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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성서를 쓰지 않았다》- The Good Book of Human Nature
700쪽이 넘는 이 책은 《총·균·쇠》나 《사피엔스》만큼이나 두껍다. 그래서 읽기에 버겁다. 그렇지만 읽다 보면 왜 진작에 읽지 못했던가 하는 悔恨이 생기던 것을 생각하면 이제라도 읽게 되어서 여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은 성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 책의 저자들은 책을 집필하는 데 5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2주 안에 모두 읽을 각오다. 저자는 2명으로, 한 명은 생물학자로서 대학교수이며, 다른 한 명은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다. 제1저자 ‘카를 판스하이크’는 네덜란드에서, 제2저자 ‘카이 미헬’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번역은 《파타고니아 이야기》등 전문서적을 여럿 번역한 번역전문가 추선영 선생이 했다.
차례 다음이 ‘서문’인데, 이것이 7쪽에서 46쪽까지로 39쪽이나 된다. 그러니 서문에 이 책의 요지와 핵심을 모두 설명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그것을 요약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성서는 한 번도 제대로 대우받은 적이 없다.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책의 주제인 성서, 즉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경전인 성서는 오랫동안 수백 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면밀히 검토해온 책이다. 그럼에도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확신하는 것은 인류의 모든 것을 기록한 책이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라는 관점에서 성서를 들여다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성서만큼 인간을 여실히 드러내는 책은 없다. 성서는 인간 본성의 기록이다. 물론 이는 저자들의 생각이다.
성서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방해하는 것은 종교와 과학 사이 우뚝 솟은 단단한 벽이다. 종교비평가인 ‘리차드 도킨슨’은 “공정하게 말하면 성서의 대부분은 ‘멀쩡한 악마’라고 할 수조차 없다. 성서는 기괴한 모습을 한 , 일개 괴물에 불과하다. 성서는 오늘날 인류가 알지 못할뿐더러 서로 누구인지 몰랐던 수백 명의 무명작가, 무명편집자, 무명필사자의 손에 의해 9세기에 걸쳐 구성, 수정, 왜곡, 개선된 이치에도 맞지 않은 문서를 두서없이 이리저리 꿰맞춘 문집에 불과하다.”라고 한다. 그러나 성서를 한 번이라도 파헤치기 위해 공을 들여 읽어본 사람이라면 ‘성서가 두서없이 이리저리 꿰맞춘 문집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진화생물학자와 역사학자인 우리는 성서가 우리에게 말해주어야 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에는 사랑, 죽음, 악마, 재물, 폭력, 학살 이야기가 있고 지상과 천상의 도덕과 천사의 본성 같은 문제를 제기할 뿐 아니라 근친상간, 동성애, 인간 제물, 난혼 통제라고 밖에 묘사할 수밖에 없는 규범 같은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이 책을 쓰면서 진화과학과 문화과학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수십만 년 동안 산야를 떠돌며 수렵·채집 생활을 해온 인류의 조상은 어느 순간 떠돌이 생활을 멈추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익명으로 사회생활을 하게 된 인류는, 더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사회적 불평등 역시 크게 심화됐다. 역사학자들이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르며, 감탄하는 이 사건을 《총·균·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야몬드’는 정착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 말했다. 1만 년 전에서 1만 2천 년 사이에 일어난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에서 이 결정적이고 최악의 실수는 인류 진화에서 전환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400만 명에 불과하던 호모사피엔스는 1만 년을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해 80억 명에 달했고, 기술도 혁명적으로 발전했다. 이런 인구증가와 경제적 성공 신화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부수적 피해는 지금까지 거의 다루어지지도 않았다. 고고학자에 따르면 그 시대에도 폭력은 일상으로 자리 잡고, 수렵·채집으로 생활하던 조상에 비해 체구는 작아졌고,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경우도 속출했다. 가축의 질병이 인간에게 넘어왔고, 천연두, 페스트, 홍역, 인플루엔자, 콜레라 같은 질병이 등장해 빠르게 확산되었으며, 충치를 앓는 사람도 더 많아졌다. 동시에 불평등과 억압이 자리 잡았다. 이때는 어떤 종류의 불행이든지 원인은 영혼과 신의 노여움에 있다고 생각했다.
진화의 관점에서 성서를 읽으면 인류를 이해하는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다양한 문제까지 설명할 수 있다. 이 책은 성서의 연대를 따라가면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을 드러내는 이야기에 집중할 것이다. 의외로 성서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이 책은 성서 중에서도 특히 구약성서에 주목하는데, 신약성서에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까지 사로잡는 카리스마 넘치는 나자렛 예수가 등장한다.
《성서는 하느님이 쓰지 않았다》는 것은 물론《모세오경》도 모세가 쓴 것이 아니다. 이런 통찰은 17세기에 등장했으며, 당시에는 격렬한 저항이 일었다.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1588∼1679)는 모세가 히브리 성서의 토라(모세오경)를 직접 쓴 것인지 의문을 품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 후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는 모세가 사망한 후 벌어진 사건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는 유대인이면서 유대교당 출입을 금지당하고, 암살 시도에 노출되기도 했으나, 어쨌든 살아남았다. 그러나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이 셋이자 하나라는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신약성서에 명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피노자보다 한 세기나 앞서서 밝히고 주장한 에스파냐의 인문학자 세르베투스는 화형을 당했다.
