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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4일
제목: 무엇을 구하든지
말씀: 요15:1-17
이 말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주리라,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기도에 대한 성경의 약속은 엄청난 것이며 대단한 것입니다. 이 약속대로라면 신앙인들이 실패할 수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고 좌절할 필요도 더더욱 없지요. 그런데 이런 엄청난 기도의 약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가장실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는 부분이 또한 기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도가 백지수표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질적으로 백지수표 같은 느낌이 드십니까? 혹시 공수표 같은 느낌은 들지 않으십니까? 오늘 이 약속의 말씀은 이루어지는 경우보다는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우리의 경험 때문에 이 말씀이 위로가 되기는커녕 낙심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엄마와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자전거 한 대 사주 세요’그러면서 악을 쓰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참 창피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애야 왜 그렇게 악을 쓰면서 기도 하냐 조용히 기도해도 하나님은 다 들으신단다.’ 그랬더니 초등학교 학생이 ‘하나님은 들으시지만 엄마는 못 듣잖아’그랬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진지하게 기도하기 보다는 체면 때문에, 아니면 명분 때에 또는 행여나 하는 요행정도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기도에 대해 포기하고 살아가며 형식적인 기도를 함으로 신앙과 믿음의 정표로만 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기도하라 그러면 다 이루리라’이 말씀이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원하고 소원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지금까지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기도는 오히려 낙심의 원인이 되고 있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만일에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하는대로 다 들어주신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복권당첨이 몇 백만이 다 당첨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모두가 다 서울대학에 합격하고 모두가 의사가 되고 모두가 대통령이 되고 그들의 소원을 다 들어주어야하니까, 그러면 세상이 바로 서겠습니까?
목사의 기도도 하나님이 다 들어주시면 골치 아픕니다. 왜냐하면 몇 명의 성도를 달라고 기도했는데 목사님들이 달라고 한 성도들을 통계 내 보면 우리나라 인구수보다 훨씬 많은 인구수입니다. 어떻게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땅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달라고 하는 땅을 모두 다 주면 우리나라 땅보다 훨씬 커야합니다. 어떻게 들어줄 수 있느냐고요.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면 행복해 질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은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행복해 질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도 돈이 필요할 때가 있어서 돈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를 놓고 해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만 어떤 전도사님이 나이가 60이 되어서 신교학에 왔습니다. 이 분이 돈을 굉장히 많이 벌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돈이 많으면 첫째 아내가 명품사려고 백화점에서 그의 살다시피 한답니다. 둘째 애들이 공부 열심히 하려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버지의 밑천 받아 가지고 자영업하려고 생각하니까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는 것보다야 낫고 불행해도 돈을 실컷 만져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주시면 행복해 질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면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지 않을 수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하는 대로 주신다고 해놓고서는 왜 기도해도 응답하시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고 끝내는 이 약속을 말씀을 불신합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교회가 주님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셔야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용기가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 말씀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시행하리라’이 말씀만 들으면 가슴에서 기쁨과 기대가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약속의 말씀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 이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 약속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이 약속이 언제 주어졌는지 그 약속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 말씀은 유월절 마지막 만찬 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요13:33 ‘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궁금하지요. 성질급한 베드로가 36절에 이렇게 묻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우리가 잘 아는 쿼바디스라는 영화의 제목을 여기서 발취한 것입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나의 가는 곳에 지금은 따라오지 못하지만 후에는 따라오리라’아니 언제 예수님을 따를 수 있냐고 물었습니까? ‘어디가십니까 주여’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사오정도 아니시고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니까 베드로가 화가 나서 ‘내가 지금은 주님을 따를 수 없나이까 내가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죽음에 이르러는 결단을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가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남문 쪽의 비탈진 경사가 있습니다. 거기로 좀 내려가면 교회가 하나 서 있습니다. ‘닭이 울었을 때 베드로가 있던 교회’그래서 그 교회 꼭대기에는 청동으로 만든 닭을 걸어놓았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는 바람에 이런 교회도 생겼습니다. 베드로가 알면 철천지한이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재미있는 전승이 있었습니다. 초대교인들이 베드로가 지나가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세 번 울었데요. 그래서 그 이후로 통닭은 먹지 않는다 하는 재미나는 유머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베드로는 썰렁한 분위기를 뒤로 한 체 물러갔겠지요. 그 때야 비로소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답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주님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의 집이라고 할 뿐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처소를 예비하면 너희를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있게 할텐데 그때 가면 내가 가는 곳과 그 길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는 것이지요. 그러자 의심이 많은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제자들의 질문이 날카로운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누가 몰라요 가는 곳을 알아야 길을 알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답합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그랬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많이 들었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 말씀은 굉장히 이상한, 엉뚱한, 난해한 말씀으로 들렀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것은 엄청난 은유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스님이 부산가는 열차를 탔습니다. 그 안에서 어떤 불자가 ‘스님 어디를 가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스님이 ‘내가 온 대가 없으니 어디 갈 때가 있으리오.’이런 단 말입니다. 정말 도사들은 그렇게 대답 안 합니다. ‘네, 부산 갑니다.’이렇게 대답합니다. 지금 부산가고 있으면서 무슨 온대가 없어서 갈 때가 없다고 합니까? 원래 도사처럼 보이기 위해 땡스님께서 이러는 경우가 있는데 예수님이 땡스님같지 않습니까? 가는 곳을 알아야 그 길을 알 것이 아닙니까? 그랬더니 내가 곧 길이랍니다. 제자들은 도저히 알다가도 모르는 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가 없었습니다.
