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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1928년생), 길원옥(1928년생) 할머니는 다시 설움에 복받쳐 눈물을 쏟으셨다. 사진 최영숙
구랍 30일(수)오후 12시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서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으로 칭함)주최로 1211차 일본군 ‘위안부’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시위가 열렸다.
이날 수요 집회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1928년생), 길원옥(1928년생) 할머니와 정대협 회원, 청소년, 시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올해 별세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혼을 기리는 추모회로 진행했다.
순서는 촛불점화식, 추모공연,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를 위한 묵념 및 삶 소개,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추모사, 추모공연- 합창, 헌화- 경과보고- 연대발언- 성명서 낭독-함께 부르는 노래<바위처럼> 순으로 진행되었다.
2015년 황선순· 박00· 이효순· 김외한· 김달선· 김연희· 최금선· 박유년· 최갑순 등 아홉 명의 할머니가 사망해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모두 46명이다.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삶은 나라 잃은 민족의 수난사였다.
2015년 숨진 9분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 이효순 할머니 아들 편지를 읽다. 사진-최영숙
황선순(1926~2015)할머니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17세 무렵에 고모 집으로 밥을 얻어먹으러 가던 중 부산에 있는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남자들의 말에 속아 따라가게 되었다. 부사, 일본을 거쳐 남태평양 나우르 섬의 위안소에 동원되 3년간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했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오랜 시간 지독한 가난과 질병으로 힘들 삶을 사셨다.
박00(1022~2015)할머니는 경북에서 태어나 1943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만주 군수공장에 보내준다는 위안부 소개장이의 말에 속아 만주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시고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어린 나이에 겪은 고생으로 병들어 힘들게 살 다 삶을 마감했다.
이효순(1925~2015)할머니는 경남 의령군에서 태어나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일본군 2명에게 부산 일본을 거쳐 대만, 중국, 싱가포르, 베트남으로 끌려 다니며 3년 정도 위안부 생활을 하였으며 그러는 동안 말을 듣지 않는다고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능 등 고생을 했다. 해방된 후 부산을 거쳐 마산으로 가서 남의집살이를 하고 집으로 가지 못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가지 못하고 힘들게 살았다.
김외한(1934~2015) 할머니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43년 공장에 취직하는 것으로 알고 끌려가 북해도에서 일본군 성노예를 했다. 45년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산에서 나무열매를 따 드시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몇 해 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셨는데 일본군 위안부 후유증으로 고통스럽게 사시다 돌아가셨다.
김달선(1925~2015) 경북 포항 한여동에서 태어나서 19세 때 어머니 따라 흥해시장에서 청어를 팔던 중, 길거리에서 일본경찰에게 끌려가 미얀마로 가게 되었고 해방 후 부산에 도착했으나 아파서 2년 동안 고향에 가지 못하고 지내다 1947년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만났다. 그 후 생선, 채소, 쌀 장사를 하며 생활했다.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만나게 되어 대구지역 할머니들과 함께 활동하셨다.
김연희(1932~2015) 할머니는 32년 대구에서 태어나 5살 때 서울로 이사 왔다.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던 44년 일본인 교장에 의해 차출되어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학교에서 2~3명씩 차출되었는데 아버지께서 중국으로 피신하였다는 것이 불리하게 작용한 탓이었다. 일본의 한 비행기 수속공장에서 약 9개월 동안 일하다 위안소에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하였다. 해방이 되면서 배를 타고 서울에 돌아왔고 위안소에 있었던 기억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최금선(1922~2015) 할머니는 2000년이 훌쩍 넘어서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신고를 했다. 그만큼 해방 이후 긴 시간이 할머니에게는 고통이었다. 2002년 까지도 할머니는 과거의 아픈 이야기를 하기 힘들어 하셨다. 2014년 1월 집에서 쓰러졌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오랜 시간 병원생활을 했다.
