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계의 큰 별 김활란 그녀는 누구인가? -
목 차
첫째. 20세기를 빛낸 여성
둘째. 반민족 행위
- 반민족행위의 시점
- 야마기 카쓰란이 되어.
- 친일에서 친미로..
셋째. 회(灰)칠한 무덤
넷째. 토론해봅시다.
- 결 론
20세기를 빛낸 여성
金活蘭, 창씨명 天城活蘭, 1899∼1970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교육·기독교계 여성지도자의 대명사 김활란
김활란은 일제하에서는 '여성박사 1호,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YWCA 창립자' 등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교육·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 꼽혀왔다. 그리고 8·15 이후에는 이화여대 총장직과 배화학원, 국제대학,동구학원, 금란여중고, 영란여중고 등 여러 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사회단체로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여학사협회, 대한부인회, 주부클럽연합회, YWCA 등 여성단체를 설립하고 회장 등의 임원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정부수립 직후에는 유엔총회 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6·25 때는 공보처장, 1965∼70년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아시아반공연맹 이사 등 정치·외교활동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 결과 정부로부터 1963년에는대한민국장 포상을 받았고, 1970년 사망한 이후에는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을받았다. 이렇듯 여성명사의 대열에서 김활란은 빼놓을 수는 인물이다. 그러나 교육·여성계에서 그가 누렸던 명성과 지위만큼이나 일제 말기에는 교육.종교계 인물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친일 행각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유엔으로부터 대한민국 인준을 이끌어낸 김활란과 한국 대표단(1948) 그의 눈부신 외교활동은 1956년부터 1959년까지 홍일점의 한국대표로 유엔총회에 참석하여, 외국인들오 하여금 한국은 몰라도 헬렌 킴은 안다 는 유명한 일화를 만들어 내었다.
반민족행위의 시점
1930년대 중반을 넘으면서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 건설을 위해 민족말살정책, 황민화정책을 강력히 시행하여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신사참배,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낭독 등을 강요하였으며 철저한 통제망을 조직하여 우리 민족을 전쟁수행의 도구로 삼기 위해 광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식인층이 일제에게 굴복하여 반민족적 행위에 나서는 데는 각각의 계기가 있었다. 기독교계 학교에 속한 인물들은 일제가 신사참배 등의 문제로 일제와 선교사들의 입장이 배치되었을 때, 폐교를 무릅쓰고 일제의 정책에 반기를 들 것인가, 아니면 묵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을 맞이했다. 김활란이 몸담고 있던 이화여전은 일제의 각종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일제의 요구에 응하며 이리저리 끌려 다닌 대표적인 이가 바로 김활란이었다. 그가 저지른 친일행각은 교장직을 맡았을 때인 1939년 4월 이후부터가 아니라, 조만간 맡을 가능성이 엿보였던 1936년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즉, 1936년 부교장으로서 그는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주최한 사회교화간담회에서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1937년 1월 황민화정책을 철저히 하는 방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방송에도 참가하였다. 그리고 1937년부터는 일제와 관련된 일회적인 모임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단체활동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즉, 1937년 1월 말에는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중일전쟁이 터지자 손정규(孫貞圭)와 더불어 애국금차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사회자로 활약하였다.
애국금차회는 일찍부터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 부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단체였다. 이후 그는 이와 같은 목표를 둔 단체나 활동에 약방의 감초처럼 참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곧 '출정가족 간담회'({매일신보}, 1937. 10.6)에 참가하는 등 친일의 수렁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이전까지의 김활란의 행적에 대해서는, 일제하라는 조건에서 합법적인 계몽운동을 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애국금차회에 가담한 시기부터는 민족역사상의 분명한 반민족적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1938년 3월 칙령으로 내선일체화란 이름하에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어 사학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수업중 조선어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학생들은 군수공장에 근로동원되고 학교과정에서도 우리 문화나 전통에 관한 것은 말살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김활란은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00명 처녀들로 '총후 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다. 한편 기독교 여성단체 중 가장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던 조선YWCA가 1938년 6월 8일 일본 YWCA에 가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이 때 회장이 김활란이었다. 김활란의 친일활동은 계속되었다.
