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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의 밀항을 돕다
증 언 자 : 정용화(남)
생년월일 : 1953. 6. 4 (당시 나이 28세)
직 업 : 현대문화연구소장 (현재 전남일보 기자)
조사일시 : 1989. 5
개 요
1979년 현대문화연구소장과 전남민주청년협의회장, 5·18 당시는 윤한봉 씨와 강진으로 도피. 6월말 상무대로 연행, 구속되었다가 10월말 석방. 1981년엔 윤한봉 씨의 밀항을 도왔다.
고등학교 서클활동
1953년 광산군 서창에서 평범한 농사꾼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송정동 국민학교와 광주서중을 졸업하고, 광주일고에 다녔다. 광주일고에는 4·19 이후 '광랑독서회'라는 서클이 있었는데 나는 1학년 때부터 참여하였다. 광랑독서회는 원래 특별활동의 일환으로 방학마다 농촌을 찾아가 노력봉사, 체력단련, 그룹토론회를 하는 농촌연구반에서 출발하였다. 그것이 우리 때는 '향토반'으로 개칭되었다가 백운산에 있는 백운농장 주인이 '광랑'이란 이름을 지어주고부터 광랑독서회로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는 주로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등의 책을 통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안목을 넓히 특별활동에서 제외시킨 후 독자적인 서클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3학년이던 1972년부터 고등학생 중심의 서클활동에 대한 당국의 제재가 심해지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다 학생과장 선생님까지도 이러한 외부 제재에 편승하였다. 이를 참다못해 광랑독서회 내의 나를 포함한 13명이 학생들을 선도하여 그 선생님을 몰아내기 위해 데모를 하였다. 그 결과 학생과장 선생님을 몰아냈으나 나와 몇 명이 무기정학을 받았다.
민청학련 사건
그로 인해 나는 입시준비를 소홀히 하게 되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재수를 하여 1974년 전남대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광주일고 선배인 김상윤씨 등이 전남대 학생운동권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때 선배들은 민청학련을 결성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단대별로 사람을 두어 일반 사람들을 선동하였는데 문리대 내에서는 내가 그 일을 주도하였다.
4월 23일 이런 일련의 움직임들이 발각되어 일명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나면서 김상윤, 윤한봉 등의 선배들이 대거 투옥되고 나는 두려운 마음에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하였다. 공수부대에 차출되어 남한산성에서 근무하는 동안 서울로 외박, 외출을 나올 때마다 일고 출신으로 서울대에 다니고 있는 선배들을 자주 만났다. 선배들과 얘기하는 동안 정세 속에서 제부문 운동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1977년 4월에 제대했으나 이미 새학기가 시작된 뒤라 복학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학교를 드나들며 선후배들을 만났다. 그때 그들은 김상윤, 윤강옥, 이강 선배들이 살고 있는 두암동에서 자발적으로 형성한 그룹 단위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김선출, 김남주 등 문화운동을 표방하는 그룹, 윤상원 등 노동현장운동을 모색하며 전단계로서 야학을 운영하는 그룹, 상대 내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몇몇 사람들의 그룹 등이었다. 나도 두암동에 자주 들르는 사이 여러 선후배를 알게 되었다.
1977년말, 스스로 학습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중 김남주 선배를 중심으로 4, 5명이 모여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일본어 서적을 통해 사회과학을 공부하기가 용이하다는 남주 형의 말에 따라 일본어를 비롯한 원서로 된 책들을 많이 보았다.
한편으로는 사회운동단체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해 갈 모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김남주, 최권행 등의 선배들과 YWCA 산하에 '고인돌' 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운동을 표방하고 있는 그룹이었다.
고인돌 주최로 1978년 2월, YWCA에서 '민족문학의 밤'이라는 행사가 연사 초청 강연회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실질적인 일은 전부터 문화운동을 꿈꾸며 민족문화연구소를 개설코자 힘써온 김남주, 황석영 등이 했었다. 이 행사는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정보기관을 긴장케 하였다. 그 후 이것과 관련되어 몇 개의 그룹들이 정보기관으로부터 주목받게 되었다.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석방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1975년에 결성되었던 광주구속자협의회와 고인돌, 그리고 김남주 형과 학습하던 그룹들이 주요 수사대상이었다.
