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전국시기는 정치 사회적으로는 상당한 혼란기였으나, 사상 학술적인 면에서는 일대 변혁이 일어난다. 일명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기라 일컬어지는 만큼 다양한 사상유파와 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중국사상의 폭을 넓혀준다.
‘춘추’라는 명칭은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라는 역사서에서 나온 것이며, ‘전국’이라는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한다.
1. 유가(儒家)
우선 ‘유’와 관련된 개념들을 살펴보자.
‘유(儒)’는 ‘선비, 유교, 나약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를 중심으로 한 ‘유가(儒家)’는 공자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지칭한다. 이들은 일종의 전문가, 전문가 집단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유학(儒學)’은 ‘유’를 순수 학문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입장이다. 그리고 ‘유교(儒敎)’는 유학에 종교이데올로기가 결합된 것이다. 유교에서는 주로 천신, 지신, 가족신을 신봉한다. 이 유학의 유교화는 한나라 시기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이루어진다. ‘유술(儒術)’이라는 단어도 있는데 이는 유가의 법도로 습관화된 도덕률이라 할 수 있다. 삼강오륜(三綱五倫), 삼종지도(三從之道), 칠거지약(七去之約), 삼불거(三不去)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유가의 대표적 인물로 공자(孔子), 맹자(孟子), 순자(荀子)를 들 수 있다.
1) 공자
공자는 유가의 창시자로, 대성지성(大成至聖)으로 불린다.
공자는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구(丘)이며 자는 중니(仲尼)이다. 그는 중국 최초의 사학자(私學者)이며 사학(私學)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많은 제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고, 유가라는 사상유파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공자는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陬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공방숙(孔防叔)이다. 방숙의 아들은 백하(伯夏)이며, 백하는 숙양흘(叔梁紇)을 낳았다. 흘은 안씨(顔氏)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이구(泥丘)에서 기도를 한 뒤, 공자를 얻게 되었다. 노 양공(襄公) 22년에 공자가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머리 중간이 움푹 패어 있어서 구(丘)라고 이름 지었다. 자는 중니(仲尼)이고 성은 공씨(孔氏)이다.
구가 태어난 후, 숙양흘이 세상을 떠나 방산(防山)에서 장사를 지냈다. 방산은 노나라 동쪽에 있어서 공자는 부친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의심했으나 어머니는 숨기었다. 공자는 어려서 소꿉장난을 할 때 항상 제기(祭器)를 놓고 예를 올렸다. 공자는 어머니가 죽자, 곧 오보지구(五父之衢)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는 대개 (부모를 함께 매장하는 풍속을 지키기 위해서) 신중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추읍 사람 만보(輓父)의 어머니가 공자 부친의 묘를 알려주어 그 후에야 비로소 방산에 합장했다. <<사기(史記).공자세가(孔子世家)>>
공자에게는 이상이 있었다. 그는 당시 사회 혼란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춘추시대에 주나라 왕실의 봉건제도가 쇠퇴하고 사회가 불안정했지만, 공자는 당시 사회에 대해 변화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세상이 혼란한 것은 전통적인 예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여겨 주공과 같은 성인이 등장하면 세상이 평화로워 질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14년이라는 세월 동안 여러 나라를 주유하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으나, 당시 현실적 욕망에 가득 찬 통치자들에게 그의 사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교육사업에 종사하기 시작한다. 그의 제자는 모두 3천여 명에 달하며, 그 중 72명의 제자가 가장 뛰어나다.
공자가 말하였다. “ 나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아 통달한 사람이 77명 있으니 모두 재능이 뛰어난 선비들이다. 덕행으로는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冄伯牛), 중궁(仲弓)이 있고, 정사(政事)에는 염유(冄有), 계로(季路)가 있고, 언어에는 재아(宰我), 자공(子貢)이 있고, 문학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있다. 사(師)는 편벽하고 삼(參)은 노둔(魯鈍)하고, 시(柴)는 우직하고, 유(由)는 조속(粗俗)하고, 회(回0는 여러 번 끼니를 굶고, 사(賜)는 작명(爵命)을 받지 않고도 재산을 축적하였으니, 억단(臆斷)하여도 가끔 적중한다.” <<사기열전(史記列傳).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1) 공자의 중심사상
공자는 인(仁)과 예(禮)를 중시했다.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예’는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인’의 개념은 공자에 의해 제기된 이래로 유가사상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논어(論語)>>를 살펴보면, 50여 곳 이상에서 공자가 인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에 맞춰 인의 의미를 다르게 언급하고 있다. 그만큼 인은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면서 동시에 사람다움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근본이 되는 것은 효(孝)와 제(悌)이다. 예는 바로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켜야할 의를 표현하는 행동 방식이다. 공자의 ‘인’은 전국시대 중기 맹자에 의해 구체화되고, ‘예’는 전국시대 말기 순자에 의해 구체화된다.
