시나 되었다.
나는 소주 두 병과 안주가 될 만한 것 몇가지를 사들고, 여관을 잡아들섰다. 방이 따뜻했다. 나는 그녀를 돌아앉게 하고, 젖은 바지를 벗어 벽에 걸었다.
그리곤 이불을 내어 몸을 가렸다.
나는 소주를 연거퍼 마셨는데도 몸을 계속 떨었다. 실은, 그녀 앞에서 긴장을 하고 있었다. 방에 들어와, 나는 그녀의 얼굴을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냥 술만 마셨다.
“선생님. 긴장하고 계시는군요.”
술잔을 잠은 손이 계속 떨고 있음을 보고,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제가 못된 여잔가봐요.”
“주연씨. 제가 오늘밤을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더는 좋아할 수 없음을 용서해주세요.”
“이유는 묻지 않겠소.”
“네에.”
“그러나 오늘 이후 제가 주연씨를 더 좋아한대도, 그건 누구의 책임도 아니
오.”
“아녜요. 우리에겐 오늘 이후가 없어요.”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오.”
나는 끝까지 그녀를 보지 않고, 계속 술만 마셨다. 오직 오늘밤을 인내하기
위해서 였다.
"제가 오늘 밤, 끝내 주연씨를 지켜줄 수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내 어깨에 남아 있을, 빌어먹을 놈의 저 달빛 때문일거요. 빌어먹게도 아름다운 달빛 같으니……”
이튿날 아침, 잠결이 어수선해서 눈을 떠보니, 나 혼자 이불 속에 누워, 긴잠을 잤던 모양이었다. 뜻밖에도, 그녀는 내 머리맡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질 않는가.
나는 너무 놀라서 상체를 벌떡 세웠다.
“주연씨. 지금 뭐하고 있는 겁니까? "
“선생님을 보고 있었어요.”
“밤새, 그러고 있었단 말이오? ”
“……”
“어리석은 여자 같으니. 꼭 그럴 수밖에 없었읍니까?”
나는 공연히 화가 났다. 자신의 벽이 무너질까봐서 밤을 새웠다고 생각하니,
불쾌한 생각까지 들었다.
“언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선생님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을 더 두
려워했어요.”
“거짓말이오, 그건.”
“정말예요. 어젯밤, 선생님의 인내하심을 제가 보았잖아요. 실은, 제 자신이
인내할 수 없었는지도. 몰라요.”
“그말이 진실이기를, 나는 죽을 때까지 믿겠소.”
“네 , 그래주세요.”
우리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탄 한마디도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녀는 내내 창밖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서울에 당도하니, 오후 3 시였다. 다방에 들러 코피를 마시자고 했더니, 그녀는 마다하고 고개만 깊히 숙였다.
“선생님이 결혼을 하신 분인지, 아직 혼자이신지, 저는 여쭤보지 않았어요.”
“왜 그랬소?”
“그동안; 우리의 만남이 그것과는 상관이 없었으니까요. 설사 앞으로 또 만나 뵙게 된다고 해도, 그때도 역시 옂줘보지 않았어요.”
“어쩐지, 주연씨를 영영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갑자기 드는군요. 사실입닉가?”
“선생님, 저, 다음달에 결흔해요.”
“……”
“그래도 저는 선생님을 죽을 때싸지 잊지 못할 거예요.”
“……”
나는 갑자기 뻣뻣해오는 목을 달래고 있었다.
“제가 선생님을 더욱 잊을 수 없게 좋은 시를 많이 발표하세요. 안녕히 가세
요, 선생님.”
“저도 주연씨의 결혼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겠읍니다. 주연씨는 참으로 좋은 여자였읍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염불삼매를 지키려는 듯, 그녀는 목탁소리만 내보낼 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어떻든 나는 그녀가 나오길 기다릴 셈이었다. 설사 그녀가 속세와 인연을 끊
고 불연을 맺은 중이 되었다고 해도, 지금의 내 심정으로는 그냥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때, 마장동에서 그렇게 헤어지고 난 후에, 나는 그녀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녀를 꽤나 원망했었다. 마치 구름처럼 나타나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그녀였다. 내 가슴속에서 회오리치다가 달빛 같은 그리움만 남겨 놓고 그녀는 사라졌다. 그녀와 지냈던 나날들을 더듬으면, 그 길은 설재하지 않았던 꿈길 같았고, 그녀가 나에게 던진 말들은 모두가 요정의 조롱이었던 것아서,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젠 삭발승이 되어 있다니…….
이윽고 목탁소리가 그치고 법당문이 열리면서, 그녀가 손에 염주를 들고 포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곤 옆방 문앞에 서서 “스니임.” 하고, 누구를 부르는 소리를 나지막하게 내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노승이 나왔다. 그러자 그녀가 노승에게 무엇인가 여러마디 얘기를 들려주는 듯하였다. 노승은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를 힐끔힐끔 내려다보았다. 짐작에 오늘 나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을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노승이 몇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신을 꿰고 뜰로 내려왔다. 그리곤 두어 걸음 거리를 두고 서서 합장하였다.
