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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39) J.R.R. 톨킨 (1)
「반지의 제왕」을 통해 그리스도교적 세계관 녹여내다
영화 ‘반지의 제왕’
뉴질랜드의 영화감독 피터 잭슨은 2001년부터 2003년에 걸쳐 ‘반지원정대’, ‘두개의 탑’, ‘왕의 귀환’으로 구성된 삼부작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원작과 마찬가지 순서로 매년 겨울 뉴라인 시네마를 통해 영화화해서 선보였습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리즈에 열광하며 한해 한해 그 다음 편을 기다리던 그때의 기억이 납니다. 이 영화가 그 엄청난 제작비와, 또 그것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흥행 수익 기록에 값하는 작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나온 지 10여 년이 훌쩍 지난 요즈음 이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있을 때, 낡았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더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대중적인 관점에서 볼 때 21세기 최고의 영화로 꼽히고 있습니다. 작품성과 시대정신을 중시하는 까다로운 평론가들 역시 높은 평가를 아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여러 권위있는 영화 잡지나 인터넷 사이트, 언론 매체들이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성공은 여러 가지 부대 효과를 낳았는데요, 그 중 하나는 감독 피터 잭슨의 조국 뉴질랜드가 영화 촬영장소들로 인해 새삼 사람들이 관광장소로 꿈꾸는 곳이 되었다는 것이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대한 양의 원작 소설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 소설 작가에 대해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작가 존 로널도 루얼 톨킨(John Ronaldo Reuel Tolkien)(1892~1973)의 이름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고, ‘반지의 제왕’은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적어도 제목만큼은 너무도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소설 「반지의 제왕」은 영화 성공으로 비로소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자 판타지 소설이라는 장르 문학의 경계를 넘어 여러 면에서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지만, 사실 영화화 이전에도 영어권 나라에서는 위대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영화 감독 피터 잭슨 역시 소년 시절 감명받은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이 필생의 꿈이었다고 밝히기도 했으니까요. 감독이 원작에 대해 가진 경외심은 가능한 한 원작에 충실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해 제작비와 상업적 성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대자본의 영화 기획으로는 이례적으로 각각 세 시간 반이 넘는 상영시간으로, 원작과 같은 세 편으로 제작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독은 최선을 다해서 원작이 그려내는 인상적인 등장인물들을 살아있는 모습으로 보여주려 하였고, 상상력을 통해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신화와 환상의 세계, 처절한 전투 장면들을 탁월한 연출과 현대 기술의 눈으로 보여줬던 것이지요.
소설 「반지의 제왕」과 저자 톨킨
옥스포드 대학의 널리 인정받는 영문학 교수이자 북유럽 신화의 권위 있는 연구가, 번역가였던 톨킨이 1954년과 1955년에 걸쳐 세 권으로 발표한 이 소설이 영국에서 처음 출간되었을 때, 문단에서는 주로 대중 문학의 한 부류인 판타지 소설로서의 가치만 인정받았습니다. 사실 유명한 작가나 지식인 중에서는 일찌감치 작품이 지닌 높은 정신적 차원을 직감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수의 진지한 문학 평론가들이나 어문학 교수들은 이 소설이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얻고 점차 독자들 사이에서 ‘고전’의 지위를 얻어갈 때도 작품의 문학성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을 보였습니다. 저자가 「반지의 제왕」 직전에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쓴 「요정 이야기」이자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소설 「호빗」(Hobbit, 1937년 출판)을 미리 썼고, 「호빗」의 성공으로 「반지의 제왕」에 착수하고 마침내 출판할 수 있었으며, 이야기 전개로 보아 「호빗」의 속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러한 과소평가의 한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톨킨 역시 처음에는 실제로 「반지의 제왕」을 「호빗」에 이어지는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 쓰려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요정 이야기」가 어린이들이 아니라, 더 없이 진지하고 처절하며, 인간과 세계의 빛과 그림자를 아우르는 어른들의 책이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혈을 다하여 인내로이 이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고 다듬어 갔습니다.
「반지의 제왕」이 완성되기까지는 십여 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고 각고의 노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신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언어학적 천재성, 그리고 문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종교적 통찰을 발전시키고, 종합하는 한편, 주요 인물들에 살아있는 개성을 불어넣고 이에 다듬어지고 격조 높은 문체를 더하여 오늘날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위대한 수준으로 작품을 완성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옥스포드 교수들 중심의 ‘잉클리즈 모임’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톨킨과 깊은 우정을 나눴던 C.S. 루이스 역시 이 그룹에 속해 있었지요. 무려 16년을 지속한, 매주 화요일의 카페 ‘독수리와 아이’ 에서 각자 자신의 창작물을 낭독하는 이 모임은 톨킨에게는 원대한 문학적 구상이 잉태되고 열매 맺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잉클리즈 모임’과 톨킨의 루이즈와의 우정에 대해서는 콜린 듀리에즈의 「루이스와 톨킨」(홍성사, 2005)이 잘 설명해줍니다.)
이러한 사실은 톨킨이 처음부터 이 작품에 대한 원대한 구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톨킨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었고, 작품의 위대함 역시 시간의 시험을 이겨냈습니다. 소설의 문체는 유장하면서도 기품있으며, 이야기의 흐름은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고 열광하게 하면서도, 높은 교양을 갖춘 사람도 감탄을 자아내는 깊이와 폭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신화적 상상력은 웅장하며, 이에 담긴 철학은 난해하지 않으나 절실함과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이라는 작품에서 영성적 지혜를 찾는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작품에 가톨릭 신자인 톨킨의 통합적인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 잘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톨킨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며 이 흥미진진한 작품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살펴보며 삶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영성에 대해 음미해보고자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16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0) J.R.R. 톨킨 (2)
어머니에게서 라틴어 배우며 언어의 매력에 젖어
황금이라고 해서 모두 반짝이는 것은 아니며,
방랑자라고 해서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속이 강한 사람은 늙어도 쇠하지 않으며,
깊은 뿌리는 서리의 해를 입지 않는다.
잿더미 속에서 불씨가 살아날 것이며,
어둠 속에서 빛이 새어 나올 것이다.
부러진 칼날이 다시 버려질 것이며,
잃어버린 왕관은 다시 찾을 것이다.
톨킨의 어린 시절과 가톨릭 신앙 안에서의 성장
작가들에게 있어 어린 시절 체험이 그들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요, 그것은 톨킨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은 톨킨은 십 대 때 삶의 지주였던 사랑하는 어머니를 역시 잃어야 했고, 후견인이었던 덕망 있고 학식 있었던 가톨릭 사제 프랜시스 신부의 후원에 힘입어 절망의 시절을 버텨내고 학문의 길로 입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톨킨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는 그의 작품과 인생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문학비평가이고 저술가이자 20세기의 그리스도교 문인들에 대한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조지프 피어스는 그의 저서 「톨킨: 인간과 신화」(김근주, 이봉진 역, 자음과 모음, 2001)에서 비교적 소상하고 세심하게 그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에 대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의 내용과 주제를 본격적으로 보기에 앞서 조지프 피어스 책에 나오는 서술을 중심으로 톨킨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를 살펴보면서 「반지의 제왕」 곳곳에 나타나는 이별의 슬픔에 대한 깊은 공감, 그럼에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절망 대신 믿음을 통해 위안과 희망을 얻은 그리스도교적 인생관이 그의 삶의 체험과 무관치 않다는 것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톨킨은 1892년 1월 3일 아버지 아서 톨킨과 어머니 메이블 톨킨 사이에서 남아프리카의 블루폰테인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블루폰테인 은행 지점장으로 일했었기 때문이었죠. 그는 대부분의 영국인이 그러하듯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남아프리카는 톨킨의 삶에서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진 못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톨킨이 겨우 세 돌이 지났을 때 그와 남동생 힐러리를 데리고 영국으로 귀국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몇 달 후 귀국하려 했는데, 병에 걸려 귀국은 연기되었고 갑작스럽게 병세가 악화돼 안타깝게도 결국 남아프리카 블루폰테인에서 병사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남편 없이 넉넉하지 않은 재정적 상태에서 홀로 어린 두 형제를 키워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된 것이지요.
