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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들의 힘으로
증 언 자 : 손남승(남)
생년월일 : 1958. 10. 6 (당시 나이 22세)
직 업 : 대학생 (현재 대학원생)
조사일시 : 1988.11
개 요
당시 전남대 3년생이었던 손남승 씨는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시위에 참여하면서, 밤에는 남동성당 건너편 지하실 건물에 위치한 백제야학에서 유인물 작성을 했다. 22일부터는 도청 상황실에서 근무했다. 27일 새벽에 도청 부근 민가로 도망가 붙잡히지 않고 빠져나옴.
사랑의 학교에서
우리 집은 4, 5대 전까지 관직을 지냈던 사람이 하나도 없는 대체로 한미한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목포공고를 나오셨고 건축기사가 되고 싶어하셨으나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포기하셔야만 했다. 결국 군대에 사병으로 지원하셔서 중위로 제대하셨다. 생계는 목포, 해남 등지에서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해서 꾸려 나갔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나의 교육에 관해 극성스러우셨던 부모님은 결국 광주로 이사를 오셨다. 광주에 와서도 여러 가지 장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아버지는 세상에 대해서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 사회의 환경이나 조건들 때문에 자신의 꿈이나 능력을 펼쳐보지 못하고 소시민적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강한 반골의식이나 진보적 의식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생활 자체에는 불성실하셨다. 아버지의 낭비벽과 타락된 생활 때문에 가정생활은 평탄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런 가운데에도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나는 74년 광주일고에 입학하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데모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2학년 때는 주변의 친구들이 직접 선언문을 낭독하고 데모를 주도해서 징계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나는 이런 것을 보면서 데모를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데모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었다. 졸업 후 서울대에 입학원서를 냈으나 떨어졌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학원에서 재수를 하려고 작정했지만, 결국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거의 일년을 집안 형편 때문에 집안일과 아르바이트 등으로 보내고, 다시 생각을 바꿔서 입시준비를 했다. 전남대학교 인문사회대 철학과에 합격을 한 나는 대학 1년을 방관자적 모습으로 보냈다. 데모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여전히 가지고 있었고, 1년의 재수생활과 또 일고 출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엘리트의식에서 나오는 출세지향적인 삶의 태도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유자적했던 1년이 거의 다 가고 10월 말쯤 나는 친구의 권유로 야학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랑의 교실'이라는 이 야학은 당시 '들불야학'과는 달리 상급학교로 진학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검정고시 준비를 시켜주는 곳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대학 4년과 대학원 1학년 때까지 같이 생활하였다. '사랑의 교실'이 '사랑의 학교'로 명칭이 바뀌고, 또 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 그 성격들이 차츰 바뀌어갔다.
1979년 가을 이 학교의 졸업생이었던 여자 형제가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손을 잘리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학생운동 단체, YWCA, NCC, 청년사회운동단체인 현대문화연구소 등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우리 야학은 '들불야학'과는 별개로 여러 사회운동단체, 특히 현대문화연구소, YWCA, YMCA, JOC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노동야학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우리 팀은 1980년 '백제야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남동성당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3학년이던 내가 팀장을 맡았다. 그리고 이때는 야학이 약간의 탄압을 받고 있었다. 서울의 경우 모두 거덜난 상태였지만 광주는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들불야학'의 경우는 이미 수색과 조사를 받았고, 우리 팀은 아직 덜 알려진 상태에서 심한 탄압은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들은 우리들의 소재를 파악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미 강학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늘 보안유지에 급급했다. '들불야학'과 우리 팀은 강학들 사이에서 세미나 등의 교류를 갖고 있었다.
개인자격으로 참가하였지만
4, 5월에 접어들면서 서울지역의 대학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전남대도 정치권에서 불어대는 민주화의 열기에 합세하고 있었다. 연일 중앙도서관 앞을 중심으로 시국대토론회가 개최되었고, 제1학생회관 소강당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때의 전남대 학생운동권의 중심은 주로 탈춤반이나 야학팀(이론과 실천을 겸비 한) 사람들과 몇몇의 이념서클의 지도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백제야학은 학내의 집회나 시위에 집단적인 참여를 하지 않고 개인자격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이것은 앞에서 얘기했던 상황들 때문에 보안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야학팀장을 맡고 있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학내의 행사에 참여하다가 야학 내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나는 낮에는 과토론회에 참석하여, '왜 지금 우리가 일어서야 하는가'에 대한 선전, 선동을 했다. 또한 학우들과 총학의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외의 집회나 시위에서는 주동자가 아니라 일반학우들의 틈에 끼어 행동했다.
