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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삶의 크레센도, 디크레센도/대상 11:1-9
1. 온 이스라엘이 헤브론에 모여 다윗을 보고 가로되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2. 전일 곧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가 왕이시었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니 다윗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 여호와께서 사무엘로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
4. 다윗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예루살렘 곧 여브스에 이르니 여브스 토인이 거기 거하였더라
5. 여브스 토인이 다윗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나 다윗이 시온산 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6. 다윗이 가로되 먼저 여브스 사람을 치는 자는 두목과 장관을 삼으리라 하였더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먼저 올라갔으므로 두목이 되었고
7.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한고로 무리가 다윗성이라 일컬었으며
8.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두루 성을 쌓았고 그 남은 성은 요압이 중수하였더라
9.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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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동휘목사(평강교회)
-Live Life in Crescendo!-
(삼하 3: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1. 음악용어에 ‘크레센도’(Crescendo)라는 게 있습니다.
처음은 약하게 음을 내다가 차차 커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센 소리를 차차 여리게 내는 것을 ‘디크레센도’(Decrescendo)라고 합니다. 음악적으로 ‘크레센도’가 효과적일 때도 있고, ‘디크레센도’가 더 효과적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디크레센도’보다 ‘크레센도’의 삶이 아름답고 복된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땐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있었는데, 사회에 나가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 그는 ‘크레센도’의 삶을 사는 게 아닙니다. 점점 발전하는 삶이 ‘크레센도 인생’이라면 그 삶이 퇴보하는 것은 ‘디크레센도 인생’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크레센도 인생’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B.C. 1050년경,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다른 나라들처럼 자신들을 다스리고 앞에 나가 싸워줄 왕을 요구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이때 등장하게 된 인물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아주 잘 생긴 젊은이였습니다. 그보다 준수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남들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더 컸습니다. 도덕적으로도 암나귀를 찾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온 땅을 두루 다닐 정도로 효성이 지극한 청년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왕을 요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없이 이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이 이러한 사울을 만나기 전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어 세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사울을 만나게 되었을 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스라엘의 장래가 그대 손안에 있습니다.’ 하자 사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사람이며 그 지파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입니다. 어찌하여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참으로 지도자로서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러한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그분의 백성을 다스릴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성령이 크게 임하게 하셔서 그를 변화시켜 새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후 사무엘이 온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잘 보십시오. 최고입니다. 온 나라에 이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열광적으로 함성을 지릅니다.
‘우리 왕 만세!’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사울과 함께한 진실하고 용감한 사람들도 사울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불량배들은 자리를 뜨면서 투덜거렸습니다.
‘구원할 자라고? 웃기지 마라!’
그들은 사울을 업신여겨 축하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들에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삼상8-10장)
바야흐로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고, 사울이 백성들에게 군사 원정을 통해 길르앗 야베스를 구하자고 소리를 높였을 때, 백성들은 한 사람도 우물쭈물하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그에 응했습니다.
즉위식 때 보여 주었던 충성심 그대로 어떠한 위험 속이라도 그를 따르겠다는 각오를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군사 활동, 즉 암몬으로부터 길르앗 야베스를 구해 내는 일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암몬에 이어 블레셋 족속을 패배시키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은 점차 사울이 장군으로서 탁월할 뿐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훌륭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에 승리한 직후, 열광적인 충성심으로 사울을 추종하던 무리는 전에 그가 왕으로 뽑힌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쓰레기 같은 놈들’을 다 쓸어버리자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은혜와 관용의 정신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사울은 어떤 적과 싸우든 그들보다 우월했고 연승을 거두었습니다.
(삼상14:47-48)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사울이 그의 통치 2년부터 서서히 몰락해가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울이 비록 지도력과 매력을 겸비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음을 보여 주는 모습들이 증거들이 발견됩니다.
이에 대한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이 두 사건 모두가 예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하자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전쟁 선전포고로 받아들여 전면전으로 나섰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집결시켰는데 전차가 3개 부대, 기병이 6개 부대, 보병은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았습니다.
