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아인(人)의 일부가 인도에 침입한 것은 대략 BC 1300년 전후 무렵이다. 이 침입을 당하여 선주민(先住民)인 문다인(人) ·드라비다인은 아리아인의 지배를 받게 되어 다사라고 하는 노예의 위치에 놓이고 말았다. 다사는 이란어의 다하에 해당하는데, 고대 이란에는 제승(祭僧) ·무사(武士) ·농민 ·공장(工匠)의 네 다하가 있었다. 아리아인이 침입했을 때만 해도 인도에는 아리아인의 일반 자유민과 선주민의 두 사회구분(신분 또는 계층), 즉 두 바르나가 생겼을 뿐이다. 그런데 이란의 네 다하가 이 인도의 신분제도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기원전 300년경 마우리와 왕조에 그리스의 외교 사절로 파탈리푸트라(현재의 Patana)에 왔던 메가스테네스(Megastenes)나 7세기 인도를 여행한 중국의 승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각각의 종성이 함께 모여 살면서 하나의 직업에 종사하고 다른 종성과 결혼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의 서남 해안에 도착한 이래 인도에 들어온 포르투갈인들은 인도 사회가 배타적으로 혼인을 그 내부 집단에서만 하는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았다. 인도인들은 이러한 집단을 자티(jati)라고 불렀다. 그러나 포트투갈인 들은 이것을 지기 나랏말로 가문, 혈통, 종족을 뜻하는 카스트라는 말은 포르투갈어 카스타(casta:혈액의 순수성 보존을 위한 사회적 說法이라는 뜻)가 인도-유럽계(系) 언어로 전화한 것으로, 인도의 바르나(varna) 즉 ‘색(色)’, 나아가서는 피부의 색을 나타내는 말에 해당한다. 카스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는데, 복잡한 인도의 사회와 역사, 그리고 카스트의 기원 등에 관한 제설과도 관련되어,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 후 인도에 들어온 프랑스인이나 영국인들도 그대로 이 말을 사용하여 오늘날의 '카스트(caste)'라는 말이 되었다. 결국 인도에서는 오래 전부터 사회적으로 족내혼을 하는 친족 내지는 길드 집단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자티라는 말을 써 왔다. 그런데 외부인들에 의해 자티라는 말 대신에 카스트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고, 지금 우리는 카스트라는 말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바르나 제도와 카스트 제도, 그리고 바르나와 자티라는 말을 구분함으로써 카스트 제도라고 할 때 카스트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써야 한다. 우리가 사성 제도라고 할 때는 베다 시대의 용어로 바르나 제도라고 해야 하며, 이것이 세분화되면서 발전한 카스트는 우리에게 카스트 제도라는 말로 익숙해 있어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겠으나, 카스트 제도를 바르나 제도(사성제도)와 동일시 해서는 안 된다. 그 개념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성(四姓) ·계급 ·등급 ·족보 등으로 번역되지만 어느것도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다.
처음의 네 가지 계급은 베다 시대의 용어로 '빛깔'을 의마하는 바르나(varna)라는 말로 표현했다. 고대 인도에서는 집단을 구별하는 데 빛깔로 표시했었는데, 승려는 백색으로 표시했고, 무사들은 적색, 평민은 황색, 그리고 노예나 천민은 흑색으로 표시했다. 원래는 아리아족이 인도에 들어왔을 때 피부색이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나타내 주었기 때문에 피부색의 차이를 구별하는 관념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본다면 바르나라는 말은 계급이라기 보다는 계급들의 집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초기의 신분 제도인 바르나 제도는 사회적인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우선 직업의 동일성 여부에 따라 발생한 사회 계급제도라고 하겠다. 이것이 점차 브라만 계급을 정점으로 하는 엄격한 신분 제도를 낳은 것이다. 그리고 바르나 제도가 확립된 이후에 색깔을 의미하던 바르나라는 말에 새로이 신분, 계급이라는 의미가 첨가되었다. 왜냐하면 혼혈이 진행되어 더 이상 피부색이 신분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지 않았음에도 이 바르나라는 말은 여전히 신분, 계급의 의미로도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자티와 바르나라는 두 개의 구분 사이에는 공통적인 성격이 있다. 가령 자기 집단 내에서의 결혼과 직업과의 결합에 의해서 자기 집단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는 상하의 질서가 있다. 또한 각 자티는 불가촉민의 자티를 제외하고는 네가지 바르나 중 어느 하나에 속해 있다. 그 때문에 예전부너 바르나와 자티가 혼동되어 두 가지 모두가 카스트로 불려졌다. 이처럼 우리는 일반적으로 바르나 제도와 자티 제도를 구분 하지 않고 이 모두를 카스트 제도라고 총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바르나 제도와 자티 제도를 구별해서 쓰는 것이 좋다. 여기에서는 카스트라는 말은 자티의 의미로 사용했고 바르나에 대해서는 그 호칭을 따로 그대로 사용했다. 그리고 카스트 제도라고 할 경우, 그것은 바르나라는 커다란 틀과 그 틀 내외에 존재하는 다수의 자티 집단을 포함하는 제도 전체를 의미한다는 점을 밝힌다.
