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라는 지명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템즈강 북쪽의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그 주변 일대를 대략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행정구역으로 존재하는 시티 오브 웨스트민스터는 대략적으로 말하는 웨스트민스터보다 넓다. 어원은 서쪽을 뜻하는 west와 수도원을 뜻하는 minster를 합친 것이다.
역사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시(City of Westminster)와 런던 시(City of London)은 별개로 생겨났고 웨스트민스터 시는 그레이트 런던, 런던시(City of London)은 시티 오브 런던이 되었다.
오늘 날 국회의사당인 이 건물은 애초 궁으로 출발했다
볼거리는
1016-1035년 사이 준공으로 웨스트민스터궁전( 영국 국회의사당이자 빅벤이 위치한 건물),
웨스트민스터 사원(성공회),
웨스트민스터 대성당(가톨릭),
웨스트민스터 역,
화이트 홀( 다우닝가 10번지 주변에는 재무장관 관저, 영국 외무부, 영국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 등 정부 청사들이 위치해있고 이들을 화이트 홀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
다우닝가 10번지 (영국총리 관저이나 언론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등이다.
비스듬히 찍힌 것이 빅벤,
영국 런던의 랜드마크이자 영국 국회의사당의 상징이기도 한 대형 시계탑 속의 종이다.
원래 정식 명칭이 딱히 없이 시계탑(the Clock Tower) 또는 세인트 스티븐스 타워(St Stephen's Tower)로 불리다가 2012년 6월 이후로는 엘리자베스 타워(Elizabeth Tower)가 되었다.
그보다는 빅 벤이라는 종의 이름이 사실상 탑의 이름처럼 불리고 있어 정식 명칭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다.
웨스터민스터의 남쪽 빅토리아 타워와 대칭이 되도록 북쪽에 건축했고 1859년 E.베켓이 설계하여 빅토리안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이름은 공사를 담당했던 벤저민 홀 경(sir)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혹은 덩치가 컸던 그의 애칭으로부터 유래한다.
아래 사진을 보면서 시계에 관한 설명 그냥 넘어가자
위 설명에 나오는 남쪽의 빅토리아 타워다
웅장하고 거대한 모습은 보는이의 시각을 휘저어버린다
영국 왕실역사에 큰 폭탄을 터뜨리고 의회사에 기여한 올리버크롬웰 동상이 왜 여기 서 있나 싶었는데 곧 짐작으로 궁금증을 풀었다.
1642년부터 1351년까지 찰스1세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와 잉글랜드 의회를 중심으로 한 의회파가 3차례에 걸쳐 벌인 대규모 내전이 있었다.
여기서 의회파 크롬웰이 승리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을 때 청교도식 법규를 기반으로 하여 통치했기에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ution)이라고도 불린다.
한때는 '청교도 혁명'으로 자주 불렸지만 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진지한 고찰에 들어간 20세기 후반부터 콘래드 러설(Conrad Russell) 등 수정주의 성향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혁명성이 부정되고,
일반적으로는 잉글랜드 내전이라고 한다. 단적으로 영문 위키백과의 표제어가 English Civil War이다.
그 과정을 좀 소상히 설명하면,
1642년 여름, 찰스1세는 외국인 용병들을 바탕으로 조카들이 이끄는 강한 군대를 앞세우며 내전을 개시했다.
반면 의회파의 군대는 대부분 토호들이 각 지방에서 긁어모은 오합지졸들이었으며, 그나마 자기 고향 밖으로 출정하기를 꺼렸다. 하지만 왕당파 역시 그리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양측은 첫 전투( 엣지힐 전투)에서 졸전을 벌이는 등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1643년,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가 <엄숙동맹>이라는 것을 체결하였다.
대신 의회는 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국교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다 1644년 마스트 무어 전투에서 대활약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전세가 역전된다.
그가 창설한 신모범군은 엄격한 규율과 훈련, 그리고 높은 사기를 갖춘 군대였다.
특히 그들의 높은 사기는 종교적 열정의 힘으로써, 싸움터에서도 늘 성경을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찬송가를 불렀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적인 왕당파 군대가 곧 사탄의 군대이며,
자신들은 "곧 이루어질 것이 분명한" 재림 예수의 천년왕국을 이룩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이들이 연거푸 승리하자 크롬웰은 의회에서 점차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그가 이끄는 급진파가 온건파를 누르고 의회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결국 네이즈비 전투에서 참패한 찰스 1세는 대세가 기울자 스코틀랜드로 도망쳐 투항했으나,
찰스 1세를 싫어하던 스코틀랜드는 400,000 파운드를 받고, 크롬웰에게 찰스 1세를 인계해버린 후 잉글랜드에서 철수해버렸다.
이래서 역사가 재미있다는 말이 나온다
의회 측에 의하여 감금된 찰스 1세는 의회파의 손아귀 내에서 외부와 끈질기게 연락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의회파의 구금에서 탈출한 후 왕을 팔아버린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고( 뭔 짓인지는 모르지만 복잡한 흥정들이 있었겠지)군대를 재조직하였다.
