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화제의 중심에 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900만 명의 관객을 돌파하며 그 열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지난 20년간 봉준호가 구축해온 필모그래피를 음악을 통해 되짚어봤다.
지난 20년간 봉준호가 구축해온 필모그래피를 음악을 통해 되짚어봤다.
# 플란다스의 개 (2000)
봉준호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 당시 만든 단편들과 '모텔 선인장', '유령' 등의 시나리오로 충무로의 기대주로 주목 받고, 2000년 초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내놓았다.
평범한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개소리가 신경을 긁는다며 단지 내 강아지들을 죽이는 대학 시간강사 윤주(이성재)와 강아지 연쇄 실종을 파헤치는 마음씨 좋은 관리사무소 경리 현남(배두나)을 그린 코미디다.
'8월의 크리스마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등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조성우가 영화음악을 만들었다.
조성우는 각 장면의 길이 등 최소한의 형식만 정해두고, 연주자들의 즉흥적인 잼세션을 담은 트랙들로 영화음악을 구성했다.
색소폰에 이정식, 트럼펫에 이주한, 베이스에 전성식, 피아노에 임미정, 드럼에 김학인 등 90년대 말 2000년대 초 당시 한국을 대표하던 재즈 뮤지션들의 합이 돋보인다.
엔딩 크레딧이 거의 다 오를 즈음엔 (조성우의 전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해 뜰 날'로 참여한) 체리 필터가 커버한 애니메이션 '플란다스의 개' 주제가를 들을 수 있다.
히트곡 '낭만 고양이'를 내놓기 2년 전 곡이라는 점을 상기시켜보면 새삼 봉준호의 경력이 길다는 걸 깨닫게 된다.
# 살인의 추억 (2003)
시니컬한 유머로 가득한 '플란다스의 개'가 안타깝게도 흥행에 실패한 뒤, 봉준호는 3년 만에 신작 '살인의 추억'을 발표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한 연극 '날 보러와요'를 옮긴 영화는 완벽한 호흡의 스릴러라는 세간의 평을 독차지 하며 2003년 개봉작 흥행 3위를 기록했다.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으로 이름을 알린 일본의 뮤지션 이와시로 타로(岩代太郎)가 영화음악을 만들었다.
전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봉준호의 냉소를 본 이와시로는 1986년 실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시니컬 하게 풀어야겠다는 방향을 잡고 작업에 임했다.
그는 일어로 번역된 시나리오를 읽고 데모를 만들어 보냈고, 일본의 스튜디오에 온 봉준호 감독이 준비한 영상을 보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수정하며 완성해나갔다.
비가 내리는 밤만 되면 저 어두운 곳에서 누군가 나타날 것만 같은, 을씨년스러운 1986년 화성의 공기를 이와사로 타로의 음악이 보다 또렷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중들의 기억에서 가장 깊게 남아 있는 음악은 역시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일 것이다. 유력 용의자 박현규(박해일)가 비가 오는 날이면 라디오 방송에 청하던 노래다.
유재하의 높은 피아노 소리와 어설픈 보컬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이 명곡의 인용은 사실 고증 오류 덕분(?)에 가능했다.
'살인의 추억'의 배경은 1986년이지만, '우울한 편지'가 수록된 유재하의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은 1987년 여름에 발매됐다.
# 괴물 (2006)
봉준호 감독이 1994년 만든 단편 '백색인'과 '지리멸렬'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기타리스트 이병우의 음악을 사용했다는 것.
'백색인'에는 1집의 첫 트랙 '새'를, '지리멸렬'에는 3집의 첫 트랙 '자전거'를 썼다.
'살인의 추억'으로 성공을 거둔 봉준호는 어릴 적부터 영화로 만들기를 꿈꿔왔던 프로젝트인 '괴물'을 연출하게 됐고 '장화, 홍련', '연애의 목적', '왕의 남자' 등으로 한국 영화음악의 마에스트로로 떠오른 이병우에게 정식으로 영화음악을 청했다.