공자는 서주시기를 가장 이상적인 시기로 보고 예가 무너져 버린 현실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인과 덕으로 어진 정치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공자는 최초의 사학자겸 사학창립자로, 학생을 가르치는 방법도 실질적이었다. 그는 모든 학생들을 동일한 틀에 맞추어 교육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개인의 능력과 재량에 따라 차별 학습을 실시했다. <<논어>> 문장이 대변하듯 그는 대화방법을 교육에 활용했다.
(2) 공자의 정신세계 <<논어>>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가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저서는 바로 <<논어>>이다. <<논어>>는 공자의 말과 그의 제자, 또는 당시 사람들과의 대화를 기록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앞뒤 연관이 없는 듯한 짧고 간결한 글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공자 자신의 기록이 아니라, 공자의 제자 혹은 제자의 제자들의 기록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닌가?”
<위정: 학문의 외적 활용에 대해 다루고 있다.>
덕으로써 정치를 하는 것은, 마치 북극성은 제자리에 있고 여러 별들이 이를 에워싸서 돌고 있는 것과 같다.
<팔일: 예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공자께서 계씨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팔일무를 뜰에서 추게 하다니, 이런 일까지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이인: 인에 대해 다루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에 터 잡고 안주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인을 선택해 그에 처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공야장: 공문(孔門)의 학문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공자께서 공야장에 대하여 “사위 삼을 만하다. 비록 감옥에 갇힌 일은 있었으나, 그의 죄는 아니었다.” 고 말씀하시고는 자기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옹야: 사례를 들어 공문의 학문체계를 토론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옹은 임금을 시킬 만하다.” 중궁이 자상백자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괜찮지만 간소하다.” 중궁이 물었다. “마음가짐이 공경스러우면서도 일을 간소하게 행하여 백성들을 대한다면, 역시 좋지 않겠습니까? 마음가짐도 간소하고 일을 행하는 것도 간소하다면 지나치게 간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옹의 말이 맞다.”
<술이: 학이편의 주해라고 할 수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 전통문화를 배워 전하기는 하되 창작하지는 않으며, 옛 전통문화를 믿고 좋아하는 점에 있어 속으로 나를 노자와 팽전에게 견주어 본다.”
<태백: 위정에서 언급된 개인의 학문수양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태백은 지극한 덕을 지닌 분이라 하겠다. 세 번이나 천하를 사양했으나, 백성들은 그를 칭송할 길이 없었다.
<자한: 공야장과 옹야 2편의 내용을 확장한 것으로, 공자의 사상과 학문 교육의 관점을 논하고 있다.>
공자께서는 재물이나 이해관계, 생명의 기원이나 운명, 그리고 인에 대해서는 드물게 말씀하셨다.
<향당: 공자의 생활모습을 다루고 있다.>
공자께서 마을에 계실 때는 공손하셔서 마치 말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종묘와 조정에 계실 때는 분명하고 유창하게 말씀하시되 오로지 신중하게 하셨다.
<선진: 학이, 위정, 이인 편의 주해이다. 공자 당시 사제지간의 토론과 공자 자신의 실제 행동들을 서술하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선배들은 예악에 있어서 소박한 야인과 같았으나, 오늘날 후배들은 예악에 있어 세련된 군자와 같이 되었다. 만약 둘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옛날 선배들의 소박함을 따르겠다.”
<안연: 학이와 위정편에 대한 주해이다.>
안연이 인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를 극복해서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다. 어느 날이라도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 인을 이루는 것은 자기로부터 비롯되지 남으로부터 비롯되겠는가?”
<자로: 개인의 내적 수양과 그 외적 활용을 다루고 있다.>
자로가 정치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에게 솔선수범하고, 백성에게 일을 시키라.” 자로가 더 일러 달라고 청하자,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하셨다.
<헌문: 이인편을 풀이하고 확장한 것이다.>
원헌이 수치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에 도가 행해지고 있음에도 녹이나 받아먹고 지내고, 나라에 도가 행해지고 있지 않음에도 녹이나 받아먹고 지내는 것이 수치스런 일이다.”
