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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5권 공양왕2년(恭讓王二)
● 봄 정월에 조사(詔使)에게 수창군에서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였는데, 밀직사 이염(李恬)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이보다 앞서 팔관회(八關會)에서 중방(重房)에서 밀직사에 예를 하지 않아 마침내 틈이 생겨 서로 글을 올려 다투었으나, 왕이 그 글을 모두 궁중에 두고 내려보내지 않으니, 이염이 깊이 원한을 품었다. 이때에 와서 왕이 연회를 파하고 내전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이염이 술에 취한김에 왕의 앞에 꿇어앉아 왕의 옷자락을 당기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정창군(定昌君)으로 있을 때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라 일이 장차 날로 그릇되어 가는데 어찌하여 아이들의 말만 믿고 대신의 글을 경시하는 것입니까." 하며, 드디어 모자를 벗어 땅에 던지면서, “왕에게 이 모자를 돌려 드립니다." 하니, 왕이 더욱 노하여 모자를 발로 차서 부수고 성난 목소리로, “이염이 주정을 부리기를 이럴수 있느냐." 하면서, 드디어 옥에 가두었다. 이염이 순군 만호 유만수(柳曼殊)에게 이르기를, “네가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으면서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았다는 평판을 받았으므로 대성에서 두 번이나 너를 논핵하였는데, 어찌 나를 죄줄수 있겠느냐, 내가 거리낌 없이 간한 것은 죄가 아니며, 또한 주정을 부린 것도 아니다." 하니, 만수(曼殊)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숙였다. 조금 후에 만호 배극렴(裵克廉)등이 오니 이염이 그를 맞아 말하기를, “만수가 거의 나를 죽일 뻔하였는데, 지금 공들을 보니 내가 살게 되었다." 하였다. 드디어 국문하니 이염이 여전히 말하기를, “왕에게 간하는 예는 마땅히 이와같이 하는 것이다." 하였다. 극렴 등이 왕에게 아뢰기를, “이염이 실상 주정을 부렸던 것입니다." 하니, 왕이 노하여 천호 김귀련(金龜聯)과 제강(提控) 정지탁(鄭之度)을 가두고 극렴,만수 등의 만호직을 파면하고, 이어서 찬성사 조준(趙浚),판개성부사 안익(安翊), 예문관 대제학 유구(柳玽), 지문하 김사형(金士衡)을 이에 대신하게 하고 성헌에 명하여 순군부와 함께 같이 국문하게 하였다.
● 왕안덕(王安德),우인열(禹仁烈),박위(朴葳)를 사면하여 편리한 대로 거주하게 하고, 박가흥(朴可興),지용기(池湧奇)에게는 외방에서 편리한 대로 있게 하였다.
● 간관이 소를 올려, 이염의 불경한 죄를 논핵하고,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니, 우리 태조가 아뢰기를, “이염이 실상 죄가 있지마는 그러나 그 말이 광망하고 곧은 데서 나왔으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왕이 이염을 곤장 1백대를 치게 하고, 합포(合浦)로 귀양보냈다.
● 사헌부에서 유만수(柳曼殊)가 어머니를 모셔 봉양하지 않았으며, 여러 아우들의 전지를 빼앗은 일을 논핵하여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다시 논핵하니,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의 관직만 삭탈하였다.
● 삭방도에 진명창(鎭溟倉)을 새로 설치하였다.
● 유만수를 판개성부사로, 권중화(權仲和)를 문하찬성사로, 조준(趙浚)을 삼사 좌사로, 안익(安翊)을 문하평리로, 박원(朴遠)을 밀직사로, 이숭인(李崇仁)을 지밀직사사로, 김수익(金受益)을 동지밀직사사로 삼았다.
● 처음으로 서적원(書籍院)을 설치하여 주자(鑄字)와 서적의 인쇄를 관장하게 하였다.
● 2월에 인물추변도감(人物推辨都監)에서 노비결송법(奴婢決訟法)을 정하였다.
● 해온정(解慍亭)을 지었다.
● 영복군(永福君) 격(鬲)과 찬성사 권중화를 남경에 보내어 은혜를 사례하였다.
● 예조에서 아뢰기를, “조회 때마다 예를 마치면 전하께서 전(殿)에 앉아 계신데도 백관이 먼저 나가니 예가 아닙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예를 마치고 전하께서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가시면 군신들은 몸을 굽히고 공손히 보내고 난 후에 차례로 나가도록 할 것이며, 또 전하가 보평청(報平廳)에 나가 계시고 형관이 친히 아뢰어 옥사를 결단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병자일에 혜성이 나타나서 하늘에 뻗쳐 있었다.
