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차이나 :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서울의 최대 경쟁력은 산과 강, 무위자연을 품다
김정탁 노장사상가 중앙일보 입력 2023.01.20 00:40
우리나라 행정지명에는 산천과 관련한 게 많다. 이런 식 이름짓기는 다른 나라에 없는 드문 일이다. 산(山)과 관련해선 부산, 울산, 군산, 익산, 안산, 괴산, 아산, 예산, 논산, 경산, 양산이 있다. 하천(川)과 관련해선 인천, 춘천, 부천, 동두천, 이천, 포천, 화천, 제천, 진천, 서천, 옥천, 영천, 합천, 사천이 있다. 들판(原)과 관련해선 수원, 철원, 창원, 남원이 있고, 땅의 평평함(平)과 관련해선 가평, 양평, 증평이 있다. 이처럼 전국에 산과 강과 들이 널려 있어 한국인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복을 누린다. 살기에 편안함을 강조하기 위해 ‘편안할 안(安)’과 ‘편안할 녕(寧)’이 들어간 지명도 있는데 천안, 태안, 부안, 진안, 무안, 신안, 함안과 창녕, 의령, 보령이 그러하다. 또 풍수지리적으로 살기 좋은 걸 말해주는 지명도 있다.
#북한산 뒤에 두고 흐르는 한강 : 한양이 대표적이다. 풍수지리적으로 살기 좋은 터가 되려면 배산임수(背山臨水)여야 하는데 한양은 북한산이 배후에 있고, 한강이 앞에 흐른다. 거기에 좌우 가림막까지 있어 안락함도 느껴지는데 좌청룡인 낙산과 우백호인 인왕산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흥미로운 건 지명에 양(陽)이 들어가면 강 건너 위쪽을 뜻한다. 그 강이 ‘한(漢)’ 강이어서 한양이라 부른다. 이런 설명만으론 한양이 살기 좋은 터임을 모두 말해주지 않는다. 배산임수라도 땅이 습하면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다. 그래서 비가 와도 물이 잘 빠져야 한다. 이 점이 산 사람에게 최적의 거주지인 양택(陽宅)으로서 갖춰야 할 요건이다. 죽은 사람에게 최적의 거주지인 음택(陰宅)도 마찬가지다. 물이 잘 빠지지 않아서 관에 물이 고인다든지 하면 묫자리로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땅이 습하지 않은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양은 북한산에서 한강으로 기울어진 지형 탓으로 물이 잘 빠지게끔 돼 있다. 배산임수가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것도 높은 산과 낮은 강으로 생겨난 경사 때문이다. 이 점이 강 건너 위쪽에 자리한 양택의 참된 쓸모이다. 한양 천도 후 물 관리를 위해서 청계천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자연스럽게 생겨난 경사만큼이나 물을 잘 빠지게 하는 장치는 없다. 게다가 그 언덕이 남쪽을 향해 있어 볕까지 잘 들어오므로 비가 어지간히 내리지 않으면 땅에 물이 오래 고이는 경우는 흔치 않다.
#풍수사상 제거한 한성과 경성 : 그래서 한성(漢城)이라 부르면 듣기 불편하다. 성은 외부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담에 불과하므로 한양이 지닌 풍수지리적 의미를 담아내지 못해서다. 그런데도 중국 정부는 한성이라 고집한다. 수도를 일개 성으로 낮춰서 호칭하는 건 한국을 속국이나 변방쯤으로 여기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일제강점기 때 서울을 경성이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漢)대신 ‘서울 경(京)’을 사용해 식민지 조선의 수도로 치켜세웠다는 알량한 배려가 느껴져도 중국이 한성이라 부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런 천혜의 터전은 강북으로 제한된다. 강남은 배산임수의 지형이 아니라서 이에 포함될 수 없다. 강남 한가운데 위치한 잠실은 비가 많이 내리면 물에 잠겨서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름 그대로 뽕나무밭이었다. 지금은 한강의 댐들로 수위를 조절할 수 있게 돼 택지로 바뀌었다. 언젠가 북한이 댐을 열어서 수공을 하면 강남 일대가 물에 잠긴다고 해 화천에 평화의 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강남은 물에 취약해 한강의 댐들이 버텨주지 않으면 사람이 살기에 힘들다. 중국과 일본이 어떻게 부르든 서울은 북경(베이징)이나 동경(도쿄)과 도시 구조가 태생적으로 다르다. 한양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데 반해 북경과 동경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져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본거지를 지금의 동경인 에도로 옮길 때 해안을 메꾸는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북경도 명(明) 영락제가 자신의 조카 건문제를 죽이고 수도를 옮길 때 원대한 계획을 세워서 조성한 도시이다. 이런 인공적 작업이 뒤따랐기에 도시명에 경(京)을 삽입했다. 그래서 서울이 ‘자연분만’의 도시라면 북경과 동경은 ‘인공분만’의 도시인 셈이다.