박유년(1922~2015)할머니는 경남에서 태어나서 일본군 간호원으로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일본인을 따라 중국 광동까지 가게 되었고 광동과 싱가포르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해방 후 집에 왔지만 집에도 머물지 못한 채 타지를 떠돌며 힘들게 생활했다. 경기도 파주에 살다 미국의 아들집으로 이사 가신 지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이 아파서 오랜 병원생활을 하다 아들 집에서 마지막 2주를 보낸 뒤 타국 땅에서 영면에 들었다.
최갑순(1919~2015) 할머니는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15살 되던 해 어느 날 일본 순경이 아버지를 잡아가려고 집에 왔을 때 식구가 8명이나 되어 아버지가 잡혀가면 식구들 생계가 어려우니 대신 첫째인 할머니가 끌려갔다. 전주를 거쳐 만주 목단강까지 끌려가 일본군인만 있는 부대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셨다. 부대가 옮겨 갈 때마다 이곳저곳 같이 끌려 다니다가 해방을 맞아 3~4년 동안 행상과 걸인 생활을 하며 남으로 걸어서 고향으로 왔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병원 침대에 누워계셨다. “죄 짓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죄지은 사람들에게 사죄도 받지 못하고 하늘로 떠났다.
2015년 돌아가신 아홉 분의 삶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가 교장선생님에 의해 차출되어 가고 아버지 대신 잡혀가고, 사람의 시선이 많은 시장과 길거리에서도 무작위로 정신대로 잡혀갔던 나라가 없는 민족의 피맺힌 한들이 묻어났다. 이 분들은 일본의 사죄를 받지 못하고 한을 품고 세상을 등졌다.
이화여고 학생들 합창 후 카드섹션을 하다 사진- 최영숙
추모사에 이어 이화여고 합창반 학생들의 <벗이여 해방이 온다>,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합창이 있었다. 합창 후 “합의 반대한다. 할머니 힘내세요.”라는 카드섹션을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1928년생) 할머니가 발언을 했다.
이용수 할머니 발언하다 사진- 최영숙
이 할머니는 발언을 통해 “일본은 아직까지 거짓으로 해나왔습니다. 우리들 아직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기에 저는 끝까지 일본에게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인 배상을 요구합니다. 귀가 먹었으면 귀가 뚫렸을 것이고, 눈이 멀었으면 눈을 떴을 것입니다. 24년간 외쳤습니다. 일본에게 사정하는 것 아닙니다. 일본은 가만히 있어도 사죄를 해야 합니다. 내가 집집이 찾아가 내가 일본에게 이렇게 당했습니다. 말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나옵니다. 아베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립니다. 죄를 짓고도 죄를 모르고 거짓말만 하는 아베를 보고만 있어야 하겠습니까?”고 성토했다.
또한 우리 정부에 대하여 “거짓말도 자꾸 하면 늡니다. 거짓말로 타결했다. 해결했다. 맘대로 입을 벌리고 보도했습니다. 미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해결했다는데 기분이 어때요. 어처구니가 없어요. 우리 정부는 뭐하는 겁니까. 외교통상부요. 어제 차관이 왔습니다. 뻔뻔스럽게 와서 벽살 들고 흔들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공휴일이라서. 피해자인 우리에게 협상하는 것을 안내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왜 일본과 짝짝궁이 되어 거짓으로 우리를 두 번 죽입니까?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우리는 조선의 딸로서 곱게곱게 자란 죄밖에 없습니다. 나는 위안부가 아닙니다. 나는 이용수입니다. 나를 끌고 가서 위안부를 만들고 그 죄를 모르고 아직도 오리발 내미는 저 일본을 그냥 둬야 하겠습니까?”고 발언을 하면서 서러움과 분함에 울먹였다.
마지막으로 이 할머니는 “저는 외롭지 않아요. 먼저 하늘로 간 238명도 모두를 위해서 그분들도 한을 못 풀고 갔습니다. 한을 풀기 위해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마땅히 받아야 합니다. 두 번 다시 우리 후손들에게 이런 일이 없도록 끝까지 싸울 겁니다. 저는 나이 젊습니다. 내 나이 88세 활동하기 딱 좋은 나이입니다.”고 발언을 끝냈다.