이병우의 영화음악에 쏟아진 찬사는 특유의 서정성을 향한 것이었다.
당시 그가 이끌던 무직도르프의 뮤지션들이 더한 다채로운 연주에 담긴 선명한 멜로디는 뭇 영화 팬들을 사로잡았다.
봉준호의 '괴물'은 조금 다른 길을 택했다.
평범한 대낮, 한강 한복판에 괴물이 나타난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설정에 맞춰 메인 테마에 해당하는 곡 '한강 찬가'에 뽕짝의 리듬을 적극 도입해 괴수영화의 활력을 부풀렸다.
외국에 가서 풀 오케스트라를 쓸 수도 있었지만, 약간은 모자란 소시민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가족을 구하는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해 악기 편성에 부러 힘을 주진 않았다.
괴수물이기 전에 가족영화인 만큼 스릴러, 코미디, 드라마 등 장르의 틀을 넘나드는 마흔 개의 트랙이 OST에 빼곡이 실렸다.
'괴물'은 봉준호와 이병우 모두의 첫 천만영화로 남았다.
# 마더 (2009)
봉준호와 이병우의 협업은 계속됐다.
일본의 도시 도쿄를 배경으로 한 옴니버스 영화 '도쿄!'의 일환으로 제작된 단편 '흔들리는 도쿄'의 음악에 이어, 봉준호의 4번째 영화 '마더' 역시 이병우의 음악이 큰 힘을 발휘했다.
섹스에 대한 억압된 욕망과 뒤틀린 모성을 파고드는 '마더'는 내내 음침한 정서를 유지한다.
휴대폰이라는 장치가 없었다면 시간적 배경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두침침한 시골 마을에 어울리는 이병우의 음악들은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과 함께 서스펜스 스릴러의 역사를 쓴 음악가 버나드 허먼(Bernard Herrmann)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 '마더'는 김혜자의 춤으로 열고 맺는 영화다.
북소리가 넓게 울리는 가운데 차갑게 스며드는 기타의 탱고 리듬과 곧 더해지는 풍윤한 오케스트레이션은 금세 청각과 심장을 건드릴 뿐만 아니라, 노란 들판에서 홀로 선 중년의 여자가 커다란 눈을 꿈뻑이며 전혀 흥겹지 않은 춤을 추는 사연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 진실을 알게 된 마더(김혜자)는 제 허벅지에 기억을 잊게 하는 침을 놓고 한바탕 춤판이 벌어진 고속버스에서 노란 빛을 뿜어대는 석양을 등진 채 몸을 흔든다.
거기서 또 한번 '춤'이 흐른다.
이병우의 음악이 없었다면 한국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에필로그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 설국열차 (2013)
'설국열차'는 한국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 450억 원이 투입된 글로벌 프로젝트다.
'괴물'에서 함께 한 송강호와 고아성은 물론 크리스 에반스(Chris Evans),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 존 허트(John Hurt), 에드 해리스(Ed Harris) 등 내로라 하는 할리우드 배우들이 봉준호가 그려낸 디스토피아의 얼굴이 됐다.
음악감독엔 '3:10 투 유마', '허트 로커'로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후보에 오른 마르코 벨트라미(Marco Beltrami)를 섭외해 대규모 프로젝트의 위용을 과시했다.
많고많은 영화음악가 가운데 벨트라미를 고른 이유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면 예상 가능하다.
'레지던트 이블', '아이, 로봇', '헬보이', '월드워Z' 등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SF영화를 상당수 작업했다.
이름난 영화음악가를 기용하긴 했지만 '설국열차'는 봉준호의 영화들 가운데 음악 활용도가 가장 낮은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음악보다는 시종일관 들리는 기차 소리와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거칠어지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더 돋보인다.