<위령공: 사람으로서 바른 처세를 말하고 있다.>
위나라 영공이 공자에게 군사 진법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예악에 관한 일은 일찍이 들어 알고 있으나, 군사에 관한 일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위나라를 떠나셨다. 진나라에서 양식이 떨어지고 따르던 제자들은 병이 나서 모두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자로가 화가 나서 찾아뵙고 말씀드렸다. “군자도 궁해질 때가 있는 겁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라야 궁함을 견딜 수 있다. 소인은 궁해지면 곧 함부로 행동하지.”
<계씨: 정치철학의 요점을 다루고 있다.>
계씨가 전유를 정벌하려 하자, 염유와 계로가 공자를 찾아뵙고 말했다. “계씨가 전유에 대하여 머지않아 일을 벌이려고 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야, 바로 너의 잘못이 되지 않겠느냐? 전유는 옛날에 선왕께서 동몽산의 제주로 그곳에 봉했던 것이며, 또한 우리 나라 영역 안에 있다. 그는 사직을 떠받드는 신하인데, 어째서 정벌하겠다는 것이냐?”
<양화: 처세의 요점을 다루고 있다.>
양화가 공자를 뵙고자 하였으나 공자께서 만나주지 않자, 공자에게 돼지족발을 선물로 보냈다. 공자는 그가 집에 없을 때를 틈타서 그에게 사례를 하러 갔다가 도중에 그를 만나셨다. 그가 공자에게 말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내 당신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보배같은 경륜을 품고 있으면서도 자기 나라를 어지럽게 내버려 둔다면 인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안되지요.”
<미자: 태백 편과 호응하며, 공자 당시의 학설사상과 관계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미자는 떠나 버렸고, 기자는 종이 되었고,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나라에는 이 세 사람의 인한 사람이 있었다.”
<자장: 공자의 제자와 문인들이 공자에게 교육을 받은 후 공문의 도학을 발휘한 것을 다루고 있다.>
자장이 말하였다. “국가나 사회가 위급한 것을 보면 목숨까지 바치고, 이득을 얻게 되면 의로운 것인지를 생각하며, 제사 지낼 때에는 경건함을 생각하고, 상을 당하면 애통함을 생각한다면 선비라고 할 수 있다.”
<요왈: 공자의 말은 극히 일부분이며, 대부분 고대 역사 문화 정신을 다루고 있다.>
요임금께서 말씀하셨다. “아아, 그대 순이여! 하늘이 역수가 그대 몸에 와 있으니, 공평한 원칙인 중도를 굳게 지키라. 그렇지 않으면 온 세상이 곤궁해지고 하늘이 그대에게 준 봉록과 벼슬도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
2) 맹자
맹자는 흔히 공자와 병칭되며 공자에 버금간다는 의미로 아성(亞聖)이라 불린다.
본명은 맹가(孟軻)이다. 노나라 귀족인 맹손씨(孟孫氏)의 후손으로 추읍(鄒邑) 사람이다. 그는 자사(子思)의 문하에게 공부를 했기 때문에 공자의 학통과 연관을 맺게 되었다. 그는 20여 년간 각국을 주유하며 자신의 이상을 펴고자 했다 당시 명성도 있고 영향력도 있는 인물이라 항상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다녔으며 각국 제후들에게 우대를 받았던 듯 하다. 이처럼 맹자는 여러 나라를 다니면 각국 제후들에게 유세를 했으나, 결국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맹자는 전국시대라는 혼란함 속에서도 인의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유가의 윤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한 혁명가라 할 수 있다.
(1) 맹자 사상의 응축 <<맹자>>
맹자 사상이 응축된 <<맹자>>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그 문장이 웅변적이고 선동적이며 격정적이다. 맹자는 유세가로도 이름이 높다. <<맹자>>는 제자들이 스승 맹가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 전체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맹자가 천하를 주유하면서 제후들에게 유세하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왕도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
② <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
공손추는 맹자의 제자이다. 공손추와 대화하면서 왕도정치를 숭상하고 패도정치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③ <등문공장구(滕文公章句)>
한 나라의 왕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지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④ <이루장구(離婁章句)>
내재한 도를 잘 지키고 자신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내재한 도를 굽히면 남을 바르게 할 수 없고, 결국 자신의 본성도 잃게 된다고 여긴다.
⑤ <만장장구(萬章章句)>
인도(仁道)를 행할 것을 주장한다.
⑥ <고자장구(告子章句)>
인성에 대해 고자와 논의한 부분이다.