광주구속자협의회는 그 구성원들이 대부분 직장을 가지고 있었고, 고인돌은 YWCA라는 종교적 보호막이 있었으므로 남주 형과 공부하는 그룹이 주요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 후 남주 형은 피신하였으나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모두 연행되었다. 하지만 남주 형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가게 되어 우리들은 하루 만에 훈방되고 남주 형은 수배되었다.
민주교육지표사건
1978년 3월, 1학년에 복학을 하고부터는 점차 두암동 출입을 줄이고 문리대 1학년 중심으로 10여 명을 모아 사회과학을 공부하였다. 같은 연배로서 가깝게 지내게 된 영문과의 양강섭과 법대의 박관현도 함께 하였다. 1977년부터 자발적으로 꾸려졌다. 여러 그룹들도 심화된 학습을 통해 역량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해 6월 27일 전남대 11명의 교수들은 학도호국단 체제 결성과 교수 재임용제 실시 등 비민주적 교육제도를 비판하고, 참다운 민주교육, 인간교육을 선언한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하였다. 그로 인해 거기에 참여했던 11명의 교수들은 중앙정보부 전남지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송기숙 교수는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나머지 전원이 해직되었다.
이 사실에 접한 나는 28일 오후 2시경, 가만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냐는 생각에 상원이 형에게 찾아가 의견을 물었다. 형은 교수님들의 뜻에 동조하고 연행 교수님의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자고 하였다. 상윤이 형은 민청학련사건 때 제적된 이후 학외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실질적으로 모든 일을 내가 맡았다.
그동안 역량을 키워오던 여러 그룹들에게 연락하여 오후 5시에 시내 모처에 모인 다음, 다음날 있을 집회를 기획, 준비하였다. 성명서를 작성하여 YWCA에서 활동하던 조봉훈 등 몇 명의 후배들에게 인쇄케 하였고, 그외에도 후배들에게 역할 분담을 하였다. 집회를 이끌어 갈 주동자를 1학년인 내가 할 수 없다 하여 공대 2학년인 노준현이 하기로 했다.
29일 12시에 중앙도서관 앞에 모여 '민주교육선언 교수 즉각 석방'과 '어용교수 퇴진', '상담지도관실 폐쇄' 등을 주장하였고, 이어 중앙도서관을 점거하며 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전남대에 휴교 조치가 내려지고 500여 명의 학우들이 연행되었는데 그중 나를 포함한 4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현대문화연구소장
교도소에서 1년여를 보내고 1979년 7월에 석방되었다. 윤한봉 선배를 중심으로 현대문화연구소를 개설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윤한봉 선배는 1974년 농대 축산과 4학년으로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되어 제적된 이후 재야, 청년단체에서 활동해 오고 있었다. 나는 그를 1학년 때인 1974년 2월부터 알게 되었다. 한봉이 형의 권유로 현대문화연구소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현대문화연구소는 유신 말기의 폭압적 상황에서 문화연구소라는 외피를 쓰고 사회운동권의 결집을 모색하는 단체였다. 전남민주청년협의회, 양서조합, 송백회(여성), 광대(야학과 문화재) 등 당시 발양하고 있는 제부문 운동의 방향을 선도하고 자금을 지원하였다. 특히 일련의 민주화운동 속에서 투옥된 사람들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전남대 학생권과도 연결을 가지며 학생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당시 광주에는 5·16 이후 민청학련사건에 이르기까지 정권이 조작한 여러 좌익사건을 통한 탄압으로 뜻있는 선배들이 대거 투옥됨으로써 실질적으로 운동을 이끌어갈 만한 선배들이 거의 없었다. 겨우 한두 명 남아 있다 하더라도 독자적 세력으로 발현하지는 못하고 그저 후배들을 지도하고 교육하는 형편이었다. 당시 청년층의 맥을 이루는 한봉이 형을 각계의 민주인사 단체들과 지방의 반체제 인사들을 지역별로 규합한 지방조직을 아울러 갖춘 전국적인 규모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관계로 바빴다. 그래서 내가 현대문화연구소장과 전남민주청년협의회장을 맡게 되었다.
