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한동대 학부모님들께
이번 총학과의 아프가니스탄 아웃리치를 다녀 와서 쓴 글을 나누고자합니다.
이번 피랍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를 원합니다.
학부모수련회를 위해 저희 학생처에서 준비 잘 하고 학부모님들을 고대하고 기다리겠습니다.
고난 중에서 삶을 더욱 소중하게 만드는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좀 긴 글입니다.
아, 아픈 땅, 아프가니스탄(2007여름 아프가니스탄 아웃리치)
한동대학교 교수 조원철
‘의료 봉사 떠난 분당샘물교회 성도 등 23명 아프간서 탈레반에 피랍!’
전 세계의 눈과 귀를 집중하게 만든 이 피랍사건이 발표되는 시간에 나는 한동대학교 12대 총학생회 뉴밸런스(New Balance) 12명의 학생들로 구성된 아프가니스탄 아웃리치(Out Reach)팀과 함께 피랍 장소인 가즈니를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고 있었다.
2007년 7월 20일 금요일 새벽 세시 삼십분, 카불에서 두바이로 나가는 날짜를 하루 앞당기는 바람에 아쉽게도 칸다하르에서의 마지막 날 일정을 하루 포기하고 카불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쉬지 않고 달려도 일곱 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인데다가 칸다하르 주를 비롯해 동서로 인접한 자불 주와 헬만 주가 탈레반과의 교전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위험한 지역이라는 말을 듣고 탄 초행길의 우리 학생들은 약간 긴장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역을 하는 내내 부어주신 은혜가 얼마인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곧 잠들게 하셨다. 나는 이미 여러 번 다니는 길이였지만 학생들과 함께 다닐 때면 언제나 탈레반 등의 무장 세력들에게 어려움을 당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럴 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무슨 말과 행동으로 학생들은 무사하게 만들어야 할지를 생각하며 긴장감을 가지고 다니는 길이라서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졸다가 기도하다가를 반복하였다. 가즈니를 지나 카불이 한시간정도 남았을 때 검문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경찰이었다. 짐칸에 실은 짐과 여권을 보잔다. 학생들더러 차에서 내리지 말고 계속 자라고 한 다음 혼자 내려서 내가 학생들을 인솔하는 교수임을 밝히고 무장을 하고 검문하는 경찰에게 어깨를 다독이며 마치 친구를 대하듯 자연스럽게 행동하였다. 현지 옷을 입은 외국인이 친근하게 굴어서일까 짐도 열어보지 않고 학생들도 일일이 체크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카불에 도착하여 권사범님(한동대를 아주 사랑하시는 카불거주 한국인)댁으로 이동해서야 우리가 버스로 올라오는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게 되었다. 권사범님 사모님의 눈이 발갛게 부어있었다. 그곳 시간으로 아침 일곱 시 쯤, 그러니까 우리가 칸다하르와 카불의 중간지점 쯤을 달리고 있을 때에 피랍사고에 대한 소식이 처음으로 알려졌는데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가던 한국인들’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50세쯤 되는 남자를 포함하여. 바로 나였다. 바로 우리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 일정을 알고 있는 한국의 아내와 교회, 학교 등에서 한 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칸다하르에서 우리를 전송한 분들과 카불에서 우리를 맞는 분들이 모두 우리 한동대학교 팀이 피랍된 것으로 알고 망연자실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 안에 안전하게 일정을 마치고 무사히 카불로 도착한 것을 기뻐할 사이도 없었다. 분당샘물교회 팀이라는 정확한 보도가 이미 되어서 카불에서 일하는 사역자들이 모여서 대책을 세우고 있었고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들을 받고 현재 상황을 설명하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피랍사건이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내려가는 방향으로 140여 킬로미터 쯤 되는 가즈니에서 일어났고 카불, 칸다하르 간의 유일한 육로인 그 길을 우리는 자면서 지나온 것이다. 떠나오기 전 날인 7월 19일 아침에 묵상한 말씀이 떠올랐다. 요한1서2장 28절로부터 3장3절의 말씀이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3:2)
이 말씀이 우리의 사역을 칸다하르에서 마치는 날 주신 의미를 생각하며 서로 깊이 나누었었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다가 영원한 나라에서 주님을 만날 때를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어떠하심을 추측하고 그려보는 그 어떤 이미지와도 사뭇 다를 것이다. 주님의 실제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미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온전하고 아름답고 선한 모습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를 좇아 사는 세대가 되었다. 겉모습에 대한 관심이 그 본질보다 앞서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는 ‘우리의 형상(이미지)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고 그 이미지란 겉모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도록 생령을 불어넣으신 우리의 본질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 분 앞에 서는 날, 우리가 ‘그와 같을 것’이라는 것은 얼마나 상상할 수 없는 신비요 축복인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1:4)로서의 축복을 결코 놓치지 않기 위하여 장래에 될 것에 대한 이미지의 본질을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고 묵상했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에 겪는 상황과 사건들에 대하여도 직접 경험치 않고 상상하는 것이 실제와 많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지 않았던가. 