⑦ <진심장구(盡心章句)>
백성이 나라에서 가장 귀하고, 학문에는 순서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다. 왕이 말했다. “어르신께서 천리의 먼 길을 멀다 여기지 않으시고 이곳까지 오셨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이익이 될 만한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익만을 말씀하십니까? 인의정치가 있을 뿐 입니다.”<양혜왕장구>
맹자가 말씀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남의 어려움을 보면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진 마음을(不忍人之心) 가지고 있다. 선왕이 남의 어려움을 보면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진 마음을 지니고 있어, 이에 남의 어려움을 보면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진 정치를 펼쳤으니, 남의 어려움을 보면 차마 지나치지 못하는 어진 마음으로 남의 어려움을 보면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진 정치를 행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손바닥에 물건을 놓고 움직이는 것처럼 쉽게 된다. 사람들이 남의 어려움을 보고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진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이유는 오늘 날 사람이 한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고 누구나 깜짝 놀라고 측은해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惻隱之心) 이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 아이의 부모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며, 아이를 구하지 않았다고 나쁜 소리 듣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이로써 볼 때, 측은지심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위를 보고 부끄러워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羞惡之心) 사람이 아니며, 타인에게 양보하는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辭讓之心)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是非之心)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은 인의 기초가 되고, 수오지심은 의의 기초가 되고, 사양지심은 예의 기초가 되고, 시비지심은 지의 기초가 된다. 사람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이 있는 것은 사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사단이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해치는 자요, 자신의 군주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군왕을 해치는 사람이다. 무릇 나에게 있는 사단을 모두 넓히고 채워서 인의예지의 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마치 불이 처음 막 타오르는 것 같고, 샘물이 흘러나와 사방에 이르는 것과 같으니, 진실로 이를 확충할 수 있으면 천하를 보존할 수 있고, 진실로 채우지 못하면 부모도 섬기지 못할 것이다. <공손추장구>
(2) 맹자의 주요 사상
① 왕도정치(王道政治)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던 맹자의 정치 이론은 바로 ‘왕도정치’이다. 이는 당시에 성행한 패도정치와 상반되는 개념이다.
전국시기 당시 여러 나라의 제후들을 국력과 경제력을 키워 나라를 확장하고 천하를 제패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맹자는 무력을 통한 영토 확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덕치를 통화 교화라고 주장했다. 한 나라의 군주가 덕치를 행해 백성을 다스린다면 모든 백성들이 그 군주를 따르고, 이러한 덕치가 천하에 전해져 천하의 백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② 성선설(性善說)
성선설은 성악설(性惡說)과 더불어 인성론(人性論)의 일종이다. 인성론은 사회의 주요 구성요소인 인간의 성품이나 품성을 주요 논제로 삼는 이론이다. 인간과 사회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고, 사회의 전반적 경향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한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 성품 고찰이 중요하다. 맹자는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인성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공자의 성선(性善)에 대한 견해를 보면, ‘성은 본래 비슷하나 습(習)에 의해 서로 멀어진다.’, ‘오로지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만이 변하지 않는다’ 고 했다. 맹자에 이르러 성선설에 대한 본격적인 주장이 나타나게 된다.
당시 또 다른 인성론으로 고자(告子)의 ‘성무성악설(性無性惡論)’이 있었다. 고자는 ‘성은 여울물과 같아 동쪽으로 트면 동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트면 서로 흐르니, 사람의 품성을 ‘선’과 ‘불선’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은 물을 동쪽과 서쪽으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했다.
맹자는 기본적으로 고자와 의견을 달리한다. 그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를 발현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했다.