유신 말기 정치적.사회적 부정부패가 노정되는 가운데 부마항쟁이 일어나는 등 독재에 항거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민중의 생존권 요구가 돌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체 역량이 부족하여 구체적인 일을 못 하고 있을 때 10·26과 함께 정국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0·26 이후 김재규 석방운동이 있었는데 그의 행위가 어쨌거나 유신독재를 끝장내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본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집권을 반대하고 직접선거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통일주체국민회의 철폐를 주장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작성, 배포하는 등 소극적 자세를 견지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 들어 '서울의 봄'이 오고 민주화 일정이 발표되면서 정국이 낙관적인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학교를 떠나 있던 선후배들이 대거 복학을 하였다. 그러나 청년단체에서 학생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 모두 복학할 수는 없었다. 한봉이 형과 박형선, 그리고 내가 밖에 남기로 하였고 상윤이 형 등은 복학을 하였다. 이로써 전남대는 복적생을 중심으로 큰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2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총학생회 부활을 서두르고 있었다. 당시는 밖에 있는 우리들과 전남대 학생권과의 연계가 긴밀하여 총학생회장 후보도 우리들이 물색하였는데 한봉이 형이 법대 행정학과 3학년인 박관현을 추천하였다. 이에 전남대는 박관현을 총학생회장으로 추대하기 위한 선거작업이 한창이더니 4월 2일 박관현을 중심으로 전남대 총학생회가 구성되었다.
한봉이 형과 강진으로 피신하여
5월 5일은 광주댐 근처에 있는 식영정에서 '민주가족' 야유회가 있는 날이었다. 여기서 민주가족이라 함은 광주에 있는 제운동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곳에서 각자 한마디씩 하는 시간에 윤한봉 형은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민주화에 대해 굉장히 낙관적인 분위기인데 민주화가 그렇게 쉽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다가도 언제 대규모 탄압이 가해질 지 모른다. 앞으로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모두 신중히 대처하자."
우리들도 그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고 야유회에서 돌아왔다. 14일부터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은 물밀듯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민주화 대행진'을 진행하고 있었다.
5월 19일은 북동성당에서 70년대말 종교적 보호막을 입고 급격히 성장한 가톨릭농민회가 주최하는 행사가 있을 예정이었다. 가톨릭농민회가 그 준비를 전남대 총학생회에 의뢰했는데 전청협도 전남대 총학생회와 17일 오후 7, 8시경까지 그 행사를 준비하였다. 한봉이 형은 그때도 국민연합 결성관계로 일을 해오고 있었다.
나는 집에 있는 것보다 편리하여 한봉이 형과 동명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17일 오후 8시 30분경 밖에서 한봉이 형을 만났는데 술집으로 끌고 가더니 막걸리를 건네면서 저녁에 집에 들어가지 말자고 하였다.
"이화여대에서 총학생회장단 회의가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사태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어떻게 알았는지 이렇게 말하는 형과 술을 마시다 11시쯤 평소 존경하고 따르던 문병란 선생님 댁으로 갔다. 형이 주위 사람들의 신변을 확인해 보라고 하여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해본 결과 상윤이 형은 잡혀갔고, 그외에도 대부분은 집에 있지 않았다. 걱정을 하며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TV를 보는데 긴급뉴스라며 '전국계엄 확대, 김대중 씨 연행' 등의 내용이 나왔다. 그 소식을 듣자 매우 놀랍고 당황되었다. 12시가 넘었으므로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까지 꼼짝 않고 앉아 있다 4시가 되자 문선생님 댁에서 나왔다.
일단 광주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담양 쪽으로 가려 했으나 서방 쪽에 계엄군이 지키고 있어 발길을 돌려 고등학교 동창생인 김기순이 살고 있는 동명동으로 갔다. 친구는 갑작스런 방문에 놀라며 안으로 맞아들인 뒤 밖을 드나들며 외부상황을 알려주었지만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18일 하루를 보낸 뒤, 계속 머물다가는 친구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 한봉이 형의 의향을 물었다.
"이번에 잡히면 죽으니까 광주를 빠져나가자."