우리나라에는 한양 말고도 ‘양’으로 끝나는 지명이 전국에 산재한다. 인천에는 계양, 경기도에는 고양이 있다. 계양은 계수나무가 많아서고, 고양은 높아서다. 경기도 화성의 옛 이름은 남양이다. 그래서 화성 앞바다를 아직도 남양만으로 부른다. 또 강원도에는 양양, 충청도에는 단양과 청양이 있다. 제천의 옛 이름은 봉양이다. 전라도에는 담양과 광양이 있고, 경상도에는 영양, 함양, 밀양, 언양, 진양이 있다. 밀양은 낙동강 지류가 구불구불해진 탓에 강이 촘촘히(密) 흘러서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
영화배우 전도연이 2007년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 ‘밀양’이 ‘비밀스러운 햇살’로 번역되었는데 ‘구불구불해 촘촘해진 강 건너편 위쪽’이란 밀양의 원래 의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게다가 ‘비밀스러움’은 비밀(秘密)이란 단어의 ‘비’를 뜻하지 촘촘하다는 ‘밀’과는 다른 의미이다. 크게 잘못된 번역이다.
#양택과 음택, 산과 강의 조화 : 강 부근에만 사람이 살기 좋은 터가 있는 게 아니다. 산 부근에도 살기 좋은 터가 있어 고을 이름에 음(陰)을 붙인다. 지리산 아래 산청의 옛 이름이 산음(山陰)인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의 미사일 기지 중 하나가 평양 인근에 있는데 이곳 지명도 산음이다. 또 산청과 이웃해서 함양에 소재하는 안의의 옛 이름도 안음(安陰)이다. 조선 명종 때 권신 윤형원이 정난정과 함께 도망쳐서 자살한 그의 별장도 강음(江陰)에 있었다. 강음은 현재 개성 북쪽 금천 부근이다. 이처럼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양택과 음택은 강과 산 부근에 늘 있게 마련이다.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한양의 이런 자연적 지형을 최대한 존중해 이와 어울리도록 집을 지었다. 경복궁과 창덕궁이 북경의 자금성과 비교할 때 아담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광화문 앞을 지날 때마다 마주치는 북악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전경은 한 폭의 풍경화와 같은데 이제는 안국동 쪽에서 이 풍경화를 더 잘 감상할 수 있다. 송현동에 있던 미 대사관 숙소가 이전한 뒤 최근 이곳이 개방돼 북악산은 물론이고, 인왕산까지 확 트여서다.
#소프트웨어 강북, 하드웨어 강남 : 도시를 가리켜서 미디어라고 한다. 담론을 매력적으로 만들어내서다. 그렇다면 서울의 매력적인 담론은 어디서 만들어질까. 각종 엔지니어링으로 범벅된 강남일까, 아니면 다소 촌스러워도 자연과 조화된 강북일까. 엔지니어링이 첨단이어도 북악산과 한강의 자연이란 담론을 따라올 수 없다. 그리고 엔지니어링은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줘도 마음의 편안함은 가져다주지 못한다. 또 엔지니어링은 하드웨어적으론 안전해도 소프트웨어적으론 안심할 수 없다. 더구나 사우디아라비아가 추진한다는 ‘네옴 시티’와 같은 첨단 도시가 등장하면 강남이 생산하는 담론은 경쟁력을 지니기 힘들다. 최근 서울에선 서양 관광객을 자주 목격한다. 이들이 멀리 떨어진 한국을 찾아와서 마음에 담을만한 추억은 어떤 걸까. 도심 한복판에 우뚝 선 남산과 북악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자연환경일 테다. 또 풍수지리적으로 느끼는 서울의 안락함일 테다. 그렇다면 ‘유위부자연(有爲不自然)’이 아니라 ‘무위자연’이 도시의 경쟁력이 아니겠는가. 아쉬운 건 자연환경이 많이 훼손돼 성형수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건 예뻐지는 성형이 아니라 원래 모습을 되살리는 성형이다. 그러면 광화문 앞에 자리한 정부종합청사부터 수술대 위에 올려야 하지 않을까. 역할을 다했는데도 우뚝 솟아 있어 뜬금없게 보여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