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샤워
1980년대에는 턴테이블에 음향기가 내장된 ‘뮤직센터’라는 간편한 전축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언젠가는 명품 오디오로 바꾸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꿈은 이루지 못했고 고장이 난 이후에는 보통 시디플레이어로 듣다가 2014년부터는 에프엠 음악방송을 자주 듣는 편이었다. 얼마 전 바둑 두러 형님 집에 갔는데, 요즈음엔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즐기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얘기 끝에 한 번 들어 보겠냐며 양희은의 판을 올렸는데 바둑을 두면서 음악을 들으니 한층 운치가 있었다.
그것도 전축으로 다시 들으니 옛날에 자주 듣던 노래였지만, 그 묵은 것이 아주 새롭게 다가왔다. 청바지 차림 날씬한 몸매의 재킷 사진으로 봐 대학생 때 녹음한 곡이어서 요즈음 목소리와는 달리 가늘면서도 맑고 깊었고, 꼭 젊은 목소리여서가 아니라 오달지게 여물어 좀 단단하지만 맛이 진해서 어딘가 근지럽지만 확실하지 않아서 그냥 지나쳤던 데를 정확하게 찾아 긁어주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디지털 신호가 아니라 레코드판과 바늘과의 마찰과 미세한 진동이 현을 문지르는 활처럼 실제 악기 연주의 기능을 해서인지 시디플레이어로 듣는 것보다 음이 훨씬 더 선명하고 감칠맛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너무나 오랜만에 들어서인지 레코드판 특유의 잡음, 튀는 소리도 그렇게 귀에 거슬리지가 않았고 크게 들리지도 않았다. 깊고 시원한 소리가 잡음을 상쇄해서 문제 삼지 않도록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서인지도 모른다. 레코드판이 내는 소리는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음이 분명했다.
인상적인 그 소리와 함께 지내고 싶어 동네 전파사에서 중고 전축-턴테이블과 음향기-을 하나 구입하여 30여 년 전에 듣던 레코드판을 꺼내 올려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음반을 넣기만 하면 사라지면서 음악이 나오는 시디플레이어와 달리 버튼을 누르면 훨씬 크고 검은 LP판 위에 바늘-픽업이 살짝 내려진 다음 가늘게 패인 홈을 따라가며 음악이 재생되고 원반 중심에 가까워지면 바늘이 다시 출발했던 자리로 되돌아와서 다음 음반으로 바꿀 때까지 대기하는 과정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몇 십 년 동안 앉은 묵은 먼지로 인해 잡음이 너무 심했다. 그래서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시키기로 했다. 판을 적신 다음 털실 행주로 비누질을 한 후 샤워를 세게 틀어 물살로 판을 때리듯이 반복하다가 뒤집기를 몇 번씩 한 후 판을 세워 높이 올렸다가 손바닥에 부딪쳐 두세 번 물을 털어내고 벽에 기대어 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건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물론이고 다 마른 다음에 보니 물방울이 맺혀 있던 부분은 얼룩이 남아 보기에도 흉했다. 그래서 샤워를 시킨 다음 어느 정도 마른 다음 여기저기 남아 있는 물방울을 면봉으로 찍어 보았지만 번거롭기도 했고 역시 얼룩이 좀 보였다. 생각 끝에 샤워의 마무리 수순을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샤워가 끝난 후 미리 음향기 위에 펼쳐 둔, 반으로 접은 극세사 큰 수건 사이에 젖은 판을 넣고 손바닥으로 가볍게 밀면서 눌러 가다가 수건에 주름이 생기면 펴 가면서 고루고루 음반 전체를 마사지하여 물기를 제거하고 또 뒤집어서 같은 방식으로 하니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게 세수한 얼굴이 나타났고 턴테이블에 걸어 보니 소리도 한결 좋아졌다.
