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종교개혁
마틴 루터보다 26년 늦게 프랑스의 노용에서 태어난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종교개혁 운동의 2세대에 해당했다. 그는 루터와 비슷한 측면도 있었지만, 다른 점도 적지 않았다. 루터는 법학을 전공하다가 중간에 그만 두었지만 칼뱅은 정식으로 교육받은 법학자이며 세속성을 강조한 신학자였다. 루터는 로마교회의 질서에 맞서서 교회의 전통을 주로 파괴하는 쪽이었다면 칼뱅은 다시 집을 건축하는 쪽에 가까웠다. 루터가 종교개혁에 역동적인 활력을 제공했다면 칼뱅은 제도를 통해서 체계화했다. 그리고 루터가 주로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집중한 반면 칼뱅은 스위스, 스코틀랜드, 프랑스, 헝가리를 비롯해서 북미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칼뱅은 루터의 신학을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같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칼뱅은 종교개혁에 투신하게 된 계기가 루터와 달랐다.
파렐과의 만남
칼뱅에게는 루터처럼 신앙적인 문제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한여름의 벼락같은 극적인 경험이 없었다. 언젠가 칼뱅은 친구를 돕기 위해 연설문을 작성해준 일이 있었다. 칼뱅은 글을 쓰면서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주장을 일부 포함시켰다. 그 연설은 프랑스 정부를 격노케 만들었고, 칼뱅은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즉시 도망쳐야했다. 그는 평생 자신이 따르던 가톨릭 신앙의 추종자들을 피해서 달아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개신교인이 되었다.
칼뱅은 처음에는 고향으로 피신했다. 그러나가 다시 노용에서 스위스로 향했다. 그는 1536년에 스위스에서 개신교 개혁신학의 고전이 된 <기독교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를 프랑스어로 집필했다. <기독교강요>를 출판하고 나서 칼뱅은 개신교인들의 도시인 스트라스부르로 옮겨가기로 결정했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전쟁을 만나서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서 제네바로 갔다. 처음에 그는 그곳에서 하룻밤만 묵어갈 생각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하나님의 섭리 덕분에 그곳을 영원한 안식처로 삼게 되었다.
하룻밤만 스위스 서쪽 끝에 위치한 제네바에서 묵어가겠다는 칼뱅의 생각은 설교자 귀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을 만나면서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다. 당시 파렐은 제네바 시민들에게 종교개혁 사상을 강력하게 전파하던 인물이었다. 칼뱅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 파렐에게 제네바를 찾아온 사람이 출판되자마자 5천 부가 순식간에 팔려나간 유명한 <기독교강요>의 저자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날 밤 늦게 파렐이 칼뱅이 묵고 있는 여관을 찾아왔다. 파렐은 칼뱅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이곳을 떠나지 마시오! 제네바는 당신처럼 재능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오.” 하지만 칼뱅은 완강했다. “하지만 나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파렐이 벌컥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만일 당신이 이런 상황을 외면하고 연구나 할 요량으로 휴식이나 안정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한 칼뱅은 어쩔 수 없이 제네바에서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리스도의 학교, 제네바
칼뱅은 제네바를 그리스도의 학교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성직자는 어떤 권력도 누릴 수 없었다. 교회생활은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종무원의 통제를 받았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제네바는 칼뱅의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칼뱅은 설교자로 임명받지 못한 채 성서 강사의 일을 담당했는데, 점차 파렐보다 영향력이 커졌다.
그는 파렐과 함께 세 가지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시의회에 제안서를 제출했다. 첫째, 성만찬을 매달 시행한다. 이를 위해서 시정부는 행실이 바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따로 구분해서 보고해야 했다. 둘째, 칼뱅이 만든 교리문답을 채택한다. 셋째, 시민들은 파렐이 작성한 신조를 강제로 따라야 한다. 제네바의 시민들은 칼뱅의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자신들과 계속해서 갈등을 빚고 있는 칼뱅과 파렐에게 그곳을 떠나달라고 요구했다. 1538년에 칼뱅은 스트라스부르로 떠났다. 그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는 것 같았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뱅은 프랑스 출신의 개신교인들을 위그노들(Huguenots)을 돌봤다. 그들 역시 칼뱅처럼 로마교회의 박해를 피해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칼뱅은 그곳에서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지만 본인이 그토록 희망하던 학문의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1539년 제네바에서는 로마의 어느 사상가와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인물을 필요했다. 시의회는 자존심을 접고서 칼뱅에게 돌아와 달라고 요청했다. 칼뱅은 답장을 보냈다. “하늘 아래 그토록 내가 무서워하는 데가 없습니다.” 그는 계속 망설이다가 몇 가지 조건을 달고서 부탁을 받아들였다.
칼뱅이 돌아왔을 때 제네바 시민들은 그가 자신들을 신랄하게 비난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칼뱅은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비난도 하지 않은 채 3년 전에 멈추었던 바로 그 대목 이후부터 설교를 해나갔다. 칼뱅은 교회와 정치권력의 관계를 규정한 교회법을 제정하고 실천적인 도덕법을 시행했다. 이후로 제네바는 그 자체가 하나의 교회이자 개신교의 로마가 되었다.
칼뱅은 ‘제네바 플랜’에 따라서 1559년에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교회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제네바 아카데미는 7년 과정이었다. 어린이부터 16세까지 참석할 수 있는 스콜라 프리바타(schola privata)와 대학과정에 해당하는 스콜라 푸블리카(schola publica)로 나누어졌다. 스콜라 프리바타는 라틴어와 프랑스어의 알파벳, 고전문학 그리고 성서의 일부 내용을 가르쳤다. 그리고 스콜라 푸블리카는 처음에 교양과목과 신학만을 가르쳤지만, 나중에는 칼뱅의 요구에 의해서 법학과 의학이 따로 추가되었다.
칼뱅은 교양과목에 자연과학과 수학을 포함시켰는데, 이는 자연을 하나님의 옷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연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작업을 탐구하면서 그 창조주는 잊어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스콜라 푸블리카는 나중에 제네바 대학교로 발전했다. 이곳에서 존 낙스를 비롯한 외국인이 신학을 공부하고 개혁 장로교회와 청교도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