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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yond reason
수치심의 초월
절망의 밑바닥에서는
에너지가 고갈되고
생존에의 의지조차
말라붙는다.
종종
지옥과 절대적 절망의 수렁속에서야
심지어 육체의 죽음이 임박한 지점에 가서야
에고는 내맡겨질 수 있다.
극심하고
영원한 참을 수 없는 고통속에서
영혼은 "신이 계시다면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할 수 있는데,
그와 함께 큰 변형이 일어난다.
이는
"천국과 지옥은 종이 한장차이"라는
선불교의 가르침이
진실임을 확인해준다.
서론
이 수준(수치심)은
위험스러울만큼
죽음에 가깝다.
죽음은
의식적 자살로 선택될 수도 있고,
혹은 삶을 연장하기 위한 조처의 불이행으로보다
미묘하게 결정될 수도 있다.
이 수준에서는
방치나 무관심, 부주의,
사고에 의한 죽음이 흔하다.
누구나 "창피"를 당하고,
명예를 잃어버리고,
혹은 존재를 무시당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고통에 대해서 알고 있다.
사람들은
수치심(자기혐오)에서
목을 메달고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며
슬그머니 도망친다.
추방은
수치심의 전통적 동행이며,
인류가 기원한 원시적 사회들에서
그것은 죽음과 맞먹는다.
이것이
불인정과 거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의 바탕에 있는 것이다.
방치나 신체적, 감정적 학대,
성적학대와 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은
수치심으로 인도하며,
나중에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한평생 성격을 왜곡한다.
프로이트가 단정한 것처럼 수치심은 신경증을 낳는다.
수치심은
감정적, 심리적 건강에 해로우며
낮은 자존감의 귀결로서
육체적 질병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수치심을 바탕으로 하는 성격은
수줍고 위축되어 있으며,
내향적이고 자기비하적이다.
수치심은
학대의 도구로 이용되며,
수치심의 희생자들은
종종 잔인해진다.
수치심을 느끼는 아이들은
동물을 학대하며
서로를 학대한다.
고작
20대의 의식수준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은
위험하다.
이들은
편집증은 물론 비난성 환각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고,
일부는 정신병자가 되거나
기괴한 범죄를 저지른다.
편집증(偏執症) 또는 파라노이아(영어: paranoia)는 심각한 걱정이나 두려움으로 자신이 주변으로부터 피해를 받을 것이라는 병리적인 의심을 고집하는 이상심리학적 상태
일부
수치심이 기저에 깔려있는 개인들은
완벽주의와 완고함으로 보상하며,
강박적이고 편협해진다.
이에 대한 악명높은 사례는
자경단을 조직하는 도덕적 극단주의자들인데,
이들은 자신의 무의식적 수치심을 타인에게 투사하고,
그 다음 그들에게 정당한 공격을 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낀다.
연쇄살인자들은
수치심, 증오, 성적 도덕주의를 행동화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 성적 도덕주의에는
나쁜 여자들에 대한 응징이라는 정당화가 들어있다.
수치심은
성격의 전 수준을 끌어내리기 때문에
다른 부정적 감정에 대한 취약성을 낳고,
따라서
그릇된 자부심과 분노,
죄책감을 일으키는 일이 많다.
임상적 측면
심한 우울증은
사람을 무력화하고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심각한 의식수준이다.
이것은
개인만이 아니라
무감정적으로 죽거나 자살하기 조차하는
큰 집단의 사람들 대부분에게 일어난다.
절망은
무력함과 희망없음을
특징으로하고,
따라서
기력없는 상태로 묘사되어
지옥처럼 견디기 힘들다.
살려는 의지는 실종되지만
맨 밑바닥에 있으므로
에너지 결핍으로 인해
자살이라는 행위조차 가능하지 않다.
수동적 자살은
먹지 않거나
육체적 필요를 채워주지 않아서
일어난다.
역설적으로
사람은
우울증의 심각한 무감정에서 빠져나와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음에 따라
자살을 감행할 수 있다.
이는
항우울제가 특히
아이들과 청소년의 자살을 유발할 수 있다는
오해를 받고 있는
임상적 역설을 설명해준다.