시골마을에서의 삶 작품 곳곳서 드러나
그녀는 생활비 때문에 저렴한 집을 찾아야 했고, 그래서 버밍엄의 시골마을 세어홀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골에서의 삶이 톨킨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칩니다.
「반지의 제왕」을 보면 호빗들이 사는 세이어 마을의 전원적인 풍경과 삶, 그리고 숲을 파괴하고 착취하는 암흑의 세력을 응징하는 숲의 정령에 대한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나게 되는데, 아마도 이런 생생한 묘사와 상상력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어린 시절에 체험한 넉넉하지는 않지만 자연과 가까웠던 전원적 환경과 그 안에서 나무와 숲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톨킨과 동생의 선생님은 다름 아닌 어머니 메이블이었습니다. 학교 수업료를 낼 여력이 되지 않아 직접 가르쳐야 했던 것이죠. 메이블은 외국어에 대한 조예와 음악, 미술적 재능도 가진 여인이어서, 충분히 어린 두 아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줄 수 있었습니다. 톨킨은 특히 어머니에게 라틴어를 배우면서 언어에 대한 자신의 재능과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언어의 역사, 의미, 소리, 철자의 모양 등 언어의 모든 면에 매혹되고 영감을 얻으며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톨킨의 문학세계는 이미 어린 시절에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시절 신화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톨킨에게 있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어머니가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하였고, 그래서 톨킨 역시 8살 나이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품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후 그리스도교 신앙에 깊이 의지하고, 영국 성공회에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길을 잘못 들어 버밍엄 빈민가에 있는 가톨릭 성당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가톨릭교회에 대한 사랑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여동생과 함께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교회의 신자가 됩니다.
가톨릭교회로의 입교는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전환점이 되고, 한편으론 인생의 시련과 고통의 시작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친정 가족들은 이런 결정에 매우 분개하였고, 여러 가지로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갖가지 정신적인 압력뿐만 아니라 일체의 재정적 지원과 도움을 끊어버립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신앙과 결심을 굳건히 지켰고, 자식들이 가톨릭 신앙 안에서 자라나도록 애를 씁니다. 톨킨의 가족은 톨킨이 상급학교에 지원, 합격하였을 때, 사랑하던 시골의 집을 떠나 산업화로 복잡하고 부산스러웠던 대도시 버밍엄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매일매일, 등교하기 위한 교통비를 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싼 집세의 집을 찾아 여러 번 이사해야 했던 가족이 정착한 곳은 에드베이스턴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근처에는 복자 존 헨리 뉴먼이 세운 오라토리오회의 수도원이 있었고, 이곳에 있는 신부 프랜시스 자비에르 모건 신부를 알게 됐습니다. 이는 톨킨 가족에게 매우 큰 행운이었습니다.
어머니, 집안 반대에도 가톨릭 신앙 지켜
생활고와 집안에서 고립되고 냉대받는 마음의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자녀들을 키우던 메이블 톨킨은 점점 지병인 당뇨병이 심해졌습니다. 프랜시스 신부 도움으로 잠시 시골집에서 요양할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결국 1904년 11월 초 혼수상태에 빠졌고, 며칠 후 불과 서른네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그녀는 브롬즈그로브에 있는 가톨릭교회 묘지에 영면하였고, 유언장에서 프랜시스 신부를 후견인으로 부탁하였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을 지니고 있었으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평생 가톨릭 신앙에 충실하게 머물렀던 톨킨은 어머니의 죽음을 일종의 신앙을 위한 ‘순교’로 이해했고, 평생 어머니의 신앙으로 자신이 신앙을 지킬 힘을 얻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톨킨은 자신의 만년에 한 편지에서 여전히 가득한 그리움과 슬픔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자신의 신앙을 어린 두 아들에게 전해 주려다가 박해와 가난에 지쳐서 결국에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레드날의 우체부 집에서 요양하셨을 때, 우리 세 식구가 함께 지냈던 작은방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그 작은방에서 의식이 없어 성체성사도 받지 못하시고 외롭게 돌아가셨다. 내 아이들이 옳지 않은 길로 빠질 때마다, 난 너무나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조지프 피어스, 「톨킨: 인간과 신화」, 37~38쪽, 재인용)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23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1) J.R.R. 톨킨 (3)
때론 유혹에 흔들려도 결국 올바른 길로 돌아와
지상의 요정 왕들에겐 세 개의 반지
돌집의 난쟁이 왕들에겐 일곱 개의 반지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들에겐 아홉 개의 반지
어둠의 권좌에 앉은 암흑의 군주에겐 절대반지
어둠만 살아 숨쉬는 모르도르에서.
모든 반지를 지배하고, 모든 반지를 발견하는 것은 절대반지,
모든 반지를 불러 모아 암흑에 가두는 것은 절대반지
어둠만 숨쉬는 모르도르에서. - 「반지의 제왕」 시작에 붙여
‘반지원정대’ 의미와 ‘절대반지’의 본질
‘반지의 제왕’이라는 제목은 원제를 직역에 가깝게 번역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말 역자가 해제에서 밝히고 있듯 좀 설명이 필요한 제목입니다. 이 작품의 특별한 점은 제목을 처음 대한 사람이 상상하게 되듯, 주인공이 반지를 찾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 ‘반지의 제왕’이라 불릴만한 영웅으로 탄생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반대로 여러 다양한 주인공들이 모든 반지를 지배하는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헌신하고 투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시작하는 제사로써 선택한 시를 읽어보면 원래 반지가 여러 개라는 것을 자주 간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어 원제 ‘Lord of the Rings’에서도 ‘반지들’이라는 복수형이 명백히 나타나 있죠. 반지들은 필멸의 운명을 지닌 인간들에게, 또한 난쟁이 족들에게, 그리고 요정들에게 모두 주어져 있고, 적절히 사용되었을 경우 유익을 주는 선물이었다고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반지들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이른바 ‘절대반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반지의 힘에 의해서 선익을 줄 수 있는 반지들은 선의 추구가 아니라 권력의 사악한 의도에 사용되는 무기로 타락될 수 있습니다. 절대반지는 애당초 악의 세력인 사우론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결코 선한 의도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악한 의도와 악의 손길에 의해 만들어진 절대반지가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절대반지의 마력에 유혹되었다는 징표입니다. 강하고 용맹하며 지혜로운 ‘영웅’들에게 이런 유혹에 빠질 위험은 더 크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절대반지’라는 주제는 필연적으로 선과 악의 타협과 양보가 없는 싸움, 전쟁을 의미합니다. 개인들은 무시무시한 위협과 폭력으로 다가오는 악과 대면하고 용기와 지혜를 다하여 싸워야 할 뿐 아니라, 달콤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유혹하는 악의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절대반지를 파괴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가진 엄청난 힘을 이용해서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하는 야심만만하고 용맹한 섭정왕자 보로미르에게 요정왕 엘론드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안, 안 되오. 우리는 지배의 반지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지요. 그것은 사우론이 만든 것이고 따라서 그의 것이며 사악한 것입니다. 보로미르, 반지의 힘은 너무 위력적이어서 아무나 함부로 휘두를 수 없습니다. 이미 스스로 위대한 힘을 소유한 자만이 반지를 사용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런 이들조차 그 때문에 더욱 치명적인 화를 자초할 수 있습니다. 반지에 대한 욕망, 그것이 바로 그의 마음을 타락시키는 겁니다. 사루만을 보시오. 만일 현자들 중 한 명이 반지를 가지고, 또 그의 지혜를 이용하여 모르도르의 군주를 무찌를 수 있다면 그는 곧 사우론의 권좌에 스스로 오를 것이며, 따라서 또 하나의 암흑의 군주가 탄생하는 겁니다. 이것이 반지가 파괴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이 세상에 반지가 존재하는 한 그것은 현자들에게조차 위협이 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악한 이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우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반지를 숨기기 위해 그것을 만지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휘두르기 위해 만지는 일은 더욱 원치 않습니다.”이 대화가 일어나는 장소는 요정왕 엘론드의 궁전입니다. 점증하는 사우론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의 힘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절대반지’를 파괴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생각한 요정왕 엘론드와 선한 마법사 간달프는 절대반지를 악의 심장부 모르도르에 있는 거대한 산의 불타오르는 화산 속으로 던져 영원히 사라지게 할 ‘반지원정대’를 꾸리기 위해 ‘반지의 제왕’ 무대인 ‘가운데 땅’에 사는 용사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합니다. 