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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後秦, 384~417)의 승조(僧肇, 384~414) 스님이 쓴 《조론(肇論)》은 중국 사상사와 중국불교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유명한 책이다. 《조론》의 등장 과정은 약간 특이하다. 남조 송나라(宋, 420~479) 명제(明帝, 439~465~472)의 명을 받은 중서시랑(中書侍郎) 육징(陸澄, 425~494)이 편찬한 《법론목록(法論目錄)》에 〈부진공론(不眞空論)〉은 법성집(法性集)에,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은 각성집(覺性集)에,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은 반야집(般若集)에, 〈물불천론(物不遷論)〉은 물리집(物理集)에 각각 기재되어 있다. 《고승전》 권제6 〈승조전〉에는 〈반야무지론〉 〈부진공론〉 〈물불천론〉 〈열반무명론〉 순서로 글들이 발표됐다고 나온다. 〈종본의(宗本義)〉에 관한 기록은 없다. 지금의 《조론》에 있는 〈종본의〉 〈물불천론〉 〈부진공론〉 〈반야무지론〉(유유민 거사의 질문 편지와 승조 스님의 답변 편지 포함), 〈열반무명론〉 등은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쓴 글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남조 진나라(陳, 557~589)의 혜달(惠達) 스님이 지은 《조론소(肇論疏)》에는 〈열반무명론〉 〈부진공론〉(이상 권상), 〈반야무지론〉(유유민 거사의 질문 편지와 승조 스님의 답변 편지 포함), 〈물불천론〉(이상 권중) 순서로 편성되어 있고, 당나라(唐, 618~907) 정관(貞觀, 627~649) 연간에 활동한 원강(元康) 스님이 찬술한 《조론소(肇論疏)》에는 〈종본의〉 〈물불천론〉 〈부진공론〉(이상 권상), 〈반야무지론〉(유유민 거사의 질문 편지와 승조 스님의 답변 편지 포함, 권중), 〈열반무명론〉(권하) 순서로 편제되어 있다. 두 책의 목차가 다르다. 전자에는 〈종본의〉가 없다.
승조 스님은 언제 이 글들을 지었을까? 《고승전》과 선학(先學)들의 연구 결과 등을 종합하면 〈반야무지론〉은 404년에서 408년 사이, 〈부진공론〉과 〈물불천론〉은 409년에서 413년 사이, 〈열반무명론〉은 413년에서 414년 사이에 각각 찬술됐다. 띄엄띄엄 발표된 글들은 승조 스님 사후 누군가에 의해 《조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권의 책으로 편집됐다. 승조 스님의 ‘조(肇)’와 묻고 답하는 가운데 진리를 논의하는 글이라는 의미의 ‘논(論)’ 자가 붙어 《조론》이 됐다. 혜성처럼 등장한 《조론》은 여러 점에서 중국 사상사와 중국불교 사상사에 새로운 기운과 흐름을 만들어 냈다.
첫째, 《조론》은 ‘독창적인 저술’이자 ‘종합적인 저서’이다. ‘하나의 사상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에서 본다면 《조론》은 승조 스님 이전의 중국불교가 온축한 결과물의 발현이다. 불교가 처음 전해진 전한(BCE 206~CE 8) 말 후한(25~220) 초 당시의 중국인들은 불교를 황(黃) · 노(老) 사상과 비슷한 방술(方術) · 도술(道術)의 하나로, 부처님은 황제(黃帝) · 노자(老子)와 같은 신선의 한 명으로 여겼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중국인들은 부처님은 신선과 비슷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됐고 전래 후 250년에서 30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스스로 교의를 연구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됐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인도불교의 사상과 학설들이 끊임없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들을 연구하며 중국인들은 중국 사상의 한 부분이지만 ‘중국의 전통사상’ 및 ‘인도불교’와 다른 ‘중국불교’를 일궈냈다. 특히 ‘인도불학(印度佛學)’을 흡수하며 형성된 ‘중국불학(中國佛學)’은 ‘중국불교의 구성요소’이자 다른 나라의 그것과 차이 나는 ‘독자적인 풍취’를 갖게 됐다. 인도불교와 인도불학을 섭취 · 소화하고 썼다는 점에서 《조론》은 ‘독창적인 책’이며 승조 스님 이전의 중국 불교인이 쌓아놓은 학문적 업적들에 의지했다는 점에서 《조론》은 ‘종합적인 책’이다. 《조론》은 ‘중국불교’와 ‘중국불학’의 토대 위에 세워진 ‘하나의 훌륭한 탑’이라 하겠다.