이것은 항우울제가 사용되기 훨씬 전부터 오랫동안 임상에서는 유명한 현상이었다.
'무감정성 우울증'이
개선되기 시작할때,
초조성 우울단계(agitated depression)가 출현하는데
여기에는 자살을 감행할 에너지가 존재한다.
V G Kenchadze, E D Chkoniia, G G Sikharulidze
In our study we aimed to verify the clinical features of agitated depression, which intensify suicidal trends leading to completed suicide. From 477 patients with agitated depression we selected 126, who presented high risk of suicide and studded them by using Mood Anxiety Inventory. On the bases of the structural-dynamic analyses we determine seven clinical variations of agitated-depression with prominent affective, cognitive, psychomotor, somato-algetic and behavioral symptoms. The most dangerous types with regards of suicidal behavior appeared to be senestopathic and algetic types and agitated depression with depersonalization and derealization.
예전에
항우울제가 사용되기 전에는
환자들이 무감정에서 초조성 우울단계로 개선되면
철저한 감시하에 놓였다.
수치심은 또한
'자기혐오의 반영'이며,
이것이
외부로 향할 때
살인에까지 이르는
심각한 공격을 초래할 수 있다.
무분별한 동급생 살인범의 상당 비율이
항우울제를 복용중이었다는
언론보도는 주목할만 하다.
우울증에 동반되는 것은
뇌생리의 큰 변화들 및
노르에피네프린과 세로토닌같은
중요한 신경전달 물질의 부족이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성향은
강한 유전적, 카르마적 요인들을 포함하며
종종 가족성을 나타낸다.
성인 중에서 최소한 1/3이
생의 어느 시기에 심각하거나
꽤 심한 정도의 우울증을 앓게 될 것으로 추산된다.
임상적으로
우울증에는
대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진짜 자살 경향성을
상대적으로 보다 빈번한 자살 제스처나
자살 위협과 구별하는 것이
또한 어렵다는 것이다.
자살제스처나
자살위협은
흔히 대인관계 및 분개를 포함하는
어떤 다른 문제에서 비롯된다.
심각한 정도의 우울증이
적당한 조건하에서 극복될 수 있긴 하지만
그것은 사실 보호와 지지의 필요성뿐 아니라
정신과적 도움이나
다른 전문가의 임상적 도움의
필요성을 가리킨다.
희망상실과 살려는 의지의 상실은
동반되는 우울증과 더불어
고립되어 있는 외로운 이들, 노인들,
스트레스가 심한 심리적 소모를 겪은
보통 사람들에게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심한 스트레스에는
이혼, 재정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애도과정 자체와 같은 것이 있다.
자살은
청소년 사망
제1 원인이다.
다른질병과 마찬가지로
주요 감정문제들은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요소들로
구성된다.
또한
카르마적 영향력은 물론이고
그밖의 대인관계 요인 및
사회적 요인들이 있을 수 있으며,
회복을 위해서는 그러한 요인들의 일부
혹은 전부를 처리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진단되지 않은
기능적 저혈당증과 같이
표면상으로 단순한 신체적 문제
또한 주된 기여요소일 수 있다.
(많은 우울증 환자가
단순히 설탕을 피하는 것으로 회복되었다).
적절한 도움을 구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부심(영적), 부정(심리적),
혹은 단순히 무지(카르마적)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 다음 기분 변동은
대인관계와 고용에 조차
영향을 미친다.
겸손함을 가질 때
모든 기여요인을 살펴볼 수 있고,
매우 심각하고 거의 치명적인 상태에서도 회복될 수 있는데,
이는 영성에 기초한 치유모임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죽음의 매력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혐오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정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죽음 또한
적당한 조건하에서는
하나의 매력으로
혹은 최후의 복수행위, 영웅적 희생이나
자기 연민의 극단적 행동화로 보인다.
또한
죽음의 낭만에 있어서
이를 통해 죽음은
그 고유한 드라마를
찬양받는다.
죽음의 스릴은
로마의 콜로세움, 결투, 자동차 경주로,
전쟁행위에 스며들어 있다.
죽음과 희롱하는 것 또한
위험 부담이 높은
매력이다.
