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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신학 논단
김성수 목사가 남기고 간 성경해석의 보고(寶庫)에는 그의 생전에 매 주일 녹화해 두었던 설교 영상자료와 수요예배 및 새벽기도회의 설교 내용을 육성으로 담은 음성 파일, 초청 부흥회 또는 초청 설교의 영상 녹화 자료, 그리고 이들을 편집하여 출간된 간행 서적 등이 있다.
그는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모든 설교 내용을 기록물로 남기는 일에 각별히 신경을 써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른 믿음의 길을 안내하려고 작정하고 목회를 시작했던 것 같다. 그는 지금 카이로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지만, 크로노스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영상과 음성과 문서들로 항상 카이로스의 세계를 그와 함께 공유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의 생전 매주 새로운 설교 영상이 유튜브에 게시되면 순식간에 수십만 뷰를 돌파하며 기독교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설교자였다. 당연히 이단성 논란이 불붙었고, 많은 목사와 전도사, 신학자들도 그의 신학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열공하는 현상도 일어났다.
한국 기독교 교단의 맏형격인 예장 합동의 한 분파인 합신 교단에서는 교단 차원에서 김성수 목사의 이단성에 대한 연구를 실시하였으나 ‘이단’이라고 명시적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강론을 읽거나 추종 금지" 판결을 내렸다.
우리는 그의 성경해석을 맹종하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되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는 자세로 성경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아래에 제시하는 가장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김성수 신학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소개하며 우리가 비판하고,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구별하고, 또 우리가 귀 기울여 새겨들을 부분은 그렇게 받아들이는 자세로 예장(합신)의 연구보고서를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혹은 이런 보고서 자체가 전혀 신경 쓸 가치도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나, 우리가 이런 비판의 목소리도 있구나 하고 그 소리를 들어보고 넘어가는 것도 몸에 좋은 보약이 될 것이다.
출처: https://blog.naver.com/mymeone/222570674455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교단에서 내린 "강론을 읽거나 추종 금지" 판결의 주요 내용
1)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운명적인 오해
2)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로 만드는 오류
3)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분리하는 오류
4) 인간이 선악과를 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그릇된 성경 해석
5) 거듭난 신자의 행함과 선행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
6)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
7) 기존 교회를 거짓 교회로 몰아붙이는 오류
하나님을 죄의 책임자로 만든 김성수 목사
-> 죄가 무엇인지, 김성수 목사의 죄에 대한 정의, 성경이 말하는 죄의 정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자신의 주관적 선입관을 바탕으로 몰아가는 선동적인 글이다. 하나님이 죄의 책임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아닌 모든 피조 세계의 존재들로서 창조의 질서,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은 것이 죄이다. 인간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창조의 섭리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게 되었다고 그 죄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것 그 자체가 죄이다. 죄는 인간의 생래적 본성이라고 김성수 목사는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이 책임을 지세요’ 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주권 사항이다.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김성수 목사의 오류들은 새로 난 것이 아니고, 이미 2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꾸준히 있어왔던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는 이미 있었던 그런 이단들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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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시적으로 김성수 목사가 이단이라고 판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이단들의 반복”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성교회가 신천지를 제대로 논박하지 못하고 ‘무조건 접근 금지’를 주장하는 것처럼 매우 빈약한 설명이다. 우매한 평신도들에게 너무 공들여 미주알고주알 자초지종을 설명할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서비스 정신이 아예 없다. 이면에서는 그들 자신의 빈약한 신학지식이 드러나지 않을까 노심초사 애타고 있지 않을까? 도대체 그들은 자신들의 천박한 성경 지식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배만 두드리고 있다.