둘째, 《조론》은 ‘산스끄리뜨어’와 ‘중국어’의 교류와 회통에 새로운 모범을 보였다. 불교의 중국적 변용에 무엇보다 큰 힘이 된 것은 ‘불교의 성서(聖書)’들을 고전 중국어로 번역한 ‘역경(譯經)’이다. 역경이 없었다면 방대한 학문적 업적과 찬란한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중국불교나 동아시아불교는 그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외래문화가 다른 지역에 들어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그 지역의 상황에 맞게 변용될 필요가 있고 변용을 위한 최선의 무기가 바로 ‘번역’이다. 현지 언어로 설명할 때 ‘전파된 사상’은 그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고 그곳에 사상적 · 문화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기점언어(source language)’인 산스끄리뜨어와 ‘목표언어(target language)’인 고전 중국어를 모두 아는 번역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상황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전래 초기 역경의 주체는 인도나 서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산스끄리뜨어를 익숙하게 한 최초의 중국인은 4세기 후반의 역경사 축불염(竺佛念) 스님이다. 《고승전》 권제1 〈축불염전〉에 “중국말과 서역 말의 소리와 뜻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華戎音義, 莫不兼解].”라고 기재되어 있을 정도로 스님은 두 언어에 뛰어났다. 역경사(譯經師)들은 이런저런 ‘역경(逆境)’들을 이겨내고 거의 1천 년에 걸쳐 ‘불교의 성경’을 중국말로 옮겨 세계 역경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업적을 이뤘다.
불전 목록의 모범으로 평가되는, 당나라 지승(智昇) 스님이 730년[개원 18] 편찬한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따르면 후한 명제 영평(永平) 10년[67]부터 헌제 연강(延康) 원년[220]까지 역경자[역경의 책임자인 역주(譯主)]는 12명, 번역된 경전[경 · 율 · 논]의 수는 합계 292부 395권이었다. 이 가운데 97부 131권이 당나라 개원 연간(713~741)에도 전해지고 있었다. 조비(曹丕, 187~220~226)가 황제로 즉위한 220년[황초(黃初) 원년]부터 위나라가 망한 265년[함희(咸熙) 2년]까지 번역된 경전의 숫자는 12부 18권, 역경자[역경의 책임자인 역주]는 5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4부 5권은 개원 연간에 볼 수 있었고, 8부 13권은 당시 이미 전해지지 않았다.
후한 중 · 후기부터 역경이 시작돼 읽을 수 있는 경전의 숫자가 증가하자 중국인들의 ‘산스끄리뜨어에 대한 이해 수준’도 그에 따라 점차 높아졌다. 산스끄리뜨어에 대한 앞 시대의 축적된 연구 · 이해가 있었기에 승조 스님이― ‘경전 목록 편찬’이나 ‘경전 해설[注釋]’이 아닌― ‘전파된 불교사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중국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반야무지론》을 읽은 스승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343~413) 스님이 “경전에 대한 이해와 해설은 내가 그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만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점에 있어서는 내가 자네보다 못하다[吾解不謝子, 辭當相揖].”라고 말할 정도였다. 승조 스님의 학우인 축도생(竺道生, 365~434) 스님이 408년 여름 〈반야무지론〉을 여산의 혜원(慧遠. 334~416) 스님과 유유민 거사 등에게 전달했다. 이를 읽은 유유민 거사는 “스님 가운데 뜻밖에도 평숙이 있을 줄이야[不意方袍, 復有平叔]!”라며 감탄했고, 혜원 스님도 “(이런 글은) 일찍이 없었다[未常有也]!”라며 찬탄을 연발했다고 〈승조전〉에 기록되어 있다.