이러한 블레셋 군대를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적으로 훨씬 열세여서 큰 위기를 깨닫고 모두 뿔뿔이 흩어져 숨어들고 도망치는 피나민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허나 그와 함께한 군사들도 몹시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때 사울은 백성들의 동요를 막아 더 이상 흩어지지 않게 하고 전쟁 승리를 기원하고자 사울 자신이 주도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전투를 준비시킬 목적으로 임의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나라의 통치자이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에 따라 아무리 사태가 급박해도 정하신 때에, 정하신 사람 사무엘에 의해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사울이 막 예배를 마치자 사무엘 선지자가 도착했습니다.
정한 예배 시간에 딱 맞추어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사태를 알게 된 사무엘이 사울에게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이렇게 책망합니다.
이에 사울이 대답합니다.
‘내 수하의 군대는 줄어들고 있는데 제사장께서는 온다고 한 때에 오시지 않고 블레셋 군대 총공격태세를 갖추고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것 같아서 부득불 제가 직접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같은 사울의 행동을 보면, 사울의 우선적인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음을 드러내는 행동이었습니다.
사울의 눈에는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사울은 일을 잘 하려고 노력했고, 일을 잘 하고 좋은 왕이 되는 방편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은 완전히 본말이 전도된 행동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하나의 수단으로, 하나의 방법으로 대우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 의해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왕으로서 정치하는 일에만 빠져서 자신이 주연이고 하나님은 조연으로 여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의 일을 위해 예배가 도구화되는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배를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는 결국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합니다.
“왕이 망령되게 했습니다. 주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왕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왕과 왕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주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왕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주께서 왕에게 명하신 것을 왕이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주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을 폐위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를 왕으로 세우셨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사건은 아말렉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모든 짐승과 더불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약 500년 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약속은 출애굽기17:13-16입니다.
(출17:13-16)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고 하신 이유는 신명기25:17-19입니다.
(신25:17-19)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사막을 지날 때, 아말렉 족속이 비겁하게도 피곤하여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공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약하신대로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말렉 왕은 살려주고 좋아 보이는 가축들을 숨겨두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사울 왕에게 “(삼상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고 추궁하자 솔직하게 죄악을 시인하고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예물로 바치고자 살려두었다며 궁색한 변명을 일삼았습니다.
아말렉과 그 모든 소유물을 완전히 파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쓰려고 가장 좋은 짐승들은 죽이지 않고 남겨 두었다고 변명한 것입니다.
예배를 핑계로 삼아 자신의 죄악을 덮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에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상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렇게 해서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새 왕이 될 사람을 벌써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사울은 두 사건을 통해 몰락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빙자하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든 사울의 삶은 황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삼상16: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주의 영이 임하여 그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그를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삼상10:6-9)
그러나 주의 영이 떠나간 사울의 정신과 정서는 혼돈에 빠져들었습니다. 왕이 되어 그 맡은 일이 아무리 크게 보여도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예배와 일치되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사울처럼 몰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몰락하게 되는 것입니다.(삼상15:24)
하나님보다 사람과 일이 더 크게 보이면 몰락하게 되지만, 하나님이 사람과 일보다 더 크게 보이면 점점 강성하게 됩니다. 사울은 자신의 주권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을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세상만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왕직을 맡기실 때 기름부음을 부으셨고, 또한 주의 영, 성령을 부어주셔서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지상 사역을 시작하실 것과 그 사역이 어떤 것인지를 선언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러나 사울의 삶에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이미 마음에 사울을 폐위시키시고 하나님 마음이 합한 자,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차기 왕으로 세우셨습니다.(삼상16:12-13)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게 되자 하나님의 영이 급한 바람처럼 다윗 안에 들어가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와 함께 하시며 큰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삼상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이스라엘의 왕은 겉으로 볼 때 여전히 사울이 왕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울이 모르는 사실이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사울 왕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삼상16:21-23)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 또 사울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원하건대 다윗을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사울은 다윗을 보자 첫눈에 그가 마음에 들어 자신의 오른팔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우울증이 사울을 괴롭힐 때마다 다윗이 하프를 연주했습니다. 그러면 사울은 진정되었고 어둡고 우울한 기운이 걷히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다윗의 영성(靈性)이 시작된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성령이 떠난 자를 치유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다윗과 함께 하시어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시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다윗은 ‘왕을 섬기는 왕’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울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는 받은 사명을 망쳐 버렸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망쳐 놓은 그 일을 바로잡으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 후 20여년 동안 왕으로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 20년 동안 그는 왕 같아 보이지 않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한 첫 번째 일은 나쁜 왕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후 사울 왕의 궁전에 들어가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 종이 되는 것과 왕이 되는 것은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종으로서의 섬김’이 단순히 왕으로서의 통치를 위한 수련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의 총수의 아들(따라서 차기 총수)로 하여금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배우게 하기 위해 회사의 가장 밑바닥 일부터 해 보도록 하는 경우와는 달랐던 것입니다.