● 올량합(兀良哈)과 알도리(斡都里)가 와서 조회하는데 서로 윗자리를 다투었다. 알도리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온 것은 윗자리를 다투려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 시중 윤관(尹瓘)이 우리 땅을 평정하고, 비(碑)를 세워, '고려의 땅[高麗地境]이다.'라고 썼습니다. 지금 경내의 인민이 모든 군사(軍事.관직)의 위신을 사모하여 왔을 뿐입니다." 하며, 드디어 서로 다투지 않았다. 태조가 올량합과 알도리를 자기 집에서 대접하였으니, 그들이 성심으로 봉종하였기 때문이다. 알도리는 곧 동여진이다.
● 왜적이 경상도 구라도(仇羅島)에 침범하니, 구라도 만호 이흥인(李興仁)이 이를 쳐서 깨뜨리고 전함을 빼앗아 바쳤다. 쌀 20석을 내려 주었다.
● 3월에 통사(通事) 이현(李玄)이 남경으로부터 돌아와서 세자가 돌아옴을 보고하니, 왕이 기뻐하여 물품을 많이 내려 주었다. 우리 태조가 세자를 황주(黃州)까지 나가서 맞이하고 드디어 해주(海州)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였다. 왕이 연달아 중사(中使 환관(宦官))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는데, 정몽주만이 이성계가 낙상한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
● 알도리와 올량합 등 여러 추장에게 모두 만호,천호,백호의 관직을 차등 있게 주고 의복과 마필을 내려 주었다. 또 여러 부락에 방을 써 붙여 불러서 위로하였다.
● 경상도의 수군 만호 차준(車俊)이 왜적의 배 1척을 빼앗아 바치니, 왕이 비단을 내려 주었다.
● 을사일에 왕세자가 남경에서 돌아오니, 도당에서는 금교(金郊)에서 맞이하고, 백관은 반열을 지어 선의문(宣義門) 밖에서 맞이하였다. 황제가 특별히 은총이 두터운 대우를 하여 세자를 공후(公侯)의 다음에 서열시키고,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어 준 것이 모두 5번이나 되었다. 또 천관(千官)에게 명하여 날마다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게 하고, 황금 2정(錠),백금 10정, 옷의 겉감과 안감 백 필을 내려 주고, 시종한 관원에게도 은과 비단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 황제가 그전 원 나라 양왕(梁王)의 자손 애안 첩목아(愛顔帖木兒) 등을 탐라에 두었다.
● 여름 4월에 간관 김진양(金震陽),이확(李擴),이내(李來),이감(李敢),권홍(權弘),유기(柳沂) 등이 삼사 좌사 조준, 전 정당문학 정도전, 전 밀직 부사 남은(南誾), 전 판서 윤소종(尹紹宗), 전 판사 남재(南在), 청주 목사 조박(趙璞) 등을 논핵하기를,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으로서 몸을 일으켜 당사(堂司)에 자리를 차지하였으므로, 미천한 근본을 덮고자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홀로 일을 할수 없으므로 참소로 죄를 얽어 만들어 많은 사람을 연좌시켰습니다, 또 조준은 한두 사람의 재상 사이에서 우연히 원수와 틈을 일으켜 도전과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변란을 선동하고, 권세를 희롱하여 여러 사람을 꾀고 협박하니, 이에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염치없는 무리와 그 뜻에 영합하여 일을 일으키려는 무리들이 호응하여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남은,남재 등은 난을 선동하는 보좌가 되고 운소종,조박 등은 말을 꾸며 내는 앞잡이가 되어, 서로 부르고 화답하여 죄의 그물을 널리 펼쳐서 형벌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형벌을 쓰고, 본래 죄가 없는 일에서 죄를 구하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두려워하여 모두 원망하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천지의 만물을 낳고 낳는 화기를 상하게 하고, 둘째는 전하의 상하기를 꺼리는 덕을 손상시켰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조준이 공신이므로 비록 죄가 있더라도 마땅히 용서해야 된다.' 하신다면, 신등은 또 적이 듣건대 지난해 무진년에 개국백(開國伯.이성계)이 전하를 세우려는 마음은 이미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키던 날에 있었는데 조준은 군중에 있지 않았으니, 그가 그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음이 또한 명백합니다. 기사년 겨울에 와서 개국백이 전하를 세우려는 계책이 이미 정하여졌는데, 조준은 이를 물리치고 다른 사람을 말하였으나, 개국백이 이를 허락하지 않은 덕택으로 전하께서 왕위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를 가지고 논한다면 전에는 처음 의논하는 날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후에는 이미 결정된 계책을 저지시키고자 하였으니, 이를 전하의 공신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조준이 만약 '내가 일찍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한다면, 왕의 곁에 있는 여러 재상이 이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높지마는 이 낮은 곳의 말을 두려울 만큼 환하게 들었을 것이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조준과 같은 자는 그 말이 저와 같으니 그 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신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로 크게 불충한 신하가 되는 것입니다.