5월 18일 0시를 기해서 전국계엄령이 확대 선포되었다.
18일 아침 나는 학교로 가지 않고 백제야학으로 갔다. 야학 형제들과 몇몇의 강학들이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 어려운 상황에서 지금 노동야학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백제야학을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야 한다는 입장의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래서 집단적인 참여는 하지 않기로 하고 개인자격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몇몇 강학들은 시골로 떠나고, 나는 김흥권 형과 함께 남았다.
이날 오전은 곳곳에서 수색과 연행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 내가 양동에서 버스를 타고 온 몇 분 후부터 시내버스의 수색과 강제연행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시내 곳곳에서는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날부터 분산적인 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동명로에서 전경들을 시민들이 포위해서 무장해제를 시키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백제야학의 남은 사람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결국 야학의 교실로 사용되고 있던 남동성당 건너편의 건물 지하실에서 유인물을 작성하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등사기도 있었고, 다량의 갱지도 준비되어 있었다. 몇몇의 야학 형제들과 김흥권 형과 함께 21일까지 여기서 일했다.
낮에는 주로 형제들과 함께 밖에서 보고들은 얘기들을 급히 유인물로 작성하여 등사기로 밀었다. 이것들을 그룹이나 개인별로 들고 나가서 시위차량에 던져주거나 학동 일대의 시위대에게 나누어주었다. 밤에는 횃불이나 각목을 준비해서 근처의 시위에 참여했고 밤 2-3시에 들어와서 자곤 했다.
공수부대가 철수하기 전까지의 남동성당 근처의 시위양상은 1백-1백50여 명 정도의 시위대가 경찰과 밀고 밀리는 접전을 벌이는 상태였다. 낮에는 밖에 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상가는 철시한 상태였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한두 명씩 모여들어 자발적으로 소규모의 시위대를 형성하였다.
도청은 공수부대들이 방어를 하고 있었지만 그 지역을 조금 벗어나면 경찰들이 있었고, 이들은 공수부대와는 달리 강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 와중에서도 사람들은 남동에서 도청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저지선을 뚫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실인지 유언비어인지 소문이 파다하게 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들이 사람을 죽인다는 얘기에서부터 여자 젖가슴을 도려내서 죽였다는 얘기며, 양림다리에서는 공수부대가 분노한 시민들에게 쫓겨 다리밑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얘기까지 소문이 무성했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점차 시위대열에서 학생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시민들은 모두 빠져나가버린 학생들에게 "학생들은 믿을 놈이 못 된다", "일만 저질러놓고 도망가 버렸다", "배운 놈들이라 제 목숨만 아깝다고 도망가 버렸다"는 식이었다. 나는 이런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나라도 기어이 끝까지 싸워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곤 하였다. 대부분의 시위대열을 보면 학생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학생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광주항쟁를 관망하고만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라도 여기에 남아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광주시민학생 혁명위원회
우리들이 야학의 지하실에서 만든 유인물은 5,6종 정도였다. 그 발행 이름은 전부 기억할 수는 없고 제일 마지막으로 만든 이름이 '광주시민학생 혁명위원회'였던 것 같다. 그 내용은 광주시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을 홍보하고, 나아가 선동까지 하는 것이었다. 차량을 접수, 제공하라는 것과 폭약이나 총기류를 시민군이 가져야한다, 또 주변의 관공서나 악질기업주 집에 방화토록 선동하는 한편, 조금만 더 견디면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해방정권을 세울 수 있다고 썼다. 나는 집에 한번 들어가면 부모님께 잡힐 것 같아서 못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20일 저녁 늦게쯤 나는 옷도 갈아입고 부모님도 뵈야겠다는 생각에 걸어서 집에 갔다. 집에서 들으니 그날 오후에 양동 복개상가에서 시민들과 공수부대가 싸워서 시민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고 했다. 이날은 집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21일) 아침 일찍 부모님 몰래 집을 나서면서 대학 1학년이었던 동생에게 살아서 보자는 말과 부모님을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 총알이 여기 저기서 날아다니는 급박한 상황때문에 언제 죽을지 몰라 한 말이었다.