전축을 다시 틀게 된 후 가장 큰 소득은 ‘에센 바흐 피아노 레슨’ 전집 30장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세 박스에 10장씩 들어 있는 것으로 딸이 초등학생 때 산 것인데 별로 듣지 않은 것이어서 샤워를 안 해도 다른 판에 비해 들을 만했다. 몇 장 꺼내서 죽 들으며 피아니스트가 그 이름을 알릴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얼마나 피나는 연습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거듭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피아노라는 어려운 악기에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 지내고 싶은 꿈을 버리지는 못하고 그 불씨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나로서는, 도저히 스스로 낼 수 없는 소리를 전축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자극이 됨과 동시에 신선한 즐거움이 되었다. 멀리 유럽에서 새로 모신 피아노 선생님 크리스토프 에센 바흐 씨가 나만을 위해 시범 연주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바그너Richard Wagner가 작곡한 3막 오페라 탄호이저TANHÄUSER도 기억이 새로웠다. 판을 구입한 그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이 음악 숙제 ‘탄호이저 행진곡을 듣고 감상문 쓰기'를 할 수 있도록 전곡을 산 것-4장-인데 이제 추억이 담긴 귀한 음반이 되어 다시 등장한 것이다. 다행히 박스에 포장된 것이라 보존 상태도 양호했다. 아들 덕분에 산 바그너의 곡을 들으며 그 당시 담임선생님이 초등학생에게 수준 높은 숙제를 냈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그리고 또 한 장을 소개하자면 '김덕수의 사물놀이'이다. 뉴욕에서 취입한 음반을 수입해서 라이선스 판으로 낸 것인데, 아래 해설에 나온 그대로 한국인이지만 정규교육 과정에서 국악을 제대로 접하지 못했던 나는, 외국 사람들보다도 늦게 우리 전통음악인 사물놀이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우리 민속악이 해외에서 녹음되어 거꾸로 국내에 수입, 라이선스 판으로 소개되는 것에 대해 자탄의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어쨌든 우리의 전통음악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는 것을 국내에서 확인해 본다는 데 의미를 갖는 것이 좋겠다."
모두 90여 장에 불과하지만 하나하나 샤워를 시켜 가며 들어볼 생각인데 들을 때마다 그 판에 얽힌 이야기가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몇 장은 더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전축 바늘이었다. 바늘이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내가 가진 형식의 바늘이 꼭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만일에 내가 구하는 바늘이 없다면 방법을 찾을 때까지 레코드판과 나는 다시 멀어질 수밖에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인터넷 검색을 먼저 해 보았다면, 대량은 아니지만 다양한 전축이 여전히 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아무 생각 없이 세운상가에 간 것은 구세대의 행동 방식이었다. 바늘이 생산되지 않아 귀하고 비쌀 것이니 한 개라도 미리 사 두어야겠다는 혼자 생각에, 시내 나간 길에 청계천 세운상가에 가 보았다. 전축을 파는 가게들이 1층에 꽤 많이 있었는데 한 가게 앞에 앉아 있던 노인에게 물어보니 바늘 파는 집이 있다며 2층까지 안내해 주는 것이었다.
다행히 분해해서 가져간 바늘-'ortofon' 과 똑같은 것이 있었다. 주인이 내민, 우황청심환 곽 크기의 포장을 받아 보니 한 쪽에는 'ortofon'이 다른 한 쪽에는 'Made in Denmark' 가 눈에 들어왔다.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각종 전축 바늘이 생산·소비될 만큼 전축 애호가들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움만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는데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묵은 것의 소중한 가치를 알아 옛 정취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볼 때, 문화란 한 번 쓰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축적되면서 과거와 현재 사이를 왕복하며 다양하고 깊이 있게 발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아닐까.
첫댓글 고운 글 읽고 또 읽고 그리고 더 많은 생각을 하며 갑니다
전축에 관한 한 제대하면서 가장 좋은 전축을 면세로 사 아끼며 듣다가 수해에 그만 몽땅 물에 잠겨 버렸습니다
내 평샹 소원은 좋ㅇ느 오디오 갖는것이있는데
시방은 일제 CD플레이어를 갖고있어 가끔 듣는데 컴프터로 듣는 음과 너무 차이가 있습니다
음이 웅장해 듣는 맛이 좋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구해 듣는 맛도 좋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