죽음은 또한
의식으로 치러질 수 있고(할복자살),
말들이 느릿느릿 관을
끌고가는 국장행렬이
뒤따르는 장례식을 통해 엄숙하게 기려진다.
프로이트는
타나토스(삶의 본능인 에로스와 대비되는)라는
내재하는 죽음의 본능을 가정했는데,
이는 원시적 무의식속에 깊이 파묻힌 채
거기서 잠재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죽음의 본능의 영향력은
주입을 통해
강화될 수 있다.
현재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광신적 자원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의 교가 있는데,
이것은 인상받기 쉬운
순진한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이다.
이들은
자살뿐 아니라
동시에 무고한 이들을
대량 살육하도록 유도받는다.
2차 대전기간 동안에는 수많은 카미가제 자원자가 있었다. 이렇듯 삶의 극적인 퇴장은 독특한 매력과 극적 매혹을 갖는다.
가장 일반적으로
자살은
믿음이나 희망의 상실에 따른 절망과
자포자기의 행위이다.
영적 측면 : 영혼의 어두운 밤.
신에게 버림받은 느낌과
절망상태는
전반적 우울감으로 귀착되며,
단테가
"여기에 들어온 너희는 모두 희망을 버려라"라고 묘사한
지옥의 경험적 하층들에 비길만한
시간경험의 변질을 포함할 수 있다.
이 상태는 또한
격렬한 내면의 영적 작업의 귀결로서 나타난
일시적 국면일 수 있는데,
이는
특히 조심성을 내팽개치고
의식의 맨 밑바닥 수준들을 탐색하는
헌신자들에게 그렇다.
의식의 맨 밑바닥 수준에서
헌신자는
에고를 포기하고
모든 의심을 버릴 필요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래서
이 상태는
에고 자체를 완전히 버리기 전에
영적 진실의 내적 확인에 도달할
필요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묘한 일이지만
이는 헌신적 무신론자가
실제의 무신이 진실인지
혹은 신없이 생존이라도 할수 있는지 여부를
증명하려고 할 때
걷는 바로 그 길일 수 있다.
심한 영적 우울증은
에고가 생존을 위해 싸우는 동안
딛고 있는
마지막 발판을
상징할 수 있다.
에고의 기본적 환상은
자신이 신이며
자신없이는 죽음이 초래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의 어두운 밤"으로 묘사된 것은
사실상 에고에게 어두운 밤이다.
에고의 핵심과 대면은
예기치 않게 일어날 수 있으며,
또한 집착과 함께
에고의 환상 및 소중히 품어온
그릇된 영적/종교적 신념과 신에 대한 공상을
놓아버린 귀결일 수 있다.
신에 대한 공상이란
예컨대
신이 애걸복걸이나
흥정에 응답하리라는 것이다.
"오 신이시여!
제가 당신을 위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보십시오"
역설적으로
영혼의 어두운 밤이
종종 의미심장한 영적 진보를 표시하는 것은,
어둠속에 있는 건 실제로
영혼(참나)가 아니라
에고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직 내려갔던 만큼
올라갈 수 있다는
영적 금언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렸고,
붓다는
뼈가 부스러지고
악마의 공격을 받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는 것을 기억함으로써
다소라도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영적 좌절과
캄캄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뒤따라야 할 필요한 인식은
영적으로
'모든 두려움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에고의 내적 핵심이
생명의 근원자체라는 신념과 함께
사람이 소중히 붙들고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놓아버려도 괜찮은 이유는
그러한 경험이
아무리 강렬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기하고
신에 넘기는데 대한
마지막 장벽은
존재의 핵심 자체의 표면상으로
환원불가능한 토대이다.
그렇게 해도 괜찮은 이유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근원, 환원, 불가능한 핵심,
자신의 생명의 본질로 보이는 것을
내맡김과 더불어
카르마적으로 적절한 때에
문이 열리고
현존은
신성한 광휘를 내뿜는다.
사적인 나는
마음과 더불어
영원의 무한한 나속으로 녹아드는데,
거기에는
심원한 평화와
모든 시간을 넘어선
하나임의 상태가 있다.
이 상태는
마음이나 에고의 귀결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기능하기를 그칠 때
대신 들어서는 것이다.
