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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은 20세기가 시작되던 1904년 8월 22일 중국 쓰촨성 광안현 셰시항 파이방촌에서 출생했다. 그는 격동의 20세기를 온전히 살아내고, 1997년 2월 19일, 21세기를 목전에 둔 시점에 베이징에서 93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그야말로 백년 중국을 중원에서 살아낸 거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중국인들은 그를 ‘백년소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덩샤오핑은 항일 무장투쟁부터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과 대장정을 함께한 중국 공산당의 핵심 인물이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인 1918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그는 그곳에서 평생의 신념으로 삼은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를 알게 됐다. 1921~1924년에는 파리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모스크바의 중산대학에서 공부하다 귀국해 1927년부터 공산당 지하운동에 참여했다. 1933년부터는 마오쩌둥을 지지하면서 대장정에 참여했다.
그는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위원을 지냈고, 1949년 장강 도하 작전과 난징 점령을 지휘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1952년 정무원 부총리, 1954년 당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에는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이후 마오쩌둥의 총애를 받으면서 정치인으로서 급성장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 빛났던 시기는 마오쩌둥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지고부터다. 그는 이때부터 중국을 경제 대국으로 이끄는 디딤돌이자 징검다리가 됐다.
과거 중국을 ‘중공’이라고 부르던 때가 있었다. ‘중국공산당’을 줄여 부른 중공은 북한과 더불어 공산국가로 적대시되었다. 지금은 아무도 중국을 중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제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모범적인 국가로, 자본주의 국가에서보다 더 사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말을 듣곤 한다.
21세기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지금의 중국을 이끈 지도자는 중국 공산당의 아버지 마오쩌둥이 아니라 덩샤오핑이다. 마오쩌둥이 사회주의 지도자로서 인민의 나라를 만들었다면, 덩샤오핑은 인민의 나라를 부자 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인민의 아들’로 인민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즉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시장경제를 도입한 사회주의 정치 지도자이다.
시장경제에 대한 구상은 그를 10년간이나 고립시켰던 문화대혁명으로부터 기인했다.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실패 후, 정권에 불안감을 느낀 마오쩌둥은 부인인 강청을 필두로 하는 사인방과 홍위병을 앞세워 정적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극좌 운동을 벌였다. 당시 참신한 정치 개혁 세력으로 떠오르던 덩샤오핑은 하루아침에 모든 권력을 잃고, 유배지에서 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대학생이었던 덩샤오핑의 아들은 홍위병 학우들에게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고문에 시달리다 창문에서 뛰어내려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게 된다.
문화대혁명 동안 수없이 많은 희생과 중국공산당의 후퇴에도 불구하고 그는 묵묵히 때를 기다렸다. 중국의 운명을 시궁창에 빠뜨릴 뻔했던 문화대혁명에 대해 덩샤오핑은 ‘나쁜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좋은 일’이라는 묘한 말을 남겼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던 그 사건을 두고 그는 ‘사람들의 사고를 촉진하고, 우리들의 단점을 인식하게 해주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의 낙천적인 성격이 잘 드러난 말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정치에 복귀한 그는 1978년 5월경 중국의 주요 인재들을 서유럽 5개국으로 시찰보냈다.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전에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하고, 이것을 중국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준비한 것이다. 그가 이토록 치밀하게 사전 준비를 한 이유는 100년, 200년에 걸쳐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발전시킨 서구에 비해 단기간에 중국이 시장경제 모델을 들여와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간도 인력도 낭비할 겨를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덩샤오핑은 중국이 ‘다시 그릇된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노구를 이끌고 직접 경제 강대국이자 자본주의의 꽃이 활짝 핀 미국, 일본 등을 방문했다. 정치적으로는 적국이지만, 시장경제를 알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경제 발전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일본에서 닛산 자동차의 기미쓰 공장을 견학한 후, 그는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곳의 노동 생산율은 중국 장춘 제 1 자동차 회사의 수십 배에 이르는군. 이것이 바로 현대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네.”