점심때쯤 나는 전남대 스쿨버스를 타게 되었다. 여기에는 약 40-50여 명이 타고 있었고, 김상집 형이 운전을 했다. 우리들은 전남대학교 안으로 들어가서 대강당 앞에다 차를 세웠다. 대운동장에는 공수부대들이 텐트를 쳤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우리들은 제1학생회관 지하실의 유리창문을 깨고 들어가서 쌓여있는 빵과 우유 등의 식료품을 접수했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스쿨버스를 보더니 내놓으라고 했다. 이것 때문에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우리는 다시 그 차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전남대 의대 옥상에 LMG가 설치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남동쪽의 시위대열이 계속해서 도청으로 가는 길목을 뚫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나는 그 대열에 끼어 있다가 흥권이형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대 입구에서 전남대 의대 앞 로터리 쪽으로 '캐리바 50'이라는 대공포를 좌우로 쏘면서 돌진해 왔다. 총알이 내 양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혼비백산해서 형과 함께 근처의 담을 넘어서 도망쳤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그곳에서 어린 아이가 총에 맞아서 죽었다고 했다.
오후 느즈막이 공수부대들이 전남공고 쪽을 거쳐서 조선대 쪽으로 퇴각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조를 지어 일렬로 사방을 경계하면서 이동하였으며 서류나 문건들은 헬기콥터로 옮겼다. 또 한바탕의 총격전의 소리가 들렸으나 위협사격인 듯 싶었다.
도청 안으로
22일 오후 1시쯤 남도예술회관 앞을 지나다 보니 "학생들은 모여라"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또 차량방송에서도 학생들은 남도예술회관 앞으로 모이라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까 전남대, 조선대, 전문대까지 40-5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이재의 형밖에 없었다.
그는 운동권 선배로서 나에게는 4년 선배였다. 재의형은 나더러 도청 안에 일손이 필요하니 같이 가자고 했다. 도청은 이미 전날 밤에 공수부대가 철수한 뒤였다. 시민들이 폭약, 다이너마이트, 총을 확보한 상태로 접수된 상황이었다. 나는 재의 형의 권유로 도청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도청 안에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시민들이었다. 또한 홍보차량 등 전혀 조직정비가 되어 있지 않아 우리는 몇명이 모여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가를 논의하고 역할분담을 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학생들을 불러모아야 했기 때문에 홍보문제가 시급했다. 안길정이가 복사기를 다룰 줄 알았기 때문에 유인물과 홍보 작업을 맡았다. 차량통제는 원갑이가 맡고, 나에게는 상황실 근무가 주어졌다. 나는 신분과 이름을 속이고 상황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때 윤상원, 박효선 등의 몇몇 선배들은 청산학원 옆에 있는 녹두서점에서 여러 일들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도청 안의 시민들이 학생들에 대한 거부감이 심한 까닭에 섣불리 도청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따라서 도청 안과 녹두서점을 연결해 주는 매개고리가 필요했다. 뒤에 알고 보니 내가 상황실에 배치된 것은 그런 매개체로서의 장기적인 포석이었다.
나는 가끔 상원이형을 통해서 연락을 취했다. 아니면 두어 차례 정도 녹두서점으로 직접 나가 도청안의 상황들을 얘기해주었다. 이때는 이미 출입증을 발급해서 도청 출입을 제한했을 때였다. 나는 상황실 근무를 통해서 어느 정도 얼굴을 익혔는지라 출입증을 제시하지 않아도 도청을 자유스럽게 드나들 수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박남선 씨가 학생들을 가끔 욕하기만 했지만 비교적 학생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윤상원 씨가 박남선 씨에게 이쪽 상황을 설명하자, 박남선 씨는 당연히 학생들이 같이 들어와서 일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학생들도 도청에서 일하게 되었다.
전용호, 김선출, 김윤기, 안길정, 박효선 등 탈춤반 출신들과 들불야학 출신들이 홍보부를 구성하였다. 도청 안에는 아주 성능이 좋은 복사기와 마스터기가 있어서 유인물이 대량으로 찍혀나왔다. 차량에 마이크를 싣고 다니면서 시민들에게 협조와 호응을 홍보하고 다녔다. 또한 미항공모함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며 계속 싸우자는 선전작업들을 해냈다.
