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9일 주일예배 설교문 / 눅 10:38-42 / 생명 공급의 자리를 빼앗기지 말라.
할렐루야!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종교의 실상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종교는 사람의 영혼을 빼앗고, 하나님의 자리까지 빼앗는 도둑이요 강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종교는 종교를 통해 이익을 얻는 자, 종교 강도, 종교의 피해자가 한 덩어리가 된 멸망의 덩어리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또 다른 종교를 세워서 종교 사업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으려면, 영원한 생명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빨리 종교 생활에서 떠나 생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혼을 사냥하는 강도요 종교는 창세기 3장에서부터 그 시작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죄가 인간에게 들어와 사람의 아비는 마귀요 사람은 뱀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은 단절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에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시고 사람이 하나님께 연결되려고 그 어떠한 행동을 한다고 할지라도 불에 타서 죽을 수밖에 없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단절되니 사람은 두 가지 방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①인간 스스로 문명을 만들었던 라멕이나 바벨탑을 지었던 니므롯의 후손처럼 하나님 없이 하나님처럼 살자. 무신론이지요. ②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졌으니 다시 회복되도록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성을 다해보자. 이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출발이 하늘의 계시가 아니라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종교는 무신론보다 훨씬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데 바로 창세기 4장에서 종교를 만들었으니까요.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 저들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지 않았으나 하나님께 무언가 정성을 올려드림을 통해서 연결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제사가 없는 종교는 없는 것입니다.
제사란 정성 들여 신에게 무엇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고기 중에 제일 맛있는 고기가 무엇이지요? 제육. 제사 때 쓰는 고기가 제일 맛있기 때문에 제육복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밥 중에 제일 맛있는 밥이 제삿밥입니다. 그래서 제사하지 않았는데도 그 방법 그대로 지은 밥을 헛제사밥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제삿밥이 맛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섬에 있을 때 어부들이 가장 큰 고기를 잡으면 말려서 잘 보관해 둡니다. 제삿날 쓰려고 한 것입니다. 즉 제사는 최고의 정성을 들여 하늘의 하나님과 끊어졌던 관계를 회복하려는 인간의 충심이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심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노력에 하나님이 응답하셨으니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흡족히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끊어졌던 관계가 창세기 4장에서 회복된 것입니다. 그러면 아벨의 제단은 왜 받으셨을까요?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쫓겨날 때의 장면을 유추해 보면 답이 나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을 먹는 그 순간 인간은 죽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금하신 금단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장에 죽이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누구나 구원을 받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래서 사람을 땅으로 내쫓은 후에 회개의 기회를 주셔서 다시 교통하는 길을 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땅으로 사람을 내쫓으실 때의 일이 신묘막측합니다. 사람에게 양가죽 옷을 해 입히셔서 쫓아내신 것입니다.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양가죽 옷을 입으려면 양이 죽어야 합니다. 즉 양이 우리 생명의 대치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은 아내 하와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여보,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양이 대신 죽었소.” 피흘리고 죽은 양이 참으로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양이 대신 죽기만 했습니까? 양가죽 옷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세상 추위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가죽옷을 차려입은 아담과 하와는 양의 모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계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려면 나 대신 피 흘리고 죽어야 하는 대속물이 있어야 하고 그 제물의 모양을 닮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히브리서 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세 구절을 꼭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세상에 오셔서 피를 흘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대신 죽으신 대속물이 되셨고, 우리도 예수님의 옷을 입은 예수 생명, 부활 생명의 사람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의 예배는 예수님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가인의 예배 즉 종교의 제사인 것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즉 오늘날도 생명은 항상 종교에 짓밟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종교사업가, 종교도둑, 종교피해자가 연합된 멸망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불심판과 불지옥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비록 아벨은 종교에 목숨(혼)이 당했으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천국백성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의 집에 예수님이 초청받아 손님으로 들어가신 내용입니다.
마르다는 귀중한 손님이 오셨으니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예수님이 앉으신 자리가 잘 정돈되었는가? 집 구석은 청소가 잘 되었는가? 식사 준비는 제대로 되어서 예수님이 만족하실까? 예수님의 일행들이 편안히 앉을 자리는 있는가? 등등. 그런데 동생 마리아가 아무것도 안 하고 예수님만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도 “아멘 아멘”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뿔 딱지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한마디 합니다. 예수님 쫌 뭐라고 하세요. 저 혼자 일하고 있잖아요. 마리아가 잘못했다는 말입니다. 자, 이제 종교냐? 생명이냐? 실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고발하는 것은 마르다는 멸망의 덩어리인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 종교와 생명을 구분할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40절).
마리아가 “잘못했다.” 이렇게 판단하고 있다면 종교생활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의 시작은 동산중앙(즉 교회)에서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가인이 정성껏 농사지은 것을 바쳤는데 하나님이 안 받으셨으니 하나님이 나쁜 것이고, 하나님은 죽일 수 없으니 대신 아벨을 죽인 것이 종교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꼭 피해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강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의 일을 다루고 있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 이전인 사도행전 1장, 즉 성령을 받기 전, 교회가 시작되기 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어봅니다.
사도행전 1: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우리가 성령 받았을 때가 “이스라엘에 혁명이 일어나는 날입니까? 저 악한 나라 로마로부터 독립하는 날입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주십니다.
사도행전 1: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너희가 알 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악의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직 생명생활만 하라. 이 말씀입니다. 이후 사도행전 28장 끝까지 이르는 동안 교회는 한 번도 정치적 질문도, 일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기도하고 말씀만 전하는 생명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고(누가복음 6:27-28절) 위해서 기도하며, 나는 말씀을 공급받고 성령으로 충만하리라. 할렐루야!
2. 염려와 근심에 빠지면 종교생활입니다(41절).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성경은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앉으실 자리인 선악판단의 자리에 사람이 앉으니 앉은 자리가 항상 불안한 것입니다. 내려오자니 불안하고 앉아있자니 내 자리가 아니고... 그러니 염려와 근심에 빠지는 것입니다. 어서 그 자리에서 내려와 말씀을 공급받는 자리에 앉으십시오. 아멘은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요한계시록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아멘 아멘 예수 예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생명의 양식, 영의 양식을 공급받으십시오. 내 삶의 자리가 에덴동산이 될 것입니다.
3. 생명의 자리를 빼앗기지 마십시오(42절).
“중이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관심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다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라는 목양의 사명을 받습니다. 그러면 십자가 지고 세상으로 나아가면 되는 일인데 베드로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 머리를 기대고 식사하던 사랑받는 제자는 어떻게 되는지?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요한복음 21: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그가 죽던지 살던지 네가 왜 궁금하냐? 너는 오직 나를 따르라. 생명의 자리에만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먹는 자리를 뺏기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가 생명의 자리라면 뺏기지 마십시오. 마르다의 일도 훌륭합니다.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여 복을 받았고,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대접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했으니... 복 받을 자리요, 영광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고 생명을 공급받으십시오. 반드시 복을 받고 누림을 것입니다.
이후 마르다는 생명 공급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의 신앙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7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의 이 생명의 고백으로 오빠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으나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생명의 자리를 빼앗기지 마십시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아멘. 아멘. 예수. 예수. 죄에서 구원과 생명의 공급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을 줄 믿습니다.✝동문교회 강순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