어떤 사건 속에 담긴 크고 비밀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실제를 우리는 바라보기 참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 지금 당장에는 피랍된 그들의 안전한 귀환을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이고 연약함이다. 그러나 내 심령의 기도는 보다 차원 높은 기도를 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였듯이 지금 이 시간에도 피랍된 이들을 위해 세계 곳곳에서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풀려서 살아나온 베드로를 믿지 못했던 그들처럼 내 믿음의 기반이 얼마나 나약한가를 발견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선교가 법적으로 금지된 땅을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교육봉사를 위해 그 땅을 밟고 있지만 칸다하르에서 지나는 동안 아프가니스탄에 순교의 피가 뿌려져야 함과 그 필요에 내가 드려질 수 있기를 결단하고 눈물 흘리며 찬양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막상 현실의 곁에 서니 연약함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했다. 그들에게도 무엇보다도 함께 하실 성령님의 도우심이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을 도와달라고 기도하면서 내 감정 때문에 성령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훼방되지 않기를 기도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과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대답했었다. 베드로의 성격으로 보아서나 수제자라는 위치로 보아서나 매우 적절한 반응이었을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오히려 책망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이 아픈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학생들이 너무 피곤한 상태에서 받는 충격이라 약간의 휴식을 가진 뒤에 모두 모여서 말씀을 나누고 피랍된 형제자매들을 위해, 이 상황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우리 팀은 너무나 신실하시게 인도하셔서 안전하게 있다. 다행이다. 분당샘물교회 팀은 목숨이 위협받는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행인가?’ 이것이 우리 기도의 질문이었다. 지금도 생명이 태어나고 동시에 죽어간다. 은혜가 있는 가운데 고난이 병존한다. ‘고난도 유익’이라는 바울의 고백은 이 모든 것을 동시에 가능케 하실 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의 고난을 결과적으로 성공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고 찬양하며 토로한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요한일서 3장 2절의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의 궁극은 신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보고 누리는 것이 아닌가. 이 영광은 우리에게 기쁨과 형통함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은 고난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딤전6:17)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과 형통함을 주시는 것을 우리는 마땅히 감사로 누려야 한다. 기뻐해야 한다. 그 감사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이러한 형통의 선물들을 우리만을 위해 누리고 쌓아두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나의 삶에서 형통함에 대한 소망이 모두 끊어져 하나님만을 의뢰 할 수밖에 없을 때 하나님은 더욱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이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약간의 헌금을 드릴 때마다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달라고 찬송을 부르는 이 시대를 사는 나의 믿음의 기반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생각나게 해 주셨다. 그런 용기와 힘을 나뿐 아니라 피랍된 형제자매들에게도 달라고 기도 하였다. 어쩌면 우리가 겪을 수도 있는 이 상황에 대하여 가장 그 사건의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들로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라 생각하고 기도하였다.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면 우리의 연약한 기도를 후에 부끄럽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믿음을 가졌지만 그들만으로는 안 되기에 천사를 통해 도우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며 도와주시라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였다. 곤란을 당하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것이 그 안에 계신 성령님이 드러나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성령님이 피랍된 자들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다음날 카불에서 두바이로 나오는데 아침부터 아프기 시작했던 윤희(12대 총학생회 회장)가 점점 더 나빠졌다. 