③ 호연지기(浩然之氣)
이는 맹자의 특수한 용어로, 호연지기는 ‘널리 퍼져 있는 기’를 의미한다. 맹자는 인간이 일체의 부도덕을 제거하고 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용기를 지닐 때 마음에 깃들게 되는 것이 바로 ‘호연지기’라고 보았다. 호연지기의 본질은 아주 크고 굳세어 올바르게 길러지면 그 기가 온 천지에 가득 찬다고 한다. 또한 호연지기는 도덕성과도 관련이 있어, 그 기가 도의와 일치하지 않으면 존립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했다. 그리고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서는 도에 대한 자각과 인간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맹자의 호연지기는 인간의 자기계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순자(荀子)
순자는 현실주의적 경향이 강한 사상가로, ‘성악설(性惡說)’을 제창하였다. 전국시대 말엽 조(趙)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황(況)이며 자는 경(卿)이다. 혹은 손경(孫卿)이라고도 한다. 제(齊)나라 직하(稷下)에서 학문을 닦은 후 초(楚)나라에서 벼슬을 지내기도 했다. 직하는 전국시대 제자백가들이 함께 모여 자유롭게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출신국에 상관없이 모든 학자에게 숙소와 생활비가 제공되어 학문 연구가 이곳을 중심을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순자의 사상체계는 저작<<순자>>를 통해 볼 수 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가의 실천도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 유가사상가에 비해 합리적, 체계적, 종합적인 경향을 띤다. 순자는 맹자가 공자의 ‘인의’사상을 계승한데 반해 ‘예악’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한데 반해 ‘성악설’을 주장했다. 맹자는 ‘인’만을 중시하고 ‘이(利)’를 경시했으나, 순자의 경우 양자를 모두 중시했다. 마찬가지로 맹자는 ‘인’을 중심으로 한 왕도 정치를 피력하나, 순자는 왕도와 패도(覇道)를 모두 중시했다. 그는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이상론만을 견지하지 않고 역사적 인식을 바탕을 현실을 이해하려고 했다.
순자는 공자와 맹자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된 유가사상이 내면적이고 주관적 경향이 강한 것에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좀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사상 전환을 했다고 할 수 있다.
(1) 성악설
맹자는 내재적인 ‘인’을 중심으로 성선설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순자는 외재적인 ‘예’를 취하여 성악설을 주장했다. 순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므로 그러한 본성을 그대로 방치하면 세상에 전쟁과 쟁탈이 발생하여 혼란함이 가중되므로 악한 본성을 교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순자 ․ 성악편>>을 보면 사람은 선천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성질이 있으므로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만약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면 예의와 교육 등의 사회적 틀은 필요가 없을 것인데, 사람의 본성이 악함으로 인해 그러한 것들을 통해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악한 것이니, 선이란 인위적으로 된 것이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그대로 두면 서로 싸우고 빼앗고 하여 양보란 있을 수 없을 것이오, 또 나면서부터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마련이므로, 그대로 내버려 두면 남을 해치고 상하게 할 줄만 알 뿐 신의나 성실성은 없을 것이다. 또 귀로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눈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려는 감각적 욕망이 있으니 그대로 두면 무절제해져서 사회규범으로 지켜야할 예의나 규범의 형식적 절차인 문리(文理)는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성질이나 감정에 맡겨버린다면 반드시 서로 싸우고 빼앗아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세상을 혼란에 빠지게 할 것이니, 반드시 스승의 교화와 예의의 법도가 있어야 한다. 그리해야 남에게 사양할 줄도 알고, 사회의 질서를 지킬 줄도 알아 세상의 평화가 유지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람의 천성은 원래 악한 것이 분명하며, 선이란 인위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부러진 나무는 반드시 도지개를 대고 불을 쬐어 바로잡아야 곧게 되고, 무딘 칼은 반드시 숫돌에 갈아야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사람의 본성은 악인지라 반드시 스승이 있어야 바로 잡히고 예의를 얻어야 다스려질 것이니, 만일 스승이 없으면 편벽한 데로 기울러져 부정해질 것이요, 예의가 없으면 난폭해져서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왕이 이를 위해 예의를 일으키고 법도를 세워, 성정을 교정하고 훈련함으로써 사회규범에 따르고 도리에 맞도록 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을 살펴보면, 스승의 감화를 받고 학문을 쌓아서 예의를 숭상하는 사람은 군자가 되고, 제 성정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소인이 되니, 이로써 사람의 본성은 악인 것이 분명하며, 선은 인위적인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맹자는 인간이 선천적 도덕관념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 성선설을 주장했으나, 순자는 인간이 선천적 도덕관념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했다. 그래서 인간의 도덕적 성품과 행위는 후천적 환경과 사회교육의 결과물이라 여겨 성악설을 주장한 것이다.
하나.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쓰시오.
둘.사서삼경(四書三經)과 육경(六經)을 알아봅시다.
2. 도가(道家)
도가사상의 대표적 인물은 노자와 장자이다.
노자는 도가사상의 창시자로 최초로 ‘도(道)’의 개념을 제기하여 철학의 최고 범주로 삼았다. 초나라 사람으로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다. 주(周)나라 도서관리직을 지낸 적이 있다. 한 때 공자가 주나라에 갔을 때 노자에게 예를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 때 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가 말하는 성인은 이미 오래 전에 죽어 그 뼈가 삭았으며, 단지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군자는 때를 만나면 관직에 나가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양손을 맞잡고 떠나는 법이다. 내가 듣기로는 훌륭한 장사꾼은 재물을 깊이 감추어 두고 마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듯 행세하며, 덕이 훌륭한 군자는 마치 어리석은 사람같은 표정을 한다고 한다. 그대는 교만한 마음과 말을 많이 하려는 태도를 버려라. 꾸민 자태와 음한 욕심은 그대에게 무익할 뿐이다. 내가 그대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 뿐 이다.