이 ‘엘론드의 회의’는 ‘반지의 제왕’ 1부인 「반지원정대」의 2권 2장 전체를 차지하며, ‘반지의 제왕’이 신화적 구조 속에서도 작품 내내 확고하게 제시하고 있는 윤리적 관점을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반지의 세계’에서 악의 중심인 사우론은 선과 악 사이의 모호함이나 경계선에 있지 않으며, 사우론과 절대반지의 유혹에 빠진, 한때 명성 높았던 사악한 마법사 사루만 역시 끝까지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반면 ‘반지원정대’ 편에 섰던 이들은 비록 때때로 유혹에 흔들리는 상황을 직면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올바른 길로 돌아오고 선을 위해 헌신하고, 동료애로 희생하는 행위를 선택합니다. 이러한 명확한 선악의 대비 때문에 언뜻 보면 ‘반지의 전쟁’의 세계관이 순진한 선악 이분법에 머물고 있는 듯 보입니다만,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톨킨을 변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톨킨은 세계 안에서 창궐하는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대신, 우리가 악의 사람들과 세상을 황폐하게 만드는 실제적 위협이라는 것을 직시하기 바랐습니다. 그러한 악과 손잡아선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악의 실재성은 참된 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유혹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힘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통해 점점 증강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반지의 제왕’의 윤리학은 근본적으로 권력 비판, 욕망에 대한 비판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반지원정대의 여정은 근본적으로 비움의 길로 보입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30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2) J.R.R. 톨킨 (4)
선을 위해서… 끊임없이 맞서 싸운 작은 영웅들
진정한 영웅 : 선을 추구하며 삶에 뿌리내린 작은 이들
‘반지의 제왕’은 절대반지로 상징되는 악의 세력과의 투쟁이 이야기 중심입니다. 톨킨은 이러한 투쟁이 결코 가벼운 것도, 상상의 것도 아닌 각 개인의 인생과 인류 공동체의 역사를 관통하며,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절박하며 엄중한 실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때때로 잔혹하게 느껴질 정도로 처절하고 실감 나게 전쟁을 묘사하였습니다.
‘반지의 제왕’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우리말 역자들은 초판에서는 이러한 의미에서 ‘반지전쟁’이라는 의역을 제목으로 선택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비록 개역판에서는 다시 원제의 직역인 ‘반지의 제왕’이 제목이 되었지만, 작품의 중심 주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기억할 만한 언급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지의 제왕’을 ‘반지전쟁’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때, 중요한 점은 ‘반지의 제왕’ 중심 주제인 ‘투쟁’이 결코 권력의 획득이나 주인공의 주관적 관점에서의 선악 대결이 아니라는 것을 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타나는 수많은 암투와 투쟁과 전쟁들은 명백히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의미를 지닌 ‘살아있는 상징’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는 오늘날 우리가 게임과 만화, 소설, 영상의 영역에서 너무나 자주 만나는 판타지들(예를 들면 ‘왕좌의 게임’)과 ‘반지의 제왕’이 구분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등장하는 투쟁은 적대적 정치세력과의 군사적 대결만이 아니라 동지들 사이에 생겨날 수 있는 질투와 반목, 자기 자신 안의 야심과 자기기만과 대결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중단 없는 ‘영적 투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영적 투쟁’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분리되거나 초연한 자세를 지닌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도전들에 제대로 대면하고 결단하며 행동하게 만드는 원천이 됩니다. 우리가 ‘반지의 제왕’에서 발견하게 되는 영적인 투쟁은 궁극적으로 ‘선의 추구’라는 인생의 근본자세와 연결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서 역설적이게도 ‘반지의 제왕’은 영웅이 아니며 반지로 상징되는 절대 권력에 대한 욕망에 빠져 스스로를 파괴하며 자기도취와 허위의 세계에 빠져있는 자입니다. 이는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 반지에 접근한 이들에게는 잠재적으로 주어져 있는 유혹입니다. 이러한 유혹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세상을 위한 선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이 장대한 이야기의 중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반지의 전쟁’에는 간달프나 아라곤느와 같은 수없이 많은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등장하는 참된 영웅들은 모두 내면에 깊은 겸허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지를 파괴시키는 가장 중요한 일을 가장 작고 약하며 두드러지지 않는 존재인 호빗이 수행하고 있다는 것에서 톨킨의 속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작고 평범하되, 희망과 용기를 지니며 사는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이들이며 선을 추구하는 주역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요정 왕 엘론드가 ‘반지 원정대’를 출정시키고자 한 회의에서 호빗들을 원정대에 포함시키며 들려준 이야기에서 감동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매우 어려운 길이지요. 하지만 강한 이나 지혜로운 이는 멀리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 길은 강한 자 만큼의 희망을 가진 약한 이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인 것은 사실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강자들의 눈이 다른 곳에 닿고 있는 동안 작은 손들은 바로 자신들이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하는 겁니다.”
샘 : 일상적 삶을 사는 것도 영웅적 삶 보여주는 인물이라
톨킨은 이처럼 작고 약해 보이지만 희망을 지니고 있기에 악과 투쟁하고 선을 추구하는 이들을 진정한 영웅으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의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이 우정과 사랑을 아는 이들이며, 일상에 뿌리내리고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톨킨의 생각이 가장 잘 구현돼 있는 인물이 절대반지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 호빗이 프로도의 절친한 친구이자 시종이며 동지인 호빗 샘입니다. 그는 작품의 절정이라 할 ‘반지의 제왕’ 3부 ‘왕의 귀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샘은 다시 절대반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공포와 위협만이 느껴질 뿐 아무런 위안이 없었다. 멀리서 폭발하고 있는 불의 산을 본 순간 반지의 무게에 변화가 생겼다. 머나먼 옛날 그 반지를 벼려 만들었던 바로 그 화산 분화구에 가까워질수록 반지의 무게는 더 무거워져 급기야 어떤 강력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이 되었다. 그렇게 서 있는 동안, 반지는 줄에 매여 목에 걸려 있었는데도 샘은 자기 존재가 훨씬 커진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일그러지고 거대해진 그림자를 몸에 걸치고 있는 듯했으며, 그 그림자가 모르도르의 산맥 위로 광대하고 불길하게 드리워지며 위협을 가하는 느낌이었다. 샘은 이제 양자택일을 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반지가 그를 괴롭히더라도 절대반지를 끼지 않든지, 아니면 반지를 자기 것이라 주장하고 암흑의 골짜기 저편 지하 요새에 버티고 있는 악마에게 도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반지는 그의 의지와 이성을 갉아먹으며 샘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무수한 환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위대한 영웅 샘와이즈가 불칼을 들고 암흑의 땅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뒤에는 무수한 군사들이 따르고 있었으며 바랏두르는 전복되고 말았다. 다음 순간 구름이 걷히고 밝은 태양이 빛났다. 그의 명령에 따라 고르고로스 계곡은 꽃과 수목의 동산이 되어 열매를 맺었다. 이제 그는 절대반지를 끼고 자기 것으로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시험의 순간에 샘이 의연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프로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소박한 호빗다운 분별력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설사 그러한 환상이 자신을 기만하는 속임수가 아니라 할지라도, 샘은 자신이 그러한 짐을 감당할 만한 큰 인물이 아님을 마음 깊이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명령하여 가꾸는 왕국만큼 큰 정원이 아닌, 자기 손으로 가꿀 수 있는 작은 뜰의 자유로운 정원사, 그것이 그가 바라는 바였고 또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샘은 위기에 빠진 프로도를 구하고 반지를 파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는 엄청난 위험을 무릅쓸 용기를 가졌을뿐더러, 누구도 이겨내지 못한 절대반지가 주는 권력의 유혹도 이겨냅니다. 톨킨은 샘이 이러한 위대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프로도에 대한 진정한 우정을 지녔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의 일상의 삶을 사랑하는 소박하되 자유로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상과 가족과 친구에 대한 순수하며 소박한 사랑이야말로 선을 추구하는 삶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톨킨의 평소 삶의 반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톨킨의 가족과 친우들과의 관계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1월 6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3) J.R.R. 톨킨 (5)
