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가톨릭 연구」와 문서 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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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평양 서포리 집에서의 김구정과 두 자녀(아들 영일과 딸 영민) . |
김구정은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다. 「가톨릭 연구」에 이를 담아냈다. 그는 이 경계 없는 무대 위에서 한껏 부르짖었다. 그리고 홍용호 신부는 그의 좋은 짝이었다.
평양교구에서는 1934년 1월 「강좌 가톨릭 연구」를 발간했다. 이 잡지는 그해 7월부터 「가톨릭 연구」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1937년부터는 「가톨릭 조선」으로 제호와 성격을 바꾸면서 간행됐다.
이 잡지는 5년간 발행되다가 1938년 12월 폐간됐다. 김구정은 창간 때부터 4년여 이 잡지의 실무를 맡았다.
「가톨릭 연구」는 태어나기 힘든 잡지였다. 1933년 조선 교회 5개 교구장은 정례 주교회의에서 전교 방침을 논의하면서 언론 출판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전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각 교구의 산발적인 출판물 발행을 통제키로 했다.
이 결정에 따라 당시 천주교의 기관지인 「경향잡지」와 향후 발간될 「가톨릭청년」만이 기관지로 정해졌다. 「가톨릭청년」은 그해 6월 창간됐다. 이에 따라 당시 발행되고 있던 대구교구의 「천주교회보」와 서울교구의 「별」은 자진 폐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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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정과 함께 잡지를 만든 홍용호 신부가 평양 교구장 주교가 된 후 모습. |
신앙에 대한 열정, 잡지 창간으로 이어져
이러한 움직임과는 달리 평양교구에서 교구 단독으로 「강좌 가톨릭 연구」를 창간했다. 이 잡지의 발간 배경이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평양교구에서는 1933년 9월 전교회장들을 위한 교리 강습회를 열었다.
전교사는 교리를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이 강습회는 그들에게 긴요한 기회였다. 강습회가 막을 내리자, 수강생들은 “적어도 매달 한 번은 교리에 대한 굶주림을 풀어 달라”고 요구했다. 김성학 신부와 강사들은 그들의 욕심에 놀랐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설명해도 참가자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때 김 신부는 예레미아 선지자의 “어린 것들이 떡을 달라고 졸랐으나 그들에게 떼어 줄 자가 없다”는 구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떡은 어디라도 있지만 나눌 심부름꾼이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수강자들에게 “보수는 그만두고 우리의 주머니 끈까지 풀 터이니 그대들도 후원할 터인가?”라고 물었다. 수강자들은 그 즉석에서 전도협회를 조직하고 40명의 회원을 모았다.
강사진은 이 후원회의 재정적 도움으로 강의록 형식의 「강좌 가톨릭 연구」를 발간하게 됐다. 이러한 잡지 창간은 엄밀히 말하면 한국 주교회의의 결정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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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정이 실무를 맡았던 「가톨릭 조선」의 목차. |
한편 전교회장으로 구성된 후원회의 움직임만으로는 잡지 간행이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도움으로는 비용의 3분의 1도 충당치 못했다. 창간호는 몇몇 성직자와 후원회원들의 자발적 후원으로 해결했다. 대성공을 거뒀다.
처음 50부 인쇄를 계획했는데, 3쇄 1500부를 찍었다. 창간호의 성공으로 그들은 모리스 교구장의 인가를 얻고, 평양 관후리 사제관에서 출발했던 사무실을 서포의 교구청 건물로 옮기고 잡지사의 틀을 갖췄다.
1934년에는 홍용호 신부가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에서 중앙부의장이 됐고, 이 잡지는 그 연맹 기관지가 됐다.
이처럼 이 잡지는 미리 계획된 잡지가 아니었고 기본 자본금도 없었다. 이 말은 편집과 운영팀이 비용, 원고, 독자를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가톨릭 연구」는 편집 고문에 김성학 신부, 책임자에 홍용호 신부, 편집 실무에 김구정으로 진용이 짜였다.
잡지 기능이 확대되면서 점차 강창희, 조천수가 충원됐다. 이중 홍용호 신부는 사제 수품 직후부터 이 잡지를 맡아 폐간될 때까지 5년간 모든 책임을 감당해냈다.
김구정은 홍용호 신부보다 여덟 살 연상이긴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일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새 신부 홍용호의 열정과 김구정의 문필력은 잡지 지면에서 신앙의 불씨로 타오르고 있었다.
홍용호 신부와 김구정은 잡지를 편집하면서 독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그들은 독자란, 시사 자료, 지상 토론회, 신춘문예 등의 원고를 공모했다. 또 잡지사에서는 각 지역에 지사를 설치코자 했다.
창간 두 달 후 대구에 첫 지사를 열었다. 이곳 지사장은 최복만이고 총무 겸 기자는 김은정이었다. 김은정은 김구정의 동생이다.
나중에 만주 해북현에 또 다른 지사를 설치했는데 이곳도 김구정과 연고가 있는 곳이었다. 1938년에 들어서면 잡지사에서는 각 본당에 지사를 설립해 주기를 당부했다.