성서가 어떻게 쓰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단서는 18세기에 발견되었다. 독일의 신학자 베른하르트 비터(1688∼1713)와 프랑스의 신학자 장 아스트 뤼크(1684∼1766)는 창세기에서 하느님을 ‘엘로힘’으로 지칭한 구절이 있는가 하면, 다른 데서는 ‘야훼’라고 지칭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하늘과 땅을 창조한 하느님(God)이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을 때는 갑자기 ‘야훼 하느님(LORD God)’으로 바꾼다는 사실도 금세 알게 됐다. 이는 적어도 두 명의 성서 저자가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다수에 의해 쓰인 저술이라는 개념은 아직도 살아있다.
오늘날 히브리어 성서는 800여 년(기원전 900-100년경)에 걸쳐 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과거 연구자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후대에 쓰여졌다. 고대 이스라엘 연구로 권위 있는 고고학자 윌리엄 데버는 “성서 텍스트(또한 전통)가 너무나 다양해 정확한 연대 측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하고, 심지어 주류 성서학자들조차도 자료를 통한 연대 측정에서 500년 정도 격차를 보이는 형편이다.”고 했다.
그렇다면 뒤죽박죽, 엉망진창인 성서는 어떻게 창조되었을까? 히브리 성서, 즉 그리스도교에서 구약성서라고 하는 성서에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나부터 열까지 인간이 작업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성스러운 경전이 단일한 저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저술을 집대성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기원전 9세기 이스라엘 왕국에서 저술 활동이 꽃피면서 학자들이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결합되고, 재해석되고, 확대되어 갔다. 눈사람처럼 되어갔던 것이다. 성서가 생긴 배경은 두 왕국, 즉 예루살렘이 수도인 남쪽의 유다왕국과 사마리아가 수도인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이 당대 세계를 지배한 위대한 문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명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파라오·피라미드의 고향인 이집트를 서쪽에, 아시리아, 바빌로니아-페르시아 제국이 있던 메소포타미아를 동쪽에 둔, 이 ‘거룩한 땅’은 망치와 모루 사이에 끼어있는 형국이다. 툭하면 왕국이 초토화되고, 백성은 끌려가는 험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재앙이 없었다면 성서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이 지역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용광로였다. 뒤이어 등장한 히타이트, 불레셋,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제국의 문화뿐 아니라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아람, 아모리, 모아브, 에돔 등 작은 나라들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고 서로 영향을 주었다.
스위스의 구약성서 학자인 오트바어 겔과 토마스 스타 우불리는 성서를 ‘100인의 목소리가 흐르는 강’이라고 했다. 이것은 문화적 진화과정을 美麗하게 묘사한 말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도 사피엔스의 성공비결을 말했지만, 인류는 지식을 창조하되 그것은 스스로 창조하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된 의견을 주고받고 그것을 개선하여 내용을 지속적으로 추가해나가는 방법과 능력을 갖추는 데 있다고 한다. 이를 가리켜 ‘누적된 문화적 진화’라고 하는데, 그런 고대인의 특기에 의지해 인류는 지금처럼 발전해 왔다.
정착 생활은 인간의 행동에 유례없는 변화를 몰고 왔다. 정착 생활로 야기되는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문화적 전략을 활용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성서에 등장한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온갖 종류의 새로운 도구를 발명하고, 새로운 행동규범과 의례를 발전시켰다. 제의를 올릴 장소를 마련하고는 영혼을 불러냈으며, 이어서 신까지 불러냈다. 이런 혁신이 항상 유효하게 작용한 것은 아니지만, 문화는 계속 발전했고 인류의 성공비결로 자리 잡았다. 결국 문화가 오늘날 인류가 살아가는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성서의 첫 부분에 해당하는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서부터 이상한 점은 아주 많다. 성서는 정말로 기괴한 이야기들의 보고다. 왜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자손들이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만으로 낙원에서 쫓아낸 것일까? 하느님의 잔인한 행동과 정의롭지 않은 것에 대해 반감과 저항만 불러올 뿐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성서를 읽는다고 모두가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간 본성에 대해서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Part 1] 창세기
구약성서를 처음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모든 이야기가 낯설고, 놀라울 것이다.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고, 남은 세계의 모든 것을 창조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데, 엿새째 되는 날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고 혼잣말을 하고는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신’하느님의 지침은 명확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 땅을 정복하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문득 기이한 일이 일어났는데, 창조물을 본 하느님이 “참 좋다”고 하시고는 하루 동안 휴식을 취했다. 그 다음은? 어이없게도 다시 모든 것을 창조하는 이야기다. 진흙으로 아담을 만들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에덴동산을 만들고, 아담을 데려가서 거기서 살게 했다. 아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을 듯하여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는 진흙으로 들짐승과 새를 만들어 아담에게 보여주고 이름 짓게 했다. 또 그를 도울 짝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아담의 갈비뼈를 뽑을 생각을 했다. 하느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뒤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만들었다. 아담 내외는 알몸이지만,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 뒤는?
(여기까지가 내가 쓴 독후감의 6쪽까지다. 모두 44쪽이나 되니 앞으로도 38쪽이 더 남았다 아마 읽기가 지겨울지 모른다. 관심 없다면 여기서 접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