작품 속 따뜻한 정서…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돼
톨킨의 세계
생생한 인물 묘사와 함께 웅장한 서사적 규모, 구조를 지닌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빠져든 독자는 또한 그 이야기에 걸맞은 총체적인 세계관과 깊이 있는 인간관을 만나며 감탄하게 됩니다. 이 작품이 흥미진진한 판타지를 넘어서 진정 위대한 이야기로 평가받는 결정적인 이유이지요. 우리가 ‘반지의 제왕’에 나타난 톨킨의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근본 사상을 이해하려 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장대한 이야기가 결코 ‘영웅숭배’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대지에 뿌리박고 있는 작고 소박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일상에서 오는 기쁨과 슬픔, 노고와 보람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매일의 작은 즐거움들을 향유할 줄 알며, 또한 난관이 있으면 극복하려 애쓰며 최선을 다해 선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삶을 일구어갑니다. 그리고 톨킨은 이러한 ‘작은 이들’은 세상과 공동체를 위해 악과 맞서 싸우고 선을 지키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분연히 용기와 고귀한 희생으로써 행동할 수 있는, 진정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하는 주체이자 진정한 영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톨킨은 이러한 목숨까지 거는 순수한 용기와 고귀한 희생은 어떤 거대한 명분이나 이데올로기, 정치적 야심, 명예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가족과 벗과 이웃에 대한 깊은 우정과 사랑에서 오는 것임을 특히 ‘작은 이들’인 호빗 족들을 통해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실 톨킨은 젊은 시절부터 옥스퍼드 대학에서 중세 문학을 연구한 학자였고 교수였으며, 후에는 북유럽 신화와 언어에 있어 독보적인 전문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신화를 창조하고, 그 신화를 위한 언어를 고안하는 즐거움을 소년 시절부터 즐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학문적 연구 과제였던 북유럽의 신화와 언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스스로 자신의 문학작품 속에서 고유한 신화와 언어를 창조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반지의 제왕’과 ‘호빗’이라는, ‘톨킨의 세계’라는 거대한 대지에 자리 잡고 자라난 나무이자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신화에 나오는 여러 요정들이나 종족들을 위한 역사와 언어가 치밀한 체계를 갖추도록 각고의 노력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반지의 제왕’에 매혹된 많은 독자들이 톨킨의 신화 세계의 전모를 알기 위해서 ‘반지의 제왕’과 ‘호빗’의 전사이자 ‘원역사’를 이루는 신화(Saga)이자 ‘반지의 제왕’ 훨씬 이전에 이미 구상되고 단편적으로 기술되었지만 톨킨 사후에 비로소 출간된 ‘실마릴리온’(Silmarillion)과 ‘후린의 아이들’ (The Children of Hurin)을 읽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지요. 이에 더하여 톨킨 사후에 많은 편집자들의 노력으로 그의 유고로부터 ‘반지의 제왕’의 시간적, 공간적 무대가 되는 ‘가운데 땅’과 관련된 신화들이 열두 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가운데 땅의 역사’(The History of Middle- Earth)로 묶여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톨킨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정서와 관심사보다는 세상과는 동떨어진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살았던 현학적이고 고답적이며 천재적인 학자이자 작가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의 작품에서는 따듯한 인간애와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정서가 가득합니다. 이것은 그의 세계관을 결정지은 것이 사실은 언어와 신화와 학문의 세계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체험한 가족과 벗과 지인들과의 사랑과 우정들 때문일 것입니다.
톨킨의 사랑, 우정, 가족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읜 톨킨과 동생은 그의 어머니가 선종하면서 후견인으로 지정한 프랜시스 자비에르 모건 신부로부터 큰 영향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훌륭한 인품과 확고한 신앙을 지닌 오라토리오회 소속의 프랜시스 신부의 존재는 어머니를 잃은 큰 슬픔을 딛고 톨킨 형제가 잘 성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프랜시스 신부는 관대하고 자상하면서도 규율 있는 모습으로 형제들에게 신앙과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아가 된 후 친척들의 냉담한 반응에 처했던 톨킨 형제에게 사비를 들여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톨킨은 인생을 통해 프랜시스 신부를 깊이 존경하였고, 그의 사랑과 도움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톨킨이 프랜시스 신부와 심각한 의견 차이를 보였고, 그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게 된 유일한 일은 열여섯 나이에, 세 살 연상이었던 에디스 브랫과 사랑에 빠지고 교제하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후에 여러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결혼에 이르지만 프랜시스 신부는 톨킨에게 엄격하게 그 교제를 끊으라고 말하였고,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야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화해합니다. 프랜시스 신부가 두 사람의 관계를 반대한 이유는 옥스퍼드 대학 준비 중이던 톨킨의 장래를 걱정한 것과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던 에디스가 톨킨의 신앙에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프랜시스 신부의 태도는 톨킨에게 큰 아픔이었지만, 그것이 프랜시스 신부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거두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후에 톨킨은 아들 마이클에게 쓴 편지에서 아내 에디스가 겪은 당시의 어려움을 회상하면서도 프랜시스 신부에 대해서 “진짜 아버지 이상의 아버지와 같은 후견인이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톨킨은 십 대 시절 이미 사랑에 빠졌고, 여러 어려운 시기를 거쳐 마침내 결혼에 이른 아내 에디스에게 평생 충실했습니다. 비록 에디스가 톨킨의 깊은 가톨릭 신앙을 진심으로 공유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고, 주로 옥스퍼드의 고전학자들과 영문학자들, 작가들로 이루어진 톨킨의 벗들에게 이질감과 일종의 질투심 같은 속앓이를 겪은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에디스와의 깊은 부부애는 톨킨에게 있어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톨킨이 평생 해로한 배우자와의 관계가 그저 인생을 동반한 것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한 더없이 소중한 관계였다는 것은 에디스가 죽은 후 작품을 통해 더없이 아름다운 연인인 베렌과 루디엔에 비유함으로써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톨킨의 삶과 작품세계에 있어 또한 중요한 존재들은 바로 톨킨의 자녀들이었습니다. 톨킨은 가톨릭 사제였던 큰 아들 존과 그의 유고집 편집인이었던 셋째 아들 크리스토퍼를 포함 네 남매를 두었는데, 자녀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은 거의 이십 년에 걸쳐 그들을 재미있게 해주려고 보냈던 유머와 상상력이 가득한 ‘크리스마스 할아버지의 편지들’(Letters from Father Christmas)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설 ‘호빗’의 탄생이 자녀들에게 멋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왔음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가톨릭신문, 2016년 11월 13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4) J.R.R. 톨킨 (6 · 끝)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영감과 통찰까지 더해져
그리스도교 세계관에 대한 철학적 단상
오늘날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전 세계적으로 문화 종교와 상관없이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수억 부가 넘게 팔렸다는, 유례를 찾기 힘든 인기의 이유는 직접 작품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영화화 사례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되었듯이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구조와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감동을 주는 생생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문학 작품들이라면 모름지기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인 좋은 서사(이야기) 구조와 매력적인 인물묘사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지의 제왕’을 더욱 뛰어난 대작으로 꼽는 데에는, 이야기와 인물에 심오함을 더해주고 독자들에게 피상적 재미를 넘어서는 영감과 통찰을 만나게 하는 철학적인 ‘세계관’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톨킨은 물론 전문적인 학자로서의 철학자가 아니었으며, 또 그 역시 철학자로 자처하지도 않았지만, 문헌연구가이자 문학자로서 신화와 언어에 대해 탐구하는 가운데 그 심층에 있는 종교적, 철학적 사상을 연구하고 익혔고, 또한 깊고 넓은 교육과 도야를 통해 위대한 철학과 사상을 배우고 체화한 사람이기에 작품 안에는 서양 철학사의 전통에 비추어 조명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 아우구스티누스의 ‘결핍으로서의 악’과 같은 서양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과 