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 김경미
동맥 긋던 마른 붓질 하늘 한껏 달아올라
연골을 본떠 만든 복제물을 쏟아낸다
배부른 아이콘들이 입봉작을 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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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김대현
눈길 한번 준 적 없는 나의 행색은
세월만큼 굽어진 그림자도 안쓰러워
미안한 마음 가눌 수 없어 어둠 속에 감춘다.
나에게 늘 복종하여 수행하고 인도하던
때로는 곁눈으로 감시의 눈길 보내다가
밤이면 편히 잠들라고 자리 슬쩍 비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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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버드나무에게 듣다/ 박순화
퇴계의 성리학을
문전에서 능히 익혀
자연에 순응하는 멋과 향으로
노송이 보내주는 아낌없는 교훈
생명을
잉태한 고견
옹이마다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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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는 날/ 박영교
한밤 내 울던 귀뚜라미도
한이 차면 그만 운다
기다리기 싫어선지 자꾸만 잔소리하더니
죽은 듯
말없이 떠나는 방울장수소리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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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 연가/ 권혁모
나를 훔치다 들킨 속마음이 미쳤다
시인도 부정도 없이 제 속을 못 이겨
한 번만 믿어보라며 분신을 하신다
한때는 그랬으리 낙엽의 베개모도
미치도록 달치도록 붉게 쓰는 만지장서
말아서 힘껏 던지면 미리내가 흘렀다
이제 보니 일기장이네 너를 건너간 잎새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지평선 한끝에서
한 닢 또 사랑이 지면 가벼워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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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강인순
목젖에 힘이 돋는 어둑한 먹자골목
소주 몇 병 잔이 돌자 살찐 모국어 시간
그렇지 너도 잘했고 나도 잘했어 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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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람의 언덕에서/ 이동백
기대할 자유마저
누군가 빼앗아 간
이 바람의 언덕엔
이미 바람은 없다
무심히 궂은비 내려
언덕을 적실 뿐이다.
이 습한 언덕에서
지키고 살 게 뭐냐며
지금까지 지니고
살아온 부끄러움마저
마침내 버리고 돌아선
참 못난 사나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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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가리/ 정광영
눈알만 굴리다가
피라미 다 놓치고
길게 목을 뽑아
하늘 너머를 본다
불현듯 전생의 내가
저 멀리 아물거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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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폭포/ 김복희
나무가 바위를 업고
도를 닦는 깊은 골에
노승은 곡차에 취해
세상 모르게 잠이 들고
오십 척
폭포 자락이
반야경을 강독하더라
법문은 뵈지를 않고
지축만 흔들리자
길 잃은 뜬구름이
하늘만 짚고 있어
못 본 채
할 수가 없어
동천에 해가 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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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김학준
조용한 의자에 앉아
학생들이 작품을 읽는다
가난한 학생 시절 의자에서 밥을 먹고
고단한
낮잠을 청하던
대학도서관 낡은 의자
썩은 고목에는
날던 새도 지나쳐 가는
그 순리의 법칙들을 이곳에서 발견하고
조용한
낡은 의자에 앉아
내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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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36집/ 시조동인 오늘/ 도서출판 영남사/ 2024
바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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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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