나는 형의 의견에 동감하고 19일 8시경 형과 친구집에서 나왔다. 택시를 타고 백운동 로터리를 지나다 계엄군의 검문을 받았으나, 나주에 볼일이 있어 간다고 말하여 그곳을 벗어나 무사히 나주로 갔다. 나주에 도착했을 때 한봉이 형은 서울에 올라가봐야겠다고 했다.
"모든 변수는 서울에 있는 것 같아."
형의 말에 따라 나는 나주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친구집에 있기로 하고 형과 헤어졌다. 형과 헤어진 뒤 친구집에 가보니 친구가 집에 없었다. 그래서 고교 은사님이신 김용근 선생님이 계시는 강진 작천으로 내려갔다.
광주 소식을 궁금해 하며 선생님 댁에서 숨어 지내던 23일경, 뜻밖에도 한봉이 형이 선생님 댁으로 왔다. 너무 반갑고 놀라 그간의 사정을 형에게 물었다.
"19일날 너와 헤어지고 나주역에서 서울행 열차를 탔는데 어떤 놈이 미행을 하더구나. 그래서 가방을 열차에 그대로 두고 화장실 가는 것처럼 살짝 빠져나와 다시 하행열차를 탔지 않겠냐. 그러나 길이 막혀 장성에서 내려야 했다. 거기서 어떤 아주머니 한 분과 짐차를 잡아 타고 광주로 갔지.
그날 저녁 임동 친구집에서 자고 20일날 하루 종일 광주시내 곳곳을 돌아다녔어. 그러다가 21일 새벽 5시경에 여동생에게 갔더니 깜짝 놀라며 윤광장이 형에게 연락하더구나. 연락을 받고 달려온 형은 '너 여기 있다간 큰일나니까 시외로 나가는 게 좋겠다'고 하더구나. 그날 오전 9, 10시 쯤 조카를 안은 여동생과 부부로 가장하여 남평을 거쳐 나주로 빠져나왔다. 네가 있겠다고 했던 친구집에 가보니 없어서 '이 자식 분명히 광주로 들어갔구나' 하고 다시 광주로 들어가려고 남평으로 갔는데 오전과는 달리 계엄군의 차단이 심해 못 갔다. 할 수 없이 다시 발길을 돌려 나주로 안 왔겄냐. 그런디 나주에서 우연히 네 친구인 전남민주청년협 의회 목포지부장 김남표를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가 내 사정을 듣고 같이 빠져 나갈 길을 모색해 보더구나. 계엄군이 도로 길목마다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산을 타고 장흥 유치-병영-강진으로 갔는디 강진에 오니 옛날에 니가 좋은 곳이 있다며 언제 한번 놀러가자고 했던 김선생님이 생각나 한번 찾아본 것이다."
우연치고는 묘한 우연이라 생각되었다.
김용근 선생님 댁에서 형과 며칠을 보내고 27일, 광주가 계엄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또 매스컴을 통해 윤강옥, 정상용 등 전청협 회원이 많이 연행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봉이 형은 매우 걱정을 하며 말했다.
"같이 있다 잡히면 더 위험하니까 일단 헤어지고 보자."
내가 김용근 선생님 댁에 남아 있기로 하고 형은 다른 곳으로 떠났다.
형이 빠져나간 뒤 한 달 가량 선생님 댁에 머무르며 모내기를 도왔다. 그러던 6월 말경, 도경찰국에서 온 형사 7, 8명에 의해 붙잡혔다.
구속되어
그들은 나를 도경찰국으로 끌고 가 항쟁 이전과 항쟁 당시의 행적을 물으며 무수히 구타하였다. 항쟁 당시엔 광주에 없었으므로 꼬투리잡힐 만한 것이 없었다.
항쟁 이전의 활동에 대해 한봉이 형님이 잡히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여 모두 한봉이 형 앞으로 미뤘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사실대로 불라고 추궁하며 계속 구타하였다. 며칠 후엔 보안대로 끌려가 많이 두들겨맞은 뒤 1주일 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상무대로 이송되었다.