나으려니 생각했었는데 심상치가 않아서 침을 잘 놓으시는 분을 급히 연락하여 오시게 하고 열이 펄펄 오르는 윤희의 머리에 손을 얹고 함께 기도하였다. 그제서야 윤희가 아픈 것이 다만 몸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칸다하르에서 떠나오기 전날 밤의 마지막 예배 모임에서 기도 중 보여주신 아프가니스탄의 변화의 광경(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을 나누면서 순교에 대한 강한 도전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피랍된 이들을 생각하며 본인이 가지는 거룩한 부담이 버거웠던 것이다. 기도하며 같이 펑펑 울었다. 침을 맞고 좀 나아지는 듯 했지만 공항에 가기 위해 차를 타기 전 결국 실신했다. 가장 절친한 현미를 함께 남기고 카불의 사역자에게 그들을 부탁한 다음 남은 학생들과 함께 두바이로 나왔다. 후에 고백을 통해 들은 것이지만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이렇게 죽어도 순교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틀 뒤 몸이 회복되어 두바이공항에서 만나 함께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였다. 7월 26일 새벽에 포항에 도착하여 학교로 돌아와서도 다른 지역으로 나갔다 돌아온 FR(Field Research) 학생들과 함께 기도회를 가졌다. 한동대학교 기도의 광장인 비전광장에서 피랍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오후 여섯시 삼심분에 모여 기도하기로 하였다. 나와 함께 지난 가을에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 들어가 6개월 동안 여성들의 상담치료를 위해 애쓰고 돌아온 리나는 피랍자들을 위한 24시간 릴레이 기도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번 2007년 여름 아프가니스탄 아웃리치는 지난 2003년도 여름부터 시작된 칸다하르 대학에 대한 교육지원 봉사의 차원을 한 단계 올리고 앞으로의 지속 여부에 대한 근거를 갖기 위해서 총학생회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주셨고 그들에게도 동일한 마음을 주셔서 계획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준비를 해 나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작년 여름부터 까다로워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비자발급을 위해 칸다하르 대학 총장의 초청장이 필요했는데 얼마 전에 또 다시 총장이 바뀌었고 안전을 이유로 초청장을 보내주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에도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고 돕기 위해 가려고 하는 일에 대한 협조가 이렇게 어렵다니 난감했다. 더욱이 여행 성수기라서 여행사에서는 2주전부터 비행기 값을 지불하라고 독촉이었다. 항공료를 지불하고 나서 비자가 나오지 않으면 낭패인 상황. ‘이래도 가야합니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뜬금없이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 칸다하르에 억수같이 비가 오는 모습을 꿈속에서라도 보여주시면 이런 상황에서도 가겠습니다.’라고. 겨울에 국토의 절반이 눈에 덮여도 칸다하르에는 가랑비가 한두 번만 오고 만다. 여름에는 비 한 방울을 보기 어려운 곳이다. 물이 정말로 필요한 곳인 것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소망의 땅 칸다하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칸다하르 카페가 있어서 이런 저런 소식들을 늘 나누는데 글쎄 ‘칸다하르에 홍수가 났다’는 글이 올라 와있지 않은가. 급히 그날이 며칠 이었나 물으니 28일이었단다. 내가 기도했던 날. 온 몸에 닭살이 돋으며 전율이 흘렀다. 그것도 엄청난 비가 내려서 홍수가 났다는 것이다. 참으로 글로 나누기 어려운 고백이다.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비자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출국 팔일 전에 항공료를 모두 지불하였고 비자는 출국 하루 전에야 나왔다. 인천 공항 출국장에서 우리 일행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나가는 것을 미리 파악하고 있던 공무원들이 우리를 호출하더니 주의 사항과 함께 확인서를 쓰게 했다. 지금까지 내가 여덟 차례 아프가니스탄으로 출국하면서 겪는 두 번째 경험이었다. 여권을 다시 확인하던 중 수진이의 여권 중 가장 중요한 사진 있는 페이지가 떨어져 나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출국 못한단다. 간신히 사정하여 테이프로 붙여서 출국했지만 불안했다. 내가 책임지기로 했으니 북경과 두바이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출입국장을 통과할 때 마다 수진이를 주시하면서 기도해야 했다. 칸다하르까지 무사히 통과, 이제는 나올 때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떨어진 페이지를 잘 붙이려다가 강력본드가 번지면서 앞 뒤 페이지가 부분적으로 붙어버리는 사고(?)가 났다. 떼려고 하니 종이가 찢어지려 한다. 아뿔사, 이건 완전히 위조여권같이 되어버렸다. 카불에 전화하여 대사관에서 여권 확인증을 받으려했지만 우리가 카불로 올라가는 날이 금요일, 즉 그곳의 주일이다 보니 금, 토요일이 모두 쉬는 날이란다. 대사관이 아예 문을 안 여니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카불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발생한 가슴 아픈 피랍 사건으로 대사관은 비상근무를 하고 있었고 수진이 여권에 대한 확인서도 받을 수 있었다. 엄청난 아픔 속에서도 신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번 아웃리치에 우리에게 부으신 섬세한 은혜는 놀랍고도 놀랍다.
