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漢武帝). 이 사람, 야심이 있었던 황제지요. 아버지 경제(景帝), 할아버지 문제(文帝)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북방 기마민족의 후환을 제거하려고 했던 그런 웅지를 품었던 사람입니다.
한무제란 인간은 그 출신배경부터가 이채로와요. 아버지는 경제(景帝), 그의 어머니 왕씨였는데 이혼녀였습니다. 왕씨가 경제(景帝)의 부인이 되기 전에 이미 김씨에게 시잡가서 딸을 하나 두고 있었지요. 왕씨가 김씨 집안에 시집가 이미 딸을 하나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장차 크게 귀하신 몸이 될 팔자라는 점쟁이의 말에 친정 어머니는 김씨 집안에 있던 딸을 꺼내 궁중에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과연 그 점쟁이의 말이 용했는지 경제(景帝)는 왕씨 부인을 총애하여 정실부인으로 삼았고 그 사이에서 한무제가 탄생한 것입니다.
[한무제 유철(劉徹) 상. 재위 50년, 장수만세! 큰사진]
한무제. 이 사람 재미있는 사람이예요. 어머니에게 딸이 하나 있었다고 했지요? 자기에게는 이복 누나가 되겠네요. 황제가 된 뒤, 수소문 끝에 이복 누나의 거처를 확인하고 직접 찾아가 누나를 궁중으로 맞이했습니다. 최근 필리핀 대통령이 과거에 바람 피워 낳았던 애를 숨기다가 매스컴이 난리치자 마지못해 인정했던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요? 한무제가 대범한 인물인지 아니면 그 당시의 풍속이 비교적 관대했는지는 단언하기 힘들지만 아무래도 그 당시 풍습이 비교적 자유롭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시집갔던 딸내미를 꺼내 궁중에 집어넣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한무제를 중심으로 한나라를 비롯하여 역대 중국왕조의 특징, 중앙집권을 염두에 두며 중국사를 산책하기로 하겠습니다.
■ 한무제에 대해
중국 역사를 펴보면 「진황한무(秦皇漢武)」라 하여 진시황제(秦始皇帝)와 한무제(漢武帝)를 동시에 거론하는 예가 많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도 되겠다. 우선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다는 점에서 서로 통하고 무엇보다 이 두 황제는 일을 벌이길 좋아했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일을 벌이길 좋아했다는 것은 자신의 임기 내에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큰 일을 많이 저질렀다는 뜻이다.
한무제(漢武帝)에 관련된 기록을 읽어보면 그가 걸출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을 것같다. 그가 생존시에 벌려놓은 사업의 공과(功過)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평가해야 하나 무엇보다도 그가 일구어놓은 국면을 후세 황제들이 이어가지 못했다는 점을 우선적으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한무제란 인간은 그 출신배경부터가 이채롭다. 그의 어머니 왕씨는 이혼녀였으며, 한무제의 아버지 경제(景帝)의 부인이 되기 전에 이미 결혼을 하여 딸을 하나 두고 있었다. 왕씨가 김씨 집안에 시집가 이미 딸을 하나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장차 크게 귀하신 몸이 될 팔자라는 점쟁이의 말에 한무제의 외할머니는 김씨 집안에 있던 딸을 꺼내 궁중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과연 그 점쟁이의 말이 용했는지 경제(景帝)는 왕씨 부인을 총애하여 정실부인으로 삼았고 그 사이에서 한무제가 탄생한 것이다. 한무제가 기원전 156년 태어나 기원전 141년에 황제에 올랐으므로 그가 황제가 된 나이는 15세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무려 54년 동안 권좌에 있었으므로 그후 2천년 중국역사에서 이처럼 장수만세를 누린 임금도 없었다. 한무제의 장수만세 기록은 18세기 청나라 건륭(乾隆) 황제에 의해 비로소 깨지게 된다.
[아래 사진/장건이 서역에 특사로 파견될 때 한무제가 송별연을 해주는 모습. 돈황 323호 벽화. 큰 사진]
한무제에 관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한무제 유철(劉徹)은 담력이 있었던 사람으로 생각된다. 그는 시간만 나면 평상복으로 변장하고 시정을 시찰하곤 했으며 그 와중에 생명을 잃을 뻔 한적도 있었다. 담력이 있는 사람은 야심 또한 만만하다. 그는 서남방 이민족을 정복하기 위해 장안(長安) 부근에 엄청난 크기의 곤명지(昆明池)를 파고 해군의 작전연습을 시켰다.