김성수 목사의 오류들을 정죄했던 가장 유명한 회의는 1619년에 네델란드 도르트레흐트에서 열린 돌트 종교회의였습니다. 김성수 목사의 궤변은 이미 400년 전부터 구체적으로 정죄되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수 목사에게 속아 넘어간다면 이처럼 미련하고 억울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 기독교 교리의 근간을 이루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 요리문답, 각양 역사적 종교회의의 결의, 다양한 기독교 단체에서 내린 결론 등이 성경 그 자체보다 더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이러한 인간 집단이 내어놓은 그 어떤 회의의 결과나 결정 사항도 오류의 가능성에서 면제될 수 없으며, 때로는 그러한 결정 사항들이 참 진리로 향하는 길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돌트 종교회의는 몰라도 아무 문제가 없으나 성경은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400년 전에 무지몽매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의 수준이 김성수 목사의 성경을 통달하여 꿰뚫어 보는 수준과 비교해서 그 발바닥만큼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러한 오합지졸들이 의논하여 내놓은 결론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엄청 용감한 도발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저지르는 도발이다.
예장(합신)의 교세가 10만 여명에 불과한 수준인 것을 보면 이들 또한 어떤 꼰대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것 같다.
주님의 양들은 주님의 음성과 거짓 목자의 음성을 분별합니다.(요10:27)
순진한 성도들은 김성수 목사의 크나큰 잘못을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합신 교단 총회의 보고서를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김성수 목사의 심각한 오류에 대해서는 그것을 지적하는 이들 간에 일치된 의견을 보이고 있습니다.
- 블로그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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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0회 예장합신교단 총회 신학위원회 보고서(2015년)
서울 서머나교회, 고 김성수 목사와 관련한 질의에 대해서
-> 우리는 김성수 목사의 로마서 강해 102장을 모두 공부했고, 그의 신학 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시점에서 아래의 예장(합신) 신학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를 보고 무엇이 잘 못 된 것인지 비판할 수 있는 역량을 시험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그의 신학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러한 "강론을 읽거나 추종 금지" 판결 문건을 비판하기도 어렵고 의미도 없겠지만 이제 어느 정도 김성수 신학을 공부한 상태에서 우리는 이러한 글을 보고 무엇이 잘 못 되고, 무엇이 왜곡된 것인지 분별이 가능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런 카페에서 우리 회원들이 각자의 생각을 토론글로 나누어 교류하는 장(마당)을 만들면 좋을 것이다./
1. 경과 및 현황
- 고 김성수 목사 : Azusa Pacific University Haggard Seminary(M.Div.)
- 미국 CRC(Christian Reformed Church) 남가주 서머나교회(2004개척)
- 2012년 4월 1일 노량진 CTS에서 서울 서머나교회 개척
- 2013년 3월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음
- 소재 : 서울 서초구 반포동 53-5 아싸빌딩 B1 (2013년 11월 노량진에서 이전)
- 담임목사 : 없음
- 교단소속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
- 홈피 : www.seoulsmyrna.com
- 모임 : 주일 1부(오전 11시 30분), 2부(오후 2시 30분)
수요 1부(오전 11시), 2부(저녁 7시 30분)
- 예배순서 : 예배로의 부름 – 찬양 – 기도 – 광고 및 환영 – 말씀(동영상) - 찬양 - 주기도문 결단송
- 설교 : 고 김성수 목사의 670여 편의 설교 동영상
- 회집규모 : (“종교와 진리” 240 (2015. 2) – 기독교이단문제연구소 간) 서울 700여 명(2014년 년 말 기준),
지역별 자체 모임 20여 곳
- 서머나교회 카페 회원 수 6,300여 명
- 인터넷 방문자 수 : 약 10,000여 명
- 설교집 : www.smyrnabooks.com 을 통해 미국에서 구입
- 해외 회집 : LA 서머나, 북가주 서머나, 뉴저지 서머나, 산타 바바라 서머나
2. 설교 내용과 관련한 몇 가지 오류들
1) 선택에 대한 운명적인 오해
김성수: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이 땅에서 행함의 유무가 천국 입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미 결정되어 역사 속으로 내려온 이들이 성도이고 그들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양과 염소는 이미 창세 전에 갈라져 있습니다. 창세 전에 이미 완료의 상태에 들어가 있는 성도는 이 땅에 죄인으로 보내져 자신의 불가능함을 폭로 당하게 됩니다. 알곡과 가라지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결정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 (비유 강해 14, 마 25:31-46, 구역 교재)
김성수: “하나님이 여러분을 역사 속에 보내서 죄의 종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 보내서 어린 양의 피로 구원해 내신 것처럼 무력한 자로 폭로해 내신다. 어린 양의 피로만 구원해 내신다.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다 쓰신다. 누가 간음한 자로 만들었는가? 하나님이시다. 누가 진짜 신랑인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화하셨다... 새사람은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입는다고 말씀한다. 먼저 새사람이 되겠다고 하니 문제다. 죄인 됨이 폭로된다. 하나님이 볼 때는 죽은 자다. 강시다. 네가 죽은 자인 것을 알라. 내가 치장한다. 그런데 왜 니가 강시에 치장하느냐?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과 군중 앞에서 결국 간음한 그 여자만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남아있었다. 최초의 간음 현장은 에덴동산이었다“(2012년 산상수훈 16번).