노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다가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상하를 저술하여 도와 덕의 의미를 5천여 자로 해석한 후에 주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도경(道經)>에서는 주로 일반적, 철학적 원리를 서술하고, <덕경(德經)>에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논하고 있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요. 이름을 이름지우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음은 천지의 시초요. 이름이 있음은 만물의 어미이다. 그러므로 항상 없음에서 그 오묘함을 보려하고, 항상 있음에서 그 갈래를 보려고 한다. 이 두 가지는 같이 나왔으나 이름을 달리하니 다 같이 이를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또한 현묘하니 온갖 묘함이 나오는 문이다.
상등의 덕은 덕이라 하지 않으니, 이런 까닭으로 덕이 있으며, 하등의 덕은 덕을 잃지 않고자 하니 이런 까닭으로 덕이 없다. 상등의 덕은 함이 없으면서 이로써 함으로 여기지 않고, 하등의 덕은 함이 없더라도 이로써 함으로 여긴다. 상등의 어짊은 이를 하면서 이로써 함으로 여기지 않고, 상등의 의로움은 이를 하면서 이로써 함으로 여기며, 상등의 예는 이를 하여서 이에 응하지 않으면,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잡아끈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있고, 덕을 잃은 뒤에 어짊이 있으며, 어짊을 잃은 뒤에 의로움이 있고, 의로움을 잃은 뒤에 예가 있다. 대저 예라는 것은 진심과 신의가 엷어진 것이요, 그리고 어지러움의 으뜸이다. 앞서 안다는 것은 도의 화려한 꽃이지만, 그러나 어리석음의 시초이다. 이런 까닭에 참다운 대장부는 그 두터움에 처하고 그 엷음에 머물지 않으며 그 열매에 처하고 그 꽃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노자사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무위자연(無爲自然)
② 공자의 인의예지를 중심으로 하는 인위적인 사상 부정
③ 소국과민정치를 숭상하여 고대 사회로의 귀의
장자는 노자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전국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주(周)다.
그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도를 추구하며 현실적인 모든 가치를 부정했다. 장자는 인간에게 인식기관이 있는 것처럼 다른 사물에도 인식기관이 있다고 여겼다. 그는 시비, 선악, 미추 등 인간의 인식잣대를 다른 사물에 확대해서는 안된다는 상대적 인식관을 가지고 있다. 춘추전국시대 여러 사상가들이 현실적 정치,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장자는 초현실적 인간본연의 경지 추구에 사상 초점을 맞추었다.
장자의 사상서 <<장자>>는 내편(內篇)7편, 외편(外篇)15편, 잡편(雜篇)11편의 전체 3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자>>의 모든 내용이 장주의 사상인지 아닌지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내편의 7편은 장주의 사상이 가장 잘 담겨 있는 부분이다.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 지 알 수 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는 몇 천리나 되는 지 알 수가 없다.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대풍이 일 때, (그것을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남쪽 바다란 곧 천지를 말한다.
남곽자기가 책상에 기대 앉아 하늘을 우러르며 휴 하고 길게 숨을 내쉰다. 멍하니 자기의 몸을 잊은 것 같다. (제자인) 안성자유가 그 앞에 모시고 서 있다가 물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육체란 본래 고목처럼 될 수 있고, 마음도 (애초) 불 꺼진 재가 될 수 있다는 겁니까? 지금 책상에 기대신 모습은 예전에 기대고 계시던 모습과는 다릅니다. ’ 자기는 대답했다. ‘언아, 너 참 훌륭한 질문을 하는구나. 지금 나는 나 스스로를 잊어 버렸다. 너는 그걸 알 수 있겠느냐? 너는 사람의 퉁소 소리는 들어도 땅의 퉁소소리를 듣지 못했고, 또 땅의 퉁소소리를 듣는다 해도 아직 하늘의 퉁소소리를 듣지 못했겠지.