셋째, 《조론》은 인도 ‘중관파의 사상’과 ‘반야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중국어로 쓴 최초의 책이다. 《조론》과 관련해 승조 스님 이전에 번역된 경전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이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이다. 구마라집 스님과 승조 스님이 활성화한 분야가 반야학이기 때문이다. 중국불교의 반야사상은 구마라집 스님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179년 지루가참 스님이 《도행반야경》을 옮긴 때부터 구마라집 스님이 장안에 들어온 401년까지를 전기, 구마라집 스님부터 길장(吉藏, 549~623) 스님까지를 후기로 본다.
후한 영제 광화 2년[179] 지루가참 스님이 옮긴 《도행반야경》 10권; 오나라 손권 황무 7년[228] 지겸(支謙) 거사가 역출(譯出)한 《대명도경(大明度經)》 6권; 서진 무제 태강 7년[286] 축법호 스님이 번역한 《광찬반야경(光讚般若經)》 10권; 서진 혜제 원강 원년[291] 무라차(無羅叉) 스님과 축숙란(竺叔蘭) 거사가 함께 한역한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 20권; 전진의 부견 왕 건원 18년[382] 축불염 스님이 번역한 《마하반야초경(摩訶般若鈔經)》 5권 등이 전기에 모습을 드러낸 반야계 경전들이다.
401년 12월 20일 장안에 도착한 구마라집 스님도 많은 경전을 번역했다. 401년부터 413년까지 양과 질에서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방대한 작업을 진행했다. 구마라집 스님이 옮긴 책 중에는 ‘반야계 경전’과 ‘중관(中觀) 관련 논서’도 적지 않다. 《금강반야바라밀경》 1권,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 2권, 《마하반야바라밀경》(《대품반야경》) 27권, 《소품반야바라밀경》 10권,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 1권, 《중론》 4권, 《십이문론》 1권, 《백론》 2권, 《십주비바사론》 17권 등이 대표적이다. 역경을 통해 반야 · 중관을 비롯한 대승불교의 핵심 개념들이 중국인에게 명료하게 소개됐다. 흉노(凶奴) · 갈(羯) · 선비(鮮卑) · 저(氐) · 강(羌) 등 다섯 민족이 번갈아 16국을 세웠다는 16국 시대(304~439)에 주로 활약했던 6가7종[六家七宗, 반야사상에 대한 이해 방식이 서로 달랐던 일곱 개의 학파]에 소속된 학승 · 학자들이 대략 ‘도가(道家)의 실재론적 무(無)와 비슷한 그 무엇’으로 개념 · 내용을 오해했던 ‘공(空) 사상’은 이때야 비로소 ‘얽힘’을 풀 수 있었다. 구마라집 스님이 옮긴 경전을 읽으며 ‘핵심 교의’를 이해한 중국인들은 중국불교의 전성기인 ‘수나라 · 당나라 시대의 불교학[隋唐佛學]’을 일궈냈다.
