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으로 도피 해 온 한국 범죄자들이 시민권을 취득, 신분을 세탁하고 있다. | | "한국에서 온 지명수배자들, 꼼짝 마라"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미국에 도피 해 온 지명수배자(기소중지자)들 중엔 미국 시민권을 소지한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주로 미국 시민권자와의 결혼을 통해 시민권을 취득한다. 한국 지명수배자가 살인, 강도, 강간, 납치 등의 중범죄나 수십억원 이상의 거액을 횡령했을 때는 '한미범죄인인도조약'에 따라 한국 정부가 즉각적인 송환을 미국 정부에 요청한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수천만원 이하의 절도나 수억원 이하의 사기사건 등 중범죄가 아닌 경우에는 송환요청을 하지 않는다. 범죄의 경중(輕重)을 마다하지 않고 송환요청을 할 경우 인적, 경제적 낭비가 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노린 상당수 한국 지명수배자들은 '안심하고' 미국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한국 법에 무지한 경우가 있어 간혹 스스로 미국 내 한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찾아갔다가 연방경찰에 체포당하기도 한다.
얼마 전 뉴욕총영사관에 여권 발급 문의를 하러갔다가 체포당한 A 씨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
수십억원을 횡령하고 미국으로 도주 해 온 A 씨는 자신의 공소시효가 끝난 줄 알고 한국여권을 신청하러 갔다가 지명수배 사실이 들통나고 말았다. 영사관 측은 A 씨를 연방경찰에 신고했으며 연방경찰은 퀸즈 자택에 머물고 있던 A 씨를 즉각 체포했다.
이처럼 범죄인들 중에는 공소시효가 끝난 줄 알고 제 발로 한국 기관에 걸어오는 경우도 있다. 해외도피 중인 지명수배자에 대해선 공소시효가 없다는 사실을 이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기소중지자라는 것은 곧 지명수배자를 뜻한다"면서 "이 뜻을 모르는 범죄자 중에선 '기소중지'란 말을 지명수배가 해제 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있다"라고 말했다.
이 검사는 "기소중지라 함은 피의자나 참고인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실질적으로 수사를 할수 없거나, 재판을 위한 여건을 구비할 수 없을 때 수사를 일시적으로 중지하는 것을 말한다"면서 "곧 해외도피 범죄인이 여기에 해당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상식을 아는 '지능적인' 범죄인들은 시민권 취득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세탁하고 있다. 시민권을 취득하면 이름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을 마음놓고 들락거릴 수 있다.
한국 법무부 지명수배자 컴퓨터 명단에 자신의 미국 이름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악용하는 범죄인들이 늘어나자 이들에게 피해를 당한 피해자 측에선 이들의 미국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미국 시민권자라 해도 이름만 알면 한국에서 재(再)고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길동'(Kim Gil Dong)이란 이름으로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미국에 와서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이름을 '존 김'(John Kim)으로 바꾸었다 치자.
한국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기록에는 '홍길동'이란 이름으로 지명수배가 되어 있어 '존 김' 이름의 미국 시민권 소지 범죄인이 한국을 왕래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나 수사기관이 '존 김'의 이름을 알아내 재고발하면 아무리 시민권자라도 한국에서 체포당하고 만다. 따라서 시민권을 소지한 범죄인들은 자신의 법적 이름(시민권 이름)을 남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쓴다.
▲ 한국 경찰이 지명수배 중인 사람들의 사진. | | 그러나 최근에는 탐정까지 동원한 피해자들의 끈질긴 추적 끝에 한국에서 체포되는 미국 시민권 소지 범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4월 한국을 방문했던 B 씨(46·미국명 스티브)씨는 한국 경찰에 의해 공금횡령 및 사기 혐의로 체포됐다. 이미 B 씨는 지난 1998년 서울 모 경찰서에 의해 지명수배를 당한 인물.
회사공금 8억원을 횡령해 미국으로 도주한 B 씨는 뉴욕에서 시민권자 한인여성을 만나 결혼에 성공했다. 신분세탁이 이뤄진 것이었다. B 씨는 시민권을 취득한 후 한국을 수 차례 왕래하면서 옛 회사 동료들 눈에 띠었다. 분명히 미국으로 도주한 것으로 알고 있는 B 씨를 서울 거리에서 만난 동료들은 이 사실을 회사측에 알렸다.