게다가 그의 황후 위자부(衛子夫)는 기생출신이었고 총애하던 애첩 이부인(李夫人)은 창녀(娼女)였다. 그렇다고 해서 한무제가 막가는 불한당도 아니었던 것이 그의 궁중에는 그 당시 최고학자였던 동중서(董仲舒)도 있었고 희대의 코메디언 동방삭(東方朔)도 있었으며 더군다나 풍류재사 사마상여(司馬相如) 역시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부인(李夫人)이 죽자 그는 그녀를 애도하는 부(賦/그 당시에 가장 유행하던 문학 장르의 하나)를 지었는데 내용이 매우 애절하고 문학성에 있어서도 만만치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한무제란 인간은 감성적으로도 매우 세련된 사람이었다.
[흉노화친(匈奴和親) 와당. 전쟁과 화친이 반복되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내몽고 포두소만 출토. 큰 사진]
한무제는 장병을 이끌고 전선에서 작전을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중요한 전략에는 자신의 계획대로 밀고 나갔으며 또한 지휘관을 선정하는데도 능력있는 자를 알아보는 편이었다. 위청(衛靑)은 위자부(衛子夫)의 남동생이며 곽거병은 위청(衛靑)의 조카로서 모두 외가 출신으로서 불세출의 군공(軍功)을 세웠던 장수였다. 곽거병과 곽광은 배 다른 형제로서 한무제 이후 한왕조의 유지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한가지 뼈아픈 실책이랄 것 같으면 이부인(李夫人)의 오빠 이광리(李廣利)를 이사장군(貳師將軍)에 임명하여 흉노를 공격했으나 중도에 패해 흉노에게 투항한 일이다.
한무제가 다소 격의가 없었다는 것은 신하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대장군 위청을 화장실에서 접견하는가 하면 평소 잔치 자리에서나 입는 평상복으로 문무백관의 알현을 받기도 했다. 요즘말로 하면 츄리닝을 입고 점잖은 결혼식에 나타나는 식이다.
비록 그렇긴 하나 한무제(漢武帝)에게도 물론 독재자의 면모는 어김없이 드러난다. 각 지역을 순시할 때 해당 지역의 태수(太守)가 제대로 황제를 접대하지 못하거나 혹은 경내 설비가 문제가 있을 때 그곳의 수장들은 자신에게 내릴 형벌을 미리 짐작하고 친족에게 연루될 것을 두려워해 서둘러 자살하는 예가 즐비했다. 더우기 한무제 말년에는 공포정치가 횡행하여 승상(丞相/국무총리)과 어사대부(御史大夫/비서실장) 사이의 알력으로 밀리는 쪽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예도 비일비재하였다.
한무제 본인은 노년에 미신에 흠뻑 빠져 장생불사를 희구했고 그로 인해 웃지못할 촌극도 양산하게 되었으며 사람을 저주하는 무당의 사술(邪術)도 믿어 결국 부자(父子) 사이에 군사를 일으키는 인생 최대의 비극을 맛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직접 아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사태의 발전은 아들을 죽인 결과가 되었으며 훗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들을 그리는 사자궁(思子宮)을 지어 회한의 여생을 보내게 된다.
