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전력질주
멈춰도 돼, 어차피 내인생이니까”
[자기주도진로] ‘서늘한 여름밤’
웹툰작가 이서현씨
# 고교시절부터 대학, 대학원을 거쳐
종합병원 임상심리전문가 수련과정에 들어가기까지 10여 년간 숨 돌릴 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 나라에선 다들 그렇게 사니까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10년 노력의 결실인 첫 직장에서 일이 행복하지 않아 3개월 만에 나왔다. 퇴사 후 심리 상담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년여만에 팔로어 8만명의 웹툰 작가가 됐다.‘서늘한 여름밤의 내가 느낀 심리학 썰’ 웹툰작가
이서현(30)씨 이야기다.
“중학교 때 두 가지 일화가 있어요.
급식이 너무 형편없어 불만이 많았는데 제가 직접 설문지를 만들어 교문 앞에서 학생들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죠. 조사결과를 선생님께 전달하고
급식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던 일이 있어요. 물론 급식 메뉴가 바뀌지는 않았어요. 또 학교 수련회를 안 가는 대신 가족여행을 간 적도 있었어요.
수련회 때 교관이 단체기합을 실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어머니가 굉장히 불쾌해하시면서 학교에 항의전화를 하셨어요. 저희 가족문화가 좀 특별했던
것 같아요.”
고교시절에는 한술 더 떠 제주도를
떠들썩하게 한 이슈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제주외고는 중간·기말고사에다 사이사이 모의고사까지 유난히 시험이 많았다. 서현씨는 선생님께
시험을 줄여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 이 사안을 제주도교육청에 신고했다. 결국 교장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사과를 하는 것으로
사태가 마무리됐다. 어른들의 눈으로 볼 땐 한마디로 ‘공부 잘하지만 되바라진 학생’이었다.
“공부 못하면서 자기주장을 하면 아무도 제
이야기를 안 들어줄 것 같아서 기를 쓰고 공부했어요. 실력도 없으면서 자기주장만 하는 아이라는 이야기는 듣기 싫었거든요. 학교든 사회생활이든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죠. 무조건 부당한 제도를 따르던가, 능력을 갖추고 당당하게 주장하든가.”
어릴 적부터 ‘심리’에 관심이 많았다.
2007년 고려대 심리학과에 입학했고 대학원에서 임상심리 및 상담을 전공했다. 임상심리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종합병원에서 3년의 수련과정을
거쳐야 했다. 수업 듣고 아르바이트 하고 학원 다니고 봉사활동에 동호회 활동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대학시절을 보낸 것은 물론, 해야 할
공부가 많았던 대학원에선 1년 중 열흘만 빼곤 학교에 나갔었다. 노력의 결과 2015년 1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기업계열 종합병원 임상심리
전문가 수련과정에 합격했다.
“종합병원 수련과정은 의과대학의 레지던트
과정과 비슷해요. 조직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던 저는 군대 같은 강압적인 조직문화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어요. 일단 말투부터 비인격적인 느낌이
들었어요. 힘들게 작업한 문서를 상사의 마음에 들지 않는 글씨체라는 이유로 다시 작업해오라고 하는 등 불합리한 일들이 많았어요. 상사의 눈치를
봐야하고 절대 튀면 안 되고 남성중심의 조직생활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저로선 압박감이 심했죠. 저는 그런 걸 못 견디는 사람이었고 결국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나왔어요.”
꾹꾹 참고 3년 수련과정을 거치고 나면
정신보건 임상심리사 1급 등 전문가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다. 지난 10년간 이 자격을 얻게 위해 힘들게 공부했지만 스스로 기회를 걷어찬
것이다. 부모님은 역시나 ‘쿨’ 하셨다. “네가 노력해서 들어간 직장인데 그만두는 것도 너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그만뒀을
때, 즉 10년 동안 전력질주하며 이루고자 했던 하나의 목표가 사라졌을 때 서현씨의 심리상태는 어땠을까.“반반이었어요. 지금까지 굉장히
불안해하면서 기를 쓰고 노력하면서 살아온 결과가 이건데 그냥 될 대로 한 번 살아보자 하는 마음과 뭘 해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살겠지 하는 마음,
둘 다 있었어요.”