윤상원 씨는 외신기자를 만나는 대변인 역할을 했다. 나는 상황실에서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총을 지급받아 옆에다 세워놓고 경계근무를 했다. 저녁이 되면서 남도예술회관 앞에 모였던 학생들이 도청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들은 학생임시수습위를 만들었다. 위원장이었던 김창길은 학내의 농성이나 시위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사건을 대처하는 데서 우유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부위원장이었던 김종배는 조선대 민주화투쟁위원회 출신으로서 이름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권력지향적인 냄새가 났다. 또 이들은 조직적인 활동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감상적 투항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 이와 함께 명노근, 송기숙, 오병문 등의 교수와 기독교장로회, 예수교장로회의 목사 그리고 남동성당의 김성용 신부님 등이 도청에 들어왔다. 이날 밤 이렇게 학생, 시민들의 수습위원회가 도청에 들어서면서부터 대학생에 대한 반발이 누그러졌다.
상황실 근무
23일부터는 어른들(교수, 신부, 목사 등)과 학생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그리고 기자들의 출입도 허용했다. 외신기자들의 출입은 용이했던 반면, 서울신문과 또 하나의 국내신문이 출입 금지당했다. 나는 상황실에서 마지막 날까지 근무를 하였다.
도청 지하실에 다이너마이트와 총기류를 보관했다. 1층 상황실 옆방을 수습위원들이 사용했으며, 상황실 우측에는 복사기와 마스터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도청으로 통하는 조그만 부속건물에서 관을 짰다. 시신들은 입관을 시켜서 관 뚜껑을 가슴 정도까지만 닫아놓고 얼굴 부분은 내놓고 있었다.
여기에서 내가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온몸이 퉁퉁 부어 썩어 있던 시체였다.
나이는 20세 초반, 기껏해야 재수생쯤으로 보이는 그 시신은 온몸에서 구더기가 생기기 시작했고, 눈에서는 진물이 나오고 있었다. 신원이 확인된 관은 상무관으로 옮겨졌다. 상무관으로 옮겼던 시체는 27일 전까지 해서 약 98구 정도였다. 관이 부족하자 시민들이 협조해서 관을 짰고, 여기에는 장의사였던 사람들도 있었다. 또 시민들에게 관값을 지불해 달라는 홍보물도 냈다. 식당은 현재 민원상담실이던 곳을 사용했으며, 식사는 부족하진 않았다. 여자들은 주로 홍보차량에 끼어 있거나 부상자를 치료했으며 식사를 전담했다.
상황실에서는 외곽지역의 병력이동 상황과 병원에 연락해서 사망자를 확인하는 일, 시민들에게 들어오는 제보를 접수하고 상황실장에게 보고했다. 또 상황일지를 썼는데, 이것은 특별한 양식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몇 시에 무슨 일이 있었고, 우리 병력은 몇 시에 어디로 배치했다는 것을 쓰고, 군인들의 이동사항을 시간별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또 외곽지역의 동정을 파악하기 위해서 외곽지역의 몇 곳을(서방은 서방주유소, 백운동은 까치고개 밑에 있는 두 군데의 민가, 화순지역, 농성동 지역) 임의로 전화를 걸어 그쪽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또 시민군을 외곽지역에 직접 파견해서 알아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무전기가 있었지만 무전기는 도청이 되기 쉬웠기 때문에 별로 사용하진 않았다. 외곽지역으로 파견된 사람들은 도청(현재 차고 비슷한 곳) 밖에 조로 편성하여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또 차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이들은 당시 외곽지역으로 나가면 거의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특히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는 곳은 교두보였기 때문에 이곳에 나갔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거나 다쳤다. 무전신호까지 약속을 해놓고 나가서 연락이 없을 때 그 지역에 전화를 해보면 총소리가 나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여섯 차례나 이런 일이 있었는데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이들 중에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광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의롭게 죽을 것을 각오하고 이름없이 죽어간 고귀한 사람들이었다.
도청의 분위기는 긴장상태였고 신경질적이었다. 단순히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아닌 상황 자체에 대한 대립이었다. 김창길과 시민수습위원회는 계속해서 총기반환을 주장했고 여기에 대해 특히 박남선은 반대했기 때문에 총기반환에 대한 갈등관계가 형성되었다.
박남선 씨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그는 중장비 운전사라 했고 공수특전단 출신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특히 실전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상황파악에 뛰어났고 육성이 컸으며 언변이 뛰어났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신망이 두터웠다. 나는 혁명과정에서 나타나는 영웅이 저런 타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총기반환에 관한 문제는 김창길과 박남선뿐만 아니라 일반시민들과도 마찰이 있었고, 교수, 신부님이나 목사님들과의 사이에서도 험악한 분위기가 수차례 연출되었다.