벨트라미의 베테랑적인 면모는 오히려 음악이 앞에 나서지 않으면서 뒤에서 받쳐주는 역할에서 빛을 발했다.
음악의 활용이 적은 가운데, 귀를 사로잡는 인용이 하나 있다. 1960년대 하드락 밴드 크림(Cream)의 명곡 'Strange Brew'다.
진격을 시작한 꼬리칸 사람들이 단백질 블록이 만들어지는 공간에 당도했을 때 들리는 노래다.
벨트라미 쪽에서 추천한 선곡 리스트 중 '양조하다'는 뜻의 'Brew'가 단백질 블록과 잘 맞았고, 그 신에서 출연한 배우가 몽롱하게 맛이 간 상태라 사이키델릭한 곡 분위기와도 어울려서 선택했다고 한다.
# 옥자 (2017)
봉준호의 또 다른 글로벌 프로젝트 '옥자'는 '넷플릭스'와 브래드 피트가 이끄는 제작사 '플랜 B'가 함께 제작한 작품이다.
'설국열차'와 달리, '옥자'의 음악은 한국의 음악가가 만들었다. 봉준호가 제작/각본에 참여한 영화 '해무'의 음악을 만든 바 있는 정재일이다.
“멋있게 걷거나 달리는 영화가 아니라 멋있게 걷는 것 같은데 휘청거리고 절뚝거리는 느낌이 필요하다.”
정재일에게 봉준호가 청한 '옥자' 음악의 분위기였다.
'옥자'는 강원도, 서울, 뉴욕, 도살장, 다시 강원도 순으로 공간을 거친다.
정재일은 공간마다 다른 느낌을 불어넣기 위해 강원도는 기타, 서울은 브라스, 뉴욕은 오케스트라, 도살장은 일렉트로니카, 마지막 강원도는 피아노를 각각 주된 사운드로 정했다.
회현지하상가에서 펼쳐지는 추격 신에서 흐르는 집시음악 풍의 스코어는 직접 헝가리와 마케도니아까지 가서 얻어낸 소리다.
이 음악을 잇는 노래, 존 덴버(John Denver)가 부르는 'Annie’s Song'의 쓰임 역시 인상적이다.
옥자와 미자의 도주가 일단락되고 난 뒤 깔리는 목가적인 분위기의 'Annie’s Song'는 두 친구의 험난한 우정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처럼 들린다.
영화 장면과 노래의 러닝타임도 신통하게 딱 맞아떨어졌다.
'옥자'의 사운드트랙은 넷플릭스가 유통을 금지하는 바람에 음반과 스트리밍 모두 발매되지 못했다.
# 기생충 (2019)
봉준호와 한국영화계에 처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기생충'의 영화음악 역시 정재일이 만들었다.
피식 웃음이 터지는 코미디로 시작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뻗어가는 서사가 돋보이는 영화라, 사건의 흐름을 이어가기보다 영화 속에서 주요하게 작용하는 '계단'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에 집중했다.
언뜻 트로트 같은 느낌의 바로크 음악을 지향하면서도 각 트랙의 분위기나 그 안에 쓰인 악기들의 폭은 아주 넓었다.
현악 오케스트라의 기초적인 악기부터 톱, 티벳 종, 우퍼에 넣은 콘트라베이스 등 다양한 시도를 감행했다.
영화 중간 벌어지는 난투극 신에 쓰인 칸초네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가수 잔니 모란디(Gianni Morandi)가 부른 'In ginocchio da te(그대에게 무릎을 꿇고)'다.
노래 때문에 모란디가 주연 배우를 맡은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1964년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한 곡이다.
모란디의 씩씩하게 열창하는 세레나데에 한국에도 잘 알려진 영화음악가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의 오케스트라 편곡이 더해졌다.
놀라운 건 영화 속 인물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상황에서 나오는 노래가, 미술감독이 오브제로 놓은 레코드를 무심코 틀었다가 뜻밖에 얻게 된 선곡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