이에 회사측은 미국의 사립탐정에게 의뢰, B 씨의 미국 이름이 '스티브'란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회사측은 이 정보를 토대로 경찰에 재고발 하게 됐고 이런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던 B 씨는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다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는 범죄인들이 늘어나자 이제는 한국 기업들이나 개인 피해자들이 사립탐정을 고용하거나 지인(知人)을 통해 범죄인의 미국 이름을 알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1997년 지명수배 당한 뉴저지 한인단체 관계자는 아직도 수배 중 … 피해자들, 미국 이름 알아내 재고발 할 듯
뉴저지에 거주하는 G(54·뉴저지 한인단체 관계자)씨는 지난 1997년 12월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의해 사기혐의로 지명수배 당한 인물. 그는 영주권을 취득한 상태에서 한국에 나가 사기를 쳤고 현재 S 카드사 등에 의해 2건의 사기혐의로 고발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에 G 씨는 이 건을 면하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 한 후 미국이름을 사용하며 한국을 왕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한 S 카드사 등은 지금 G 씨를 재고발 하기 위해 준비중이다.
G 씨는 그 동안 지인들에게 "내가 지명수배자라면 왜 뉴욕총영사관에서 안 잡아가겠는가" 라고 큰 소리를 쳐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G 씨를 잘 아는 이들은 "체포권도 없는 영사관이 일손이 남아돌아서 중범죄자도 아닌 G 씨 뒤를 쫓겠는가"라고 반문한 후 "G 씨가 이름을 미국식으로 변경한 후부터는 자신의 지명수배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의 피해자 측은 "G 씨가 아직도 지명수배자란 사실을 최근 다시 한번 확인했다"면서 본지 취재진에 협조를 요청했을 정도이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지방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범죄자가 해외로 도피하면 20년이고 30년이고 지명수배자인 상태로 남게된다"면서 "G 씨의 경우 정식으로 재고발장이 접수되면 미국 이름으로도 추가 지명수배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개인 피해자들도 이제는 미국 시민권 취득 한인 범죄자들의 영문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매우 적극적인 것이다.
부산에 거주하는 박모(부동산업자)씨는 빌려 준 돈 5억원을 안 갚고 지난 2000년 뉴욕으로 도주 한 Y 씨(51)를 찾기 위해 최근 지인 2명을 뉴욕으로 보냈다.
박 씨는 "Y 씨는 이미 사기혐의로 경찰에 고발되어 있는 상태이나 미국으로 도주 후 시민권을 취득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어떻게든 영어이름을 알아내 한국 경찰에 재고발 하려한다"고 말했다.
이어 박 씨는 "Y 씨가 언젠가는 한국에 오게 될 것"이라면서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한인 범죄자들이 시민권만 취득하면 만사형통인 줄 알았던 시대가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다. 한국의 피해자들이 시민권을 취득하고 영어 이름으로 한국을 왕래하는 범죄인들을 잡기 위해 집요한 추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정부도 한국인 범죄자들에 대한 추방의지가 강하다.
연방이민세관단속국(ICE)의 한 관계자는 "한국에서의 범죄로 미국에 도피 중인 사실이 드러난 해당자에 대해선 즉각적인 추방조치를 할 수 있다"면서 "이에 대한 단속을 강화해 나갈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총영사관에 따르면 최근 3년간 뉴욕 일원에서 강제 추방된 한인이 6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체포 된 기소중지자가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 | 추방 사유로는 불법 체류와 중범죄 문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뉴욕, 뉴저지, 코네티컷,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등 관할 5개 주에서 연방이민당국의 요청에 따라 추방 목적의 임시여권을 발급한 건수는 지난 2006년∼2008년 4월말까지 총 60건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불법체류 등 체류 신분문제를 이유로 추방된 건수가 23건으로 전체 1/3 이상을 차지했으며 강도, 강간, 마약 등의 범죄로 인한 추방이 13건, 범죄공모 9건, 매춘 및 매춘알선 6건 등의 순 이었다.
이 밖에도 절도 3건, 살인 2건, 불법무기 소지 및 거래 2건, 밀입국 알선 2건 등으로 파악됐다. 한편 한국 외교통상부는 지난 2년간 한국인이 미국에서 저지른 범죄 건수는 1백45건이라고 밝혔으나 '미국 국적자의 한국 범죄 통계' 자료는 밝히기를 꺼려했다.
ㅁ 뉴욕 = 안상민 뉴스메이커 기자, 서울 = 최영수 뉴스메이커 기자
2009년 07월14일 13:11분 54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