자체적으로 치안에 나서
24일 밤에는 차량도 배분되고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특히 치안유지에 신경을 썼는데, 도청 주변의 빈 건물 등의 요소요소에 2인 1조의 정찰조를 파견했다. 이들에게는 랜턴과 총을 지급해서 보냈다. 무전을 때리고 상황을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한번은 노동청에 파견했던 1명에게서 소식이 없었다. 노동청은 이미 불에 탄 뒤라 텅 비어 있었다. 확인조를 보냈는데 그들이 정찰나갔던 그 사람과 여자 한 명을 데리고 왔다.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자기는 집에 있는데 정찰나갔던 남자가 총을 들고 와서 위협하여 강간했다고 했다. 당시 상황실 옆에는 치안대가 구성되어 있었다. 40대 초반의 남자가 치안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다음에 경찰이 제 기능을 찾을 때 그곳에 넘겨주기 위해서 그는 조서를 작성했다. 근무하라고 파견해 놓았더니 범법행위를 했다 해서 그 사람은 손을 뒤로 묶인 채 많이 맞았다.
25일 새벽에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누가 독침을 맞았다고 했다.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은 채 당사자는 잠적해 버리고, 그 일은 곧 유야무야돼 버렸다.
26일 군인들로부터 도청을 치고 들어오겠다는 1차 위협이 있었다. 그러나 수습대책위원회와 31사단장과의 협상에서 일단락되었다. 이날 저녁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약 1백50여 명 되는데, 구YWCA에서 분대로 편성되어 비상시에 병력으로 투입되기도 하고 대기하였다.
비상입니다
27일 새벽 1시 30분쯤 외곽지역에 전화를 해서 상황을 점검해 보았다. 지원동, 서방지역, 농성동, 백운동 쪽에서 대규모의 병력이 이동하고 있다고 했다. 도청 안에서는 사람들이 너무나 피곤했기 때문에 다들 아무 곳에서나 누워서 자고 있었다. 나는 이양현 씨를 깨웠다. "비상입니다." 도청 안에 들어와 있는 YWCA의 병력 중 일부를 7, 8명 정도의 분대로 편성하였다. YWCA와 금남로 쪽에, 그리고 도청 외곽지역과 도청의 2층 복도에 배치하고 나니 도청은 조용하였다. 다이너마이트는 이미 뇌관이 제거되고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 윤상원 형이 끝까지 싸우자는 연설은 약 10여 분간 했는데 무척 감동적이었다. 이미 그 전날 밤에 온건파로 불리는 사람들 일부와 여자들이 빠져나간 뒤였지만, 우리들은 남은 사람들 중 나이 많은 사람들과 어린 아이들은 내보냈다. 나는 2층 복도에 랜턴 하나와 카빈 소총 한 자루를 지급받아 배치되었다.
계엄군들은 공원과 양림동을 통해서 도청으로 들어왔다. 먼저 도청 뒷담을 넘어서 들어왔고, 금남로 쪽에서도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M16으로 무차별 난사하며 도청 안으로 들어왔다. 지휘관들은 확성기를 통해 무조건 항복하라고 했으나, 전투가 시작되고 나는 다시 자세를 낮추어서 상황실로 되돌아왔다. 여기서 박남선 씨를 만났는데 그는,
"죽을 때가 된 것 같다. 끝까지 싸우자."
라는 인상적인 말을 했다. 나는 상황실에서 도청 쪽을 보고 총을 몇 번 쏘았다.
정문 쪽에 사람이 없다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분수대 쪽에서 오는 병력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도청 뒤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나는 차를 은폐물로 삼아 몸을 숨겼다. 그쪽에는 기껏해야 13세 정도 되는 어린 아이들이 몇몇 있었다. 나는 이들을 끌고 옆 민간인 집으로 넘어갔다. 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총을 가지고 있으면 다 죽는다. 총을 버리고 따로따로 도망가라" 하며 도망갈 통로를 가르쳐주었다. 잠시 후 도청 주변의 수색이 시작되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자수하라는 목소리와 함께 총을 난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옆집 담을 다시 넘어갔다.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총과 실탄, 그리고 상황일지를 그곳 화장실에 버렸다. 수색이 계속 진행되자 나는 마땅히 숨을 곳이 없었기 때문에 어느 집 화장실 안으로 숨었다. 군인들이 내가 숨어 있던 집도 수색하더니 그냥 나갔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다시 그 옆집 담을 넘어 그곳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피난가고 아무도 없었는데 옷이 몇 가지 있었다. 나는 냄새나는 옷을 갈아입고 다락방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은 밖이 잘 보였다. 노동청 앞에는 전차와 탱크가 포진해 있었다.