“선생님, 웬만하시면 저 위, 석탑이 있는 곳에 가셔서 말씀을 나누면 좋겠읍니다.”
그녀는 내 대담을 들을 생각도 않고, 이내 몸을 돌려 산길로 앞장을 섰다. 보물로 지정된 이 석탑은 화강석의 3 층탑으로서, 사람들의 발길이 별로 와 닿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석탑에 이르자, 또 합장을 하고 배례하였다. 그리고도 한참 있다가 나에게 몸을 돌렸다.
“선생님 모습이 많이 변하셨읍니다.”
그녀가 애애한 눈으로 나를 한동안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속에서 수많은 햇살들이 부서져 날아갔다.
“그새, 볼혹을 넘겼읍니다.”
그녀가 눈을 내려깔고 짧게 한숨을 토했다.
“이곳엔 어쩐 일로……·?”
“아무데고, 산사에서 시 몇편 쓸까해서 집을 떠났읍니다.”
“선생님을 뵙는 순간, 소승이 갑자기 이승을 떠난 듯 싶었읍니다.”
“불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다시 합장을 콴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속눈썹 사이로 물기가 반짝반짝 배어나왔다.
“이미 불문에 든 분에게 들어도 괜찮다면, 어찌 된 까닭인지 말씀 좀 해주시
오. 가슴이 떨려 견딜 수가 없읍니다.”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소하였다.
“불연입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합장한 손끝에 짧게 경련이 일었다.
주연이는 그해 10월에 결혼을 하였다. 남편은 영문과 출신으로 주연이 아버지가 나가는 회사의 사장 아들이었다. 장남인데도 그는 회사에 일체 관여를 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부자간에 갈등이 심했다. 그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그를 회사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엉뚱하게도 사진에 미쳐 있었다. 회사 같은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예술사진을 받들어 내는 일에만 열을 쏟았다.
그리하여 혹시 그가 가정을 가지면 마음이 달라질까 싶어서, 하지 않겠다는
결혼을 그의 부모가 서두른 것이다.
그들은 며느리감을 물색하던 중, 당시에 이사로 있던 주연이 아버지에게 화살을 쏜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년만 더 있으면 이사직에서 물러나야 하고, 또한 그것이 곧 퇴직이었다.
청혼을 받아놓고, 주연이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도 괴로와하였다. 그녀는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고민하는 아버지를 대할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약해졌다. 4 남매 중에 그녀가 맏이었다. 동생 셋이 줄줄이 학교를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생활 구조가 당장 바뀔 판이었다.
결국, 그해 4 월에 서로가 내키지 않은 약혼을 하였다. 그리곤 약혼자는 사진술을 배우겠다며 불란서로 날라버렸다.
주연이는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살았다. 그래도 하던 공부나 계속한다면서 미친 척하고 대학원을 다녔다. 그러나 어느 하루도 우울한 감정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꺼림칙한 결론을 생각하면, 때때로 죽고 싶은 감정도 생겼다.˙
7 월에 돌아온다던 약혼자는 8 월이 지나, 9 월이 되어도 귀국하지 않았다.
그럴 즈음에, 그녀는 시인 조대치를 만나 친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약혼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심저에서는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저항을 키우면서, 시인을 아름다운 감정으로 대하였다.
결혼일자를 10월 말로 잡아놓기는 했지만, 중순께까지도 약혼자는 귀국하지
않았다. 양쪽 집 안에서는 발을 동동거렸다.
아무래도 예정일에 식을 올리기는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깊게 들었다. 그러
나 주연이는 오히려 그렇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날짜가 하루하루 더해감에 따라 초조하였다. 제발 그가 영영 나타나지 않아 파혼이라도 됐으면 싶었다.
결혼일 열흘을 남겨놓고, 남자의 어머니가 불란서로 직접 가서 아들의 널미를 잡고 나왔다. 그도, 끝까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주연이는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넘 겨주었다. 마치, 막장의 떨이를 헐값에 처리하듯, 그녀의 이상과 온갖 그리움들을 몽땅 소각해 버렸다.
그는 아주 비벽한 인간이었다. 첫밤에, 그는 주연이의 옷을 홀랑 벗겨놓고 불을 있는 대로 밝혔다. 그리곤 카메라를 조작하였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불을 끄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그는 못들은 척,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그녀를 핥듯이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여자의 부끄러움을 존중해 달라고 애소하였다.
“부끄러움? 여자란 어차피, 밤에는 요부가 되는 게 아니겠소?”
“뭐라구요? 당신이라는 남자,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군요.”
“그렇소.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오. 당신도 결국 형편없는 아내가 될 것이오.
나는 사진을 찍는 일 외엔, 아무것에도 가치를 느끼지 않아요. 당신에게도 아내 이전에, 피사체로서의 가치를 찾고 있는 중이오. 미안하지만.”
“뭐라구요?”
그녀는 발가벗은 몸 그대로 일어나 그의 뺨을 갈겼다. 그는 볼을 만지며 마
치, 광인처럼 히죽거리며 호텔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는 나가버린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리곤, 그녀도 호텔방을 나와, 혼자 술을 마셨다. 신랑은 홀 저쪽에 앉아 있었다. 호스티스 같은 웬 여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둘이는 끝내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신부에게 오지 않았다. 그녀는 더는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웃어버렸다.