도가 사상의 중심이 ‘무위자연’ 사상이기는 하지만, 노자와 장자는 사상의 차이를 보인다. 노자는 사상의 적극성을 보여 정치에 대한 의욕을 드러내지만 장자는 그렇지 않았다. ‘도’를 바라보는 시각도 차이가 있다. 노자는 도가 천지만물의 근원으로 움직이지 않는 실체로 여겼지만, 장자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로 여겼다. 그리고 ‘무위’의 개념에 있어서도 다른 사고를 볼 수 있다. 노자의 ‘무위’는 외물(外物)을 대상으로 하지만, 장자는 내심(內心)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결국 노자는 처세적 경향을 드러내며, 장자는 절대자유의 정신을 추구했다고 보여진다. 후에 노자사상은 황로사상의 정치사상으로 연결되고, 장자의 사상은 도교의 신선사상으로 연결된다.
노자와 장자를 중심으로 한 도가사상은 무위자연사상이 중심을 이루는 반문화론자적 성향의 사상이라 하겠다.
하나.도가의 중심 사상인 ‘무위자연’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3. 법가(法家)
법가는 춘추시대 관중(管仲), 자산(子産)에게서 시작되어 전국 시대 이리(李悝), 상앙(商鞅), 신도(愼到), 신불해(申不害) 등에 의해 발전하였다. 이 중 상앙은 법(法)을 중시하고, 신불해는 술(術)을 중시하고, 신도는 세(勢)를 중시했다. 전국 시대 말엽에 이르러 한비(韓非)라는 인물이 세 사람의 ‘법, 술, 세’를 종합하여 법가사상을 체계화한다. 그는 순자의 현실주의적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을 흡수하여 법가사상을 발전시킨다.
한비는 전국시대 한(韓)이라는 약소국의 왕족 출신이다. 처음에는 한자(韓子)라고 불렸으나 당대의 한유(韓愈-韓子라고 불림)와 구분하기 위해 한비자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순자의 제자로 진나라의 재상이었던 이사(李斯)와 동문수학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순자 성악설의 영향을 받아 들였다. 순자가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예로 다스리고 제재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해, 한비자는 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즉 순자는 윤리적 제재를, 한비는 법률적 제재를 취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한비가 집대성한 ‘법’, ‘술’, ‘세’의 개념은 이러하다. ‘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법령, 법률’을 의미하며, ‘술’은 군주의 전유물로 용인술(用人術)을 말하며, ‘세’는 통치자의 통치 권력을 의미한다.
한비의 사상은 <<한비자>>에 잘 나타나 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신불해와 공손앙, 이 두 사람의 학파에서 주장하는 말 중 어느 편이 나라에 더 긴요한가?” 라고 하니, 이에 한비가 대답했다. “이것은 헤아려 견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열흘만 먹지 않으면 곧 죽고, 큰 추위가 매서울 때 옷을 입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다. 그런데 옷과 먹을 것 중 어느 것이 사람에게 더 급박하냐고 묻는다면, 이것은 어느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두 삶을 길러내는데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지금 신불해는 술을 주장하고 공손앙은 법을 시행하고 있다. 술이란 임금이 신하의 능력에 따라 관직을 주고, 그의 말을 좇아 그 실적을 추궁하며, 사람의 생사 권한을 쥐고 여러 신하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으로 이것은 임금이 굳게 잡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법이란 모든 관청에 명시되어 있는 법령으로서 상벌이 민중의 마음에 반드시 새겨져 있어서, 법을 잘 지켜 따르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명령을 어기는 자에게 벌을 가하는 것으로 이것은 신하가 따르고 익혀야 하는 것이다. 임금에게 술이 없으면 윗자리에서 눈과 귀가 가리워지고, 신하에게 법이 없으면 아래에서 어지러움이 일어나게 된다. 이 법과 술은 어느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모두 천하 통일을 꾀하는 통치자에게 필요한 조건이다.”
형나라 회왕에게는 정수라는 애첩이 있었는데, 그 뒤 임금은 또 새로운 미녀를 얻었다. 투기심이 생긴 정수는 계략을 꾸밀 마음으로 그 미녀에게 가르치기를 “ 임금께서는 남이 입을 가리는 것을 매우 좋아하시니, 그대도 임금을 가까이 모실 때는 반드시 입을 가리도록 하오.” 라고 말했다. 미녀는 정수가 시키는 대로 궁궐로 들어가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것을 본 임금이 이상하게 여겨 정수에게 그 이유를 묻자 정수가 대답했다. “그 여인은 늘 임금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 하여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은 뒤의 어느 날 임금과 정수, 그리고 미녀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정수는 미리 시종에게 이르기를 “오늘 임금께서 무슨 분부가 있거든 지체하지 말고 즉각 거행하도록 하라.” 라는 말로 다짐해 두었다. 그 날도 미녀는 앞으로 나아가 임금 가까이 다가가자 여러 번 입을 가렸다. 이를 본 임금은 분을 참지 못하고 말하기를 “ 이 계집의 코를 당장 베어버려라.” 하니 시종이 재빠르게 칼을 빼 그 미녀의 코를 베어버렸다.