그때까지도 도청에서는 교전하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4시가 지나고 동이 틀 때쯤 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도청은 접수되었으니 광주는 평정을 되찾았다"라는 식의 방송을 했다. 그러나 아직도 도청에서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몇 집을 더 넘어서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거기서 몸도 씻고 옷도 갈아입었다. 잠시 후 도청 쪽이 잠잠해졌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나를 데리러 오셨다. 집에 들어간 나는 3일 동안 꼼짝 않고 집에 있었다. 문 소리나 어떤 조그마한 소리조차도 총소리로 들려오는 등 공포에 싸여서 지내야 했다. 거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시 학교로
항쟁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간 나는 신영일, 김영옥, 임낙평, 김선용, 고희숙, 김정희 등과 함께 전남대 운동권 재편작업에 들어갔다. 이 작업은 8월부터 시작되었으며 송정리 고희숙의 집에서 진행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교원운동, 노동운동 등의 부분운동에 대한 새로운 작업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것을 기회로 1981년 싸움을 준비하게 되었고, 나는 신영일, 김경옥, 김전승 등과 함께 광주운동권과 학생운동권의 중심인물로 우연찮게 명사 대접을 받았다.
1981년 서울은 4-6월의 전학기부터 광주의 5월에 대한 이론적인 싸움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광주는 총학의 공백상태와 함께 무력증에 빠져 있었다. 방학중인 8월에 구체적인 싸움 준비를 하여 9월 29일 나와 신영일, 김경옥 씨를 중심으로 하여 싸움에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9.29 싸움의 여파가 너무 컸기 때문에 전남대운동권은 타격이 심했다. 당연히 김경옥과 내가 정리하기로 되어 있던 10월 싸움은 무산되었다. 결국 나는 직업적 혁명가가 될 것인가, 민족이론가가 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모든 것을 대학원 진학으로 정리했다. 또 나의 역할은 야학 속에 몸담은 것으로 끝냈다.
5월 싸움 동안 가장 가슴아팠던 것은 민중들의 역량에 대한 평가가 전무했다는 것이다. 지식인 운동은 5월이 질적인 비등점에 이르렀을 때 탄력적이고 응전력이 강한 건강한 모습을 갖추어내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적들이 5월을 지역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광주에 한하게 했던 원인들도 있었지만 조직력의 헛점이 더 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민중역량과 인텔리겐챠의 역량에 대한 합리적이고 강력한 조직을 꾸리지 못했던 것이 실패의 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신영일 열사의 경우, 그의 조직들은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5월을 혁명적인 시기로 간파하지 못했다. 단지 이론적으로 적들의 전술에 이쪽이 놀아난다는 오판을 내림으로써 1980년 5월에 참여하지 않았다. 신영일 씨는 대중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적도 없었으며 도청 앞에서나 학내집회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때문에 5월에 대한 반성에서 신영일은 조직관리를 주도하지 못한 본인의 반성을 1981년 싸움에서 정리했다.
내 자신의 경우, 1980년 3월부터 1981년까지의 운동권 내부에서 어떠한 개인적인 삶의 준비도 없이 지도부로 위치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현장에서 계속적으로 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의식성향이나 성장환경, 배경 등이 나를 현장에서 견뎌낼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먹물은 아무리 빨고 갈아도 먹물근성은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자신으로부터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5월에 대해서만큼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사회과학 공부의 이론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민중들의 폭발적인 힘에 나는 놀랐다. 노동판에서 욕지거리를 하며 화를 내면서 서로 맞잡고 싸우는 힘들, 오직 가진 것은 몸뚱아리 하나 뿐이라는 그 힘이 그리도 큰 힘인 줄은 몰랐다. 비록 조직역량은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합리적이고 탄력적인 조직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때 죽었어야 한다는 생각들을 많이 하곤 한다. 지금 살아가는 것을 그때 못 죽은 것에 대한, 또는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은혜 갚음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신부가 총을 들듯이 언제라도 내게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대중들을 잘 조직화 해내고 싸워나갈 준비를 하여 신분이나 기득권에 관계없이 총을 들겠다는 마음가짐을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