권세있는 연줄을 타서 요행을 구하여 도리어 공신의 이름을 얻어 공신의 반렬에 참가하여 화상을 그려 빛나게 전한 것이 큰 공신과 다름이 없으며, 품계를 뛰어 관직을 받은 것이 참 공신보다도 십배나 되니, 영화가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일찍이 허물을 뉘우치고 선으로 옮겨 죄를 가릴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몰래 보좌가 되고 앞잡이가 되는 무리들과 함께 모여서 무시로 모의하니, 신등은 그들이 반드시 도모함을 이루지 못한 원한을 품고 불충한 의논을 만들어 낼까 매우 두려우니, 일찍 이를 도모하여 그 세력이 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등이 또 듣건대, 조준이 전하의 앞에서는 거짓으로 울고 슬퍼하여 겉으로는 고치고 뉘우치는 형상을 보이고, 속으로는 죄를 용서받을 계책을 부리니, 이것은 곧 거짓으로 뉘우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천성이 정직하여 사실로 인정하시니 신은 그것을 몹시 한 합니다. 조준이 간사한 계책을 한창 부릴 처음에 하늘이 그 마음을 달래어 드디어 그전의 그른 것을 깨닫고 뉘우쳤더라면 이와 같은 것은 그 뉘우침이 진실로 참된 것이겠지마는, 지금에 와서는 그 악한 짓을 같이하고 서로 주창하고 화답한 무리들이 거의 기세가 꺾였으나, 여러 사람의 노여움과 의심이 극도에 달하였으니, 제가 어찌 이와 같이 않고서 그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마지못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니 거짓으로 뉘우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훗날에 다행이 다시 기회를 타서 세력을 얻게 된다면 그들이 변고를 일으킴이 전보다 심할 것은 필연적이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이들을 믿지 말고 일찍 도모함이 옳을 것입니다.
또 신등이 듣건대, 남은(南誾)이 일찍이 전하에게 아뢰면서, '전하께서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도 겉으로는 인의를 베풉니다.' 하였다 하오니, 이 말이 웬말입니까. 더구나 남은은 국가에 별로 특수한 공도 없이 갑자기 재상에 올랐습니다. 전하의 은혜가 컸는데도 이에 조준과 정도전의 마음에 영합하는 것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찍이 감사하게 여기고 만족한 줄을 아는 마음이 없고, 감히 전하를 경멸하고 모욕하는 불경한 말을 내게 되니, 왕의 뜻을 격발시켜 정도전에게 붙어서 그 욕심을 부리려는 것입니다. 그 간악하게 마음을 쓰는 것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두려워할 만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 죄가 같으니 전하께서 만약 고식적으로 하고 이를 결단하지 않으시면 하늘이 노하고 백성이 원망할 뿐만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맡은 관사로 하여금 조준과 남은,남재,윤소종,조박 등의 직첩과 공신의 녹권을 회수하고, 그 죄를 국문하여 형벌을 밝게 다스리고, 도전은 귀양간 곳에서 처단하여 뒷 사람을 경계할 것입니다." 하였다.
소가 올라가서 지신사 이첨(李詹)이 왕에게 아뢰니, 왕이 아룀에 의거하여 조준은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남은,윤소종,남재,조박의 관직을 삭탈하고, 또한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도전 또한 유배 중에 있었으나 이첨이 잊고 기록하지 않았다. 진양 등이 아뢴 대로 한다는 왕의 명령에 의거하여 사람을 봉화(奉化)로 보내어 도전을 잡아서 보주(甫州)에 가두었다.
● 사헌부에서 판전교시사 오사충(吳思忠)을 탄핵하여, “죄가 윤소종과 같으니 함께 문초하여 다스리기를 바랍니다." 하므로, 명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였다.
문하성의 낭사(郞舍)에서 또 소를 올려 아뢰기를. "조준 등은 정도전과 그 죄가 같은데, 어제 글을 올려 베기를 청하였으나 오직 도전만 특별히 승낙을 받았을 뿐이며, 나머지 사람은 다만 외방으로 폄출(貶黜)되기만 했으니, 죄는 같은데 벌은 다릅니다. 청하건대, 조준 등을 모두 극형에 처하소서." 하였다. 왕이 몹시 놀라며 이르기를, “내가 처음에 도전을 베라는 말이 없었다." 하면서, 양광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먼저 남은 등 여러 사람을 국문하여 그 진술한 말이 조준과 정도전에게 관련이 있으면 그 뒤에 도전을 아울러 국문하도록 하였다.