황태자가 죽은지 4년, 한무제는 자신의 생명이 곧 마감할 것을 짐작하고는 고작 8세 밖에 되지 않은 유불릉(劉弗陵)을 황태자로 삼았는 바, 그가 곧 소제(昭帝)다. 한무제는 소제(昭帝)의 친모 구익부인을 살해했는데 그 이유는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가 어지러운 것은 어린 임금에 어머니가 나서기 때문」이라 했다. 결국 곽광에게 소제(昭帝)를 맡기며 눈을 감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어찌하여 그토록 영명하고 야심만만했던 한무제가 말년에 미신에 빠져들고 후계자를 정함에 있어서 이토록 사리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였을까? 심지어 부자지간에 군대를 일으켜 무고한 군민(君民)이 죽어가게 되었는가? 이것은 단지 한무제 일개인의 잘못이라기 보다도 한무제가 건립한 서한제국의 권력구조 때문이었다.♣
■ 권력구조
한무제는 할아버지 문제(文帝) 아버지 경제(景帝)에 이어 중앙집권 정책을 계속적으로 추진했다. 기원전 127년 제후들에게 영토를 떼어 자제들에게 분배하라는명령을 내리면서 그 구체적인 실행 내용을 황제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기원전 122년 제후의 영토를 삭감하여 국고에 귀속시키자 이에 불만을 품은 회남왕(淮南王)과 강도왕(江都王)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수많은 인재들이 죽음을 당했다. 기원전 112년 제후들이 황실(皇室)에 바치는 술 색깔 및 용량이 규정에 못미친다 하여 관직을 박탈한 케이스가 106인에 달하였다. 이로써 유방(劉邦) 이후로 제후에 봉해졌던 공신들이나 왕실 자제들은 거의 모두 평민으로 전락되고 거의 완전한 중앙집권의 군현제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한무제는 상홍양(桑弘羊), 동곽함양(東郭咸陽), 공근(孔僅) 등 상인 출신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여 국가의 재정을 총괄토록 했다. 이들 상인 그룹들을 발탁했다고 하여 상업 조직의 효율성으로 국정을 관리했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그들은 경제 조직과 상인 자본으로 정부의 경직된 인사관리와 작업 능률을 개선한 것도 아니요 정부의 후광으로 상업 발전을 도모하여 국고를 충실히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들이 했던 일은 새로운 화폐를 계속 발행하거나 농산물의 비축 판매를 통해 임시방편으로 재원을 마련했으며 그 재원은 크게 허덕이던 군사비에 조달하였던 것이다.
[한나라 때의 토기 인형. 강인한 기마민족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마병을 양성해야 했다. 한혈마(汗血馬/땀이 피처럼 붉은 천리마)를 얻기 위해 서역으로 특사를 수차례 파견했던 한무제의 고심을 보는 듯 하다. 큰 사진]
이렇게 본다면 그 당시 전국을 통털어 대략 5-6천만 명에 달하던 백성을 황제 한 사람이 통치한 셈이었다. 유능하고도 효율적인 관료계급이 백성과 황제 사이에서 중간 계급으로서 받쳐주지 못하였다. 각 지방의 지역적 특성에 맞는 경제 활성화 정책을 시행할 만한 관료층이 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각 지방의 수령이라 할 태수(太守)는 지방 자치의 수장으로서 그곳의 백성들이 뽑았던 것이 아니라 이미 말했듯 황제가 임명하여 파견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해당 지역에서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에 귀감이 될만한 인물을 선발하는 일 따위도 황제의 조서(詔書) 한통으로 시행했던 것이므로 그들은 황제의 분신이나 대리인에 불과하였던 셈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 순환되면서 황제의 권위는 점점 공고해지고 팽창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 중국 전통의 군주전체에 있어서 최대 약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도가 일단 정착되게 되면 황제 혼자 아무리 위에서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한다 해도 관료계급은 타성에 젖어 자발적으로 자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굳이 나서서 일을 만들어서 손해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가만히 주어진 일만 하면 쫓겨날 리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부 구조와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한무제가 취한 방법은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전국민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운동을 전개하여 조직의 동맥경화를 막는 일이었다. 한무제의 이러한 방법을 일컬어 일부 학자들은 「철권통치(鐵拳統治)」라 부르기도 하는데 한무제 자신은 스스로 대장군 위청(衛靑)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 「하루라도 군대를 일으켜 사방으로 정벌을 나서지 않으면 천하가 불안하다.」 이말을 현대식 용어로 바꿔서 말하면 국민의 시선을 밖으로 돌린다는 뜻이다. 클린턴이 지퍼게이트로 국내에서 곤욕을 치룰 때 시의적절하지 못하게 이라크 공습을 감행했던 것도 역시 국민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려는 행위가 아니었나 의심받듯 말이다.
그건 우리 나라의 경우도 국내가 어수선할 때에 돌연 휴전선에서 총격전이 일어난다거나 혹은 연안에 무장공비가 출몰하는 등 이상하리만치 시기적절하게 사건이 터지는 것과 유사하다. 한무제는 대대적인 군사행동을 통해 국내의 동맥경화 현상으로 인한 불안요소를 해결하려 했다.그러나 대외적인 군사행동은 그 득실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한무제(漢武帝)의 무공(武功)은 실로 찬란하다. 남쪽의 월(越)지역을 평정했고 조선(朝鮮)을 정복했으며 장건(張騫)을 파견하여 서역(西域)과 교통로를 개척하며 북방 흉노족을 배후에서 위협했던 일 등이 그러하다.