다윗에게, 종으로서 섬기는 일은 그 자체가 이미 왕으로 통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종인 동시에 왕이었습니다. 사울의 궁정에서 다윗은 왕을 섬기는 왕이었던 셈인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만왕의 왕이시지만 섬김을 받으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왕이시지만 사람을 왕같이 섬기러 오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종의 형체로 사람을 섬기셨습니다. 사울은 성령이 떠나므로 왕이었지만 왕의 일, 즉 왕업(王業, kingwork)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섬기는 일을 하고 있지만 왕업을 행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악사(樂士)요 ‘무기든 자’로 임명되었지만(삼상16:21-23) 궁중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궁중과 집을 왕래하면서 부친의 양을 돌보는 일을 함께 수행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의 하프 연주로 치유되어 정상인으로 회복되면 집으로 돌아와 부친을 도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나라의 왕이 시원치 않은 상태에서 블레셋이 믹마스 전투에서 패배를 설욕하고자 최대, 최고의 병력을 준비하여, 그리고 최고의 장수 골리앗을 앞세워 도전장을 던집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진영을 향해 소리칩니다.
‘너희 군대를 굳이 다 동원할 필요가 있겠느냐? 블레셋은 나 하나로 충분하다. 너희는 다 사울에게 충성하는 자들이니 너희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용사를 골라 나와 대결하게 하라. 만일 그가 나를 쳐죽여 이기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다. 그러나 내가 그를 쳐죽여 이기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서 우리를 섬겨야 한다. 내가 오늘 도전장으로 던지니 어서 사람을 내보내라. 어디 한 번 끝장을 보자!’
이에 사울과 온 이스라엘은 그 블레셋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겁에 질려 크게 낙심합니다.
바로 이때 목동으로 집에서 일하던 다윗이 등장합니다. 아버지 집과 사울에게 왕래하다 이와같은 급박한 상황을 보고 다윗이 사울에게 말합니다
. ‘왕이시어, 낙담하지 마십시오. 제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겠습니다.’(삼상17:32)
다윗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향해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렇게 외치고 달려 나가 물매에 돌멩이 하나를 걸어 날렸습니다.
다윗의 물매를 떠난 돌멩이는 골리앗의 이마에 정확하고 깊에 박혀 버렸습니다. 골리앗을 외마디 비명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맥없이 쓰러졌습니다. 다윗에게 칼과 창과 단창은 필요 없었습니다. 다윗은 곧장 달려가 골리앗을 목을 밟고 골리앗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삼상17:45-51)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노라’(in the name of the LORD Almighty)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나간다는 뜻입니다. 이 전쟁에서 보면, 분명 사울이 왕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다윗이 왕업을 수행하여 나라 민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이 일로 사울의 인기는 날로 하락하고 다윗에 대한 인기는 날로 상승하게 되어 이를 시기한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하자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더욱 다윗을 향한 사울의 두려움은 커져만 갔고 결국에는 다윗을 증오하게 됩니다.(삼상18:29-30)
성령이 떠나 이미 제정신이 아닌 사울은 그후 전국에 걸쳐 다윗 체포 및 살해명령을 내리고 다윗을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수차례에 걸쳐 주어졌지만, 다윗은 이렇게 말하며 사울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삼상26:23-24) “주께서 각 사람에게 그 공의와 진실을 따라 갚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오늘 왕을 나의 손에 넘겨 주셨지만, 나는, 주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께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왕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겼던 것과 같이, 주께서도 저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시고, 어떠한 궁지에서도 저를 건져 내어 주실 것입니다”
.