● 우리 태조가 해주로부터 벽란도(碧瀾渡)에 이르러 유숙하려 하니, 태종(太宗)이 달려가서 고하기를,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안을 해칠 것입니다." 하였으나, 태조는 답하지 않았다. 또, “이곳에 유숙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태조는 허락하지 않다가, 굳이 청한 뒤에야 병든 몸을 억지로 참고 드디어 견여(肩輿)를 타고 밤에 사저로 돌아왔다.
● 성헌(省憲)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또 조준,정도전 등을 목 베기를 청하였다. 이때 몽주가 우리 태조의 위엄과 덕이 날로 성하여 조정과 민간에서 마음을 그리로 돌리는 것을 꺼렸는데 조준,정도전,남은 등이 비로소 태조를 추대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는 태조의 병이 위독한 것을 이용하여 도모하고자 하였다. 대간을 사주하여 조준,정도전,남은과 평소에 태조에게 마음을 돌린 자 5, 6명을 탄핵하여 이를 죽이고 태조에게까지 미치게 하려 하였다. 태종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형세가 이미 위급합니다. 장차 어찌하려 하십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있으니, 마땅히 천명을 따라서 받아들일 뿐이다." 하였다. 태종은 태조의 아우 화(和),사위인 이제(李濟) 등과 함께 휘하의 군사에게 의논하기를, “이씨가 왕실에 충성한 것은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인데, 이제 몽주에게 무함되어 악평을 받게 되었으니, 뒷세상에서 누가 능히 이를 분별하겠는가." 하면서, 이에 몽주를 제거할 것을 도모하였다. 태조의 형 원계(元桂)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그 계획을 몽주에게 누설하니, 몽주가 태조의 사저에 나아가서 사태를 살피고자 하였는데, 태조는 그를 대하기를 전과 같이하였다. 태종이,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고 몽주가 돌아감에 미쳐서 곧 조영규(趙英珪) 등 4,5명을 보내어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쳐서 죽였다.
태종이 또 화(和)등과 의논하여 공정왕(恭靖王.定宗)을 보내어 아뢰기를, “만약 몽주의 당을 신문하지 않으면 신등을 죄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대간을 순군옥에 가두고, 또 이르기를, “외방으로 귀양보냄이 옳을 것이며, 국문할 필요는 없다." 하다가, 조금 후에 판삼사사 배극렴과 문하평리 김주(金湊)에게 명하여 순군 제조관 김사형(金士衡) 등과 함께 국문하게 하였다. 좌상시 김진양(金震陽)이 말하기를, “몽주,이색,우현보가 이숭인,이종학(李種學),조호(趙瑚)를 보내어 신등에게 말하기를, '이 판문하(李判門下.이성계)가 공을 믿고 권력을 마음대로 하는데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를 보좌하는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야 도모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숭인,이종학,조호를 순군옥에 가두었다. 조금 후에 진양과 우상시 이확(李擴),우간의 이래(李來),좌헌납 이감(李敢),우헌납 권홍(權弘),집의 정희(鄭熙),장령 김묘(金畝),서견(徐甄), 지평 이작(李作),이신(李申)과 이숭인,이종학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율문(律文)을 대조한 법관이 말하기를, “진양 등은 죄가 참수형에 해당합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살인을 즐기지 않은 지가 오래이고, 진양 등은 몽주의 사주를 받았을 뿐이니, 어찌 함부로 형벌을 쓰겠는가." 하니, 관이, “그러면 엄하게 곤장을 치소서."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이미 그들을 용서하였으니 어찌 곤장을 칠 필요가 있느냐." 하였다. 진양 등이 이로 말미암아 면하게 되었다. 대사헌 강회백(姜淮伯)은 회계(淮季)의 형인 관계로써 연좌되지 않았으며, 우정언 유기(柳沂)도 또한 병으로써 면하였다.
● 조준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 백극렴을 수문하시중으로, 조준을 찬성사로, 설장수(偰長壽)를 판삼사사로, 이원굉(李元紘)을 삼사 좌사로, 김사형(金士衡)을 삼사 우사로 삼고, 이두란(李豆蘭)을 지문하부사로, 우리 공정왕(恭靖王)을 판밀직사사로, 조규(趙珪)를 밀직부사로, 윤사덕(尹師德)을 지밀직사사로 삼고, 민개(閔開)는 대사헌을 겸하게 하였다.