승조 스님도 역경에 참여했으며 자연스레 ‘공 사상’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구마라집 스님의 ‘지도’와 역경 과정에 체득한 ‘학식’ 등이 있었기에 승조 스님은 ‘비유비무(非有非無)를 정확하게 이해한 최초의 중국인’이라는 ‘사상적인 월계관’을 쓸 수 있었다. “공 사상을 제일 잘 이해한 사람은 바로 승조 스님이다.”라는 구마라집 스님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넷째, 《조론》은 ‘위진현학(魏晉玄學)’의 흐름을 ‘수당불학(隋唐佛學)’으로 돌린 선구적인 저작이다. 위진현학이 마무리되고 중국 불교철학이 시작된다는 점을 알린 저술이 바로 《조론》이다. 위진남북조시대(220~589)의 주류 사상은 불학이 아닌 현원지학(玄遠之學), 즉 현학이었다. 추상적인 개념과 사변으로 경험 세계를 넘어서는 유(有) · 무(無), 본(本) · 말(末)[만물의 근원, 즉 본체론], 재능과 성질[인성(人性) 탐구], 일(一)과 다(多)[사회가 존재하는 근거], 성인의 조건[이상적 인격] 등을 주요한 주제로 다룬 학문적 흐름이 현학이다. 노장철학을 토대로 유가와 도가의 조화를 꾀하고 ‘자연(自然)’과 ‘명교(名敎)’를 융통하려 한 ‘철학적인 사조’가 현학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은 만물 존재의 근거, 즉 도(道)의 또 다른 명칭 혹은 본체 · 근본이라는 뜻이며 ‘명교’는 삼강 · 오륜 등 사회생활의 준칙을 가리킨다. 유가는 명교를 숭상했고 도가는 자연을 근본으로 여겼다.
시대적 · 사상적 흐름 속에서 탄생한 위진현학의 중심인물은 하안 · 왕필 → 혜강 · 완적 → 배위 → 곽상(郭象) 등으로 바뀌었으며 학설은 하안 · 왕필의 귀무론(貴無論) → 완적 · 혜강의 자연론(自然論) → 배위의 숭유론(崇有論) → 곽상의 독화론(獨化論) 등으로 변천했다. 정시(正始) 시기 현학(240~249) → 죽림(竹林) 시기 현학(255~ 262) → 원강(元康) 시기 현학(291~299) 등으로 나눌 수도 있다.
귀무론의 대표자는 하안(何晏, 190?~249)과 왕필(王弼, 226~249)이다. 이들 사상의 핵심이 《진서(晉書)》 권43 〈열전 제13 · 왕연전(王衍傳)〉에 기록되어 있다. “천하 만물은 모두 무를 근본으로 한다[天地萬物, 皆以無為本].”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왕필은 ‘무’를 ‘본체론적인 도(道)’로 해석했다. 왕필이 지은 《논어석의(論語釋疑)》에 나오는 “도는 무를 말하는 것이다. 무는 통하지 않음이 없고 무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하물며 무를 도라고 말하는 것은 텅 빈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형체가 없고 모양으로 만들 수 없다. 이 도는 형체로 드러낼 수 없기에 다만 마음과 뜻으로 흠모할 따름이다.”라는 구절에서 분명히 추론할 수 있다. ‘무’에서 ‘유’가 나오고 무가 바로 ‘도’라는 하안과 왕필의 이론은 발생론 · 실재론적인 경향이 강하다.
귀무론에 이어 등장한 현학 사조는 죽림 시기의 자연론이다. 대표자는 완적(阮籍, 210~263)과 혜강(嵇康, 223~262)이다. 둘 다 ‘죽림 7현’에 포함된다. 《진서(晉書)》 권49 〈열전 제19 · 혜강전〉과 《세설신어》 〈임탄(任誕)〉 편에 ‘대나무 숲속의 일곱 현인[竹林七賢]’에 대한 기록이 있다. 완적과 혜강의 현학 사상은 전기와 후기가 다르다. 전기, 즉 정시(正始, 240~249) 이전엔 ‘자연’과 ‘명교’의 결합을 추구했다. 정시 이후, 즉 후기엔 ‘자연’이 근본이고 ‘명교’는 지말(枝末)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249년 사마의(司馬懿, 179~251)가 ‘고평릉사변(高平陵事變)’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조씨와 사마씨 간의 정쟁에서 사마씨가 우위를 차지하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마의의 둘째 아들 사마소(司馬昭, 211~265)를 중심으로 한 사마씨 집단이 명교를 이용해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기 시작하자 둘의 사상도 ‘자연’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했다. 종회(鍾會, 225~264)의 참소와 사마소의 견제로 (사마소에게) 무고하게 살해된 혜강은 〈태사잠(太師箴)〉 〈석사론(釋私論)〉에서, 완적은 〈대인선생전(大人先生傳)〉에서 각각 일그러진 명교를 강하게 비판했다.