상무대 영창으로 들어가니 윤영규, 윤광장 씨 등 평소에 이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온몸이 시퍼렇고 퉁퉁 부어 있어 나를 쉽게 알아보지 못하였다. 한참 후에야 알아보고 내 몸에 비닐에 싸 온 안티프라민을 발라주었다.
거의 운신을 못하고 1주일 정도 누워 있다 또 불려나가 맞았다. 무조건 사실대로 불라며 구타를 하면 나도 죽이라며 지지 않고 대들어 더욱 심하게 맞곤 했다.
빨리 맞고 기절해 버리는 것이 상책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많이 맞고 만신창이로 영창 안에 보내지면 며칠 후 다시 불려나곤 했다.
8월 1일, 나는 소요죄, 집시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항쟁 이전의 활동은 한봉이 형에게 미뤄 특별한 혐의를 받지 않았고, 또 선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 빨리 석방될 수 있었다. 내가 전체적인 운동의 흐름을 알고 있다고 판단한 정상용, 윤강옥 등의 선배들이 내게 혐의가 될 만한 근거를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차단해 줬던 것이다. 수사관이 물을 때마다 나와의 관련사실을 부인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광주항쟁 자료수집
그런 여러 사람들의 도움 덕분으로 연행된지 4개월 만인 10월말경에 석방되었다. 원래 체중이 75킬로그램이었으나 석방 당시 55킬로그램으로 줄었고, 온 몸엔 구타로 인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시력도 많이 떨어져 책을 한 장도 읽기 전에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집에서 토종 꿀, 보약으로 2, 3개월 몸보신을 하고 나니 체중이 5킬로그램으로 느는 등 몸이 어느 정도 좋아졌다.
몸이 좋아지자 우선 광주항쟁에 대한 자료를 모을 생각으로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을 물색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활동했던 선배, 동료들은 잡혀가거나 도망가버린 뒤였으므로 어려웠다.
그런데 1979년 10월의 남민전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던 동료 조봉훈이 1980년 8월에 출감해 나왔다. 봉훈은 광주항쟁에 대한 얘기를 듣고 매우 흥분하여 함께 일을 해보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1980년 12월부터 봉훈과 자료수집을 시작했다. 처음엔 둘이 시작하였으나 투사회보를 제작했던 후배들이 연행되었다 풀려나온 뒤엔 그들을 통해 유인물, 머리띠, 어깨띠, 사진, 필름 등을 구했다.
자료가 모아지면 봉훈이가 그것을 복사하여 서울 등지로 알리는 작업을 하였다.
윤한봉의 밀항을 주선하다
그 일을 하고 있던 1981년 2월경, 한봉이 형으로부터 연락이 와 만났다. 형은 5·18 광주민중항쟁의 주모자로 전국에 지명수배된 이후 서울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형은 자기가 잡힐 경우 생명이 위태롭다는 사실은 물론 그동안 도피생활을 도왔던 여러분들의 신변안전 문제, 또 광주운동권에 돌아갈 피해를 우려하였으나 스스로 향방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밀항을 하면 어떻겠냐고 내가 물었을 때 형은 도피생활을 하면서 충분히 하고자 하는 일을 해나갈 수 있다며 거절하였다. 일부에선 자결 권유의 분위기도 있었는데 형 자신은 만약을 대비하여 청산가리와 칼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
형과 헤어진 뒤 다시 생각해 보았지만 그래도 역시 앉아서 당하느니보다 밀항을 하는 게 나을 성싶어 얼마 뒤에 다시 형을 만났다. 형은 도피생활에 상당히 지쳐 있을 때라 일단 동조는 하였으나 밀항이 성공할지 못 할지의 여부는 아무도 점칠 수 없었다. 나로서는 당시 상황에서 한봉이 형의 밀항을 돕는 것이 최선으로 생각되어 밀항을 주선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밀항에 필요한 외항선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알아보았으나 쉽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한봉이 형의 고등학교 후배로서 민청학련 관련자인 정찬용 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에게 사정을 얘기했더니 그는 동생이 삼미그룹 해운회사인 외항선 삼미라인에 2등기관사로 있다며 동생과 한번 의논해 보자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정찬용 씨의 동생인 정찬대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로부터 배의 내부구조와 그외 여러 가지 사항들을 파악하였다. 그 배에는 같은 전남 출신인 최동현(3등항해사)도 있었다. 이들이 잘 도와줄지 도와주지 않을지 우려되었으나 한봉이 형이 처해 있는 상황을 듣고 나서 사명감을 가지고 도와주었다.