● 몽주의 머리를 베어 거리에 달고 방문을 붙였는데, 그 방문에, “없는 일을 꾸며서 대간을 꾀어 대신을 모해하고 국가를 요란시켰다." 하였다. 몽주는 본관이 영일현이다. 사람됨이 뛰어나게 호탕하고 고매하며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다. 젊을 때에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며, 성리(性理)의 학문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깊이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강설이 높이 드러나 다른 사람의 의사보다 뛰어났다. 우리 태조가 평소에 그 재기(才器)를 존중하여 정벌할 때마다 반드시 그와 함께 같이 갔으며, 여러 번 천거하여 함께 올라 재상이 되었다. 이때 국가에 사고가 많아 기무가 번거롭고 많았는데, 몽주는 큰 일을 처리하고 큰 의심을 결단하는 데 말소리와 얼굴 빛을 움직이지도 않고 이것저것 바로바로 처리하되 모두 그 적당함을 얻어 베풀어 놓은 것이 많았으니, 당시에 왕천하(王天下)를 보좌할 만한 재주라고 일컬어졌다.
● 지신사 이첨(李詹)을 결성(結城)으로 귀양보내고, 우부대언 이사영(李士穎)을 남원(南原)으로 귀양보냈다.
● 문하시중 심덕부와 수시중 배극렴이 여러 도의 관찰사를 폐지하고 안렴사를 회복할 것이며, 절제사와 경력 도사를 폐지하고 장무녹사(掌務錄事)를 회복하기를 청하였다. 또 새로 정한 감무, 여러 역승, 여러 도(道)의 유학 교수, 관자섬저화고(官資贍楮貨庫), 인물추쇄도감, 동서체운소(東西遞運所), 수참(水站)과 호구성적(戶口成籍), 우마낙인(牛馬烙印), 주군향사이장(州郡鄕社里長) 등의 법을 폐지하고, 또 각 관사로 하여금 모든 결재를 받을 일들은 모두 도당으로 바로 보고하고 6조에 예속시키지 말도록 하였다.
● 이색을 한주(韓州.충남 서천)로 내쫓았다.
● 우리 태조의 휘하 군관이 소를 올려 정몽주의 가산을 적몰하고, 아울러 그 당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이숭인,조호,이종학,이종선,김진양,이확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 심덕부를 판문하부사로, 우리 태조를 문하시중으로, 이원굉(李元紘)을 정당문학으로, 정희계(鄭熙啓)를 판개성부사로, 최을의(崔乙義)를 밀직사로, 이빈(李彬),장사길(長思吉),김인찬(金仁贊)을 동지밀직사사로, 우리 태종(太宗)을 밀직제학으로 삼았다.
● 군관의 3년상을 없앴다.
● 5월에 우리 태조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 김권(金綣)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태조가 또 글을 올려 사직했다.
● 급전도감을 폐지하고 그 업무를 호조로 돌렸다.
● 사헌부에서 소를 올리기를, “개국백(開國伯.이성계)는 마음가짐이 성실하고 정직하며, 난을 당하여 피하지 않아서 무진년 여름에는 대의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이켜서 사직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기사년 겨울에는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계책을 정해서 왕실을 회복하여 공렬이 매우 높으니, 영원한 세대까지 잊을 수 없습니다. 찬성사 조준은 성품이 본래 강직하여,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며, 나라만 위하고 자기 집은 잊으며, 일에 당하여 절의를 다하였습니다. 개국백이 새로이 왕을 세울 계책을 정할 즈음에 조준이 대의를 분발하여 이 일을 도와 전하를 세웠으니, 공이 한 시대에 높으며 영원히 잊기 어렵습니다. 이들은 모두 오직 성심으로 왕을 받들고 공리는 헤아리지 않으며, 어진 사람을 천거하고 불초한 사람을 물리쳐서 구폐를 일체 개혁하였으며, 삼한을 바로잡아 한결같은 마음으로 왕을 보좌하였습니다. 정몽주는 본래 용렬한 사람인데 개국백이 그를 옛일에 통달한 서생이라 하여 여러 번 천거해서 자기의 관직을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몽주는 부귀를 탐내고 뇌물을 받아들였으며, 강직하여 자기 뜻을 거스리는 사람은 일체 모두 배척하여 내쫓고, 아첨하여 자기에게 붙좇는 사람은 조정에 나열시켜 이루지 못한 욕심이 없었으나, 오히려 그 욕심을 마음대로 다 부리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개국백과 마음을 같이하여 왕실을 도운 조준,남은 등을 꺼려하여, 대간을 몰래 사주하여 그 죄를 얽어 만들어서 이들을 극형에 처하고, 장차 개국백에게까지 미치게 하여서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자 하여 당을 만들어 난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만일에 그 계책을 이루어 나라의 권병을 마음대로 부렸더라면 조정을 어지럽혔을 뿐만 아니라, 장차 반드시 사직을 위태롭게 하여 헤아릴 수 없는 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함께 모의한 무리를 버려두고 신문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화를 이룰까 더욱 두렵습니다. 그 무리인 판삼사사 설장수(偰長壽), 지밀직사사 이무(李茂), 동지밀직사사 이빈(李彬), 예조 판서 김이(金履) 등은 몽주와 결탁하고 편당하여 충량을 무함하고 국가를 어지럽히려 하였으니, 마땅히 직첩을 회수하고 국문논죄하여 뒷사람을 경계하소서. 