개념들이 성서적, 신학적 배경과 함께 톨킨의 작품 속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톨킨이 ‘반지의 제왕’에서 여러 철학적 요소들을 현학적으로 보여주거나 잡다하게 나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계, 가치, 초월에 대한, 넓으면서도 통합적이며 일관성 있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통합적으로 세계를 보는 관점을 ‘세계관’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세계관’이 하나의 문학작품에서 지니는 중요성에 대해 우리는 영국의 작가 체스터튼이 그의 중요한 저작 「정통(오소독시)」을 시작하는 도입부에서 언급한 내용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한 작가의 참모습은 궁극적으로 그의 ‘세계관’ 곧, 표현과 묘사의 기저에 있는 철학에서 결정됩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읽으면서 우리는 잘 짜여진 이야기에 빠져들어가는 즐거움을 얻게 되고 또한, 동감과 흠모, 연민 등의 강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는 인물들을 만나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이야기의 뿌리이자 배경이 되고,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의 깊은 동인이 되는 ‘세계관’을 음미해 볼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작품이 지닌 심오한 의미에 접근하는 ‘깊이 읽기’의 차원으로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또 일시적 독서의 즐거움을 넘어 인생의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한편 이러한 톨킨의 ‘세계관’에 주목하면서 잠시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지닌 철학사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도 뜻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의 주제로서의 세계관
‘세계관’(Worldview)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그의 유명한 철학서 「판단력 비판」에서 사용한 독일어 개념어 ‘Weltanschauung’에서 처음 철학적 의미를 지니고 사용되었다고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독일어로 ‘세계’를 뜻하는 단어와 ‘바라보다’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가 합쳐진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요, 칸트는 이 개념을 가지고 우리가 개별적인 것을 감각적인 차원에서 지각하며 통합하는 데 있어서 그 근원적인 역할을 하는 ‘세계에 대한 직관’을 가리켰습니다. 칸트는 사실 ‘세계관’이란 개념을 독자적으로 다룰 만큼 중요한 개념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이를 철학의 중요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은 딜타이나 쉴라이어마허 같은 낭만주의 시대 해석학적 철학을 전개한 독일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많은 철학자들이 ‘세계관’ 개념을 니체의 ‘관점주의 철학’과 결부시키면서 ‘세계관’을 각 개별적 사상가들의 세계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일컫는 개념으로 발전시켰지요. 또 다른 한편에서 보면 ‘세계관’은 언어의 문제와도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후 언어에 대한 이해에 있어 큰 기여를 한 독일의 빌헬름 폰 훔볼트(1767~1835)는 Weltanschauung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Weltansicht’란 단어로써 언어철학과의 연관성 속에서 ‘세계관’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언어가 단순히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각 개인과 각기 민족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고유한 관점 자체를 규정하는 심원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훔볼트의 세계관으로서 언어를 이해하는 관점은 사실 언어 문제가 서양 철학의 중심으로 부각되었던 20세기에 재평가를 받았습니다. 20세기 철학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 유다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과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의 철학을 대하면 언어의 문제와 세계관의 문제가 현대 철학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세계관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도 이 두 명의 걸출한 철학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깊이 숙고했던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말년의 철학적 작업에서 언어의 실제적 사용방식과 그 언어가 사용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삶의 양식’에 대해서 끊임없이 성찰하였습니다.
그가 중시하였던 것은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언어 역시 이러한 총체적인 삶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물론 언어가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의식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겠지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서의 방법론을 흔히 ‘일목요연한 조망’이라는 표현으로 정리하곤 합니다. 이는 철학이 관념 속에서 개념을 구축하고 종합하는 사고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제로 세계를 보는 방식에 대한 숙고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관을 요약한 “생각하지 마라, 오히려 바라보라!(Denk nicht, sondern schau!)”라는 문장은 이런 통찰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존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존재’에 대해서 깊이 사유하는 영역인 존재론과 형이상학에서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고, 또한 사람들에게 서양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야를 넓혀준 인물인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부르면서 편협하고 과학주의적인 관점에 집착하는 서양 근대문명의 ‘세계상’을 비판하기도 했지요.이처럼 철학사적 개념사를 지니고 있는 ‘세계관’이라는 관점에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재독하려 할 때, 관심을 가질 만한 이는 20세기 중반에 활약한 뛰어난 신학자이자 종교철학자이며 가톨릭 사제였던 로마노 과르디니입니다. 그는 서양의 위대한 문학과 철학을 신앙의 관점에서 만나고 대화하며 통합하는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정립하려 노력한 사람입니다. 이는 오늘을 사는 신앙인인 우리 각자에게도 큰 도전일 텐데, 톨킨의 작품은 그 좋은 모델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5)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1)
시대와 호흡하며 다양한 사회활동… 신앙인의 모범 보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에게 기도의 신비에 대해 참으로 귀중한 말씀을 남겼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귀를 당신의 마음에 지니고 계신다.’(시편 주해 148)
하느님의 귀를 우리의 마음에 담아두는 것, 우리의 마음을 그분의 귀에 놓아두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도의 기예다. 이 기예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이 고안한 기예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주셨고,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영의 기예이기 때문이다.
미사에서 주례자는 참례하는 신자들에게 성찬례의 성찬기도를 “마음을 드높이”라는 기도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신자들은 “주님께 올립니다”라고 응답한다. 참으로 기도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고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까? 우리 마음이 지닌 감지력의 폭이라는 것은, 주님께 닿기에는 너무나 좁은 것이 아닐까? 우리의 마음이 가진 활기는 그러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것은 아닐까? 우리의 마음은 사실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절름발이로 만들고, 무거운 짐에 억눌리게 하는 중력에 종속된 것이 아닌가? 무엇이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을 당신께로 들어 높이게 하려는 용기를 주는가?
그분의 귀. 그분이 당신의 귀를 우리에게 향하시기에.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나는 모른다. 사실 모든 것이 내 마음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자, 그러면 ‘나의 마음’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의문들, 불안들, 희망들, 내 안에서 솟아나는 나도 모르는 느낌들인가? 스쳐가면서 소리 없이 흔적을 남겨놓는 수없이 많은 인상들과 예감들인가? 한 사람 안에서 불쑥 수수께끼같이 생겨났다가는 불투명하게 스스로를 숨기는 마음은 과연 그 사람 속에 자신의 근원을 가지고 있을까? 무엇이 나의 마음인가? 어디에 나의 마음이 있는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분은 아신다. 그분의 사랑이 나의 마음을 알기에(요한 21,17). 그분의 귀가 보듬어 주실 때만이 나는 나의 마음을 ‘가진다’. 나의 마음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너를 그분께 내어놓고, 너를 자유로이 그분께 봉헌하고, 그분께 의탁하라!
그러면 너는 그분께 머물 것이며, 그분은 너에게 머무실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귀를 너의 마음에 두신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너의 귀에 두신다는 것, 이로써 너의 귀를 통하여 그분의 마음이 너의 마음 안으로 오신다는 것, 이로써 그분의 마음이 너의 마음이 되신다는 것.
너의 마음에 있는 하느님의 귀 -
하느님의 마음에 있는 너의 귀
그러한 기도의 상호교환
오직 기도하는 이만이 하느님을 알게 되며,
오직 기도하는 이만이 인간을 알게 된다.