절망의 문을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걸음을 내딛는데는
용기, 확신,
깊은 내맡김이 필요하다.
진동형태의 진실과
진정한 스승의 오라가
최대로 도움이 되는 곳이
바로 여기인데,
붓다든, 그리스도든, 크리슈나든
혹은 곧바로 신이든간에
자신이 선택한 스승, 구세주,
궁극의 영적 실상을 보는 일 역시
큰 도움이 된다.
경험상으로
영혼의 어두운 밤의
또 다른 형태는
높은 상태에서 추락한 귀결로 일어나는데,
그것은
기독교 성인들의 삶에서
자세히 묘사된 것과 같다.
이는
선업을 다 썼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으며,
뒤이어
카르마적 집착과 경향들 나머지가 처리되어
신에게 내맡겨지기 위해
표면으로 떠오른다.
그중 일부는
자기혐오,
신에 대한 분개처럼 뿌리가 깊은데,
괴로움에 대한 신념들에 달라붙어 있는
소중한 신념들 역시 마찬가지다.
영혼의 어두운 밤에는
일정한 신념에 대한 믿음이
실재의 실상과 맞선다.
신에 대한
모든 신념은
타인에게서 비롯되고,
전해진 간접적 정보이므로
이러한 것조차
내맡겨져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오직 고양이만이
고양이임으로 말미암아
고양이로 존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진실로 안다는 비유를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고양이는
고양이로 존재함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어떠한 신념체계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신에 대한
모든 그릇된 신념은
경험적 실상에 대해 외래적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문은
"모른다"는
깊은 정직함을 거친다.
참나로서,
혹은 내재적 신으로서
내면의 신성의 경험은
초월적 신에 대한 신념과는
전혀 다르다.
붓다가
신에 대한 모든 묘사나
명명을 피하고 권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인데,
그것은
깨달음이란
자기인식의 정체에 대한
자기인식의 조건 혹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 혹은 상태에서는
자기와 같은 그것으로
참나를 묘사할
"이것"은 없다.
그러한 조건 혹은 상태는
스스로 빛을 발한다고
묘사하는 것이 가장 낫고,
그러한 상태에서
인식은
그것 자체의 실상이다.
특히 서양의 종에서는 카르마라는 용어가 쓰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본적 실상이다. 카르마는 사후에 영혼의 운명을 결정하는 영적 책임이기 때문이다.
카르마라는 용어는
또한 인간존재에 내재한
영적문제들을 포함하는데,
그러한
영적 문제에는
인류가
제한된 영적이해(무지)를
특징으로 한다는 사실이 포함된다.
그리하여
인간 삶의 목적은
위대한 종교적,
영적 스승들이
드러내준 것과 같은
영적진실을 통해
이러한 상속받은 한계(무지)를
극복하고 초월하는 것이다.
카르마는
서구인의 정신에서
재탄생, 윤회
혹은 다수의 인간생과 혼동을 일으키는 일이 많다.
일반적으로
카르마란
영혼이 기원과 운명에서
공히 진화적이라는 것과
영혼은
자신의 결정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킬 뿐이다.
누구나 날때부터
이미 특정한 의식수준을 가지고 있다.
실용적으로
그러한 조건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무관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의식연구는 물론이고
다양한 종교에서
다른 설명을 제공한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각 개인은
진화과정에서
자신이 처해있는
바로 그것에서부터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카르마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개인의 환경은
우연적이거나 변덕스럽게 보일테고
그래서 그것은
모든 창조가
신성한 조화, 정의,
균형의 반영임을 입증하는
의식연구의 발견들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카르마적 절망
카르마적 절망은
비극적인 대사건이나
재앙을 통해 경험되는 일이 많다.
또한
인간으로 존재한 것의 귀결일 뿐인
인간의 집단적 카르마가 있다.
인간의 집단적 카르마는
집단적 조건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데,
이러한 조건은
인종적, 종교적, 지리적인 것일 수도 있고,
과거의 행위나 동의로 인해
다른 방식으로 정렬되어 있을 수도 있다.
카르마는
선형적이며,
영혼을 통해 전달되고
의지에 따른 유의미한 행위의 귀결로서
상속된다.