총랑 안노생(安魯生),최관(崔關)과 호군 김첨(金瞻)은 몽주에게 아첨하여 섬긴 자이오니, 마땅히 아울러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어 뒷사람을 징계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설장수와 김이를 파면하여 전리(田里)로 돌려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파면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 좌상시 김자수(金子粹)등이 소를 올리기를, “전 대사헌 강회백(姜淮伯) 등이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얽어 만들어 전하의 총명을 속였으나 전하께서 한두 사람의 대신에게 명하여 끝까지 신문하여 사실을 알아 김진양,정희(鄭熙) 등 10명은 모두 그 죄를 자복하여 외방으로 멀리 귀양갔는데, 홀로 강회백과 정언 유기(柳沂) 등은 요행히 죄를 면하고 집에 있으면서 그 의논에 참여하지 않은 척하니, 죄는 같은데 벌은 달라졌습니다. 전하께서는 대의로써 결단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어 국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외방으로 귀양만 보내도록 하였다.
● 6월에 도평의사사에서 전 판삼사사 우현보와 그 아들 지밀직사사 홍수(洪壽), 전의 부령 홍부(洪富), 판사 홍강(洪康), 상호군 홍득(洪得), 정랑 홍명(洪命), 종친 남평군(南平君) 화(和), 수연군(壽延君) 규(珪), 영원군(寧原君) 기(琦), 익산군(益山君) 서(敍), 복원군(福原君) 자(諮), 순영군(順寧君) 담(耼), 보령군(保寧君), 복(福)과 문하찬성사 안익(安翊), 판개성부사 김남득(金南得), 밀직사 최을의(崔乙義), 전 청주절제사 왕승귀(王承貴), 전 밀직부사 도흥(都興), 지신사 안원(安瑗), 좌대언 유정현(柳廷顯), 우대언 허응(許膺), 판사 박흥택(朴興澤), 전 연안부사 안준(安俊), 내부령 신원필(申元弼), 총랑 최함(崔咸), 내관 강인부(姜仁富)를 잡아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는, 경력 장지화(張至和)를 시켜서 왕에게 아뢰기를, “현보 등이 여러 번 죄를 범하였으나 관대한 용서를 지나치게 받았는데도 오히려 마음을 고치지 않고, 다시 난을 일으키려 하여 화란의 기미가 급박하였으므로 미처 아뢰지 못하고 현보 등을 외방으로 나누어 귀양보내었습니다. 신이 듣건대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이를 벨 수 있다 하므로 감히 먼저 일을 행하고 뒤에 아룁니다." 하였다.
● 도평의사사에서 아뢰기를, “우현보와 홍수(洪壽) 부자는 본래 간사한 행실로써 아첨하여 벼슬과 녹을 얻었는데, 그 집만 알고 나라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여, 한가지 생각도 생민에게 미친 것이 없으며, 한 마디 말도 공도에 미친 것이 없었습니다. 지난번 위조(僞朝) 때에는 임견미,염흥방에게 편당하여 뇌물을 많이 받고, 토지와 노비를 점검하고 빼앗았는데, 무진년에 죽음을 면한 것은 요행입니다. 그럼에도 현보는 김저(金佇),득후(得厚)의 모의에 참여하고, 홍수는 신우를 맞아 다시 세울 의논에 참여하여 여러 번 탄핵을 당하자, 저의 죄를 면하려고 하여 몰래 윤이(尹彝),이초(李初) 등을 보내어 큰 말썽을 지어 꾸며서 상국에 호소하고, 친왕(親王)이 군사를 움직일 것을 청하여 본국을 해치려고 하였으니, 이는 실로 만세에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근년 이후로 대성에서 여러 번 소를 올려 죄를 논핵하였지만, 전하의 너그럽고 인자함을 힘입어 요행이 사면을 받았습니다. 진정 마땅히 행실과 생각을 고쳐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해야 될 것인데, 도리어 지난번에 자기를 논핵한 사람에게 깊이 원한을 품고 원수를 갚고자하여, 정몽주에게 편당하여 저들과 가까이 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을 끌어들여 각 관사에 나열시키고, 또 종친 등과 수시로 모여서 모의하여, 충량을 무함하고 국가를 어지럽혔으니, 죄가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신등이 상부(相府)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사직의 큰 계책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전일에 죄의 괴수인 현보와 그 아들 홍수 등 5명과 그 무리 남평군(南平君) 화(和) 등 20명을 이미 모두 외방으로 내쫓았으나, 죄악이 너무 커서 여러 사람의 마음에 만족하지 못하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그 죄를 밝게 다스려 가산을 적몰하소서." 하였다. 왕이 명하여 모두 관직을 삭탈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하고, 정도전과 남은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 사헌부에서 말하기를, “요사이 대간이 여러 번 상소를 올려, 유만수(柳曼殊)의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은 죄를 논핵하였으나, 전하께서 인자하여 신문하지도 않고 은총과 대우가 날로 융성하였습니다. 마땅히 마음과 생각을 고쳐 절의에 힘써서 임금을 받들어야 될 것인데, 오히려 징계하지 않고 교만하여 포학함이 날로 심하니, 지금 만약 버려 두고 신문하지 않는다면 악을 징계할 길이 없으며, 뒷날의 화가 될까 진실로 두렵습니다. 청하건대, 직첩을 회수하고 국문하여, 죄를 다스려 여러 사람의 마음을 통쾌하게 풀어 주소서." 하니, 왕이 다만 외방으로 귀양보내게 하였다. 또 설장수와 김이의 벌이 너무 가벼운 것을 논핵하여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그 말을 따랐다.