생활인, 신앙인, 철학자, 신학자, 그리고 사목자 : ‘영성의 자리’에 대해
오늘날 영성이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해 의미 있는 전망을 얻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솔직하면서도 깊이 있는 관찰과 숙고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영성의 자리’에 대한 섬세하고 다양하면서도 포괄적인 관점을 얻어가는 과정이기도 하겠지요. 먼저 우리는 신앙인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상과 영성의 관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영성이라는 것이 복잡한 현대사회 안에서 생활하는 신앙인들의 삶의 중심에 자리하는 것이 가능한지, 당위에 앞서 자신의 경험에 입각해서 되짚어 보는 것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에서 듣고 배우는 성서와 교의적 가르침들이 나의 영성적 삶에 있어 얼마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고, 나아가 이러한 가르침을 학문적이고 사변적으로 탐구하는 신학이 개인과 공동체의 살아있는 영성을 위해 어떠한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가늠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세상과 인간에 대해, 그리고 신과 정신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철학들이 신앙인의 영성에 있어 어떠한 긍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새롭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의 구체적인 활동이며 외적이고 가시적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사목이 신앙인들의 내적인 삶의 중심인 영성과 맺고 있는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것도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이 일상 안에서 살아있으며 통합적인 ‘영성의 자리’를 자신의 삶의 중심에 마련하는 길을 독일 아헨의 주교였던 클라우스 헴멀레(Klaus Hemmerle·1929~1994)의 생애와 사상을 살피면서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클라우스 헴멀레는 깊이 성찰하고 사색하는 삶의 자세를 지녔고, 온유한 성품이었지만 동시에 교회 안에서, 사회를 향해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범이 된 인물입니다. 그는 외적으로 보자면 별다른 풍파가 없었던 조용하고 평탄하며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증언하고 그가 남긴 글을 통해 그의 인격과 활동, 사상을 대하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한 신앙인이 어떻게 자신의 시대와 호흡하면서 깊은 숙고와 내적 체험과 구체적 실천이 함께 하는 진정한 영성을 자신 안에 형성해 갈 수 있는가라는 절실한 질문에 대하여 한 착한 목자가 보여준 힘 있는 답이라 하겠습니다.
클라우스 헴멀레는 신앙인으로서, 철학자로서, 신학자로서, 그리고 사목자이자 주교로서 살아가면서 통합적이고 살아있는 영성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결실 있는 삶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만남과 구도의 여정은 그의 주옥같은 저서와 글들만큼이나 우리에게 배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독일 주교회의 의장인 칼 레만 추기경은 1994년 선종, 아헨대성당에 안장된 클라우스 헴멀레의 추도미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아마도 우리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성인과도 같았던 사제이자 주교를 무덤가로 모셔가고 있는 듯합니다.”
1974년 독일 아헨교구의 주교로 임명되면서 클라우스 헴멀레는 요한 복음 17장 21절 말씀을 주교직의 표어로 선택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Omnes unum ut mundus credat)”
이 표어대로 목자로서 교회 안에서, 사회와의 만남 속에서 다양성 안의 일치를 추구하는 목자로서의 삶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한 개인이 조용한 실천과 숙고를 통해 통합되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범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1월 27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6)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2)
나치정권 하에서 성장… 자유의 중요성 깨닫고 강조
대림 시기가 되면 우리는 창조에 대한 위대한 갈망에 대해서, 아울러 이제 다가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인간이 지니는 위대한 갈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말 그분을 갈망하기는 하는 것일까요? 혹은 그분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위기는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박한 배고픔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는 듯 보이는 데 있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감히 말하자면, 대림 시기는 마리아 안에서 참되게, 감지할 수 있게 존재합니다. 인간의 내적인 공허, 인간의 상처받음,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성모님 안에 모아집니다. 마리아는 빈터를 받아들이시고 기다리시고 준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갈망이 드러납니다. 그녀 안에서 비로소 인간 내면의 가난함이, 이제 오실 분을 향한 기다림과 준비라는 ‘대림의 태도’(adventliche Haltung)로 승화됩니다. 이제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모님 자신이 ‘살아있는 대림’이셨듯이 자신의 시대에서 살아있는 대림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의 대림 묵상
클라우스 헴멀레는 1929년 독일의 아름답고 유서 깊은 가톨릭 대학도시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프란츠?발렌틴과 어머니 마리아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난 그는 소박하면서도 신앙심 깊은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했습니다. 헴멀레의 집안은 예술적인 분위기도 가득했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주로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나 성상을 제작하는 미술가였고 어머니 쪽 삼촌인 프란츠 요셉 필립은 그 당시 프라이부르크 지역에서 손꼽히는 교회음악가이자 작곡가였습니다. 클라우스는 소년 시절을 나치정권 하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그 시절 부모님과 함께 다녀온 스위스 휴가가 매우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고 후에 말하기도 했지요.
프라이부르크가 스위스 및 프랑스 국경 인접 도시이기는 했지만 아주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기에 스위스 여행은 애써 저축한 돈을 다 들여야 할만한 ‘사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행은 그의 부모님들에게는 절박한 것이었다 합니다. 신앙심과 예술적 감수성이 가득한 부모님들에게 나치정권의 정치 선전과 점점 가시화되는 독재 체제는 숨 막히게 느껴졌기에 중립국 스위스에서 조금이나마 자유의 기운을 숨 쉬고 싶었던 것이지요. 소년 헴멀레에게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위스에서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행할 수 있었던 나치정권에 대한 비판을 독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부터 입을 봉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대다수 당시 독일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헴멀레 집안도 외국으로 나가 살 수는 없었으므로 스위스에서의 해방감은 잠시의 위안이었을 뿐, 나치정권 붕괴 전까지는 이러한 억압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년 시절 깨달은 자유의 소중함은 헴멀레의 신학과 사목에 두고두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후에 그의 말과 행동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이었지만, 남다른 유머감각과 친화력도 지녔던 클라우스 헴멀레는 일찍부터 학문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였습니다. 그는 라틴어나 희랍어 교육에 많은 비중을 두는 정통 인문계 김나지움을 마친 후, 1947년 대학 입학 자격인 아비투어를 마치고 프라이부르크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프라이부르크 교구 신학생으로서 프라이부르크 인근 슈바르츠발트(검은숲)에 소재한 교구 신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학교 측에서는 그의 신학교 입학에 부모의 권유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판단해서 얼마간 관찰기를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곧 헴멀레 자신이 분명한 성소를 느끼고 있음이 확인되었지요.
헴멀레는 매우 진지하면서도 행복하게 신학교 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영적 지도자였던 루돌프 헤르만 신부였습니다. 헤르만 신부는 깊은 신심을 갖추고 스승으로서 학생들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신심운동들에도 개방돼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헤르만 신부의 영적 지도를 통해 헴멀레는 교구 사제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 영성적인 추구를 지속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며 이를 위해서는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점점 분명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루돌프 헤르만 신부 자신 역시 이러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었는데, 그에게 당시 큰 영감을 주었던 것이 키아라 루빅(Chiara Lubic·1920~2008) 여사가 창시한 포콜라레(Focolare) 운동이었습니다. 포콜라레의 국제적 모임인 마리아 폴리에 다녀온 후 깊은 감명을 받았던 헤르만 신부는 클라우스 헴멀레에게 확신을 가지고 포콜라레 운동을 권했습니다. 이렇게 포콜라레 영성과 만나게 된 클라우스 헴멀레는 포콜라레와 깊은 유대를 맺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훗날 신학자이자 주교로서 포콜라레 운동을 교회론적 지평 안에서 자리 잡도록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교구 사제로서의 영성과 품성을 수련하는 한편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이라는 학문적 차원을 통해 사제로서, 사상가로서의 능력을 도야했습니다. 이는 매우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당시 프라이부르크대학 신학부에는 매우 뛰어난 교수들이 있었고, 재능 있고 열성적인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프라이부르크대학 신학부에서 신학과 종교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 존재론적 깊이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앞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가시화될 인간학적 관심과 대화와 일치, 소통을 중시하는 신학과 철학을 예비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는 헴멀레 역시 평생을 통해 지키고 발전시켜나간 학문적 방향이었습니다. 헴멀레가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교수들 중에는 구약학자인 알퐁스 다이슬러(Alfons Deissler·1914~2005) 신부, 신약학자인 안톤 푁틀레(Anton Vogtle·1910~1996) 신부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가톨릭 성서신학의 중요한 선구자들로 존경받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이들을 통해 헴멀레는 특별히 당시 신학에서 중요 주제로 떠오르던 ‘하느님 나라’에 대해 깊이 성찰할 수 있었다고 술회합니다. 그러나 헴멀레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이었던 사람은 무엇보다도 종교철학자인 베른하르트 벨테(Bernhard Welte·1906~1983) 신부였습니다. 프라이부르크대학 출신의 세기적인 철학자이자 문제적 인물이었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제자이면서 후에 하이데거의 장례미사를 주례하고 추도사를 했던 그는 중세 철학과 신학, 신비주의에 대한 깊은 인식을 바탕으로 교회가 사상적으로 근대정신 및 현대세계의 철학과 깊은 차원에서 대화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학문만이 아니라 사제로서, 한 인간으로서 많은 존경을 받은 벨테의 문하에서 학자의 길을 걸었던 헴멀레는 학문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천적 태도에 있어서도 벨테에게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4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7)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3)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실천 위한 시노드 실무 맡아
여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분이 있다. 바로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셨기에, 그분이 인간이 되셨을 때, 그분이 취하려 하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분은 오직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은, 그분 자신은 멀리 떨어져 계신 채, 우리에게 친절하게 선물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분의 관심은 그분 스스로가 우리의 상황 안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시며, 우리의 삶이라는 열차 안에 탑승하신다.