잡지가 겪는 제일 큰 어려움은 물론 발간 비용을 마련하는 문제였다. 잡지는 후원을 받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특집호를 기획해 축하 광고를 받았다. 한편으로는 서적을 간행해서 수입을 올리고자 했다.
「가톨릭 연구」 1년 치를 양장으로 합본하거나, 달력을 제작하고, 특집호를 별매하고, 「진교요리」(김성학) 등의 서적을 간행해 판매했다. 상업성 광고도 실었다.
급기야는 편집인들이 잡지를 홍보, 판매하러 다녔다. 교구에서는 출판물 보급 사업의 활성화를 위해 순회 강연을 했다. 나중에는 ‘가톨릭 문화 보급대’를 조직해 사원들이 각 본당에 파견돼 보급운동을 벌였다.
김구정은 각 지방 본당 담당, 조천수는 평양 관후리본당 담당으로 매 주일 미사 후 신자들을 모아 특별 강화와 간담회를 열어 가톨릭 문화 보급에 진력했다.
그들은 광고를 따고 잡지를 홍보하러 다녔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잡지는 독자들에게 꼭 필요한 글들을 마련했고, 지역의 인적자원을 확보하고 연계해 나갔다.
김구정은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며, 사람들을 모아오고, 각 지방과 연결해 나갔다. 그는 주재용 신부 등 여러 사람을 집필자로 모셔왔다. 또 당시 경상도와 전라도 등 조선 남쪽 지방 전체를 망라하던 대구교구의 소식을 실었다.
잡지에 그의 형 김하정이 소개되고 대구 신암동성당 소식이 담긴 것 등이 그 예다. 그의 동생 김윤정이 평양교구 전교사로 취직한 다음에는 이 잡지의 원고나 기사도 쓰고 있다. 대구의 건설회사 ‘쌍흥호’의 광고도 김구정이 얻었을 터였다.
잡지 편집진은 모든 어려움을 기쁨으로 감수하면서 5년 세월에 많은 내용을 담아냈다. 그들은 당대를 문서 전교의 시대라고 믿었다. 그리고 가톨릭 진리를 선전하는 것보다 더 신성한 직무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들은 교황께서 “대종도(大宗徒, 큰 사도를 지칭하는 옛 표현) 바오로가 20세기 오늘에 다시 나타난다면 반드시 기자가 되었으리라”라고 한 말씀을 바탕에 두고 가톨릭 정신으로 무장하고, 순교 정신으로 가슴을 태우며, 당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글로 소통하고자 했다.
침묵의 교회 전하는 유일한 자료
한편 잡지의 기능은 당대 소식을 전하는 일이다. 「가톨릭 연구」는 당대 큰 행사, 혹은 기념일을 택해 특집호를 냈다. 편집 인원이 적은 데다 월간 잡지에 특집을 마련하는 일은 그 자체가 이미 비장한 각오였다.
1935년 ‘조선 천주교 전래 150주년 특집호’를 냈고, 이듬해 7월호에는 ‘대구교구 설정 25주년 기념’을 보도하며 특집으로 대구교구사를 정리했다.
여러 특집 중 정말 귀중한 기록은 1936년 9월호에서 천주교 간도 선교 40주년을 기념해 ‘간도 천주교회 소사’를 엮은 것과 그다음 해 4월 평양교구 설정 10주년 특집으로 평양교구사를 쓴 것이었다.
평양교구사 특집은 교구사를 한꺼번에 다루려던 초기 계획을 바꿔 한 호에 두세 개의 본당을 소개해 나갔다. 이때 잡지에서는 각 본당의 공로자로 공소회장이나 전교사도 조사해 기록했다.
이러한 특집은 당대의 기록자로서 과거를 짚고 현실을 바로 점검하는 연구가 동반된 작업이었다. 더구나 잡지에 기사로 나간 자료는 동시대인들에게 검증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김구정은 이제는 ‘침묵의 교회’가 된 평양교구와 연길교구의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공산 정권 하에서 모든 것을 몰수당할 때 사제들은 더는 활동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하면서도 그곳에 남았다.
그들이 교구 공문이나 교회 기록들을 간수했으리라. 그러나 그 기록들이 이곳까지 전해지지는 않았다. 「가톨릭 연구」는 이 침묵의 교회에 대해 현재까지 전해지는 거의 유일한 자료다.
평신도는 교회의 내부까지를 기록하기 힘들다. 그러나 김구정은 평양교구 설정의 자문이었던 김성학 신부가 옆에 있었고, 나중에 주교가 된 홍용호 신부와 함께 일했다.
그리고 잡지사는 교구청사 안에 있었다. 온갖 분야에 관심이 많고, 처음으로 세상과 대한 날카로운 눈과 제대로 발휘된 필력이 평양교구를 실어냈다 은경축도 할 수 없었던 평양교구는 금경축을 맞아 남한에서 「평양교구 50년사」를 발간했다.
「가톨릭 연구」는 그 실마리가 돼 줬고, 당시 생존했던 김구정은 설명을 보탰다. 주님은 김구정을 그렇게 쓰셨다. 평양교구 100주년은 현지에서 할 수 있기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