전체적으로 한비의 문장은 순자의 영향을 받아 논리정연하고 논설적이며, 도가의 상상력도 느낄 수 있고 많은 우언과 고사를 사용하고 있다.
한비 사상의 특징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이전시기의 ‘법’, ‘술’, ‘세’를 집대성하여 유기적 정치사상체계를 형성했다.
② 한비 법치설의 근거는 순자의 성악설이다.
③ 한비는 ‘법’에 있어서 상벌을 엄격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④ 통치술에 있어서 용인술을 중요하게 여겼다.
한비 이외에 전기의 법가로 상앙을 대표적 인물로 들 수 있다. 그는 본래 성이 공손으로 공손앙이라고 부른다. 진나라의 ‘상(商)’ 이라는 지방에서 봉읍을 얻어 상앙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진나라는 전국시대 후기에 부국강병을 위해 일련의 조치를 취했는데, 그 중심인물이 상앙이었다. 그는 진나라에서 변법을 시행하여 군주의 절대권력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법가사상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한 이는 바로 진나라의 시황제이다. 진시황은 법가사상을 채용하여 중국의 정치적 전통을 만들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법가사상은 절대군주제와 전제주의 국가 형성에 기여한 바가 크다.
하나.한 나라와 국민에게 있어서 ‘법’이
지니는 의미는?
둘.한비자 법치사상의 이론적 근거에 대해
쓰시오.
4. 묵가(墨家)
묵가는 전국시대 사상유파 중 유가와 함께 대표적 양대 학파 중 하나이다. 묵가의 창시자이자 중심인물은 바로 묵자이다. 그는 본명이 적(翟)이며, 송나라 사람이다. 실제 그는 송나라 보다는 노나라에서 주로 생활했다. 그는 천한 수공업자 출신으로 수레바퀴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당시 묵자를 신봉하는 이들은 대부분 하층출신이었으나 그들은 잘 짜여진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묵자는 여러 나라를 다니며 백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이에 대해 맹자를 이렇게 말했다. “정수리로부터 발뒤꿈치 까지 (온 몸이) 닳아 없어질지라도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하는 사람이다.”
본래 묵자는 유가사상을 배웠으나 유가가 점차 지배계층위주의 사상으로 흐르게 되자, 유가의 반대파가 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묵가는 정치, 학술, 사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유가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묵자>>를 통해 묵적의 사상을 살펴 볼 수 있다.
새로이 입국한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써서 선비를 찾아 쓰지 않으면, 모처럼 얻은 나라도 다시 잃게 된다. 어진 선비를 존중하여 친히 만난다 하더라도 서둘러 급히 만나지 않는다면, 어진 선비 쪽에서도 임금에 대해 냉담해지며, 의뢰받는 일을 뒤로 미루어 서두르지 않게 된다. 무릇 어진 선비가 아니면 사물을 판별치 못하므로 긴급한 일이 없고 지혜로운 선비가 아니면 더불어 국정을 걱정할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진 선비 만나는 것을 게을리 하여 서두르지 않고, 지혜로운 선비를 잊고서 찾지 않으면서도 그 나라를 보존해간 임금은 일찍이 없었다.
묵자의 사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세상이 안정되고, 그렇지 않고 서로 미워하게 되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묵자 겸애사상의 최후 근거는 ‘이(利)’로, 겸애는 바로 천하는 ‘대리(大利)’이다.
② 비공설(非攻說)을 주장했다. 일종의 반전사상이다. 그는 전쟁이 백성에게 해를 끼치므로 극력 반대했다. 그러나 모든 전쟁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죄가 없는 나라를 치는 것은 반대했으나, 사악한 나라는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③ 상현상동설(尙賢尙同說)을 주장했다. 현명한 이를 숭상하고, 등급을 가리지 말고 능력 있는 이를 추천하자고 했다. 이러한 상현설은 일부 계층의 정권독점을 반대하고 농민과 공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상현설이 능력 있는 인재등용을 주장한 것이라면, 상동설은 최고 통치자의 자리도 현명한 이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