이와 같이 바르나 제도가 성립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추측을 가능케 한다.유목민이었던 아리아족이 농경민으로 정착하면서부터는 인도의 중심부로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최초 근거지 였던 인더스강 유역과 펀자브지방을 떠나 남동쪽으로 진출하여 마침내 힌두스탄 평원의 중앙부, 즉 현재의 델리 지방에 정착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갠지스 강을 향해 계속 전진하였고, 이어서 갠지스 강을 따라 남하하여 베나레스(바라나시)주변에 정착했다. 이 이동은 매우 서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갠지스 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정착한 아리아족의 사회는 점차 그 구조가 복잡해졌다. 사회적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왕이 종교, 군사, 정치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아리아족 사회에는 종교 의식이 복잡해짐에 따라 이를 맡을 전문적인 사제인 브라만 계급이 생겨나게 되었다. 종교의식을 주관하는 브라만은 처음에는 소박한 농업, 목축 생활민이 의지하는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러나 갠지스 강 유역에 정착한 기원전 1000년에서 500년 사이에는 베다와 더불어 제사에 필요한 제사 전문 서적인 [브라흐마나]도 편찬하였다. 이들 브라만 계급은 왕이 정치적 안정에 주력하는 한편 정복사업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베다에 근거를 둔 브라만교의 교리를 체계화하고 그 의식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왕권에 앞서는 소위 브라만 제일(지상)주의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브라만들은 리그베다에서 볼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종교의식을 바탕으로 매우 복잡한 제례를 만들어 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만일 제례를 어김없이 집행하지 않으면 큰 재해를 입는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제단의 벽돌 한 장이 조금이라도 비뚤어져 있든가, 산 제물로 바쳐진 산양이 틀린 장소에 놓여지기만 해도 리타(rta)라고 하는 우주의 질서가 무너져 이 세상에는 대혼란이 일어난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제례상의 정확성의 요구는 제단 제작기술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세밀하고도 해박한 지식을 발달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제의 지위를 높여준 일이었다. 브라만의 지위가 확고해지면서 우주적 질서인 리타는 제례가 바쳐지는 대상인 신들보다도 제례를 정확하게 집행하는 일에 더 크게 비중을 두게 되었다. 신들은 리타를 수호하는데 지나지 않고,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제례라고 믿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제례를 행할 수 있는 것은 사제뿐이었으므로, 그들은 우주 속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논리를 성립시켰다. 브라만 계급이 사회의 최상층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확보해 가면서 그 사회에는 내부적인 계급 분화가 일어났다. 바르나 제도를 만들고 유지케 한 것은 분명히 브라만이었다. [리그베다]의 말기에 속하는 푸루샤(原人)를 공물로 하여 제례의식을 행했을 때, 푸루샤의 각 부분으로부터 만물이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푸루샤의 입으로부터 브라만, 양팔로부터 크샤트리아, 두 넓적다리로부터 바이샤, 두 발로부터 수드라가 생겨났다고 한다. 이것은 계급 제도가 틀이 잡혀 간 당시의 아리아족의 사회 구조를 반영한 것이다. 이는 브라만이 신들과 동등한 위치의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신분 체계의 구조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처음부터 계급 체계에서 최고 지위를 확보하려고 하는 브라만들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이 브라만의 특수한 지위가 곧 인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브라만은 베다 성전을 연구하고, 신 앞에 희생을 바치고, 조상이나 정령 그리고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승려(사제)였다. 그들은 제사나 복잡한 의식을 어김없이 행하기 위해서는 베다에 정통해야 했으므로 브라만은 승려인 동시에 당시의 천문학, 역학, 수학의 연구자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신에 대한 제사를 맡은 성직자, 즉 브라만 계급을 중심으로 한 브라만교가 서서히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족간의 전투와 행정 조직의 발달에 따라 왕족을 비롯한 정치, 군사 지도층인 크샤트리아 계급이 형성되고, 농경의 발달과 도시의 성장에 따라 바이샤 계급이 형성되었으며, 이들 계급의 피정복민이며 가장 천한 노예 계급인 수드라 계급과 함께 신분 제도인 바르나 제도를 형성 하였다.
이와 같이 바르나 제도의 성립은 아리아족 사회의 내부의 발전을 나타내는 계급의 분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제도는 고대 인도 사회의 사회와 문화를 해명하는 주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제도는 브라만 계급이 자기의 특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나 다름없다. 동시에 역사적으로는 이 시대에 여러 군소 부족이 중앙 집권화된 왕권으로 집결됐으며, 상비군으로 직업 군인이 생겨 났으며, 농민과 서민 계급은 자기의 생업에만 전념하고, 노동력은 노예 계급이 전담하는 사회적 분업이 확립된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바르나 제도는 복잡한 사회조직의 질서와 지배 계급의 특권과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일정한 형식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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