비판 =>김성수는 구원을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선택 경륜 안에서 폐쇄적으로 완료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돌트신경(Ⅰ.1-4)은 창세기 1-3장의 순서에 따라 구원의 실행은 영원 전 삼위 하나님의 선택 경륜에서 시작하지 않고 시간 속에서 일어난 타락으로 시작한다. 영원 전 삼위 하나님의 선택 경륜에서 결정된 구원의 대상이 누구인지 먼저 계시하지 않으시고, 성자를 보내어 택자의 구원(생명)을 획득하게 하시고, 이 구원을 택자에게 수여하기 위해서 은혜의 방편, 즉 복음 설교를 듣게 하셔서, 성령께서 택자들에게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을 일으켜 구주를 영접하게 하심으로 드러내신다.
이와 같이 영원 안에서의 선택은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구원의 서정을 펼치시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나타난다. 구원의 결정은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실행은 신자의 신앙의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적 작정에 의해 선택한 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신앙의 행위가 가능하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은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언약 안에서만 실행이 된다(창 15, 17장). 또한 그 확신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경외심, 자신들의 죄에 대한 슬픔, 의에 주리고 목마름과 같은 선택의 열매들을 자신에게서 살핌으로 얻게 된다(돌트신조 첫째 교리 12항).
2)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로 만들고 있다.
비판 =>김성수의 주장에 의하면 정죄 심판의 원인이 사람의 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원인이 아니라 심판자이시며, 정죄 심판의 원인은 인간의 죄에 있다(돌트 신경Ⅱ.6). 성경은 교훈하기를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씀한다.
그는 이해하기를, 언약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는 상관이 없이, 여호와께서 이미 이루신 성도가 이 땅에 온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강림이 아직 완전하게 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하는 약속으로 보며, 성령께서 신앙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으로 믿지만, 그는 창세전에 이미 완료된 구원을 주장함으로 우리의 믿음이나 삶이 설자리가 없어지고 만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더 이상 인간은 책임 있는 당사자가 아니므로 은혜 언약의 특징이 훼손되며 은혜언약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벌코프는 선택보다 언약을 중요시했다. 벌코프는, 선택이 마지막에 오는 것이었다. “선택은 하나님의 행위에 있어서 첫 번째 말이지만, 신자가 고백할 때는 마지막 말입니다. 그것이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지평선을 나타내주며, 언약의 영역을 가능하게 합니다.”