“선생님, 소승이 그렇게 지낸 적이 있었읍니다. 자신이 부끄럽기 그지 없읍니다.”
그녀는 몸을 돌려, 한동안 석탑을 어루만졌다. 나는 먹물이 바랜 그녀의 승복을 바라보며, 골짜기 바람보다 더 큰 한숨을 내쉬었다.
“법문엔 언제 들어왔읍니까?”
“부모님께 사연만 띄우고는 그길로 입산하였읍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저는 그대를 그리워했읍니다.”
“제가 행자로 있으면서, 이듬해 선생님이 결혼하신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산중에 있으면서 어떻게……·?”
“우연한 기외에 어면 문학지의 문인동정 란에서 읽었읍니다.”
“……”
“저는 그 다음 달에 계를 받아, 머리를 깎았읍니다.”
“슬픈 일입니다.”
“전생의 업보였나봄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오.”
“자녀를 두셨읍니까?”
“딸을 하나 두었소.”
그러자 그녀는 석 탑을 향해 합장을 하곤, 나무관세음보살을 수없이 반복해 외었다.
“범명은 무엇이라 합니까?”
“노스님이 연화(蓮華)라 지어주셨읍니다.”
“아까 보니, 벽에 그림과 시구가 있었습니다. 혹시 그대가……?”
“보잘 것 없읍니다만, 행자 때 노스님의 허락을 받아, 낙서 삼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부모님과는 그 후, 면대가 없었읍니까?”
“네에, 아직……·소승의 마음이 흔들릴까봐 두려웠음니다. 소승이 죄인일 따
름이지요.”
“입산하기 전에 저를 한번만이라도 만나줄 것을 그랬소.”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나간 인연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
“서울엔 언제쯤 떠나시렵니까?”
“한 열홀 있을 예정으로 왔읍니다.”
“……·네에.”
“또,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승은 이만 내려가야 되겠읍니다.”
그녀는 석 탑에 배례하고 앞장 서 내려갔다.
“말씀해주십시오. 또 찾아와도 되는지를.”
그러나 그녀는 대답 대신 걸음을 멈추고, 한동압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다시 걸음을 재촉하였다.
산길을 내려와 우리는 뜰 앞에 마주섰다.
“선생님, 소승을 아주 잊어주십시오.”
그리곤 고개를 깊게깊게 숙였다.
“제가 갑자기 나타나, 그대의 불심에 흠을 내었다면 용서 해주시오. 그러나……·.”
“소승은 이미 불가에 들어와 있읍니다. 먼 길, 안녕히 가십시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잠간 올려다보고는, 이내 등을 돌려 가버렸다.
나는 그냥 뜰에 서서, 그녀가 섰던 자리를 한참동안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목탁소리와 함께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가 암자를 혼들어놓았다. 그때, 승방에서 노승이 나와,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법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더 큰 목탁소리와 염불을 외는 소리가 그녀의 것과 어울렸다. 그녀의 마음을 달래려는 것일까, 불심을 돋우려는 것일까.
나는 이튿날까지 밥 한 끼로 배를 때우고, 종일 누워만 있었다. 그래도 배고픈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잠도 오지 않았다. 아침 저녁으로 울리는 범종소리가 갑자기 공허해진 내 가슴을 궁궁 울려놓곤 하였다. 그것은 확성된 그녀의 목탁소린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아무래도 내가 여기에 더 머물러서는 안될 것 같았다. 텅빈 내 가슴에, 자꾸 그녀의 목어가 들어와 앉았다. 아니, 그녀의 모든 것이 들어와 앉았다.
닷새째 되는 날, 나는 짐을 꾸렸다.
“열홀쯤 계시겠다더니, 벌써 떠나시려구요? 불편하셨군요.”
“그런 게 아닙니다. 급히 떠나야 할 일이 생겨서…….”
나는 암자로 다시 올라갔다. 그녀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 어쩌면 다시 못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 때문이었다.
노승이 뜰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다시 오실 줄 알았읍니다.”
노승이 합장하여 고개를 숙였다.
“연화스님 좀 뵈러 왔읍니다.”
“연화는 어제, 여길 떠났읍니다.”
“떠나다니요?”
“연화는 누구보다도 불심이 깊었읍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선생님이 다녀가신 그날, 연화는 밤새 깊은 번뇌에 시달렸읍니다.”
“……”
“중이 속세의 인연으로 번뇌하는 것은 불심이 약한 탓이지요.”
“……”
“그래서, 그 이튿날 스스로 떠났읍니다.”
“어디로 갔단 말씀입니까?”
“더 깊은 암자, 어디론가 갔겠지요. 나무관세음보살…….”
“정말입니까, 스님?”
“불가에서는 거짓을 행할 수 없읍니다.”
노승은 이내 법당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뜰에 못박힌 사람처럼 서서, 연화의 시구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눈물이 고여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뜰을 내려서며, 겹겹이 이어진 모악산 줄기를 바라보았다. 연화는 지금
쯤, 무수한 저 산들을 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화여, 연화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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