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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천하제일 늦깎이 완창꾼 박동진 / 노혜봉
얕보지 마라. 풍물패 상쇠 손병두 아래서, 도막소리를 배우며 첫발을 내디뎠다. 깔보지 마라.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여러 선생을 전전해 짬짬이 소리를 배워, 한 바디도 제대로 소리 줄 닦지 못했으매, 계보가 분명치 않다. 무시하지 마라. 창극단 여성 국극단에 빌붙어 입에 풀칠을 하였으니 득음은 가당키나 하랴! 또랑광대였다.
허드렛일을 하며 밥벌이하며 새벽 두세 시간, 쉬는 날엔 대 여섯 시간 폭포 소리 북 장단 삼아 최상성最上聲으로 소리를 질렀다. 달빛 억새 바람결 따라, 이슬비 빗방울 구을리며 「더늠」시김새를 갈고 닦았으나 극심한 영양실조에 부증浮症까지 겹쳐 목이 꺾였다. 소리가 갈라져 피를 몇 대야나 쏟았다. 삼년 묵은 똥물을 가라앉혀 목울대에 넘기고 온잠에 든 몇 날 밤, 천우신조 신통방통 마침내 목이 풀렸다.
꼭두새벽 독공篤工, 거친 떡목소리를 화평하게 다졌다. ‘심청가’ 인당수 너울파도 소리를 누르고 ‘귀신형용 쑥대머리’ 춘향 아씨 곡성 꺾어지는 소리맛을 되돌렸다. ‘조조가 조자룡에게 쫓겨 도망가는데’ 소리로 바짝 뒤를 짚었다. 미리 마련된 폭죽 소리꽃불이 마냥 터졌다.
‘제비 후리러 나간다, 추임새 후리러 나간다’. 소리를 위해 태어난 사람, 소리에 미친 사람, 소리의 귀신이 된 사람,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마당 밖으로 날아다니는 판소리꾼, 귀신처럼 소리만 남은 목재치, 암, 천하제일 명창이렸다!
<산문>
바보새는 내 진짜 이름 / 노혜봉
시 쓰기는 고독한 침묵으로부터 온다. 백지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침묵이다. 백지는 그 안에 말이 빼곡히 수 놓여있는 눈밭이다. 저 밤하늘 별에서 오는 눈짓, 깊은 바위틈에서 솟아나오는 눈물, 먼 유년의 뒤란 꽃밭에서 나팔꽃 꽈리가 등불을 켜는 입술이다. 눈을 감으면 하얀 백지의 침묵, 다시 눈을 뜨면 캄캄한 백지에 침묵이 거울로 놓여 있을 뿐.
시를 쓰려면 언제나 말이, 낱말이나 이름이 먼저 번뜻 스친다. 때로는 사물이나 풍경, 보이지 않던 이미지가 희미하게 저를 봐 달라는 듯이 스치면 나는 그 말이나 이미지를 선뜻 거머쥔다 놓칠세라 아무 쪽지에나 메모를 한다
말은 번뜩임이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말 벼락을 한꺼번에 맞는 일도 있지만, 그런 일은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시 한 편을 단숨에 끝 행까지 쓰기는 어쩌다 있는 일. 몇 날 며칠 시를 쓰려면 첫 말이 오지 않아 몇 밤, 몇 주, 심지어는 몇 달, 몇 해 떠도는 소리 속삭임 냄새가 오기를 기다린다. 내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말이 목소리가 마중 나오는 것을 받아쓰면 시가 된다. 시가, 목소리가 나를 반갑게 찾아오는 것이다. 그때 애초부터 거기 존재하고 있던 목소리를 민낯 그대로 나꿔채며 사로잡아 끄집어내야 한다. 리듬과 말의 숨결에 맞추어서.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아 불안에 끙끙 댈 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을 내쉬면서 시 제목을 뇌어 보기도 한다. 때로, 그 말, 말끝에 헝클어진 실 꾸러미 속에서 길을 풀면서 말이 말을 끌며 딸려 나오기도 한다
말이란 높다란 얼음절벽, 그 얼음절벽 끝에 서 있는 한 마리 새다. 그 바보새가 다름 아닌 바로 나다.「천하제일 늦깎이 완창꾼 박동진」을 주제로 시를 쓰려고 맘먹은 지 이십년도 넘어서야 작년 10월 초, 겨우 졸시를 낳게 되었다. 어느 면에서 보면 박동진도 긴 세월을 바보새와 같이 외길만 걸으면서 살았던 것이다.
‘바보새는 땅에서는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잘 날지 못 한다. 거추장스러운 긴 날개와 물갈퀴 (미련스럽게 허둥대며 곤곤히 살고 있는 삶의 무게인가)때문에 뒤뚱거리며 걷기에 사람들에게 늘 무시나 놀림을 당하기 일 수. 그래서 옛날부터 붙여진 이름 바보새. 그러나 폭풍이 거세게 몰아치 는 밤, 바보새는 죽을 각오를 하면서 절벽에서 날개를 꿈틀거리다 뛰어내린다. 활짝! 비상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마침내 3미터도 넘는 양 날개가 하늘을 가리고 바다에 검은 그늘을 드리운다. 바보새는 날갯짓 한 번을 하지 않고 한 번도 쉬지 않고도, 6일 동안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바람을 타며 날 수 있다고 한다. 두 달을 날게 되면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장 높이 날아가는 새, 알바트로스가 된 판소리꾼 박동진, 나도 진짜 이름인 알바트로스 새가 되고 싶지만.
‘침묵을 동경하는 입술이여, 침묵으로 한껏 차 오른 입을 열어라’ 시는 날갯짓으로 별하늘에 자기 목소리를 온 몸으로 간절하게 쓰고 싶다는, 온 마음으로 스며들고 싶다는 동경이다. 시는 침묵이란 낯선 땅을 끝없이 방황하는 모험 여행이다. 캄캄해서 두렵지만, 불안하지만 죽는 날까지 말이라는 얼음절벽에, 날마다 깃털을 헛되이 떨어뜨리면서.
*알바트로스 ---「동물의 세계」에서 인용
*"시와소금" 2018년 봄호 게재(위 원고는 저자가 직접 전송해준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