돌트회의에서 핵심 이슈 중 하나는 선택의 작정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돌트신경은 첫째 교리에서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아야 할 인류(제 1항),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아들을 보내심(제 2항), 복음 설교자를 보내심(제 3항),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음(제 4항), 불신앙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제 5항), 어떤 사람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시며 어떤 이에게는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나옴(제 6항), 그리고 나서 제7항에서야 제한된 수의 사람들을 오직 은혜로 선택하심이 나온다. 그러니까 결국 선택은 가장 먼저 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송영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신 은밀한 뜻으로서 창조 이전의 오묘한 일에 속해 있으며, 언약은 시간 속에 드러난 일로서 언약 백성에게 속해 있어(신29:29), 선택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앞서게 하고 지배하도록 하면, 언약의 특징을 잃어버리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당사자로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 설자리를 상실하게 되어, 거룩한 언약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3) 언약 이해의 오류
(1)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분리
김성수: “아무튼 그러한 새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은 옛 언약의 파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옛 언약이 뭡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라, 안 지키면 죽는다’입니다. 그런데 그 옛 언약의 대상자였던 이스라엘이 그 옛 언약 앞에서 완전히 실패자로 드러나 버리지요? 옛 언약이 이스라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에 의해 파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자리에 새 언약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 언약은 법과 몸의 분리 상태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너희 인간들은 옛 언약에 의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내가 새 언약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한시적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즉 ‘율법을 지키라’는 옛 언약은 새 언약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사전 광고에 불과한 것입니다”(로마서1,129쪽).
비판 => 김성수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분리시키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에 의해 옛 언약이 파기가 되었으며, 그 자리에 새 언약이 주어졌다고 한다. 이는 보완적이고 연속적인 한 언약을 대립이나 대조로서 분리시킨다.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의 중보자는 공히 예수 그리스도시다. 단지 실체 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옛 언약의 의식법과 정결법과 같은 그림자로서 성격이 무의미하게 되었으며 경륜상 차이가 있을 뿐, 중보자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과 구원을 받는 면에서 본질상 동일하다. 율법은 두 언약 안에서 죄를 폭로하고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규범 역할도 한다. 이는 옛 언약 교회와 새 언약 교회는 두 교회가 아니라, 성부의 선택과 성자의 구속과 성령의 성화의 은혜를 입은 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2) 옛 언약에 대한 오해
김성수: “옛 언약이 뭡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라, 안 지키면 죽는다입니다”(로마서1,129쪽). “이스라엘 족속은 집단적으로 창세 전에 구원을 받은 교회이다”(비유강해 12).
비판 => 이 말의 의미는 이스라엘과 지금의 교회가 구원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구약 교회와 신약의 교회가 한 교회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주신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져냄을 받은 뒤에 언약을 체결할 때인 시내산에서 받았다.
(3)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오해
김성수: “성도는 죽은 자, 불순종의 상태로 이 땅에 보냈는데 산 자인 척한다. 산 자인 척하는 것이 죽음이며, 사람들은 산자인 척하는 행위를 성화라 부른다. 새사람은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입는다고 말씀한다. 먼저 새사람이 되겠다고 하니 문제다. 죄인 됨이 폭로된다. 하나님이 볼 때는 죽은 자다. 강시다. 네가 죽은 자인 것을 알라. 내가 치장한다. 그런데 왜 니가 강시에 치장하느냐?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과 군중 앞에서 결국 간음한 그 여자만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남아있었다. 최초의 간음 현장은 에덴동산이었다(산상 수훈 16번).
비판 => 김성수는 인간이 율법을 행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고 그것이 인간이 하나님 되려는 것이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주장한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도덕적인 율법은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위한 우호적인 안내자인 것을 부인하고 있다. 복음으로부터 분리되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율법은 나의 원수이고 나를 정죄한다. 반면에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여 복음과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경우 율법은 더 이상 나의 원수가 아니라 나의 친구이다. 율법은 결과적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속하며, 핵심에 있어서 도덕적인 율법은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위한 우호적인 안내자인 것이다. 그러한 신앙은 “칭의된 사람 안에서만이 아니며,...죽은 신앙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1장 2절).
4) 창세기 3장에 대한 그릇된 해석
김성수: “선악과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나약함을 확연하게 구별해 주므로 해서 하나님의 안식은 인간과 힘으로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납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었다. 하나님과 피조물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격적이며 도덕적인 존재에서 가르치시고 싶으신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지켜낼 수 없는 하나님의 계명이었다” (창세기1, 162쪽).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둘 다 좋은 나무이다. 그런데 티끌에 불과한 인간은 도저히 그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그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안 따먹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지시고 선악과의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니다. 그 선악과나무를 통해 너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티끌인지를 만천하에 폭로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발적인 항복과 순종을 할 수 있는 자로 설복시키기 위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라는 소품을 에덴에 심어 놓으신 것이다” (창세기1, 198쪽).