‘자연’을 존중하고 ‘명교’를 낮춰보는 자연론 현학의 신봉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술에 취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마치 사리에 통달한 양 여기기 시작했다. ‘무’를 중시하는 ‘귀무론’과 방종한 생활을 소요유(逍遙遊)인 양 여기는 ‘자연론’의 폐단이 지나치자 원강 시기 배위(裵頠, 267~300)가 《숭유론》을 지어 이들을 비판했다. 배위에 이어 현학 사상의 무대에 등장한 곽상(郭象. 253~312)은 ‘무’가 ‘유’를 만들어 낸다는 점도 ‘유’가 능히 ‘무’를 생기게 한다는 점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다만 만물은 “홀로 스스로 생겨난다[塊然而自生].”고 주장했다.
곽상 이후 동진 시기(317~420)를 살았던 장담(張湛. 370~?)이 현학을 새롭게 구성하려 했으나 귀무론 · 숭유론 등을 종합하는 정도였으며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지는 못했다. ‘실재론’에 가까운 현학의 무 · 유 개념을 대체할 새로운 사유 방식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고, ‘귀무’에서 ‘숭유’로 ‘숭유’에서 ‘독화’로 발전한 현학 사조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는 점도 이유의 하나였다. 이러한 때인 홍시(弘始) 11년(409) 구마라집 스님이 《중론》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특히 반드시 존재한다고 하면 상주론에 빠지고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단멸론에 떨어진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마땅히 유와 무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라는 《중론》 〈관유무품〉의 열 번째 게송과 “여러 원인과 조건들의 결합으로 나타난 모든 존재를 나는 공(空)하다고 말하며, 이것을 가명(假名)이라고도 하며, 이것이 바로 중도의 의미이다.”라는 《중론》 〈관사제품〉의 열여덟 번째 게송은 위진현학의 실재론적 유 · 무 개념을 뛰어넘는 활로를 열었다.
인(因)과 연(緣)의 결합으로 출현한 현상 · 존재[사물 · 개념 · 관념]는 ‘유’라고 말할 수 없고 ‘무’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비유비무(非有非無)’에 입각해 지은 글이 바로 승조 스님이 409~413년 발표한 〈부진공론〉이다. 만물은 본질적으로 ‘공한 성질[空性]’을 갖고 있으며 모든 존재는 ‘성질상 공한 성품[性空]’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반야 · 중관 사상이 구마라집 스님과 함께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며 현학 사상의 토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론》에 표현된 ‘공 사상’이 그 공간을 채웠고 사상계의 흐름도 현학에서 불학 쪽으로 점차 옮겨갔다.
