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5월 7일,
나토군, 유고연방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 폭격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측의 실수로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이 폭격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고
사태가 복잡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 동안 중국은 나토의 유고 공습을 반대해왔다. 판 잔리엔 유고 주재
중국대사는 부서진 대사관 건물 앞에 서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공격 당했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전국인민
대표대회(전인대)는 “패권주의의 적나라한 작태”라는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1999년 5월 8일 당시 나토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 대사관 건물(위),
베이징에서 나토군의 폭격에 항의하는 중국 학생(아래)
베이징에서는 8일 시민-대학생 1만 여명이 미국대사관 앞에서 밤늦도록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대는 베이징대학 등 시내 10여 개 대학 학생들이 중심이 돼 오후 12시쯤 미 대사관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오후 2시쯤엔 시민들이 가담하면서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이날 저녁 7시쯤 일단 물러가는
것으로 보였으나 밤이 되면서 더 많은 시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숫자가 더욱 늘어나고 시위 양상도 훨씬
격렬해졌다.
시위대들은 “하늘이 클린턴을 저주할 것”, “미국은 살인자”라고 소리치며 돌을 던져 대사관 승용차와 유리창,
정문 전등을 깨기도 했다. 시위대 일부는 성조기를 불태우며 차량을 앞세워 대사관 정문을 돌파하려다 경찰에
의해 간신히 저지되기도 했다. 또 남부 청두와 광저우, 상하이 등 중국 곳곳에서 반미시위가 벌어졌고, 특히
청두에선 미국 영사관이 시위대 방화로 2층 대부분이 불탔다.
친화쑨 유엔 주재 중국대사는 이날 자신들의 요구로 긴급 소집된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나토는 무고한 인명
살상 방지를 위해 유고에 대한 군사공격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클린턴 미 대통령은 유고에 대한 공습 완화를 시사하고 미국 독일 등은 오폭 사건 수습을 위한 외교적 중재
노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나토군은 8일과 9일 세르비아 남부 니시와 코소보 중심부를 폭격하는 등 공습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중국 대사관 오폭은 비극적인 실수”라며 유감을 표시했으나, “나토의 공습은 계속될 것”
이라고 말했다.
슈뢰더 독일총리는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유고 특사, 빌트 유엔 사무총장 특사와 회담한 뒤 “정치적 해결”을
지속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코소보 평화는 외교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며 공습 중단을 촉구했다. 나토는
중국 대사관 오폭 사고가 건물의 성격에 대한 잘못된 정보에 기인한 것이라고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미국의 공식 사과와 해명과는 달리 오폭이 아니었다는 정황 및 근거가 나와 주목되었다.
중국이 자국 대사관 지하실을 세르비아 정보당국의 은신처로 제공해 세르비아 정보국이 이곳을 근거지로
정보활동을 벌이자 미군이 이를 겨냥해 조준 폭격을 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미국이 '오폭'을 사과해 중국의
체면을 살려주고, 중국은 반미시위가 번지는 것을 막는 식으로 외교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은 홍콩의 시사잡자 첸샤오(前哨·사진) 2월호가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의 자녀들과 가까운
인물을 통해 입수한 장 주석의 미발간 회고록의 일부에서 나왔다.
첸샤오 2월 호에 따르면 장쩌민 전 국가주석은 "나토군이 세르비아를 폭격했을 때 중국 대사관을 철수시키지
않고 대사관 안에 세르비아 정보요원을 숨겨준 것은 정말 후회스러운 일이었다"며 자신의 이 같은 결정을
'정치적 실책'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당시 미군이 이끄는 나토(NATO)군은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알바니아계 코소보 주민을 유혈 진압한 세르비아
의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을 겨냥해 1999년 3월부터 5월까지 78일간의 대규모 폭격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미국의 대규모 공습으로 세르비아 국방부 정보기구 경찰총국 등이 잇따라 파괴되자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은
정보국의 핵심부문을 중국 대사관으로 이전해 활동을 계속할 수 있기를 희망했으며, 마침내 중국의 허락을
얻었다. 4월 하순 전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며 러시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철수하고 중국 외교부도
대사관 철수를 건의했지만, 장쩌민 주석은 이를 거부했다. 장쩌민 주석은 당시 세르비아가 필요한 물자를
공급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의 폭격기를 격추할 수 있는 지대공 미사일을 리비아를 통해 공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5월9일, 미군은 다탄두 미사일을 중국 대사관에 명중시켰으며, 일부 탄두는 벙커버스터 폭탄처럼 대사관
건물 옥상에서 지하실까지 뚫고 들어가 폭발했다. 이 사건으로 지상 건물에 있던 중국인 직원 3명과 함께
지하에 있던 세르비아 정보요원 14명도 숨졌다.
이후 중국은 미국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지하에서 숨진 14명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으며, 미국은 중국
대사관 지하실에 세르비아 정보국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협상에 능한
미·중 두 나라가 교묘한 '뒷거래'로 사태를 수습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