그는 1939년 이화전문학교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것에 앞장 섰다. 당시 일제는 중등과정의 학생들에게는 강제로 교복을 입게 했지만 전문학생의 경우는 학교의 재량에 이 문제를 맡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 부교장이었던 김활란은 언론({동아일보})과 학생.학부모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체생활상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교복을 입게 하였다. 이것이 학교에서 한복이 사라지게 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야마기 카쓰란이 되어.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연행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식민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선전하기 위해 각종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여기에 친일 여성단체를 만들고 여성명사들을 동원하는 등 여성들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김활란은 임전대책협력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등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직을 맡았다. 그리고 여성대중에게는 노력동원, 가정의 절약과 저축을 강조하였다.그는 1941년말 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으로 창씨하였다. 그리고부인궐기촉구 강연, 결전부인대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미화하고 내선일체 황민화시책을 선전하며 일반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확장되는 전선을 일본인 군인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남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고자 한 결정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감격하였다.
친일에서 친미로
김활란등의 친일세력은 한국이 해방을 맞았을 때 또한번 재빠른 변신을 한다. 미군정이 들어서고 그들이 미는 이승만 정부가 단독정부를 세우자 이승만의 편에서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이며 정부의 요직에 앉았다. 모윤숙 등은 '모일류 여자대학교를 졸업한 교육받은 매력적인 여성들로 국한된 '자유당의 접대부' 낙랑클럽을 조직하여 외국귀빈, 한국정부 고위관리 및 군장성, 주한외교사절 등을 접대하였다. (중앙일보 95년 1월 18일 미방첩대 보고서 인용기사)
이대 총장시절 1950년에는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가 1년만에 특별사면으로 풀려나자 당시 피난차 부산에 있던 그녀의 서재로 불러 미리와 있던 신성모 국방장관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안두희에게 '격려금'을 주는 광경을 지켜보기도 한다. (93년 국회제출 안두희 육성고백 녹취록)
5.16 쿠데타 직후인 5월 18일 미국으로 건너가 박정희를 위한 외교를 펼치기도 하였다.
이후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에는 대한민국포상, 대한민국순회대사 한국아시아 반공동맹 이사등 정치 외교활동을 하다가 1970년 사망하였다.
회(灰) 칠한 무덤
'회(灰)칠한 무덤'은 거짓의 상징이다. 무덤을 치장하기 위해 하얀 횟가루를 뿌려대도 무덤은 무덤일 뿐이다. 이화여대 학생문화관에서 열린 '金活蘭상 제정 설명회'가 그랬다. -이대(장상 총장)는 99년 김활란 박사 탄생백주년을 맞 아 '우월 김활란박사탄생백주년기념사업회(회장 정의숙 이사장) 를 구성하고 우월 김활란상 제정 등 각종 기념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상금 5만불이 수여되는 김활란상은 탁월한 세계적인 전문여성에게 수상된다. 이대측 에서는 여성노벨상의 수준에 견줄 세계적인 상으로 발전하게 될 것 이라며 국제적으로 아직까지 여성을 대 상으로 한 권위있는 여성상이 없음을 감안할 때 오늘의 여성들에게 21세기 역할의 비전을 제시하고 한국의 세계 화에 기여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고 발표했다. 수상 자격은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각 전문영역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뤄 인류사회 발전과 여성지위 향상에 현저하게 공헌한 국내외 여성에게 주어진다. 상금은 5천만원(외국인의 경우 미화 5만불)..
토론해봅시다.
-김활란의 업적은 어떻게 평가되야할까요?
-친미와 친일은 다른가요?
결 론
'과거에 눈을 감는 자들은 미래도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외세의 힘을 빌어 광복을 맞은 후 분단, 전쟁, 군사독재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비판의 장을 전국민적 차원에서 차분히 열어보지 못한 것은 친일행각을 한 이들에겐 '행운'이었겠으나 한국민에게 그것은 대단한 불행이다.
프랑스는 2차대전이후 나찌전범 협력자로 200만을 가려내여 그 중 20만을 형사 처벌하였으며 3만5천명을 사형시키고 9만명의 공민권을 박탈하였다. 히틀러, 무솔리니와 손잡은 일제의 침략전쟁은 세계사 속에 '인류에 대한 적대적행위'로 기록된다. 과연 '세계적 여성지도자'들이 민중을 호도하고 파쇼에 협력한 김활란을 기리는 상을 받고 싶어할까?
'어쩔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라 하며 김활란의 친일행각을 비호하지만 그것은 바로 '어쩔 수 없는 시기에도 침묵해서는 안되는 지식인의 역할을 방기한채 강자의 지배논리에 길들여진' 나약하고 기회주의적인 지식인을 옹호하는 일이 될뿐이다. 우리의 교육이 강조해야할 일은 '비굴하게 살아남기'가 아니라 억압에 저항하여 옳게 살아남기 위한 힘 기르기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