● 사헌부에서 아뢰기를,"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이후로 변고가 잇달아 일어나고 조정이 화목하지 못하니, 이것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상 주고 벌 줌이 밝지 못하고 은혜와 의리가 나누어지지 못한 데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현보는 본래 절의가 없는 사람인데 세상에 아첨하여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으며, 홍수(洪壽)는 간사하고 아첨하여 한 가지도 일컬을 것이 없는 사람인데, 척리(戚里)에 연줄을 타서 은총의 대우가 두터웠으니, 모두 마땅히 성심으로 힘을 합하고 근신하여 직책을 지켜서 왕실을 보좌해야 될 것인데, 이미 안열의 역란의 모의에 참여하였으며, 정몽주가 난을 일으키려고 음모하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범한 바가 여러 번 나타나서 죄가 용서하기 어려운데, 전하의 자주 용서하는 은혜를 믿고 사직의 안위의 계책을 소홀히 여겨, 일찍이 경계하고 조심하지 않고 날로 더욱 교만하고 자랑하며, 충신을 제거하고자 도모하고 보복만을 일삼아, 마침내 도성 안팎에서 서로를 의심하고 신하들이 화목하지 못하게 했으니, 적이 전하를 위하여 상심하는 바입니다. 법이란 것은 국가의 큰 권병이니, 사사로이 굽혀서는 안 됩니다. 지금 도평의사사에서 각기 그 죄를 지칭하여 소를 올려 논핵하였는데도 전하께서 법을 굽혀 너그럽게 용서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실망시켰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사직을 생각하고 대의로써 결단하여, 그 죄를 밝게 다스려 만세에 경계를 드리우소서." 하였다. 왕은 다만 관직을 삭탈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하였다.
●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어 대장경을 청구하고, 이어서 토산물을 바쳤다.
● 조준을 경기좌우도 절제사로, 남은을 경상도 절제사로 삼았다. 각 도에도 모두 이와 같이 하여 그 도의 병마를 관장하게 하였다.
● 문하평리 경의(慶儀)를 남경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고, 개성윤 조인경(趙仁瓊)은 천추절을 하례하였다.
● 왕이 우리 태조의 사제에 가서 병을 위문하였다.
●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 우현보의 죄를 청하였으나, 그 글을 궁중에 두고 내려보내지 않으니, 대궐 문에 엎드려 힘써 간하였다.
● 조준을 판삼사사로, 공정왕(恭靖王.定宗)을 삼사 우사로, 남은을 동지밀직사사로, 권중화(權仲和)를 상의찬성사로, 윤호(尹虎)와 성석린(成石璘)을 찬성사로, 이인민(李仁敏)을 판개성부사로, 경의(慶儀)와 정희계(鄭熙啓)를 문하평리로, 김사형(金士衡)을 삼사 좌사로, 윤사덕(尹師德)을 판밀직사로, 김용초(金用超) 김을귀(金乙貴) 이의(李薿) 김균(金稛)을 모두 밀직 부사로 삼고, 이행(李行)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 대간이 소를 올리기를, “김진양의 무리들이 불화를 만들고 일을 일으켜 화란을 이룬 것은, 그 모의가 하루에 한 것이 아니며 그 무리가 한 사람만이 아닌데, 이제 또 그대로 이리저리 미루어 내버려 두고 묻지 않는다면, 신등은 여러 사람의 의심이 풀릴 길이 없으며 여러 사람의 마음이 편안할 길이 없으므로, 변고가 발생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일어남이 그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원컨대, 진양 등에게 그 죄상을 따져 신문하여 경중에 따라서 그 죄를 밝혀서 화의 실마리를 근절하소서." 하였다. 왕이 명하여 다시 국문하지 말고, 다만 전일의 옥사(獄辭)에 의거하여 그 경중을 분별하여 아뢰게 하였으나, 대간이 논핵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진양은 곤장 백대를 쳐서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홍부(洪富)와 홍수(洪壽)는 관직을 삭탈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영구히 서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 문하평리 김주(金湊)를 남경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였었는데, 숙주(肅州)에 이르러 왕이 폐위된 소식을 듣고 곧 돌아왔다.