다섯째, 불교의 중요한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는 《조론》은 후대의 중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의 감산덕청(憨山德清, 1546~1623) 스님은 《조론략주(肇論略注)》에서 “〈물불천론〉은 속제에 합당하고 〈부진공론〉은 진제에 적합하며 속제 · 진제인 이제는 객체인 보이는 대상이 되고, 〈반야(무지론)〉는 주체인 관찰하는 마음이 된다. 〈물불천론〉 〈부진공론〉 〈반야무지론〉 등 세 편은 인(因)이 되고 〈열반무명론〉은 과(果)가 된다.”; “앞의 〈물불천론〉과 〈부진공론〉은 속제와 진제가 둘 아닌 진리임을 밝혔다.”; “앞의 〈물불천론〉과 〈부진공론〉은 대상인 경(境)을 밝힌 것이고 〈반야무지론〉은 관찰하는 지혜를 설명한 글로 세 편 모두 원인[因]이다. 이들 원인에 대해 〈열반무명론〉은 결과[果]인 깨달음이 된다. 그래서 전체는 한 편의 논(論)이 된다.”고 해설했다. 속제 · 진제 · 지혜 · 열반, 즉 〈물불천론〉 〈부진공론〉 〈반야무지론〉 〈열반무명론〉 등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불교의 중요 개념들을 설명했다는 것이다. 《조론》이 삼론종 개창에 필요한 사상적인 기반을 제공하는 등 후대의 중국불교 · 사상계에 지우기 힘든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위진남북조,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등 시대마다 《조론》을 주석한 책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론집해령모초(肇論集解令模鈔)》에 따르면 당나라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출간된 《조론》의 주석서는 20여 종이다. 물론 원나라, 명나라 때 저술된 것도 적지 않다. 이들 가운데 위진남북조시대 남조 진나라의 혜달 스님이 지은 《조론소》 3권, 당나라 원강 스님이 627~649년 찬술한 《조론소》 3권, 북송(北宋, 960~1127)의 원의준식(圓義遵式, 1042~1103) 스님이 저술한 《주조론소(注肇論疏)》 6권, 북송의 비사(秘思. 994~1056) 스님이 1053년 강술한 내용을 토대로 북송의 정원(淨源. 1011~1088) 스님이 1058년 집해(集解)한 《조론중오집해(肇論中吳集解)》 3권, 정원 스님이 1061년 찬술한 《조론집해령모초(肇論集解令模钞)》 2권, 남송의 몽암(夢庵) 스님이 강술한 《몽암화상절석조론(夢庵和尙節釋肇論)》 2권, 원나라 문재(文才. 1241~1302) 스님이 저술한 《조론신소(肇論新疏)》 3권, 원나라 문재 스님이 주해(注解)한 《조론신소유인(肇論新疏游刃)》 3권, 명나라 감산덕청 스님이 1616년 짓고 1617년 출간한 《조론략주》 6권 등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명나라 월천진징(月川鎭澄, 1547~1616) 스님이 1588년 발표한 《물불천정량론(物不遷正量論)》, 명나라 환거진계(幻居眞界) 스님이 1597년 저술한 《물불천론변해(物不遷論辯解)》, 명나라 도형(道衡) 스님이 1603년 찬술한 《물불천정량논증(物不遷正量論證)》, 명나라 용지환유(龍池幻有, 1549~1614) 스님이 저술한 《박어(駁語)》(1606년) 《성주석(性住釋)》(1606년) 《물불천제지(物不遷題旨)》 등 적지 않은 주석서들이 현존한다. 중국불교의 어느 시대에도 《조론》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경덕전등록》 권제27 〈제방잡거징염대별어(諸方雜舉徵拈代別語)〉에 승조 스님이 요흥왕으로부터 사형을 언도받고 집행되기 직전에 지었다는 게송, 즉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오온은 본래 공하다. 칼날이 머리를 베어 떨어뜨리는 것은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다[四大元無主, 五陰本來空. 將頭臨白刃, 猶似斬春風].”라는 ‘임종게’가 실려 있다. 청나라(清, 1636~1911) 세종 옹정제(雍正帝, 1678~1722~1735)는 《어선어록(御選語錄)》 권제1 〈대지원정성승조법사론(大智圓正聖僧肇法師論)〉에서 “승조 스님이 지은 게송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요흥왕이 승조 스님에게 사형을 내렸다.”라는 《경덕전등록》의 기록은 “당시 승조 스님이 (요흥왕으로부터) 받은 존경이 이와 같았다.”라는 《고승전》 권제6 〈승조전〉의 내용과도 다르다.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불교학자 가운데 한 명인 탕용통(湯用彤, 1893~1964)도 《한위양진남북조불교사》 제10장 〈승조략전(僧肇略傳)〉에서 “《경덕전등록》 제27권에 ‘승조 스님이 요흥왕에게 사형을 당할 때 게송을 지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 이전에 이런 말이 없는 것 같고 게송의 단어도 속되고 천박해 필시 정확한 것이 아니다.”