“선악과는 하나님이 왜 만들어 놓으셨을까? 그것도 제일 잘 보이는 동산 중앙에? 그것은 그것을 따 먹어라! 그리고 내 은혜받아 산 자가 되라는 이유에서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를 반드시 죽이셔야 했다. 왜? 언약을 하셨기 때문이다. 정녕 죽으리라! 죽고 죽으리라라는 반복이다. 이것이 나중에 야베스에서 복의 복으로 확 뒤집어진다.”
비판 => 김성수는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의 혼란스러운 적용을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은 교훈적 의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보기를 기뻐하시는 의지이다. 아담은 이러한 교훈적 의지에 순종할 수 있는 순전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 그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의 자유를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이 시험에 통과할 수가 없는 존재이거나, 애초부터 순종을 기대하지 않으시고 금지명령을 내리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에 따라서 아담은 불순종하고 심판을 받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를 들어, 애초부터 아담은 순종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이 없었다고 말하면 잘못이다. 아담은 순전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실행할 수 있는 자유선택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성수는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를 혼동하며, 그 결과 운명론적 이해를 전개하며 그것을 은혜론으로 왜곡하고 있다.
5) 심각하게 잘못된 알레고리 해석
김성수: “창조 셋째 날이 담고 있는 구속사 안에서의 영적 메시지를 살펴보면, 성경에서 물과 바다가 대조되어 나올 때 항상 뭍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바다는 죄악된 세상을 상징한다. 그래서 창세기의 다섯째 날 만들어진 바닷속의 생물 중에 타닌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창 1:21의 그 큰 물고기, 타닌이라는 단어는 용, 뱀, 바다 괴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이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다가 물러가고 뭍이 드러나는 것으로 묘사를 하기도 한다” (창세기1, 84쪽).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은 반드시 너와 결혼할 것이고 예수를 낳을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비유 강해 11).
“창세기를 잘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아벨이나 에녹 같은 산 자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라인인 인물들의 나이는 정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지만 가인의 후손들의 나이는 기록을 하고 있지 않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는 선택 밖의 사람들은 모두 죽은 자로 취급하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바로 산 자들에게만 성경을 주신 것이다” (창세기1, 21쪽).
비판: 김성수는 심각히 잘못된 알레고리 해석의 오류를 보이고 있다.
6) 율법폐기주의를 주장한다.
김성수: “우리는 창세전에 이미 완료된 다른 상태를 가지고 이 땅에 왔다”(비유강해 14번). “성경은 순종치 않음에 가뒀다고 하는데 순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전부가 가짜다”(산상 수훈 16번). “생각해 보세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를 하게 되면, 인간의 행함에 의해 믿음의 진위가 결정이 되는 이상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셨는데 인간이 행함으로 그 믿음을 확증해 내지 못하면 그 믿음이 죽은 믿음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라는 제품에 인간의 행함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이상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은 인간 측에서의 어떤 불순물도 가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야고보서에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은 십자가 은혜라는 하나님의 행함에 의해, 자신의 옛사람의 심장에 칼을 꽂는 자기 부인의 행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인간 측의 노력과 공로가 가입된 불순물 묻은 믿음과 가짜 믿음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은, 착한 일을 많이 하지 않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측에서의 착한 일이나, 선한 행위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함에 의해, 구원에 있어서 인간 측에서의 모든 행함을 부정하는 그런 행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믿음은 가짜라는 완전히 반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예수님의 비유, 242-243).
비판 => 신자의 선행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믿음을 부인하거나 모순된 것이 아니다. 선행이 믿음의 증거가 된다는 말을 오해하여, 마치 선행이 믿음의 진위를 결정하는 근거이며 따라서 인간이 믿음을 결정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한 완전한 오류이며 또한 왜곡이다. 올바른 개혁신학은 신자의 믿음은 그 자체가 성령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러한 선물을 주신 성령 하나님께서 또한 거룩한 성화의 일을 행하시므로 선행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임을 가르친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또한 반드시 성화의 사역을 행하실 것이므로 행함이라는 열매로 믿음의 진실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교훈한다. 따라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4)의 말씀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임을 행함으로 드러내게 된다는 원리를 교훈하는 말씀이다.