● 왕이 황태자가 훙(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발상(發喪)을 하고자 하니, 조정의 신하들이 아뢰기를, “황태자는 군왕이 되지 못하였으니, 상복을 입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백관은 포대(布帶)를 띠었다.
● 여러 도의 주,군에 다시 유학교수관을 두었다.
● 가을 7월 갑신일에 왕이 우리 태종과 사예 조용(趙庸)을 불러서 이르기를, “내가 장차 이시중(李侍中.이성계의 당시직위)과 함께 같이 맹서(盟誓)를 하려고 하니, 경 등은 시중의 말을 듣고 맹서하는 글을 초하여 오라." 하고, 또 이르기를, “반드시 고사(故事)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조용히 대답하기를, “맹서는 중한 것이 아니니, 성인이 싫어하는 바입니다. 열국이 동맹하는 것은 옛날에 있었지마는, 임금이 신하와 함께 동맹하는 것은 경적(經籍)과 고사에 의거할 데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다만 초를 잡으라." 하였다. 조용히 태종과 함께 태조에게 나아가서 왕의 명령대로 전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네가 마땅히 왕의 명령대로 초를 잡으라." 하였다. 조용히 물러나서 초를 잡았는데, 그 초고에, “경(卿)이 있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찌 이런 자리에 이르겠는가. 경의 공과 덕을 내가 감히 잊겠는가.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곁에 있으니, 대대로 자손들이 서로 해치지 말 것이다. 내가 경을 저버림이 있다면 이와 같은 맹서가 있다." 하였다. 조용히 태종과 함께 왕에게 초고를 바치니, 왕이, “되었다." 하였다.
● 다시 정도전을 봉화군 충의군(奉化郡忠義君)으로, 조반(趙胖)을 지밀직사사로 삼았다.
● 신묘일에 왕이 왕위를 사양하고 원주(原州)로 물러났다. 얼마 후에 간성군(杆城郡.강원도 고성 간성면)으로 옮기고, 공양군(恭讓君)으로 봉하였다. 왕은 그 후 3년 갑술년에 삼척부(三陟府)에서 훙(薨)하였다. 후에 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찬(贊)에 "우(禑)가 왕위를 차지하고 있을 그때에 이미 왕씨가 없어졌다. 16년의 오랜 세월을 지나도록 우가 음흉하여 주색에 빠져 포학을 부렸고, 창(昌)이 또 혼암하고 유약하였다. 하늘이 광망한 동자로 하여금 명기(名器.王位)를 더럽히게 하지 않고 덕이 있는 사람을 기다려 이를 주려고 하였는데, 그 뜻이 분명하니, 충신과 의사들이 반드시 왕씨의 후손을 구하여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공양왕(恭讓王)이 자기 집에서 그대로 일어나 보위(寶位)에 올랐으니, 왕씨의 종사가 이미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고, 왕씨의 나라가 이미 망하였다가 다시 흥하게 되었다. 이에 마땅히 공훈이 있는 어진 사람에게 성심으로 대하고 충언을 받아들이고 직간을 용납하여, 서로 함께 새로운 다스림을 도모하여야 될 것인데, 어찌하여 다만 인척들의 사사로운 감정을 담은 호소와 부녀자와 내시들의 사욕을 따르는 청만을 들어주고 믿으며, 원훈(元勳)을 꺼리고 멀리하며 충량(忠良)을 무함하여 해치니, 정사가 문란해져서 인심이 저절로 떠나가고 천명이 저절로 가버리게 되어, 왕씨 5백년의 종사가 홀연히 망하게 되었으니 슬픈 일이다." 하였다. 백관(百官)이 국새(國璽)를 받들어 왕대비(王大妃) 안씨(安氏)의 전(殿)에 두고 정사를 청단(聽斷)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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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다. 고려가 멸망한 1392년의 기록도 조선이 개국된 60년뒤 김종서가 지어 임금께 올린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