라며 옹정제의 주장에 동조했다. 일본 학자 마키타 타이료(牧田諦亮, 1912~2011) 역시 〈《조론》의 유전(流傳)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 게송은) 선가(禪家)에서 사실과 다르게 전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게송의 내용과 문체도 조악한 편이다. 위작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조론》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었다. 원효(元曉, 617~ 686) 스님이 찬술한 《금강삼매경론》 권하 〈총지품 제8〉에 〈부진공론〉의 마지막 구절, 즉 “승조 스님이 말한 것과 같다. ‘그러면 깨달음은 멀리 있는가? 사물의 본성[空性]을 체득하는 그것이 바로 진리[中道]를 증득하는 것이다. 성스러움은 멀리 있는가? 중도를 체험하는 그것이 곧 신령스러움이다.’”라는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삼국유사》 권제4 〈의해(義解)〉 편 ‘이혜동진(二惠同塵)’ 조에도 《조론》이 등장한다. “혜공 스님이 일찍이 《조론》을 보고 ‘이것은 내가 옛날에 지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혜공 스님이 승조 스님의 후신임을 이로써 알 수 있다.”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 역시 《조론》을 언급했다. 의천 스님이 1090년 편찬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전 3권. 1,010부 4,857권 수록) 권제3에 적지 않은 《조론》 주석서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 현존하지 않는 주석서들이다. 《대각국사문집》 권제20에 실려 있는 〈해 좌주를 전송하며[送海座主]〉라는 시의 제4구에 “강산이 비록 멀지만 마음이 계합하면 바로 이웃이 된다.”라는 〈반야무지론〉의 한 구절이 협주(夾注)로 부기(附記)되어 있다. 이 구절은 유유민 거사가 보낸 편지에 승조 스님이 답변하며 쓴 것이다. 현행본에는 “江山雖緬, 理契即隣.”으로 되어 있는데 《대각국사문집》 권제20에는 “《肇論》云: ‘江山雖繞, 道契即隣.’”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장자》를 주석한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를 지었는데 이 책에 《조론》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대종사〉 편에 나오는 “무릇 배를 계곡에 숨겨놓고 산을 못에 감춰두고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밤에 힘 있는 사람이 지고 가버려도 어리석은 사람은 이를 모른다(夫藏舟於壑, 藏山於澤, 謂之固矣. 然而夜半有力者負之而走, 昧者不知也).”라는 문장을 〈물불천론〉에 나오는 구절로 설명해 놓았다. 인용문은 원문과 다소 다르며 원문의 괄호 친 부분은 인용되지 않았다(앞 페이지 도표 참조).
《금강삼매경론》 《대각국사문집》 《신편제종교장총록》 《삼국유사》 《남화경주해산보》 등에 인용되었다는 점에서 신라시대 이래 우리나라의 지식인들도 《조론》을 적지 않게 읽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륵보살이 깨달음을 증득하면 모든 중생도 깨달음을 증득한다.”라는 《유마힐소설경》 권상 〈보살품〉에 나오는 구절이 현행본 〈열반무명론〉의 마지막 단락에 인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생을 무한히 긍정하는 정신이 《조론》에 내포돼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조병활 chobyunghwal@naver.com
북경대학 철학과에서 북송 선학(禪學)사상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취득. 중국 중앙민족대학 티베트학연구원에서 티베트불교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바세 연구》 《조론연구》 《불교미술기행》 《다르마로드》(상 · 하) 등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조론오가해》(전 5권) 《조론》 등을 우리말로 옮기고 펴냈다. 〈《바세》 5종 필사본에 보이는 ‘김 하샹 기록’ 비교 연구〉 〈〈조론서〉 연구〉 〈〈물불천론〉 연구〉 등 우리말, 중국어, 티베트어로 쓴 다수의 논문이 있다. 퇴옹학술상, 불교출판문화상 붓다북학술상, 불교평론 뇌허불교학술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