카르마가
표면상으로
부정적인 귀결일 가능성은
인간역사로부터
쉽사리 추론해낼 수 있는데,
인간 역사는
고의적이고 방자한
신성 모독행위는 물론
무고한 이들에 대한
무익한 살육에
빈번히 반복적으로 휩쓸렸다.
부정적 카르마의 귀결인듯 보이는 것에
휘말리는 것은
이전의 의견일치
그리고/혹은 참여의 결과이다.
그래서
검투사의 죽음에 환호하는 것은
카르마적으로 의미심장한데,
이는
고통과 괴로움
혹은 타인의 죽음에서
섬뜩한 만족감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두대의 작동에 환호하는 것은
그것의 카르마적 귀결에
합류하는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정의를 세우는 일은
카르마적 위험성을 안고 있는데,
그 이유는
"주께서 이르시되, 정의는 나의 것이니라'이기
때문이다.
신성이
절대적 정의를 보증한다는 믿음은
표면적으로
불의한 세계에서는
수용하기 어렵다.
신의 절대적 정의와,
너희가 심판받지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라를
믿는 것이 낫다.
그것은
'너희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를
기억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너희가 심판받지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라
너희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신성한 정의(카르마의 법칙)에 대한
유용한 설명은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을 다 아는
무한한 의식의 장은
신성의 광휘 그 자체이고,
그속에서는
아무리 사소해 보이더라도
모든 지나가는 사건이 다
기록된다는 각성이다.
사람은
태어날때
의식의 무한한 장 자체속
선형적 장의 성질의 한 귀결로서
전체적 카르마의 장과 자동적으로 정렬된다.
그래서
오직 의지에서 나온 행위를 통해서만
하나의 실체는
자신의 운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사람의 의식측정치는
내적 결정과 의지에서 나온 행위에
좋게든 나쁘게든 영향받으며
그것의
한 귀결로서
개별적 실체는
어떤 끌개장에 지배되는
자신에게 적절한 의식수준에 이끌린다.
이렇듯
사람의 의식수준은
카르마적 유산을 반영한다.
머리카락 한올이라도 세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없다
의식의 본성에 대한
전체적 이해에서 볼때,
정의(카르마)는
의식의 전체적인 무한한 장내에서
영혼의 진동이
상호작용한 귀결로서
자동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실과 의식측정 연구의 과학은
"머리카락 한올이라도
세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없다"는
성경구절을 확인해준다.
신성의 무한한 장은
전부를 다 알 수 있고,
정의는 이를 통해
자동적으로 승리한다.
인류의 공상은
인격신의 무의식에서
투사된 것들인데,
인격신은
복수하고, 질투하고, 노여워하며
재난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하지만 그동안 인류역사에서 발생한 것보다 더 높은 비율의 자연재해가 인간이 존재하기도 전에 일어났을 것이 분명하고, 그러한 자연재해는 사실 공룡시대의 종말을 부른 조건이었다고 추정된다.
요약해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바와 같이
카르마(영적운명)는
의지에 따른 결정의 귀결이며,
육체의 죽음위에
영적운명을 결정한다.
또한
영적 운명에는
인간 물질계에서 환생하는
선택지도 포함되어 있는데,
의식측정 연구에 따르면
이는
개인의 의지에 따른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렇듯
모든 인간은
동의에 따라
이 길을 선택한 것이다.
더구나
의식연구는
현상이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이
영적진화를 위한
최적의 조건하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확증한다.
카르마는
사실 책임성을 의미하며,
이전의 영적연구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실체는
우주에 책임이 있다.
또한
긍정적 카르마(선행, 기도, 사심없는 봉사, 자비로운 행위 등)는
부정적 카르마(악업)를 보상하고
해소할 수 있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공덕이 쌓이는데,
때로는
파란만장한 삶에 직면해서
공덕을 빼 쓸수조차 있다.
영적 진보는
일반적 세상에서의 존재 방식을
이득을 쫒는 거래로 바라보지 않고
선의, 용서, 사랑임을 선택하는데
자동적으로 뒤따라 일어난다.
자신의 카르마를 녹인다는 것은
이번 생뿐아니라
역사적인 잊혀진지 오래된
진화상의 측면들 또한
포함하는 것이다.