얼마 전 종려주일만 하더라도 수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를 꺾고 나와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이여’독립기념일인 유월절에 독립의 분위기가 무려 익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께서 이스라엘 왕으로 자신이 선언하고 천군천사 동원해서 로마군들 쫓아내고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윤리적으로 건전한 메시야 왕국은 세우면 왼편 오른편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서 작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에 좋은 데가 얼마나 많은데 이 좋은 세상을 나두고 또 어디로 가서 새로운 거처를 준비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나를, 왜 우리 가정을, 왜 우리교회를 우리 기독교를 주님께서 어디로 끌고 가려고 하시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2006년도에 인터콥에서 수백 명 수천 명 아프가니스탄 가지 않았습니까? 굉장히 대대적인 행사를 했습니다. 가려고 그러니까 위험하지만 내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20명밖에 안 되는 소수인원이 가서 봉사하는데 왜 잡아 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주님이 가시는 길은 어디고 주님은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것일까?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시 제자들은 이해 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입씨름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떠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요18장1절에 보면 예수께서 기드론시내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거기서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씀은 고별말씀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의 농부는 아버지고 나는 포도나무다 가지인 너희가 내 안에 붙어 있으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이렇게 가능성을 제시한 다음에 주님이 떠나있어도, 주님가신 곳이 어디인줄 몰라도, 주님의 길이 무엇인지 몰라도, 가지가 줄기에 붙어만 있으면 얼마든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 두신 다음에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계시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이 어딘지 몰라도 주님이 우리를 내버려두고 계셔도 문제가 되지 않은다는 것이지요. 왜요?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해요 원하는 대로 들어주시기는커녕 뒤로 잡아져도 코가 깨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주시겠다는 것은 앞에 조건이 있지요.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 조건입니다. 놀랍게도 요15장에 보면 ‘저가 내 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에 응답하는 조건과 똑 같습니다. 그렇다면 열매를 항상 맺을 때 열매를 맺기 원할 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6절에 분명하게 나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우리가 언제 주님을 택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택했지요.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우리를 택해서 열매 맺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항상 열매를 맺게 하고 항상 과실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열매 맺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정말 열매 맺는 것을 원하십니까? 겸손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더라도 부유해지고 싶은 것 아닙니까? 좀 진실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 아닙니까? 정말 열매 맺는 것을 원하십니까? 열매 맺기를 원하고 항상 과실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받으시려고 하는 그런 상태에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열매를 맺느냐, 열매 맺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열매 맺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열매 맺는 유일한 방법인데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이 들었습니다. 너무 어려운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건물이라면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되는데 공간 안에 한 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둘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입니다. 그러면 주님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이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가장 중요한 선택과 결정의 원동력이냐 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선택과 우리의 삶에 결정권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라는 말입니까? 직장 상사이야기입니까? 20억버는 세미나 이런 것이 메일로 날라 오는데 이런 이야기입니까? 이런 것이 가장 신빙성 있게 다가옵니까?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예로 설명하자면, 여자들이 아주 당돌하고 자기 할 말 다하고 그래도 정말 마음에 맞는 남자를 만나면 그 사람 앞에서는 ‘노’를 못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줄 아십니까? 그 남자가 그 여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안 되십니까? ‘오빠 믿지’ 그러면 분명히 머리로는 못 믿겠는데 이미 마음으로는 믿어버립니다 필란드의 한 여성이 한국문화에 대해서 설명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여성이 하는 말이 한국남성들에게 ‘오빠’그러면 안 통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재대로 우리문화를 이해한 것 같습니다. 예쁜 여자가 와서 오빠 그러면 다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이 ‘오빠’의 말씀처럼 ‘노’가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예수님 말씀 때문에 하루종이 가슴이 두건거리고 오빠 한 마디에 울고 웃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그렇게 다가 옵니까? 헨리나웬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특별히 기독교인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대하지 않고 듣는 말씀이 없다’설교를 하면서 때로는 간증 같은 것 할 때나 ‘내가 엇졌게 이런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고개를 다 들었다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고개를 다 숙입니다. 예수님말씀은 그게 그것이니까 사랑해라 믿음을 가져라 예배드려라 이런 교리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말씀에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기대를 하지 않으니까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노가 안 되는 말씀으로 우리 안에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생동감 있게 남아 있다면 말씀이 내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그 말씀이 일으킨 기도를 그 말씀을 일으키게 하신 주님께서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기도해도 어떤 사람이 기도해도 그 기도는 사람의 수준이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기에 응답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을 의미해요. 요15:9절에 보면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하면 둘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은 쌍방적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9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성자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제자를 사랑했습니다. 사랑이 서로 둘이 상호 교환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하여 또 다른 제자를 사랑해야한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10절‘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2절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이것이니라’