그는 중국에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삼보주`(三步走)’라는 목표를 세웠다. 경제 강국으로 가는 목표를 향한 세 발걸음이다. 우선 제 일보인 ‘원바오’는 ‘인민이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는 초보적인 단계’이고, 제 이보인 ‘샤오캉’은 생활 수준을 중류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며, 제 삼보인 ‘대동사회의 실현’은 중국의 현대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덩샤오핑의 계획대로 중국은 지금 제 삼보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후 100년을 내다보고, 정책을 실현할 때 절대 흔들리지 말라고 후계자들에게 당부했다.
덩샤오핑은 1979년 말, 미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찬위원회 지프니 부사장 등과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만 있다는 견해는 정확하지 않소. 사회주의 국가에서 왜 시장경제를 할 수 없단 말인가요?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시장경제는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없지요. 시장경제는 봉건사회 시대에 시작했던 것이므로, 사회주의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과감한 경제특구의 개발, 계획적인 시장경제의 성공적인 운영으로 중국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1993년 아흔 살에 가까운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경제의 취약점인 부의 분배 문제에 대해서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그것은 중국 경제가 발전한 후, 사회적 부의 분배에 관한 문제였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경제가 발전하지 못했을 때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움이 따른다고 지적했다. “만약 많은 재산을 소수만이 누리고 대다수 사람들은 누리지 못한다면, 분배가 공평하지 못하게 되고, 그에 따른 양극 분화를 초래하기 쉽다. 장기적으로 이렇게 된다면 크나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우리는 적절한 방안을 세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혁명가로서의 긴장감을 결코 놓지 않았던 것이다.
혁명은 양극의 분화가 심화될 때 터지는 활화산과 같은 것이다. 시장경제를 도입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위대한 사회주의자였다. 만년에 그는 말했다. “국가는 발전했다. 나는 부유한 나라의 한 공민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공산주의 이상은 위대한 것이고, 사회주의는 경애로우며, 사회주의를 위해 일평생 투쟁하는 것은 값어치가 있다.”
덩샤오핑이 가장 빛난 시점은 바로 홍콩 반환 시점이 돌아올 때였다. 영국은 자본주의 홍콩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면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면서, 영토는 반환하되 홍콩에 대한 관리는 자신들에게 맡겨달라며 중국 정부에 중재안을 냈다. 이때 덩샤오핑은 단호하면서도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결과적으로 홍콩은 무사히 중국 땅이 되었다.
1842년 8월 29일, 청나라가 영국 군함 콘월리스 호에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면서 홍콩은 1997년까지 영국에게 조차되었다. 그후 150년의 시간이 지나고, 홍콩 반환 시점이 가까워지자 영국이 사전 협상을 위해 1979년 베이징을 방문, 매리 매클레호스 홍콩 총독을 만났을 때, 덩샤오핑은 ‘일국양제(一國兩制)’ 구상을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영국이 조차 기간이 만료된 1997년 이후에도 홍콩을 관리하고자 한 이유는 이미 홍콩에 엄청난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만약 홍콩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면 그것들을 모조리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영국은 차선책으로 토지 매각 등을 통하여 투자한 자본을 회수할 조짐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홍콩은 자멸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이때 덩샤오핑은 ”1997년 7월 1일, 반드시 홍콩을 돌려받을 것이다. 그것이 주권국가로서의 할 일이다. 만약 그것이 안 된다면 인민들은 우리 지도자들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단, 홍콩은 자체의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우리는 우리들의 사회주의를 실시할 것이다. 당신들은 돌아가서 투자자들을 안심시켜라.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한 나라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상반된 두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 덩샤오핑의 구상, 즉 ‘일국양제’이다.
덩샤오핑은 1984년 12월 19일, 영중 홍콩 문제 해결에 관한 연합성명 서명식에서 당시 영국 총리인 마거릿 대처와 악수를 나누었다. ‘철의 여인’과 ‘강철 사나이’의 만남이었다. 훗날 대처는 일국양제 구상은 덩샤오핑의 천재적 발상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1986년 10월, 덩샤오핑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접견했다. 이제 덩샤오핑의 소원은 1997년 7월 1일 중국으로 돌아오는 홍콩 땅을 살아서 밟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반환 시점을 불과 5개월 남겨두고, 덩샤오핑은 1세기를 살아낸 거인으로 부유한 나라인 중국에서 눈을 감았다.
