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교단 소설가 문신수(4)
남해 문신수 자택에서 진주 소설가들이 회동한 이후 한 두어달 뒤 경남소설가회 발기 모임이 남해읍 식당에서 열렸다. 이때 문신수, 이재기, 정정대, 박주원, 김동민, 김현우, 조계자 등 10여명이 모여 정관 손질을 하고 공식 창립회의 일정을 잡았다. 이날 결정 사항은 초대 회장에 문신수, 사무국장에 이재기를 내정했다. 이때 문신수는 완강히 회장 자리를 고사했고, 회원들은 사정이 그러니 일은 이재기 국장이 도맡아 하는 것으로 하여 진행하겠으니 회징 이름만 붙여두게 해달라 간청하여 겨우 수락을 받아냈다.
그로부터 얼마후 2005년 11월 진주 평거동 냉면집에서 경남소설가회는 창립을 보게 되었다. 회장에 선출된 문신수는 "내가 아는 것이 없습니다. 많이 도와 주십시오. 연간 기관지도 내고 모임도 자주하여 작품 토론회도 하고 친목도 도모하십시다. 감사합니다."하고 짤막한 취임사를 했다.이날 참석회원은 문신수, 이재기, 조계자, 박주원, 표성흠, 김동민, 정정대, 이경수, 이상태, 전용진, 김진환, 문갑연, 박태갑, 김현우 등이었다. 이날 회의를 마친 뒤 진주 시외바스 터미널 맞은 편에 있는 노래방에 갓는데, 회장은 노래에는 흥미가 안나는지 불참하고 남해행 버스를 탔다. 그 다음날에 사무국장 이재기가 발병하여 입원하게 되었다. 소설가회가 잠시 휘청거렸다.
이재기는 문신수를 생각하면 고향 성주의 선배 소설가 박완을 떠올린다고 한다. 1961년 문신수가 소설 <백타원>으로 '자유문학'에 추천을 받을 무렵 그 비슷한 시기에 박완의 <배무족>도 추천으로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이때 이재기는 군대에 있었다. 인제군 남면에 있는 제1병참단 21병참대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지금 소양강댐으로 수몰되었다. 이재기에게는 힘드는 군대생활, 병참대, 소양강댐만 생각하면 늘 문신수와 박완이 세트로 떠오르곤 한다는 것이다.
경남소설가회 창립 이후 인근의 문학제때의 일이었다. 이재기는 그 사무 책임자에게 "소설행사를 하면서 경남소설가회의 회장을 초청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지역 원로를 챙길 때 그 행사는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하고 지적을 해주었다.그후 진주 봉곡동 성당에서 이재기 소설 <낙제생> 출판기념회가 있을 때 문신수는 참석하여 회장으로서의 축사를 했다. 기념연 자리에서 문신수는 이재기 부인에게 "내조를 잘해 주셔서 좋은 작품 출판하게 된 것을 축하 드립니다."하고 깎듯이 예의를 차렸다.
문신수의 아우로 문중근(전직 교사)이 서울에 살고 있는데, 전화로 인터뷰 요청을 하자 흔쾌히 응해 주었다. "저는 언제나 형님을 귀감으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각고면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우리 형님을 위해 있는 말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옛날 소학교 출신으로 늘 일등만 했고, 자학자습을 하여 교사가 되고, 또 일류 교사가 되었습니다. 원래 형님은 남상리에 있는 '성명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나중에 그 학교는 면소재지 이전에 따라 서상리에 옮겨 앉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상리 시절에 학교를 다녔지요."
문중근은 이어"형님 문신수는 효심이 지극하여 우리는 늘 따라하면 되었어요. 어릴적 일인데 노인들이 동실에서 효자 효부상을 준다면 마을에서 누구를 줄 수 있을까,하고 논의를 하는 가운데 효자로 문신수를 거론하게 되었지요. 그 자리에는 문신수의 부친이 자리를 하고 있어서 이 말을 집에 와 형님에게 전했지요.그러자 형님은 길길이 뛰면서, 천부당 만부당하다고 소리쳤어요. 형님은 '아버지, 효도나 효심이라는 것이 어디 칭찬하는 것입니까? 자식된 도리는 칭찬한다고 하고 칭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후부터 문신수에게 효자 논의 하는 것을 동실에서는 중단하게 되었다고 해요."
문중근에 의하면 문신수는 병중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틈만 있으면 지게를 지고 산으로 들로 나가 짐을 졌다는 것이다. 퇴직하고 나서 고령의 아버지를 위해 예사로 지게를 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시절 지게를 지는 등 주경야독하여 교원 시험에 응시했던 농촌에서의 전천후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문신수는 그냥 보면 뽓뽓하여 체질이 약한 것으로 보이지만 내실로는 강골이라 할 수 있었다.문중근은 "약해 보이는 형님은 언제나 '조선어책'을 들고 다니셨어요. 일제 강점기에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꼼짝달싹 하지 못할 때 형님은 위태할 정도로 손에는 조선어책, 연필로는 우리말 일기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어요."하고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