한편,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그 요나단이 자기 아버지 사울이 충신, 다윗을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며 항의하고(삼상20:31-34) 사울 왕가의 후계자로서의 특권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됩니다.
(삼상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사울 왕은 결국 블레셋과 전쟁에서 아들 요나단과 함께 비참을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삼상31:9-10)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지 아니하고, 예배를 구실로 자신의 죄악을 변명하며 하나님을 이용하려했던 사울은 ‘디크레센도’(Decrescendo)의 인생, 점점 몰락해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3. 오늘 본문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통치한 기간은 40년이었습니다. 헤브론에서 7년간 통치했고 예루살렘에서 33년을 통치했습니다.
(대상29:26-27) “이새의 아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간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을 다스렸더라.”
다윗이 왕이 되었지만 처음 7년간은 헤브론 지역만을 통치하는 반쪽짜리 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장차 통일왕국의 수도가 될 예루살렘,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성전이 세워질 예루살렘은 정복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 예루살렘은 여부스 족의 거주였는데 여호수아도 정복하지 못했었습니다.(수10:6-43)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여부스 족과 함께 거주했습니다.
(수15:63)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삿1: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이렇게 팔레스타인 원주민인 여부스 사람들이 예루살렘 한 복판에 위치한 시온산 성에 수 백 년 동안 버티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 시온산 성은 천혜의 난공불락 요새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복에 능숙한 다윗이 이스라엘의 새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다윗에게 “(대상11:5)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며 강하게 저항합니다.
사무엘 하5:6에 보면, 다윗과 그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곧장 진군하여 여부스 사람을 치려고 하자, 여부스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거라. 너 따위는 눈먼 자나 다리 저는 자라도 물리칠 수 있겠다. 너는 여기 들어올 수 없다!’ 며 다윗을 아주 우습게 보았습니다.
다윗은 결코 여부스를 뚫고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삼하5:6)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그러나 다윗은 돌진하여 단 번에 시온 성을 점령했습니다.
그후 그곳은 다윗 성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예루살렘(여부스 성)을 점령하여 통일왕국의 수도로 삼았고 이곳에 법궤(언약궤)를 옮겨 성막을 세워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합니다.
그 후 솔로몬이 이곳에 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은 정치, 종교, 문화의 중심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다윗이 이처럼 수 백년 동안 점령하지 못했던 여부스 성을 단숨에 거뜬하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점령한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 다윗은 점점 강성하여 갔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에 현장에 어떠한 강적,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오랫동안 제거하지 못한 막강한 세력일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능히 승리하여 점점 강성해질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눅 18:27)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수록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 시작이 비록 ‘말째’, ‘하카톤’ 즉 지극히 작은 겨자씨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므로 그의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인생은 한 마디로 ‘크레센도’의 인생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카톤’, 겨자씨처럼 작고 하찮은 존재,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내세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문벌도, 학벌도, 재능이나 자질도 탁월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약점과 결점뿐입니다.
그러나 ‘만군의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삶이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주어진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통치의 중심, 그의 삶의 중심은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한 예를 보겠습니다.
사무엘 하5:17-25입니다.
(삼하5:17-25)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새로 나가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치우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예배가 중심이 되는 생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뜻을 묻고, 그 뜻대로, 그 말씀대로 행하는 생활을 보여준 다윗은 결국 예배 중심의 삶을 위해 성전을 건축하고자 합니다.
성전을 자신의 삶의 중심으로 삼고 통치의 중심으로 삼은 것입니다.
다윗처럼 점점 강성해지는 ‘크레센도’의 인생이 되도록 예배가 중심이 되는 삶,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