영적 작업은
인간의 집단 무의식의 측면들은 물론
억압된 태도, 생각, 신념들을
개인의 무의식으로부터
끌어올릴 수 있는데,
인간의 집단무의식은
융의 원형들의
차크라계에 비길만한 것에
강력하게 정렬된다.
인간 발달의 본성으로 인해
성숙하고, 지적으로 완전히 성장한
어른조차 억압되었거나
잊혀진 그러나 여전히 기능하는
유아적이고 아이같은 욕구들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러한 유아적 욕구는
부지중에 작용한다.
가장 흔한 것중 하나가 "좋은 나"와 "나쁜 나"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균형을 잡는 일이다. 선악의 양분은 여러가지 심리적 어려움의 근원일 수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나쁜 나를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집단 : 지역적, 상황적인 재앙
심한 가난, 박탈, 기아는
이전의 책에서 묘사하고
설명한 바와 마찬가지로,
세계 전지역과 문화,
주요지방에서
지리적으로 풍토적이다.
그러한 것들은 높은 출생률과 높은 유아사망률, 짧은 수명, 높은 유병률, 내정의 혼란, 부족간의 전쟁, 잔학행위, 대량 살육을 특징으로 한다.
의식연구는
지역적으로 풍토적인 가난이
집단 카르마에서 기원하며
유전적 전달과 상호관련속에서
그 자체를 표현한다는 것을 확증해준다.
사람과의 초기형태(측정수준 85-90)들이 왔다가 갔는데, 호모 사피엔스는 진화의 관점으로 보면 진화의 나무에서 극히 최근에야 출현했다.
사실 지금 시기에
인간집단의 대다수(78%)는 200이하로 측정되며,
이 집단은 따라서
그러한 수준과 일치하는 경험들을
일으키고 끌어당긴다.
각각의
측정된 의식수준은
그 밑에 있는 수준들을 넘어선
진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한때
그보다 높이 올라갔던 이들이
고의적 선택의 귀결로서
추락한 바로 그 수준을 나타낼수도 있다.
이 하향하는 수준은
대단히 유명한
정치 지도자들의 사례에
잘 기록되어있는데,
이들은
400대로 측정되는
온전하고 이상주의적인 지도자로 출발했으나
나중에
과대망상증이 발생한 귀결로
아주 낮은 수치로 무너져 내렸다.
나폴레옹, 히틀러 등 동일한 현상이 이스터 섬을 비롯하여 그동안 출몰한 다른 사회들과 같은 집단에서는 물론 보통의 개인들에게서 일어난다.
일반적으로 부정적 카르마로 알려진 것은 때로 "빚"으로 지칭되는데, 예를들면 이렇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준 것처럼
우리가 진 빚을 탕감해 주시옵고"
비록
의지에 따른 결정은
카르마적 귀결을 갖지만,
적절한 영적 정렬과
봉헌을 통해
그러한 귀결에서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진화할 때,
상승된 수준 각각에는
그에 따른 시험이나
유혹이 있는데,
부주의한 이들은
거기 넘어갈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부, 권력, 명성이다.
이것은
분석적으로
루시퍼적 유혹으로 묘사되며,
이는 힘 자체를 위한 힘이나
혹은 타인을 지배하려는
힘에의 유혹이다.
오류의 원천은
힘의 근원을
신성이 아닌 에고 "나"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비슷한 추락이
세속적 세계에서 나타나는데,
세속의 기업 대표들은
현실감을 완전히 상실하고
무제한적 힘에 대한 욕심에
굴복하는 듯하다.
수치심은 또한
영적/종교적 지위와 영향력을
남용한 귀결이기도 한데,
이는 한때 세계적 명성과
막대한 부를 누렸던
추락한 구루들의 재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많은 세계 문학에 우화가 포함되어 있는데, 예를들면 구약의 우화와 나중에 일신교의 발생으로 대체된 다른 종교들의 우화는 물론 그리스 신화와 게르만 신화에 나오는 우화들이 있다.
영적작업이
힘겨울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 성인들에 관한 기록된 역사에서 입증된다.
그중 많은 것이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적절히 묘사되어 있다. 붓다 또한 자신이 환상들과 공격과 마라(환상)이라는 부정적 악마 에너지들의 공격을 받았던 일에 대해 묘사했다.