‘백수’가 된 이후 서현씨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생겼고 그림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대학시절 3개월간 그림을 배운 적이 있었고 직장을 그만둔 이후 1년 동안 꾸준히
그리다보니 실력도 차츰 늘었다.‘서밤(서늘한 여름밤)’블로그를 열고 처음엔 직장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그린 그림을 올렸다. 공감하는 이들이
조금씩 늘면서 블로그엔 심리상담 전문가 수련생들의 애환이 쏟아졌다. 페이스북 페이지 ‘서늘한 여름밤의 내가 느낀 심리학 썰’은 청년들의 심리
문제로 소재가 확대했고 취업준비로, 혹은 나쁜 조직문화 때문에 상처받은 2030세대에게 단숨에 인기 콘텐츠로
떠올랐다.
“기본적으로 ‘서늘한 여름밤’은 제
일기라고 생각합니다. 시작할 때부터 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가 컸어요. 다른 사람들이 SNS를 하는 이유와 같은 거죠.‘나는 이런
생각을 해’라고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거죠. ‘서늘한 여름밤’이라는 이름은 제가 원래 서늘한 여름밤을 좋아해서
그렇게 지었어요. 제 성격도 서늘한 여름밤처럼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
그해 7월부터 서현씨는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자살예방관련기관에서 계약직 연구원이 된 것이다. 담당했던 업무는 자살자 유가족을 만나 고인이 왜 자살에 이르렀는지 데이터를 수집하고
관련 논문을 리서치해서 분석하는, 사회과학 연구원들이 흔히 하는 일이었다.
“우리 사회는 구조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개인의 행복이나 삶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만들어낼 존재로서만 교육받고 취급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당연히 개인의 삶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거죠. 수많은 직장인들이 매일 밤 11시에 퇴근하는 것이 현실인데 그런 그들이 과연
행복할까요.”
낮엔 직장인으로 일하면서 밤엔 그림 그리는
일을 1년 반 동안 병행하다 지난해 말 직장을 그만뒀다. 일하고 싶은 회사가 없다면 스스로 회사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올초부터 창업 준비에
들어가 조만간 서울 용산구에 상담센터를 열 계획이다. 물론 ‘서늘한 여름밤’ 작업은 더 열심히 하고 있다. 올초부터 페이스북 업로드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5월엔 블로그에 올린 그림들을 엮어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 책도 출간했다. 그렇게 ‘서늘한 여름밤’은 3년째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며 7월 현재 페이스북 구독자가 8만8600명에 이르는 ‘핫한’콘텐츠로 떠올랐다.
“블로그를 하다보면 ‘상담센터 어디를 가야
되느냐’는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아요. 아직 우리나라는 상담센터나 정신과에 가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만연하죠. 상담센터도 믿을 만한 지인에게
은밀하게 묻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처음엔 지인과 내담자로부터 추천을 받아 전국의 좋은 상담센터 지도를 만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지도에
나오는 센터의 상담선생님들을 다 만나보진 않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내담자를 소개할 수가 없더군요. 이럴 바에야 내가 믿는 상담 선생님들을 모시고
직접 상담센터를 운영해보자는 생각에 이르렀고 현재는 이 일이 그 어떤 다른 일보다 내가 더 열심히 하고 싶은 일이 된
거죠.”
이 시대 청소년들은 불안하다. 정해진
길에서 한 치라도 어긋나면 낙오된다는 생각이 아이들을 옥죈다. 청소년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다. 서현씨는 그런 청소년들에게 두 가지를
조언했다.
“첫번째로 어른을 너무 믿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어른도 잘 모른다는 거죠. 제가 어른이 돼보니까 나도 모르겠더라구요. 어른도 자기 삶밖에 모르는 거예요. 두번째는 인생이란
게 쉽게 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많은 중고생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원하는 고등학교, 대학교 못가면 망할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걸로
인생이 망하진 않아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잘 챙기고 돌보는 연습, 뭐가 나를 기쁘게 하는지 내가 뭘 싫어하고 뭘 좋아하는지를 놓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서늘한 여름밤의 내가 느낀 심리학 썰’
웹툰의 주인공이자 작가 자신을 표현한 ‘서밤’캐릭터.
글_
김은혜 에디터
출처_ 꿈트리 Vol.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