한편 의회 내부에서 급진 개혁을 추구하는 수평파와 이를 저지하려는 크롬웰의 독립파가 충돌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왕당파가 2차 내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크롬웰의 신형군이 프레스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면서 왕당파는 1년 만에 또다시 패배 진압당했고,
찰스 1세는 재차 포로로 구금되었다. 크롬웰은 더 이상 국왕을 살려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의회에 찰스 1세를 처형하라고 건의했으나, 의회 내 온건파는 처형에 주저하며 크롬웰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자 분노한 크롬웰은 1648년 12월,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기습하여 찰스 1세의 처형에 반대하는 200여 명의 온건파 의원들을 축출하여 가두어 버리고,
50여 명 남짓의 크롬웰 지지자들로만 의회를 편성했다.
이를 잔부 의회라고 한다. 마침내 왕을 재판할 최고법원을 열었다. 1649년, 찰스 1세는 반역죄로 사형 선고 후 처형 되었다. 이어 1649년 1월 30일, 군주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왕권 신수설을 끔찍히도 주장했든 그였지만 세상 민심의 변화 대처에 눈멀었든 탓으로 목이 잘리는 신세가 된다.
왠만하면 비록 전투에서 패한 왕이었지만 목슴만은 부지해 주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으나 굿이 그랬나 하는 생각.
올리버 크롬웰의 정치적 입장은 그의 청교도적 신앙과 군사적 성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의회파의 군사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얻었고, 이를 발판으로 정치가가 되어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을 주도하고 잉글랜드 연방에서 호국경이 되었다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으로서 행한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
국왕 처형 및 왕정 폐지: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왕정을 폐지하여 잉글랜드 연방이라 불리는 공화정을 세웠다
청교도 혁명: 그는 청교도 혁명을 이룩하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나라를 통치하는 종신호국경의 자리에 올랐고,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정벌: 크롬웰은 왕당파의 중심지인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정벌하여 영국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내비게이션 법 (Navigation Acts): 해외 식민지로 수송하는 배와 연안무역은 영국배로 한정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여,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통해 해상권을 장악.
중상주의 정책: 크롬웰은 자신을 지지하는 중산시민의 권익을 옹호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시작하였다.
통치장전 (Instrument of Government): 크롬웰은 성문헌법인 통치장전에 기하여 군사독재를 행하였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성격을 보였던 수평파를 탄압하는 결과를 낳았다.
청교도적 사회 개혁: 그는 철저한 청교도 신앙을 바탕으로 극장 폐쇄, 도박, 경마, 투계 등 대중적인 오락을 금지하는 등의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것도 하지마라 저것도 하지마라 노래도 춤도 다 뭣도 하지마라
오직 청교도 정신으로 하느님과 성경과 찬송가에만 눈 떠라.
국민들은 여기에 질린다. 오늘 날 영국 음식이 맛없고 형편없다는 평은 여기서 부터 출발이다
이런 크롬웰의 정책은 당시 영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의 통치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정책들은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청교도적 가치관에 기반한 사회 개혁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가 영웅인지 잘못된 독재자인지 오늘 날 까지 헷갈리게 만든다
말년과 최후,
그는 1658년 9월 3일, 59세의 나이로 사망.
그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인플루엔자로 인한 합병증이나 말라리아로 인한 것으로 추정.
사망 후, 완전히 판이 바뀌는데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의 지위를 계승했으나,
리더십 부재와 군대의 지지 상실로 인해 ,실패한다.
공화정이란 걸 해보니 백성들이 청교도고 뭐고간에 사람이 먹을거 먹고 입을거 입고 즐길거 즐기며 사람답게 살아야지 하며 민심은 급변하였고,
결국은 왕이 군림하든 나발을 떨든간에 일상생활의 기본적 자유가 있었든 왕정이 낫다.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프랑스로 쫒겨난 찰스 2세가 왕위에 복귀한다.
왕정복고 이후, 크롬웰의 시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 처음 여기 묻였다. 소개한데로)에서 끌려나와 타이번에서 부관참시 된다.
그의 머리는 참수된 후 30년 동안 런던탑 밖의 창끝에 매달려 있었고, 이후 케임브리지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그의 모교라고 하는 켐브리지의 전신)에 재매장되었고 크롬웰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다양하며,
여기 있는 그의 동상에 대한 철거 논란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크롬웰은 다양한 개신교 분파 중에서도 독립파를 지지하는 청교도였으며, 자신의 성공을 신의 섭리에 따른 결과라고 믿었다. 그는 여러 종파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지지했지만, 퀘이커나 제5왕국파와 같은 일부 종파는 이단으로 간주하여 반대했고
1653년,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하고 종신집권을 하며 호국경이 되어 독재정치를 실시했다. 그의 정치는 철저한 청교도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극장 폐쇄, 도박, 경마, 투계 등 대중적인 오락을 금지하는 등 대중들에게 반발을 샀다. 그는 군대와 소수 특정 상인들만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의 정치적 입장은 영국의 정치와 종교를 개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올리버 크롬웰 초상화
반 다이크가 그린 명화로 찰스 1세 3중 초상화
웨스트민스터 홀. 현재까지 살아남은 중세 웨스트민스터 궁의 가장 오래된 흔적이다.
여기 까지는 촬영이 자유로웠으나
여기 부터는 촬영이 금지
촬영이 흐리다
빅톡리아 여왕
의회내의 왕의 자리. 당연히 촬영은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