이분들이 왜 이 추운 겨울에 거리로 나왔는지, 역사는 과연 무엇을 기록할 것인지,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이어서 연대발언이 있었다. 정대협 회원의 연대발언을 듣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1928년생), 길원옥(1928년생) 할머니는 다시 설움에 복받쳐 눈물을 쏟으셨다.
성명서 낭독 후 일본대사관을 향해 고함치다 사진-최영숙
이어서 제1211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성명서를 낭독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염원하며 맞이했던 광복 70년이 이제 겨우 하루밖에 남지 않은 오늘, 이 평화로에는 더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몰아친다. 올해 아홉 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끝내 문제해결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이제 우리 곁에 46명의 할머니들만이 남아있다.
무엇보다 더욱 절망적인 사실은 바로 엊그제 한일 양국이 외교장관회담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타결했다며 피해자들을 다시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일이다. 지난 이십 여 년 동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정부가 조직적으로 자행한 일본군성노예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의 국가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인정하라고 외쳐왔다. 그러나 한일정부가 타결이라고 주장하는 그 합의 속에는 법적 책임은 찾아볼 수 없고 모호하고 진정성 없는 사과만이 담겨있었다. 더욱이 피해자가 빠져 버린 그들만의 합의를 통해 일본정부가 표명한 조치를 착실히 시행한다는 전제 하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확인한다는 어이없는 약속까지 이루어졌다.
과연 이 합의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이루어 낸 합의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정부가 내세워 온,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해결이라는 원칙은 간 데 없이 오히려 피해자들을 무시하고 국민의 염원에 등 돌린 졸속적 합의 앞에 피해자들은 이것은 결코 문제해결이 아니라고 울부짖고 있다. 이미 일본정부는 합의에서 말한 바가 법적 책임이나 배상을 뜻한 것이 아니라고 못 박고 있고, 한국정부를 향해 ‘위안부’ 문제에 손을 떼도록 압박하는 여론전을 서슴지 않고 있다. 한국정부가 볼 맨 소리로 반박이나 하는 동안 합의 과정에서 벌어진 굴욕적인 행태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광복 70년, 진정한 해방으로 한걸음 다가갈 수 있으리라는 피해자들의 바람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지금 피해자들과 함께 여기 선 우리 모두는 참담한 심정을 가눌 수 없다.
고인이 되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그리고 정의 회복을 요구하며 이 순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는 생존자들과 함께 우리는 한일 양국정부를 향해 분명하게 밝힌다. 이번 양국 합의는 피해자들도 시민사회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외교적 담합일 뿐이며 따라서 문제 해결이나 최종 타결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전국을 넘어 세계 각지를 찾아가 차마 말로 하기 힘든 성노예 경험을 증언하며 피해자들이 만들어 온 지금까지의 성과마저 내팽개치고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거론조차 않겠다는 우리정부의 부끄러운 작태에 분노한다. 천회를 넘어 정의로운 투쟁의 역사로 이어져 온 수요시위의 평화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여기 바로 이 자리에 세워진 평화비 철거마저 운운한 한국정부는 이제 일본정부와 함께 더욱 무거운 역사적 책임을 져야함을 분명히 한다. 박근혜 정부가 말하는 ‘대승적 결단’은 피해자들을 저버린 외교 참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국제사회 또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바로 이 순간에도 해결되지 않은 절실하고 긴급한 인류 공동의 인권문제로 남아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군사적, 경제적 동맹을 내세운 국익 챙기기로 수많은 여성들의 인권이 참혹하게 유린당한 일본군성노예 문제를 걸림돌로 치부하고 한일 정부의 졸속 합의에 손을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 한일 양국 정부는 물론 국제사회 어느 정부도 그런 오만과 월권으로 피해자들의 정의실현을 가로막을 수 없다. 국내외 모든 언론 역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먼저 듣고 우선순위로 다루며 약자와 민중 편에서 정도의 길을 가줄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오늘 1211차 수요시위에서 고인이 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앞에 정의의 촛불을 켜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올바르고 조속한 해결을 위해 인권과 평화를 염원하는 세계 모든 이들과 더 굳건한 의지로 함께 나아갈 것임을 다시 한 번 천명한다.