이 즈음, 많은 사람들이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는 일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장국영이나 유덕화, 임청하와 같은 홍콩 배우들이 인민복을 입고 다니는 것인가 하는 우려감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홍콩은 여전히 자본주의 홍콩으로서 발전하고 있다. 덩샤오핑이라는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덩샤오핑은 노간부들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는 역할을 했다. 1982년에 그는 중앙고문위원회를 만들어 노간부들이 정치에서 물러나 조언을 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다. 덩샤오핑 자신도 초대 중앙고문위원회 주임을 맡아 5년 후 퇴임했다. 또한 이 과도기를 통해 정권 유지를 위한 제 2의 문화대혁명과 같은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았다. 위대한 지도자라 일컬어졌던 마오쩌둥 역시 권력 앞에서는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는 퇴임하는 자리에서 말했다. “나는 나이가 많으므로 퇴직하겠습니다. 우리는 새 사람을 발굴해내야 합니다. 고문위원회의 설립 목적은 바로 노간부가 젊은 지도자들에게 자리를 내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노간부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다름 아닌 새로운 후계자를 선택하고 키우는 것입니다.”
중국과 가까이 있는 북한 지도자들은 덩샤오핑을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문화대혁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문제는 바로 당에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지도자 간부들의 종신제였다.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이른바 덩샤오핑은 과거를 통해 배우고 미래를 내다보는 지도자라 말할 수 있다.
중앙고문위원회는 10년간 존속했으며, 이후 해산했다. 노간부들은 고문으로서 조언은 가능하지만, 정부 정책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이것은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결국 덩샤오핑의 솔선수범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중국의 권력은 자연스럽게 인민의 손에 의해 선택된, 인민의 아들에게로 넘어갔다.
1989년 11월 9일, 덩샤오핑은 은퇴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건강한 삶을 살았다. 한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하고 수영을 즐겼으며, 지인들과 카드놀이하는 것을 좋아했다. 서재 책상 밑에서 손자들이 뛰어노는 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었고, 인민들과 함께 자신을 닮은 나무를 끊임없이 심었다. 덩샤오핑은 대가족이 모인 집안에서 식구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에 관한 많은 서적이 있지만, 대표작으로는 자신이 직접 감수한 3권으로 출간된 <덩샤오핑 문선>이 있다. 이 책은 ‘전세대 혁명가들이 후세대에 보내는 간절한 기대’로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4년 8월 13일 쓰촨성 광안에서 열린 덩샤오핑 동상 개막식 연설에서 중국 국가주석인 후진타오는 다음과 같이 덩샤오핑을 추모했다. “덩샤오핑 동지는 일생 동안 민족의 해방과 국가의 부강,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끊임없이 분투한, 빛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중국의 혁명과 건설, 개혁을 위해 영원히 남을 역사적 공헌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숭고한 사상과 인품, 위대한 인격적 매력을 갖춘 분으로, 우리들에게 고귀한 정신적 자산을 남겨주었다. 오늘, 우리가 덩샤오핑 동지를 가장 훌륭하게 기념하는 길은 그가 개척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을 끊임없이 추진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진실하고 위대하면서도 평범했던 한 지도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백년소평>은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중국 방송 프로그램을 옮겨놓았다. 덩샤오핑의 가족과 혁명 동지들을 비롯한 주변 인물 100여 명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이 책은 독자들이 편하게 위대한 인물을 접할 수 있게 해준다.
가장 최근에 출판된 <불멸의 이노베이터 덩샤오핑>은 중국통인 필자의 역량이 돋보이는 저서이다. 실리를 중요시한 리더의 모습,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과감한 추진력으로 중국이란 거대 국가의 개혁 개방을 진두지휘한 덩샤오핑의 모습이 전문가의 손길에 잘 녹아 있다. 저자는 덩샤오핑의 전략과 리더십 성공 방식을 밝히면서, 오늘날 중국이 세계 강대국들과 경쟁하는 가능성의 나라로 성장하게 된 과정과, 덩샤오핑의 처세와 성공 원칙까지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등소평 평전과 문선 등 여러 종이 출판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