밀항을 하는 동안 한봉이 형은 배 안의 의무실에 딸린 화장실에 숨기기로 하였다. 일단 배는 확보되었으나 밀항지를 어디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한봉이 형과 고심을 했다. 일본, 유럽, 미국을 상정하고 각각 가능성 여부를 체크해 갔다.
일본은 두 가지 점에서 불가능했다. 첫째는 대부분의 일본 밀항자가 망명절차도 밟지 못한 채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는 말이 들렸기 때문이다. 둘째는 만약 일본으로 밀항하였다가 발각되었을 경우 정보기관에 의해 조총련과 연결되었다는 누명을 쓰게 되어 나는 물론 광주운동권에도 큰 타격을 줄 것 같았다.
유럽은 우선 거리가 너무 멀고, 또 그쪽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 불가능했다. 미국도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밀항자를 거의 100퍼센트 안 받아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인의 이목이 미국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이러한 문제를 함부로 처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 일단 미국으로 밀항할 것을 결정했다.
4월 28일 정찬대와 최동현을 만나 세부상황을 점검하고 출항일인 29일 한봉이 형을 찾아가 준비가 다 되었으니 준비를 서두르라고 했다. 형은 그렇게 빨리 됐느냐며 놀랐다. 배가 출항하는 마산으로 가기까지는 한봉이 형의 도피생활을 돕고 있던 한국신학생 김은경 양과 동행키로 하였다. 한편 나는 광주로 내려와 급히 100만 원을 융통하여 바로 마산으로 갔다.
오후 6시경, 마산에서 한봉이 형, 정찬대, 정찬용과 만나 최종적으로 점검하였다. 배가 일본, 홍콩, 동남아 등을 거쳐 미국으로 가기까지 여러 검문소를 통과하는 데 필요한 암호 몇 가지를 정했다. 항해 중 국내에 이상 유무를 알리는 통신 암호, 미국에 도착, 마중나온 사람들과 나눌 인사 암호 등이었다.
최종 점검을 마치고 그날 자정 외항선에 타기 위해 부두로 나왔다. 한봉이 형이 부두에 있는 검문소를 술취한 사람처럼 꾸며 무사히 통과하는 걸 보고 돌아왔다. 이제 남은 일은 한봉이 형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 마지막 검문소를 통과하는 것과 거처할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혼자 일을 진행시켜 오던 나는 무진교회의 강신석 목사님을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렸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은 조아라 장로님과 의논하게 되었는데 마침 조아라 장로님의 아들이 미국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연락하기로 하였다.
검문소를 통과할 때 필요한 인사 암호와 몇가지 준비사항을 정리한 편지를 강신석 목사님이 선교사를 통해 조아라 장로님의 아들에게 전했다. 그러고 나서 성공 여부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미국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한봉이 형이 미국에 도착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더욱 긴장감에 초조해 했다. 그런데 뜻밖에 놀랍고 어려웠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 장로님의 아들이 편지를 받아 보고서도 정보기관의 농간인 줄 알고 사전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도 확신을 못 하고 있던 중 한국에 나오는 종교계 인사를 통해 조아라 장로님에게 확인해 본 후에야 모든 게 사실인 줄 알고 서두르게 되었다. 성공여부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초조하게 기다린 지 한 달여가 지나자 미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연락이 왔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고 한봉이 형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되었다.
한봉이 형 밀항문제를 그렇게 해결하고 자료 모으기를 계속하는데 6월말경 봉훈이가 유인물을 돌리다 발각되어 구속되어 버렸다. 내게도 수배령이 내렸다. 유인물 건도 있었지만 한봉이 형의 밀항관계가 밝혀질 염려가 있어 7월 4일 서울로 도피하였다. 한봉이 형의 도피생활을 도왔던 김은경 양의 도움을 받으며 이곳저곳에서 숨어 지내는데 1982년 10월 하순, 군산 오송회사건이 일어나 수사가 진행되던 중 한봉이 형의 도피 및 밀항경로가 드러남으로써 나는 재수배되었다.