■ 한일 양국 정부는 졸속 합의를 즉각 취소하고 피해자들의 요구에 귀 기울여 올바르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라.
■ 일본정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뜻을 담아 채택한 제12차 아시아연대회의의 제언, 즉 일본정부의 국가적,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이에 따른 조치를 이행하라.
■ 한국정부는 피해자들의 뜻을 저버린 졸속 합의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이제라도 피해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올바른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라.
■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게 정의를! 진정한 해방을!
2015년 12월 30일
2015년 돌아가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추모회 및 제1211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참가자 일동“
소녀상 앞에서 시위를 하다 사진-최영숙
인천에서 온 김예원(2000년생)학생은 “수요 집회 하는 것을 알고 친구와 일부러 참석했다. 할머니들이 우리나이에 끌려가시고 고생하신 것을 뵈면서 역사를 생각했다. 일본에 화가 나고 할머니들에게 도움이 못되어 죄송하다. 또한 할머니 의견 없이 타결된 것에 너무 속이 상했다.”고 했다.
외교부(外部交)를 왜교부(倭部交)라고 쓴 피켓을 든 청년이 소녀상 앞에서 시위를 했다.
바닥에는 “이 소녀상은 미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왜군의 군화 발에 젊음과 육신을 낭자당한 이십만 조선 소녀의 갈기갈기 찢긴 육신을 그분들의 한과 인류의 양심과 8천만 겨레의 피눈물로 빗어 만든 상입니다. 누가 이 상을 어디로 옮긴단 말입니까? 이곳은 하느님도 범접 못하는 영원불변의 <불가역적>장소입니다. 그런 것을 <10억엔>과 맞바꾼다고?”는 글이 적여 있었다.
2015년 12월 28일 윤병세-기시다 위안부 해결 합의안은 다음과 같다
법적책임- ‘군의 관여’를 명시하면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힘. 책임이 법적인지 도의적인지 여부 밝히지 않음.
사과방식과 내용 -총리가‘일본국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밝힘
기금, 재단 규모- 10억엔
구체적 지원 -일곤 정부가 설립한 재단을 일본 예산으로 운영
결과- 한.일 정부 타결
향후 문제 제기- 책임 이행 전제 아래 서로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 확인
소녀상은 묵묵하게 그 자리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첫댓글 ● 진정한 사죄와 반성이 없는 왜(倭)는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되는 나라임이 분명하다.
● "용서는 강요로 가능하지 않으며, 섣부른 용서는 정의와 멀어진다. 우리에겐 용서할 권리도 있지만, 용서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_권영숙 노동사회학자
대한민국 정부는 엉망진창이다, 그럼에도 더 안타까운 것은 선거때마다 집권 여당이 압승을 하는 것이다.
제발 좀 말로 정치하자. 여당은 하면 한다고 얘기나 좀 하고, 야당의 의견을 들어보기라도 해라.
야당은 야당이 할 말을 하자, 표 찍어주면 여당하고, 그래도 안찍어주면, 야당하고 계속해서 해야 할 말을 하자, 눈치보지 말고, 그러면 국민은 언젠가 표를 줄 것이다.
- 2016.1.4.jtbc 정치토론에서 유시민 정의당 공동대표가 한 발언을 추려보았다.
문득 지난 가을 제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서두른다는 것은 서툴다는 것이다."
그 고통의 세월을 고스란히 안고 가시는 저 분들에게 이 나라는 조국이 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저승에서는 미련 없이 내던져버릴 듯...
"서두른다는 것은 서툴다는 것이다." 참 스승은 도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