? 클라우스 헴멀레, 「우리를 위한 말씀」 중에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 하나의 창문이니. 대성당의 찬란하고 장엄한 색유리창.
그러나 빛이 없다면 이런 창문들이 무슨 소용이랴.
성탄절에 빛이 솟아오르네. 성탄절에 나의 삶을 비추시는 그분이 태어나시네.
비록 내가 아직 나의 삶에서 오직 어둠만을 보고 있을지라도.
나는 이제 그분의 빛 속에서 나의 삶을 두 손에 가만히 품고 싶다네.
그리고 그 창문은 곧 빛나는 색채로 환해지겠지.
그리고 많은 이들이 빛을 보게 될 것임을.
? 클라우스 헴멀레, 「하느님의 시간, 사람의 시간」 중에서
헴멀레의 신학과 영성의 원천
헴멀레는 사제로서 자신에게 주어지고 허락되는 소명들 안에서 삶과 신학, 철학, 영성을 실존적으로 깊이 자신 안에 통합하고 표현하고 나누려 평생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클라우스 헴멀레의 삶의 여정은 젊은 사제이자 보좌신부로서 최초로 사목적 체험을 했던 세 가지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1950년대 중반 프라이부르크 교구의 가톨릭 아카데미의 설립과 기획, 운영의 실무 책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1960년대 후반기부터 독일 주교회의에 의해 가톨릭협의회(ZdK)의 영적 동반자 역할을 오랫동안 맡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기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독일교회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매우 의미 있는 시도였던 뷔르츠부르크 시노드(1971~1975)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실무에 참여하는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범 교구적인 다양한 활동들은 그가 교회와 세상과의 대화와 협력에 대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내의 사제들과 평신도들 사이에서의 동등하고 자유로운 대화와 이해 증진에 많은 경험과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활동들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신학과 영성을 정립하는 데 있어, 추상적, 관념적 차원에만 몰입하지 않고, 실질적인 경험에 뿌리내리고, 여러 다른 견해와 관점들에 개방돼 있는 대화적 성격을 잃지 않는 자세를 지켜갈 수 있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신학적, 철학적 사유와 일상적 삶, 사목적 활동 등을 잘 통합한 영성을 열매 맺고, 쉽고 매력적이며 인간적인 언어로 그러한 영성을 표현한 시기는 역시 아헨교구 교구장으로서 활동한 마지막 시기일 것이지만, 그 중요한 밑거름이 된 것은 신학자이자 종교 철학자로서 교수 생활을 했던 시기일 것입니다.
그는 학문적 활동의 시작부터 삶에 뿌리내린 신학과 철학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이자 평전을 쓴 빌프리드 하게만이 전해주는 다음과 같은 헴멀레의 인상적인 고백은 그의 신학의 동기와 원천을 잘 보여줍니다.
“나의 신학과 사상에 있어 중요한 하나의 원천은 내가 정신과 영혼 깊숙한 곳에서 씨름하였고 전율하게 만드는 거대한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매우 종교적이고 신앙심이 가득했지만, 또한 대단히 자유롭고 개방적인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나는 청소년기에 ‘이런 책은 읽으면 안 돼!’라는 내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한 책을 탐독했습니다. 그것은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신존재 증명’을 비판하는 책이었죠. 나에게 이것은 청천벽력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칸트의 비판에 제대로 반박의 대답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게 되었던 거죠. 그때 저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내적으로 매우 분열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시 나의 신앙이 참되다는 직감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나보다 훨씬 지적으로 뛰어나고 존경할 만한 인물이 있고, 그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으니까요. 자, 이제 나보다 더 학식 있고, 지혜롭고, 더 교양 있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하면 그를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이 되었던 거지요.
이러한 내적 갈등과 고민은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고, 사실 사제품을 받고 첫 두 해 동안은 특별히 심했습니다. 이는 저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사유의 길을 추구하고, 이해하고, 논증을 연구하고, 파악하려 노력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저의 신학의 또 다른 원천이 저를 구했습니다. 부모님은 그 시대 신앙에 대한 저술들과 강연들로 유명한 작가 라인홀트 슈나이더와 깊은 친분이 있었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라인홀트 슈나이더가 예술가라는 사실은 제 안에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있어, 철학적 논증을 넘어서고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아버지와 슈나이더 같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저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논증만으로는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진실되고 참된(신앙적이고 종교적인) 경험이 무엇인지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정신적 위기에서 저를 구했습니다. 분명해진 것은, 신학은 이러한 가장 깊고 진실되고 실존적이며 참된 경험과 씨름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신학은 단지 이론적 사항에 대해 고투하는 작업이 아니라, 논증과 이론으로는 없앨 수 없을 정도로 절실한 경험들에 뿌리내린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11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8)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4)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삶의 스승’으로 학생들 이끌어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아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래로 이 진리에 예외란 없습니다.
인간이 되어가는 길은 아이가 되는 길을 거쳐가는 것이지요.
이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이가 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분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인 아이들을 받아들일 때, 그분께 속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이들처럼 그 분 자신을 받아들일 때, 그분께 속합니다.
오직 아이가 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는 단순하게 되는 것, 맑고 가뿐해지는 것, 고통과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 기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거듭거듭 선사되는 존재로서 놓아 둘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는, 체념과 잇속을 챙기는 마음에 대해서, 이기주의와 공허함에 대해서 치유하는 힘입니다.
구유 안에 계신 아이는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분과 함께 사람이 되도록,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하느님의 생명을 받도록.
? 1979년 헴멀레 주교가 지인들에게 보낸 성탄인사
하느님께서 성탄에 오시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시간을 쓰는 방식은 ‘합리적’이지 않았습니다.
지상에서 보내신 예수님의 시간의 대부분은 말하자면 성탄절에 깃든 약함과 가난함의 연장이었으니까요.
어떤 쓸모나 효과를 초월한 ‘여기 있음’ 자체.
그러나 바로 이것이 계시입니다.
하느님이 그저 우리가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에 계신다는 것.
우리는 그러니 이제 구유 앞에 머물러 그분을 바라보면 됩니다.
아무것도 말할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여기에 있으면 됩니다.
이러한 침묵이, 우리에게 다가온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준을 뒤엎고 전복시키는 것이지요.
그분은 그저 이렇게 와 계십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님이 하실 수 있었던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무력하되 빛나며 존재하시는 그 자리에, 하느님 자신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제 여기에 우리를 위해 계십니다.
베들레헴의 아이의 모습으로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아기는 나에게 말합니다.
아기는 당신에게 말합니다.
아기는 모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여기 있으니, 참 좋습니다, 라고.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왕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답니다. 그분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옷을 입으신 분이지요. 그분처럼 가난하고 보잘 것 없고 약한 이들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우리는 그 왕을 만나는 거랍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들이 나의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지.” 자, 이제 이 이야기를 이해하겠나요? 우리 모두는 마땅히 예수님과 함께 왕들이 되어야 해요. 우리는 그 분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찾고, 발견하고 사랑해야 한답니다. 그리고 그 분은 가장 위급하고 비참한 곳에 계신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성탄절에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예수님을 찾는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잘 알고 있겠네요. 맞아요, 그분은 가장 헐벗고 누추한 옷을 입고 계셔요. 그런 옷이 있는 곳에 예수님도 계실 거예요.
