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즐기는 발레 공연의 최고 레퍼토리는 역시 '호두까기 인형'(러시아어로는 '쉘쿤치크' Щелкунчик)이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도 12월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신년 맞이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무대에 올리는데, 최정상급 무용수들이 총출동한다. 연말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세계 최고의 무대다. 1년을 기다린 러시아인들은 이 무대를 함께하기 위해 지난 수십년간 티켓 확보에 목을 매곤 했다.
볼쇼이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한 장면/사진출처:볼쇼이 극장 홈페이지
그러나 신종 코로나(COVID 19) 사태는 볼쇼이 극장의 연말 풍경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코로나 사태 당시, 사회적 격리조치로 볼쇼이 극장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백신 접종 QR코드(우리 식으로는 백신 패스)가 필요했고, 그러다보니 그간의 온라인 예매가 중단됐. 볼쇼이 극장 예매 창구로 한꺼번에 사람이 몰린 것은 누구나 예상 가능했다.
특히 2021년 11월에는 볼쇼이 극장 앞에 '티켓 전쟁'이 벌어졌다. 예매 첫날 볼쇼이 극장은 혼잡에 따른 안전 사고 예방을 위해 티켓 판매를 중단했고, 현장 질서를 확보한 뒤 밤 11시에, 그것도 예약 번호표를 나눠줘야 했다. 당연히 암표상들도 판을 쳤다. 2021년 연말 발레 공연의 티켓 가격은 1,500루블(당시 환율로 2만4천원)에서 1만5,000 루블(24만원)까지 다양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볼쇼이 극장은 연말 '티켓 전쟁'을 막기 위해 획기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12월 31일 무대에 오르는 '호두까기 인형'을 역사상 처음으로 생중계하고, 티켓 판매에 '경매 방식'을 도입하기로 한 것.
'호두까기 인형'은 설명이 필요없는 고전 발레의 대표작이다. E.T.A(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 인형과 쥐의 왕'을 바탕으로 러시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와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가 만든 작품. 차이코프스키의 아름다운 음악과 화려한 춤, 마법 같은 사랑 이야기로 1892년 초연된 후 지금까지 연말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스테디 셀러'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호두까기 인형'(실제로 이 인형으로 호두를 깐다)을 선물 받은 소녀 '클라라'가 왕자로 변신한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 과자의 나라로 모험을 떠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발레다.
렌타.ru와 가제타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볼쇼이 극장은 25일 연말 티켓 판매 방식의 변경 사실을 알리는 한편, 새해맞이 '호두까기 인형'의 공연을 생중계하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연말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생중계와 티켓 판매 방식 변경을 알리는 볼쇼이 극장 공식 텔레그램 채널/캡처
볼쇼이 극장의 공식 텔레그램 계정은 “새해를 맞아 역사상 처음으로 발레 '호두까기 인형'이 공개 생방송된다"며 "볼쇼이 발레 공연을 현장에서 직관할 수 없는 러시아 전역의 오지 마을은 물론, 전 세계 어디에서나 러시아 발레 팬들은 '호두까기 인형'을 즐길 수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생중계 방식과 시청 루트 등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추후 공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볼쇼이 극장의 공연 무대 중계는 사실상 이번에 2번째다. 코로나19 사태 당시, 유튜브를 통해 주요 작품을 공개한 바 있다.
볼쇼이 극장은 지난 2020년 3월 중순 당국의 사회적 격리 조치로 문을 닫으면서, '방콕'하는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주요 발레및 오페라 작품을 온라인으로 시청할 수 있도록 공개했다. 1776년 볼쇼이 극장 설립 이후 처음으로 2020년 3월 27, 28일 유튜브를 통해 '온라인 공연'을 진행한 것이다. 당시 첫 온라인 공개는 모스크바 시간으로 오후 7시(한국시간으로는 이튿날 새벽 1시) 유튜브 볼쇼이극장 계정을 통해 이뤄졌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극장도 유튜브 '온라인 공연'에 동참했다. 볼쇼이극장 측은 첫 온라인 공개 기간에 140개국에서 300여만 명이 접속했으며, 총 650만 클릭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국내 발레팬들의 관심도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볼쇼이 극장의 올 연말 '호두까기 인형'의 생중계는 전세계적으로 더 큰 관심을 받을 게 틀림없다. 러시아 출신 세계적인 무용수들이 '연말 발레' 공연에 총집결하기 때문이다. 또 코로나 사태 당시의 '온라인 공개'와는 다르게, 볼쇼이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도 직접 느낄 수 있다.
달라진 볼쇼이 극장의 티켓 판매 방식은, 공급에 비해 수요가 과도한 연말 공연의 시장 동향에 맞춘 자구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참전자 등 국가 유공자들에게 일정 분량을 미리 할당하고 남은 티켓을 판매하다 보니 다양한 판매 방식의 도입은 불가피해 보인다.
이에 따라 연말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티켓은 볼쇼이 극장 공식 홈페이지에서만 구매 가능하며, 현장 매표소에서는 구할 수 없다. 일부 티켓은 '경매'을 통해 판매되는데, '호두까기 인형' 티켓은 2장에 10만 루블(약 140만원)로 경매가 시작된다고 한다. 2021년 연말 티켓 최고 가격 1만5,000 루블(당시 환율로 약 24만원)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비싸다. 이렇게 비싼 가격으로 팔린 티켓 판매 대금의 일부는 볼쇼이 극장의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고 볼쇼이 극장 측은 밝혔다.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사진출처:극장 홈페이지
하지만 현지에서는 '경매' 방식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터져 나온다. "돈없는 사람은 볼쇼이 발레도 즐기지 못하느냐?" "소비예트(소련) 시절이 지금보다 나았다"는 반응들이다.
볼쇼이 발레는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스크린이나, 디지털 플랫폼 등으로 저변을 넓혀왔지만, 연말 '호두까기 인형'을 모스크바 생중계로 본다니, 세상이 변하기도 엄청 변했다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