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살아 숨 쉬는 현실로 재구성하는 작업. 파편처럼 남아 있는 유물을 근거로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찾아가는 여행.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던 '곰 나루터(웅진)' 공주를 둘러보는 일정은 행간에 숨어 있는 백제의 숨결을 느껴보는 과정이었다.
금강 품은 백제 대표 성곽 공산성
왕궁터·누각 등 걸음마다 역사 향기
도굴로 점철된 백제문화재 수난 속
무령왕릉 발견은 학계 최대의 쾌거
유물 4천600여 점 공주박물관 보관
송산리 고분군 모형전시관 볼거리
전통문화 체험 한옥마을도 눈길
■산책길 같은 공산성 답사 코스 첫 번째 코스로 잡은 공산성.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에 밀린 백제가 도읍지 위례성(현 경기도 하남시)을 버리고 남쪽으로 옮겨 정착한 곳이다. '물결이 비단처럼 아름답다'는 금강을 천연 요새로 삼아 쌓은 성이다.
먼 길을 달려 찾아간 공산성. 매표소 앞에는 '무료 개방'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백제 유적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을 자축하는 분위기다.
공산성 답사의 출발점인 금서루. 푸른 숲이 우거진 언덕 위에 석축을 쌓아 올려 공산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누각이다.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간 금서루 앞에는 수학여행 온 초등학생들이 줄을 서 있다. 공산성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위력일까.
시원한 고개 바람을 맞으며 오른쪽으로 10여 분 걸어가면 진남루가 나온다. 웅진 백제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하지만 남은 유적이라고는 주춧돌밖에 없다. 안타까운 마음에 동쪽으로 500m가량 걷다 보면 임류각에 도착한다. "왕궁 동쪽에 연못을 파 기이한 새를 길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소다. 하지만 이곳 역시 옛 모습을 찾아볼 길이 없다.
|
국립공주박물관 전경. |
허전한 가슴을 안고 금강이 흐르는 쪽으로 5분가량 걸어가면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공북루에 도착한다. 해발 110m. 공산성 답사의 마침표를 찍는 곳이다. 40여 분만에 끝난 답사길. 가벼운 산책길에 가까운 코스다.
공북루에서 바라본 금강 너머에는 고층 아파트촌이 펼쳐진다. 쇼핑센터를 비롯한 각종 편의시설이 집중된 그곳을 공주 사람들은 '강북'이라 부른다. 서울과 달리 공주는 강북이 '부촌'이라고 했다.
"백제가 금강을 1차 방어선으로 삼아 강 남쪽에 터를 잡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보호할 문화재가 적은 강북 지역을 신도시로 개발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선자 문화해설사의 열띤 설명에 아이들은 지겹다는 표정이다. 오히려 금서루 건너편 언덕에 있는 학교가 박찬호 전 메이저리그 투수가 졸업한 중학교라고 설명에 관심이 쏠리는 분위기다. 심각한 것을 싫어하는 세태 때문일까. 아니면 역사 교육이 부족한 탓일까.
|
송산리 고분군 모형 전시관. |
아쉬운 마음에 두 번째로 찾아간 송산리 고분군. 백제 왕릉 7개가 모여 있는 곳이다. 무덤의 주인을 몰라 일련번호가 매겨진 1~6호 고분과 무령왕릉이 있는 지역이다. 푸른 잔디밭에 깨끗하게 단장한 모형전시관으로 들어가면 캄캄한 지하를 밝혀주는 불빛 아래 벽돌로 정교하게 쌓은 공간이 펼쳐진다. 자세히 살펴보면 벽돌 하나하나에 연꽃이 새겨져 있다. 사치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예술적 감각을 예민하게 살린 작품이다. 무려 1천 500여 년 전에 만든 백제 왕릉. 이처럼 호화로운 분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을까. 잠시 상념에 잠기는 순간,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은 국립공주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
송산리 고분군 인근 연못. |
모형관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국립공주박물관. 황금 관장식과 금귀고리, 금목걸이. 산수 무늬가 정밀하게 새겨진 은잔과 '다리'라는 공예가의 이름이 새겨진 은팔찌 등등. 그냥 보기에도 눈이 부신 문화재다. 하지만 국립공주박물관 전체가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로 가득 찬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백제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 무령왕릉 이유를 물으니 1~5호 고분은 일제강점기에 도굴을 당했고 6호 고분은 1932년 공주고보 교사였던 카루베 지온이 발굴한 유물을 개인 몫으로 빼돌린 다음 이미 도굴당한 것으로 위장하는 바람에 남은 유물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런 일제 강점기에 무령왕릉이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1971년 6월. 집중호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배수로 공사를 하던 인부의 삽에 부딪힌 벽돌을 단서로 시작된 무령왕릉 발굴 작업. 우리 역사학계에 무려 4천600여 점에 달하는 유물을 안겨준 쾌거였다.
"이처럼 눈부신 문화재들이 무령왕릉에서 발견될 당시 모습 그대로 현장에 보존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문화재는 본래 있던 그 자리에 놓여 있어야 빛을 발한다"고 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석학, 존 듀이도 "문화재를 전시해 놓은 박물관은 '문명의 미장원'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박물관에서나마 우리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어딘가. 도굴범들의 손에 넘어가 행방조차 모르는 문화재가 숱하게 많은 마당에.
|
공주 한옥 마을. |
벅찬 가슴을 안고 국립 공주 박물관을 빠져나오면 큰길 옆으로 공주 한옥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활을 쏘는 궁터와 다도 문화관 등 전통 체험시설들이 고루 갖춰진 마을이다. 한옥 마을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연못이 있다. 분홍색 연꽃이 흐드러진 연못이다.
도굴과 약탈로 점철된 치욕스러운 역사를 딛고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백제 문화 유적지. 힘든 세월을 버텨낸 저력을 진흙탕 속에서 맑은 꽃을 피워내는 연꽃에 비유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글·사진=정순형 선임기자 junsh@busan.com
여행 팁
■교통편 부산에는 공주까지 직통하는 대중교통편이 없다. KTX는 충북 오송역(2시간 소요. 4만 1천200원)에서 호남선으로 갈아타서 공주역(15분 소요. 8천 원)으로 가면 된다. 시외버스는 부산종합버스터미널에서 세종시(3시간 40분 소요. 1만 1천 원)로 가서 공주행 버스(30분. 1천800원)로 갈아타면 된다. 자가운전을 하려면 대구부산고속도로를 타고가다 동대구 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옮겨 탄 다음 유성분기점에서 당진영덕고속도로로 갈아타면 된다. 약 4시간 소요. 도로사용료 2만 600원.
■먹거리 공주에는 신선한 채소를 이용한 쌈밥(사진)이 유명하다. 상추와 양배추 치커리 깻잎 풋고추 등이 푸짐한 쌈밥 한 상이면 부러울 것이 없다. 게다가 밥상에 오른 쌈들이 모두 유기농으로 재배되었다니 더욱 신뢰가 간다. 고마나루 돌쌈밥. 1인분 7천 원. 041-857-9999. 정순형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