? 1979년 헴멀레 주교가 교구의 어린이들에게 성탄절에 보낸 사목서한
교수이자 학자로서의 헴멀레
본당 공동체에서 보좌신부로서 가진 사목 경험, 여러 가톨릭 단체와 기구에서의 활동, 사회와대화하고 교류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 체험들과 함께 헴멀레 주교의 사상과 영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종교철학과 기초신학 분야의 연구가이자 학자로서 대학에서 보낸 시간과 여러 스승과 제자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가톨릭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근대와 현대의 철학에 개방적인 학풍을 가진 독일의 유서깊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특히 베른하르트 벨테의 영향 하에서 수학한 후 신학교가 있는 본에서 강사로 첫 강의를 시작하며 교수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어 그는 보훔의 기초신학 교수로 임명받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걸출한 가톨릭 신학자 리하르트 셰플러와 풍요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는 보훔의 교수직에 만족했었지만, 벨테가 오랫동안 맡아왔던 가톨릭 종교철학의 교수좌를 맡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사명이자 책임으로 느껴졌기에 자신의 고향이자 소속교구이기도 한 프라이부르크의 신학부로 귀환하게 됩니다.
그는 스승 벨테가 전개한 가톨릭 철학의 관점에서의 종교 현상학과 해석학을 이어받으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발전시켜 나가고, 특히 구체적인 삶과의 연관성에 관심을 가집니다. 학문적으로는 프라이부르크 출신의 현상학과 해석학의 대가이자 ‘구조 존재론’을 제시한 하인리히 롬바흐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철학은 헴멀레가 종교현상학에 관해 ‘교회’가 가지는 의미를 깊이 숙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앙인의 실제적 체험에 깊이 뿌리내린 헴멀레의 고유한 종교철학은 자주 ‘신앙의 현상학’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그는 종교철학과 기초신학을 포괄하여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자신의 학문이 지적 자기만족이 아니라 신앙인의 실천적 삶에 부합하고 도움을 주는 교회의 학문이 되도록 노력합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는 학생들과 격의없고 가까운 관계를 맺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소박하고 검소하면서도 유쾌한 그의 태도는 많은 학생들이 ‘학문의 스승’만이 아니라 ‘삶의 스승’을 그 안에서 만나게 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18일,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9 · 끝)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5)
어려움에 처한 노동자와 연대… 탄광 직접 방문하기도
복음 안의 삶, 동반의 여정, 일치의 추구 : 헴멀레의 주교직
1975년,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던 중 헴멀레는 예상치 않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신생 아헨교구의 주교직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1994년 1월 23일 주일 아침 그 전 해에 알게 된 갑작스런 암이 악화돼 65세라는 아직 아까운 나이로 선종하기까지 착한 목자로서 주님의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였습니다.
그의 주교직의 근원은 일상 안에서 이루어진 깊은 하느님 체험과 복음에 대한 조건 없는 신뢰와 응답이었습니다. 그는 주교가 된 후 첫 번째 사목서한에서 ‘자신은 복음 외에 다른 프로그램을 내세우지 않는다’라고 밝히기도 했지요. 그리고 그는 이러한 복음에의 헌신과 하느님 체험을, 홀로 고립된 삶이 아니라 늘 사람들과의 만남과 동반을 통해 실현하려 했습니다. 주교로서도 그는 교구민들을 이끌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교구민 모두와 함께 지상의 여정을 순례하며 복음을 실천하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모든 이들을 말씀 안의 형제라고 칭했습니다. 또 모든 신자 한 명 한 명이 자신이 주체성과 공동 책임성을 깨닫고 자유롭고 기쁘게 복음에 헌신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글 중 하나가, 정치적으로나 교회 내적으로나 독일에 있어 변혁의 시기였던 1989년에 교구민들에게 보낸 ‘사순절 사목서한’ 일 것입니다.
“올해 사목서한에서는 보통 때와는 좀 다르게 말하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여러분들께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의 말을, 충고를 듣고 싶습니다… 저에게 여러분들의 근심, 희망, 경험, 영감들을 알려 주십시오. 저에게 편지로 써 보내 주십시오! 여러분들은 혼자서나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작업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서로가 (복음과 하느님 체험을) 증언하고 봉사하는 길을 함께 걷는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 주님께서 우리를 미래로 인도하십니다.”
그는 또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상황에 함께하려 하고 도우려 진심으로 애썼습니다. 그리고 외적인 부유함이 아니라 ‘복음적 청빈’의 정신이야말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정치적인 정파에 휘말리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고 목소리가 필요한 사람들 옆에 서는 것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이들과 함께하려 애썼습니다. 그는 주교가 되어서 그간 자신이 익숙했던 교회나 대학에서 경험하지 못한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노동운동의 세계였지요. 그는 진심으로 노동자들에게 배우고 공감하고, 또한 갈등 당사자들의 화해와 대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잘 나타난 것이 1991년 탄광 폐쇄에 항의하여 터키 이주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갱도에서 파업한 광부들에게 연대를 표현하기 위해 탄광을 직접 방문한 일이었습니다. 헴멀레 주교와 광부들 사이에서 자라난 진실된 존중은 헴멀레가 선종한 후 탄광의 노동조합이 신문에 실은 조의 광고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조용하면서도 끊임없이 일치와 대화, 상호 존중과 이웃사랑, 연대의 길을 추구한 헴멀레의 삶과 영성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는 젊은 시절 만난 포콜라레 영성이었습니다. 그는 포콜라레를 통해 복음에 충실하며 대화와 일치의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 길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콜라레 운동을 시작한 키아라 루빅 여사의 존재는 큰 영감이 되었으며 또한 그녀에게 포콜라레 영성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작업의 중요성에 대해 제언하기도 하였습니다. 포콜라레 영성을 시작한 키아라 루빅 역시 헴멀레 주교의 인격과 영성을 높이 평가하였고, 그의 사후, 그에 관한 질문에 대해 헴멀레는 시대를 초월하는 신앙인의 귀감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성탄을 맞이하면서 착한 목자였던 헴멀레 주교의 묵상과 함께 예수님 강생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네,
말씀이 심장이 되셨네.
하느님께서 심장을 가지셨네,
인간이 된 하느님의 심장이 뛰시네,
수백 만의 사람의 심장이 맥박 안에서.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네 사람의 심장 안에 살고 계신 것이 누구신지.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는 하느님이 되고 싶으셨으니까.
그분은 단지 사람의 심장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고,
그 심장과 함께 살고 경험하기를 원하셨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네.
우리의 심장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헛된 꿈같은 것이 아니며,
출구 없는 벽으로 이끄는 우리 자신의 판단도,
진실을 피해가고자 우리가 끊임없이 내세우는 알리바이도 아닌 것.
우리의 심장은 옳고 힘 있는 것이라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심장을 취하셨으니까.”
- 헴멀레 주교의 1978년 성탄 강론에서
“성탄에 내가 바라는 네 개의 열쇠
하나는 작은 쪽문을 위하여!
주님이 언제, 어디로 오시는지 우리는 모르지. 다만, 그분은 크고 거창한 문을 믿고 있지 않는 이들에게 오시리라.
하나는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위하여!
주님은 내 가장 깊은 곳보다 더 깊은 곳에 계신 분. 그리로부터 주님은 우리의 삶이라는 집으로 들어오신다.
하나는 이웃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문을 위하여!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으나, 나에게 가장 낯선 이웃, 형제.
주님은 바로 그들로부터 우리의 방문을 두드리신다.
하나는 현관문을 위한 열쇠!
거기에서 사람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있는 예수님께 경배하네.
예수님을 우리 삶에, 우리의 세상에 들어오시도록 맞이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기를.”
- 헴멀레 주교의 성탄 묵상집 「뒷문을 통해 구유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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