그러기에 사랑이 성부에서 성자 성자에서 제자로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부의 사랑과 다른 것입니다. ‘신랑의 사랑을 받아 신랑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하여 다른 남자를 사랑 한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것은 말도 되지 않은 말이지만 주님의 사랑은 이렇게 서로 상호적인사랑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하여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나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하여 나의 계명을 지켜 서로 사랑해라입니다. 성부에게서 출발한 사랑이 성자에게로 성자에서 제자들에게 사랑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우리 영명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가면 그냥 내 버려두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사랑에 감격하여 그리스도 사랑에 거하기 위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도 여러분들을 통해 주님의 사람을 경험하고 그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겠지요. 사랑이 연쇄사슬고리를 만들어 내며 화학작용처럼 연쇄 폭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은 이웃을 사랑한다면 형제를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사랑이 음식대접 좀 하고 위로 하고 교제하는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이 정도만 해도 한국교회서는 꽤 수준 높은 교회라고 할 수 도 있겠지요. 적지 않은 교회 성도들이 만날 때 기쁨과 즐거움으로 만나지 못하고 갈등하고 시기하고 불화하는 교회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양심적으로 절제하면서 수준높은 교제를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13절에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지금 주님이 원하는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원하고 있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요. 부모를 위해서도 목숨을 버리기가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옛날 선조들은 부모님의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소변을 맛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내가 먹다가 남은 음식이나 밥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먹다가 남은 찌꺼기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나이든 부모님의 남은 음식을 자식들이 먹을 수 있겠습니까? 나이가 60이 되면 밥풀이 입가에 붙은 것을 모른답니다. 그리고 70이 넘으면 국물이 흐르는 것을 모른답니다. 밥 먹으면서 침과 함께 음식을 질질흘려요. 그런 남은 음식을 자식들이 먹을 것 같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부모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예’하고 대답하는 분이 나이가 많으신 분인데 이미 돌아가시고 없는 분이더랍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 찾아뵙는 것은 고사하고 일주일에 안 부전화하기도 힘들어하는 자식들이 부모를 위해 죽는다고요. 천만에 말씀, 만만의 콩떡입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위해 죽을 수있겠습니까?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방송용어가 아니라 양심적으로 말입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남편을 위해서는 아닐 것입니다. ‘저 인간 죽든지 말든지 내 상관할 바 아니다 ’이런 태도가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 힘으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데 필요하다면 재산 달라하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웃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하는데 열매가 항상 있고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아버지이름으로 시행하리라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가 있고 그리고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건강달라하면 줄 것이고 직장 달라고 하면 줄 것이고 생명 연장해 달라면 줄 것이고 돈 달라고 하면 준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다면, 열매가 항상 있다면, 어떤 열매입니까?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사랑 말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가 없이 또한 그런 목적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함이라’정욕으로 쓰려고 구해 놓고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 하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보이고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하나님과 본질상 동등하시지만 동등함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사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다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보여 주신 다음에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며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야 비로서 예수님이 가신 곳은 아버지의 집이고 우리가 가야할 최종목적지도 아버지의 집인데 그 길은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삶임을 분명히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여 어디로 가는지를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서문 답이 아닙니다.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지요. 왜요 주님이 직접 가르치시고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부요하게 살든지, 아니면 가난하게 살든지 많이 배웠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나이가 들었든지 아니면 젊었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끝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집에 가느냐 못하느냐하는 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는 길은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그 길을 따라 가야만 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던지 간에 우리가 아버지 집에 가는 길 가운데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필요하다면 내가 무엇이진지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주님은 떠나셨고 아버지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21일일작정기도에 이 말씀을 부여잡고 ‘주님 만일 내가 구하는 것을 주신다면 이것 가지고 하나님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여러분의 삶 가운데 당장 적용하셔서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열매가 있다면 그 열매로 인해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 약속 붙잡고 21일작정기도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시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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