수배의 눈을 피해 다니던 중 1983년초에 있을 미대통령 선거로 인해 정국이 일시 해빙기를 맞았다. 그에 따라 수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2년 12월 17일, 서울 기독교회관 NCC 총무를 맡고 있는 윤상근 목사의 책임보증 아래 남영동 치안본부에 자진출두하였다.
한봉이 형의 밀항사건을 집중 추궁하는 수사관에게 밀항에 관계된 계획을 적당한 선에서 모두 얘기했다. 내 말을 들은 수사관이 매우 놀라며 물었다.
"너 이 새끼, 어디서 그런 기막힌 작전을 배웠어?"
"공수부대에 있을 때 익힌 기술이었소."
수사관은 공수대에서 군복무를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어느 정도 내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한봉이 형이 밀항하기까지는 국제적 루트와 배후가 있을 줄 알았는데 공수부대에서 터득한 감각으로 내가 맡아 했다고 하니 그도 그럴 것이었다.
한봉이 형 밀항관계로 20여 명이 연행되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10여 일에 가까운 수사를 마치고 전원 훈방되었다.
특히 밀항을 주선한 나는 1981년 6월 이후 수배중이던 유인물 사건까지 덤으로 해결하고 풀려났다. 일선엔 1982년말 1983년초에 걸친 미국 대통령선거의 영향이 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볼 수도 있다. 한봉이 형이 마산항을 출발할 때만 해도 5·18 광주민중항쟁과 국내 정치상황으로 수배된 민주인사들의 해외도피를 막기 위해 신문과 방송을 통해 밀항관련 사범들의 소탕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전국에 지명수배된 한봉이 형이 해외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공포한다는 것은 바로 치안담당자들의 발등을 찍는 결과이기 때문에 관련자를 모두 훈방 조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남일보 기자로
그 후 서울 한마당출판사에서 일하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광주에 들렀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은 광주민주시민협의회를 구성하여 하루 빨리 광주항쟁을 규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창립준비 성명서 등을 작성하여 선배들에게 의견을 묻는 등 은연중 준비 작업을 하였다.
1983년 5월에 결혼하고 10월에 광주로 내려와 바로 광주민주시민협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실질적인 활동을 하였다. '광주민주시민협의회'로 명칭을 정한 것은 5·18 관련자로서 민주화 추진의지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범시민적 단체를 만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광주항쟁 직후의 암울한 상황에서 선배들은 민주시민이라는 단어에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 명칭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1984년초 홍남순 변호사를 회장으로 광주구속자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이어 광주항쟁을 겪는 과정에서 전남민주청년협의회가 실질적으로 와해된 이후 새롭게 결성된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에도 준비위원장 겸 부위원장으로 참여하였다. 그 이후에도 5·18 위령탑건립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전남사회문제연구소, 5·18 광주민중항쟁동지회 결성을 도왔다.
이러한 제단체에 몸담고 1980년대 재야운동권에서 죽 활동해 오는 동안 아내가 중학교사로 일하며 가정살림을 꾸려왔다. 도중에 복학하여 88년에 졸업하고 지금은 전남일보에 입사하여 사회부 기자로 일하고 있다. 그후 지금까지 몸담고 있는 제단체에서 손을 떼고 5·18 광주민중항쟁동지회에만 가입해 있다.
당시 온몸에 입었던 타박상으로 지금도 비가 오고 날이 궂으면 온몸이 쑤신다. 아직 부상자회에 신고하지는 않았다. 오항동 회장인 윤강옥 형의 전체적인 계획에 따라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신고 할 계획이다.
광주문제 해결은 요즘에 자주 이야기되고 있듯이 먼저 진상규명이 되고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진 다음에 정신적, 물질적 보상을 해야 한다. 생각건대 요즘 너무 체계없이 광주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가 되고 있지 않나 한다. 문제의 본질을 하나하나 짚어가야 할 것이다. (조사.정리 최정숙)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