두바이에서 칸다하르에 도착한 7월 12일, 칸다하르에서의 우리 일정을 사전 준비한 창현(현재 칸다하르대학에서 컴퓨터를 가르치는 청년이다)군의 일정설명을 들으면서 좀 서운했다. 왜냐하면 칸다하르대학과 여전히 협조가 잘 안되어서 시내에 있는 중 고등학교들을 돌아보고 가르치는 일정으로 짜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총학과 함께 하는 아웃리치이니만큼 뭔가 가시적인 성과를 가지고 가야한다는 부담이 있었던 터였다. 점입가경이랄까. 창현군이 우리에게 칸다하르 부총장님에게 줄 선물로 코털 깎는 가위를 부탁했다는데 나도 들은 바가 없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서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참 별 사사로운 부탁을 다 하는구나 생각했지만 어쩔 것인가 잊어버려야지. 다음날 아침 칸다하르 대학을 가기 전에 학교에서 급히 몇 개 챙겨온 학교기념품이라도 줄 요량으로 물건을 챙기다가 내용물이 뭔가도 모르고 주기가 껄끄러워서 포장을 풀어보았다. 다시 쌀 요량으로 조심조심 뜯고 조그만 레자박스의 지퍼를 여니 글쎄 그 안에 코털 깎기 가위를 포함하여 손톱 깎기 세트가 몽땅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 참 재미있으십니다.’라고 찬양했다. 우리가 간과한 이런 작은 일까지도 준비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계획된 일정을 다 내려놓고 인도하심에 따르기로 했다. 마음이 편해졌다. 창현군의 수심이 사라진 것은 당연했다.
이렇게 뭔가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나니 첫날부터 학생들의 기쁨이 넘쳤다. 우리 학생들이 방문한 남 여 고등학교에서 각각 영어클래스를 열어달라는 부탁을 받아 당장 시작하기로 하였고 남학교는 태권도교실, 여학교는 컴퓨터 교실을 각각 더 열기로 했다. 칸다하르 대학에서도 부총장님과 학생들을 만나서 우리 학생들과 함께 할 포럼 일정을 잡았다. 학생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 다 맡겨드린 후에 느끼는 자유함을 누렸다. 이제는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일만 남았다.
위험한 곳, 환경이 열악하여 숨쉬기조차 어려운 곳에서 가진 매일 아침의 묵상, 백부장님 내외와 함께 사역하는 분들에 의해 준비된 화려한 밥상의 교제는 그 어떤 좋은 환경과 값비싼 식사와 비교되지 않는 행복한 경험이었다. 저녁마다 우리의 마음을 두드린 말씀 통독, 도착하자마자 칸다하르에서 사역하는 외국인들과 함께 드린 예배의 경험, 사역자들의 가정을 통해 받은 사랑의 섬김도 빼놓을 수 없는 은혜였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법적으로 금지된 상황에서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일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고대하실까 하는 깊은 감사와 묵상, 피랍사건을 통해 우리의 몸을 드림이 보다 더 현실적인 일일 수 있다는 성숙한 고민을 하고 그 사건을 우리의 일처럼 기도하게 하신 일 등 일일이 기록하면 너무나 많은 간증을 해야 할 풍성한 일들을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피랍형제 중 또 한명이 사살되었다는 가슴 아픈 뉴스를 접한다. 남은 스물한명의 형제자매들이라도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큰 은혜의 경험을 안고서 말이다. 우리가 후에 주님이 예비하신 처소에서 그들을 대할 때는 우리가 상상했던 고통의 이미지가 아닌 ‘신의성품’으로서의 완벽한 모습으로 그들을 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지금도 난 알 수가 없다. 왜 내가 출국하기 전날 두바이의 안집사님께 전화를 걸어서 이미 부탁한 카불에서 두바이로의 비행일정을 하루 앞당겨 줄 것을 부탁했는지를. 그것도 학생들과 상의도 없이...
이번 아웃리치를 함께 했던 윤희, 성은이, 해도, 문규, 현미, 동준이, 수진이, 인애, 창오, 민지, 민아, 지연아 사랑한다.
이미 신의 성품을 입고 주님의 실제를 경험하고 있을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 형제를 비롯하여 이선영, 서명화, 차혜진, 서경석, 고세훈, 김지나, 김경자, 유정화, 제창희, 이주연, 유경식, 송병우, 이영경, 한지영, 김윤영, |
첫댓글 빛의 자녀들이라면 읽으신 후 느낀 소감을 밝혀 주십시요. 감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입니다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