이러한 까닭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신자가 선행을 하여야 할 필요를 다음과 같이 교훈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4문의 답). 당신은 이 모든 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지킬 수 없습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5문). 만일 아무도 이 생애에서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면, 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그렇게 엄격하게 선포하셨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의 용서와 의를 더욱 간절히 추구하게 하기 위해서이며...성령의 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점점 더 새롭게 되기 위한 노력을 결코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5문답, 고전 9:24; 빌3:12-14; 요일 3:1-3).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일지라도 계명을 완전히 순종할 수는 없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나는 전혀 순종할 수 없다고 말한다거나, 새롭게 되기 위한 노력조차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믿음의 진위를 사람이 결정한다는 것을 결코 뜻하지 않는다.
7)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오해
김성수: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땅에서 행함의 유무가 천국 입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결정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 (비유 강해 14).
비판 => 이 말은 구원이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얻게 된다는 면에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논리를 펴는 마음 저변의 생각은 인간은 누구나 죽은 자요 강시라는 사상이 깔려있다(그는 인간을 실제로 강시와 같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산상수훈 16번). 그는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일방적인 방향만을 본다. 작정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사용하시되 그들을 교훈적 의지에 따라 판단을 하시는 방향도 또한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한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사용이 되었으나, 그들의 악행은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에 따라서 판단을 받고 공의의 심판을 받는 것임을 말하지 않는다.
이사야 10장의 5절과 6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고집 센 백성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서 앗수르를 보내셨다고 하는 말씀을 우리는 읽는다. “화 있을 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같이 짓밟을 것이어늘....” 앗수르는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이고, 타락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서 보내진 하나님의 손의 몽둥이 이였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분명하게 성취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을 이룬 앗수르는 그 행한 일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되었다.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12절) 여기에 보면 앗수르는 예루살렘에 대해 행한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 앗수르는 그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거나 하나님께 불평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먼저 앗수르를 도구로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도구를 사용하셨지만 앗수르가 완악하며 교만한 마음에 악을 행하였기 때문에 앗수르의 악한 행위는 악한 행위대로 심판하셨다.
우리는 주께서 당신의 주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하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8) 기성교회를 가짜 기독교로 규정하는 오류
김성수: “따라서 올바른 복음이 교회에 떨어지면, 종교가 되어버린 가짜교회가 붕괴되고, 가짜 신자들이 와해가 되며, 가짜 종교 행위들이 빛을 잃어, 밖에서 보면 교회가 더 어수선해지는 것 같고, 열심도 없어지는 것 같고, 지리멸렬해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가짜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 공격을 당하거든요. 그런게 그 복음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고 골수와 관절과 영혼까지 쪼개는 힘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복음이 전해지면 교회 안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조작해 놓은 가짜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를 이단으로 몰아붙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되어버린 가짜 기독교가 기독교의 주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서 기독인들로부터 이단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어쩌면 진짜 복음을 들어보지는 못할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구원파나 신천지나 다락방 같은 그런 유의 이단 소리를 들으라는 말이 아닙니다”(로마서1, 122-123).
3. 결론
1)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 김성수의 강론 내용은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사료됩니다.
2) 그의 적은 누룩이 많은 신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사단적인 요소가 많아 보입니다.
3) 억지로 성경을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벧후 3:16). 연약한 신자들이 미혹에 이끌려 굳센 데서 떨어질까 심히 염려가 됩니다.
그러므로 교단 산하 모든 교회는 고 김성수의 저술과 강론을 읽거나 듣거나 그것을 추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을 제안합니다.
[출처] 하나님을 죄의 책임자로 만든 김성수 목사 (김성수 목사에 대한 합신 총회 보고서)| 작성자 좋은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