[신강성 위구르 자치구에 남아있는 한나라 때의 봉수대. 큰사진]
특히나 재위 기간 중 8차례에 이르는 대대적인 흉노족 정벌은 국가의 모든 재원과 인력을 동원했던 엄청난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투입했건만 유목민족 흉노를 멸망시키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흉노족들은 강인한 기질의 기마민족으로 기동성이 극히 우수했다. 이들은 평시에는 유목을 하다가도 일시에 말을 타고 전투대형을 이루었으므로 굳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할 필요성이 없었다. 치고 빠지는 이들의 전략에 거의 당하기만 했던 것이다. 기원전 119년의 흉노 정벌이 가장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14만필의 전마(戰馬)가 국경선을 넘었지만 정작 개선한 숫자는 고작 3만에 불과했으니 비록 전과를 올렸다고 해도 실은 참중한 대가를 치룬 터였다. 한무제 말년에 이르자 계속되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낀 부자들은 돈을 내고 합법적으로 병역에서 빠져나오는 일이 많아져 하급 군관의 자리마저도 못채울 지경이 되고 만다.
[장신궁등(長信宮燈). 1968년 하북성 만성현에서 출토됨. 중산정왕 유승의 왕비 묘에서 나왔는데 원래 두태후가 거주하던 장신궁에 있던 물품이므로 장신궁등이라 이름 붙임. 시녀가 등을 들고 있는 모양으로 금으로 도금되어 있어 당시 도금 기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큰 사진]
한무제의 통치력은 대내적으로는 중앙집권, 대외적으로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길거리에 떨어진 물건을 집어가지 않았다는 전설적인 태평성대는 사실상 백성들의 도덕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단 적발되면 적게는 기백명 많으면 수천명이 연루되어 처형되는 고압 공포정치의 소산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포 정치와 전쟁이 근 반세기 지속되면서 황제의 권위와 조직의 취약점이 점차 폭로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도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일어난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고급관리들도 자신의 일신상의 안위(安危)를 돌보기에 급급한 나머지 목숨을 걸고 황제에게 옳은 소리를 올리지 못했다. 일생을 너무도 고달프게 보내는 한무제로서는 경직된 관료체제가 국정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탓에 말년에 이르러 후계자 문제가 닥치자 오해로 인해 자신의 아들을 죽이게 되고 여생을 회한 속에 보내는 그러한 가정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는 외형상 성숙한 체계를 갖춘 듯이 보이지만 그에 상응하는 경제 및 법률 제도가 받쳐주지 못했기 때문에 야심만만하고 영명하였던 한무제는 비극적인 최후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숙명(宿命)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한무제가 황제에 등극한 3년되던 해에 황하가 범람하여 기근이 심하게 들었고 사람들이 서로 자식을 바꿔 삶아먹는 사건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재해가 중국을 가만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황제가 자리에 있었어도 피하지 못할 숙명적인 지리조건이었다. 그러므로 단합된 역량과 철권통치로써 일사불란하게 천재지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통일된 정부와 강력한 리더쉽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점은 이미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 게다가 수시로 국경선을 넘어 식량을 약탈해가는 북방 기마민족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강력한 리더쉽과 통일된 국가는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역사(歷史)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고 이렇듯 자연환경과 지리적 요소 역시 극히 중요한 변수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역사상 인물 중의 인물이라는 진시황제(秦始皇帝)와 한무제(漢 武帝) 역시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정치적체제>>
정치적으로는 외형상 성숙한 체계를 갖춘 듯이 보이지만 그에 상응하는 경제 및 법률 제도가 받쳐주지 못했기 때문에 야심만만하고 영명하였던 한무제는 비극적인 최후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숙명(宿命)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한무제가 황제에 등극한 3년되던 해에 황하가 범람하여 기근이 심하게 들었고 사람들이 서로 자식을 바꿔 삶아먹는 사건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재해가 중국을 가만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황제가 자리에 있었어도 피하지 못할 숙명적인 지리조건이었다.
[한무제 유철의 능묘-섬서성 흥평 무릉(茂陵). 큰 사진]
그러므로 단합된 역량과 철권통치로써 일사불란하게 천재지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통일된 정부와 강력한 리더쉽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점은 이미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 게다가 수시로 국경선을 넘어 식량을 약탈해가는 북방 기마민족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강력한 리더쉽과 통일된 국가는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역사(歷史)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고 이렇듯 자연환경과 지리적 요소 역시 극히 중요한 변수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역사상 인물 중의 인물이라는 진시황제(秦始皇帝)와 한무제(漢武帝) 역시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