종전의 연구로부터
모든 사람이 카르마적 기회에 대해
최적인 조건하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분별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데,
왜냐하면 불행이나 재앙으로 보는 것이
해소해야 할 부정적인 카르마를 가진 이들에게는
해방에 이르는 문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 파국적인 사건들은
영혼의 진화를 위해
필수적이고 필요한 요소일 수 있다.
초월
절망의 밑바닥에서는
에너지가 고갈되고
생존에의 의지조차 말라붙는다.
종종
지옥과 절대적 절망의 수렁속에서야
심지어 육체의 죽음이 임박한 지점에 가서야
에고는 내맡겨질 수 있다.
극심하고 영원한 참을 수 없는 고통속에서 영혼은 "신이 계시다면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할 수 있는데, 그와 함께 큰 변형이 일어난다. 이는 "천국과 지옥은 종이 한장차이"라는 선불교의 가르침이 진실임을 확인해준다.
이상야릇하게도
에고는
신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로서
이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데,
에고의 그러한 시도에는
자신의 육체적 죽음까지도 포함한다.
이렇듯
마지막 순간까지
에고는
죽음은 하나의 실상이되
신은
그렇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수치심의 이원성
수치심은
자기와 참나의 실상을
모두 부정한 귀결이다.
이것은
정상적 삶에서는
일시적이지만
하나의 우세한 의식수준으로서는
영적진화에 대한 매우 큰 장애를 나타내고,
심할때는
육체적 생존을 위협하여
자살을 하기도 한다.
첫댓글 요약해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바와 같이 카르마(영적운명)는 의지에 따른 결정의 귀결이며, 육체의 죽음위에 영적운명을결정한다. 또한 영적 운명에는 인간 물질계에서 환생하는 선택지도 포함되어 있는데, 의식측정연구에 따르면 이는 개인의 의지에 따른 동의가있어야 한다. 이렇듯 모든 인간은 동의에 따라 이길을 선택한 것이다. 더구나 의식연구는 현상이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이 영적진화를 위한 최적의 조건하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확증한다
자신의 카르마를 녹인다는 것은 이번 생뿐아니라 역사적인 잊혀진지 오래된 진화상의 측면들 또한 포함하는 것이다. 영적 작업은인간의 집단무의식의 측면들은 물론 억압된 태도, 생각, 신념들을 개인의 무의식으로부터 끌어올릴 수 있는데, 인간의 집단무의식은 융의 원형들의 차크라계에 비길만한 것에 강력하게 정렬된다. 인간 발달의 본성으로 인해 성숙하고, 지적으로 완전히 성장한 어른조차 억압되었거나 잊혀진 그러나 여전히 기능하는 유아적이고 아이같은 욕구들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러한 유아적 욕구는 부지중에 작용한다.
카르마!
문제없어요^^ㅋ
갚아야 할 부채가 있다면 하루 빨리 당겨서 기꺼이 혼신을 다해 갚으면 되죠?
한편
하늘에 쌓인 포인트가 있다면
기쁘게 신나게 기차게 재기발랄하게
삶을 통해 쓰면 되겠지요?
가장 흔한 것중 하나가 "좋은 나"와 "나쁜 나"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균형을 잡는 일이다. 선악의 양분은 여러가지 심리적 어려움의 근원일 수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나쁜 나를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초월
절망의 밑바닥에서는 에너지가 고갈되고 생존에의 의지조차 말라붙는다. 종종 지옥과 절대적 절망의 수렁속에서야 심지어 육체의 죽음이 임박한 지점에 가서야 에고는 내맡겨질 수 있다. 극심하고 영원한 참을 수 없는 고통속에서 영혼은 "신이 계시다면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할 수 있는데, 그와함께 큰 변형이 일어난다. 이는 "천국과 지옥은 종이 한장차이"라는 선불교의 가르침이 진실임을 확인해준다.
이상야릇하게도 에고는 신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로서 이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데, 에고의 그러한 시도에는 자신의 육체적 죽음까지도 포함한다. 이렇듯 마지막 순간까지 에고는 죽음은 하나의 실상이되 신은 그렇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