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1-11
민족을 위한 기도 / 안효관 목사
누가복음 22:42-43
42.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
오늘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35년 동안 압제와 서러움을 당하다가 해방된 해방기념일입니다. 2차대전 말에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일본이 조건 없이 항복을 하였고, 덕분에 우리나라는 그렇게도 갈망하던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3.1독립운동을 비롯해서 광복군과 임시정부의 활동 등, 해방을 위해 노력한 수많은 선조들이 감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 해방을 위한 많은 몸부림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오늘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이 깊이 되새겨야 할 부분입니다.
기독교는 애국 신앙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과 이웃입니다. ‘이웃’이라는 말은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세계도 사랑해야 할 이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조국도 사랑해야 할 이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국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조국이 해방되기 위해서 투쟁했고, 조국이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비록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함으로 우리 민족이 해방을 얻긴 하였지만,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끊임없이 눈물로 간구했던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으로 우리 민족에게 해방이라는 커다란 선물이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59년 전에 해방의 기쁨을 누렸던 날을 기념하며 광복절로 지키고, 교회도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59년 전에 우리 민족이 누렸던 그 기쁨과 환희를 다시금 누리기 위해서 우리 민족이 풀어야 할 문제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59년 전의 그런 해방은 아닐지라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2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통일의 문제입니다.
우리 민족은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과 북으로 나뉘는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국토가 분단되는 것은 곧 민족의 분열이었고, 사상의 분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겪었던 6.25전쟁이라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뼈아픈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전쟁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민족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통일입니다. 분단의 아픔으로부터 해방될 때에 우리 민족은 또 한번의 축복의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금 온 국민들에게 아픔을 주고 있는 경제적인 침체로부터의 해방일 것입니다.
한 때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울만큼 경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행복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너무 빨리 삼페인을 터뜨렸다”는 비판을 받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IMF라는 경제위기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경제위기를 맞은 지 7년이 지났고, IMF에 빌린 모든 외채를 갚았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지금 IMF 때보다도 훨씬 더 심한 경제적인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국민은 이런 경제적인 침체와 고통으로부터 빨리 해방되길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통일과 경제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회복도 필요하고, 교육과 문화와 사회 곳곳에서 곪아터지고 있는 썩은 부분들을 도려내는 뼈아픈 수술을 통해서 희망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렇게 나라가 어려울수록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일제의 압제를 받았을 때 조국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던 것처럼,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우리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은 조국의 어려운 처지를 들은 느헤미야가 조국을 위해 기도했고, 그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조국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역사의 문을 연 아주 중요한 사건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해방기념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모든 믿음의 식구들이 느헤미야와 같이 우리 민족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 민족이 당면한 모든 고통과 문제들이 해결되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전 4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은 오늘 본문보다 무려 140년 전인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라가 멸망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아끼던 성전도 파괴되고, 주권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벽도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의 집들은 거의 다 불타버렸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야 했습니다. 빈천한 자만 그 땅에 남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때 사로잡혀 갔던 포로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시기에 이국 땅 바벨론에서 태어나서, 당시 전 세계를 호령했던 페르시아의 왕궁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까지 올라갔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그의 지위를 “왕의 술맡은 관원”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술 관원”이라는 지위는 당시 굉장히 높은 자리였습니다. 술 관원은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직책이었고, 왕이 마시는 술과 음료를 책임지는 일을 했습니다. 고대에 왕을 죽이고 반역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강한 시대일수록 그런 자리는 왕이 아주 신임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맡을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비록 포로 2세이긴 했지만,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페르시아의 관리가 되었고, 왕의 특별한 신임을 얻어 높은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세계 최강국에서 이런 높은 지위를 얻은 느헤미야는 그의 평생에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자신의 지위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떠나갑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떠나가기 앞서, 어려움에 빠진 조국을 위해 일하기 전에 느헤미야는 조국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입니다.
느헤미야는 고국에서 온 몇몇 사람에게서 조국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바벨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가 들어서면서 포로로 잡혀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왕을 통해서 선지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70년 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70년 만에 고국에 돌아가는 백성들은 너무 기뻤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기뻐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70년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고국으로 돌아간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옛날 다윗 시대에 누렸던 영광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이방 민족들과 예루살렘에서 권력을 갖고 있던 일부 권력자들이 예루살렘의 회복을 강하게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성벽이 없기 때문에 이방인의 공격을 받으면 수많은 희생자를 내야 했습니다.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그 당시 예루살렘 길에는 날마다 시체가 즐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곽이 없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공격해 오면 대책 없이 당해야만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런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방해공작 때문에 성벽을 건축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갔던 사람들이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페르시아 왕궁에 있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동족의 어려움과 고통의 소식을 듣고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본문 4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가 취한 행동이 4개의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울고, 슬퍼하고, 금식하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억만리 멀리 떨어진 고국에서 들러온 소식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습니다. 자신은 페르시아 왕궁에서 높은 지위에 앉아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조국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조국과 그 조국에서 고통당하는 동포들을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건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 하나님께서 나를 이 시대에 살게 하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불러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이런 어려움에 대해서 염려하거나 책망하는 소리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민족을 끌어안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한 사람입니까?
염려하고 책망하는 편에 선 사람입니까?
아니면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나라나 사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예언자적 사명감을 가지고 정의의 소리를 외치며 불의를 책망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먼저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기도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의 계획을 앞세우기 보다는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그 은혜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힘이나 우리의 능력으로 일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가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고,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 비교하면 힘이 있어 보이고 능력이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피조물로서 무능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의지해서 일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을 당신의 일꾼으로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나라 돌아가는 모습이 맘에 들지 않고 지도자들이 하는 일들이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비판하고 욕하기 전에 그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민족을 위해서 먼저 사랑하는 마음으로 -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일하는 것, 기도하지 않고 비판하는 것은 독선이기 쉽습니다.
느헤미야는 조국의 어려운 소식을 듣고 나라를 그런 어려움에 빠뜨린 지도자들을 원망하거나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5절입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이 기도는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의 기도입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당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어려움이 우리의 눈을 가려 하나님조차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어려운 현실보다는 먼저 그 현실을 풀어주실 하나님을 먼저 바라봅니다. 그게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나올 때에 그들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홍해를 건널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바라보며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홍해라고 하는 커다란 장애물을 건널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라고 하는 장애물을 보고 불평하고 낙담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어려운 문제가 부딪히거든 문제를 보지 말고, 그 문제를 풀어주실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문제 앞에서 찬송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문제가 풀려지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은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 어려운 환경만을 바라본다면 우리 입에서 불평과 원망의 소리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고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있습니다.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할 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느헤미야는 기도할 때에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6-7절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는 자기 민족의 죄를 자백하면서 그 죄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와 내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범죄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느헤미야는 포로 2세입니다. 그는 조국이 멸망당할 때에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조국의 멸망이 결코 자기 죄일 수 없습니다. 조상들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에 형벌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잘못이라고 고백합니다. 예루살렘에 귀환한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 것도 다 자기 죄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게 지도자요 이게 신앙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의 우리 민족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느끼고 있습니까? 오늘날 이렇게 나라가 어렵고 혼란스러운 것이 모두 정치인들이나 지도자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그들만을 탓하고 있진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민족이 이렇게 어렵게 된 게 다 내 책임이라고 탄식하며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죄까지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합니다. 아담이 범죄하고서 그 책임을 하와에게 떠넘기고 하와는 그 책임을 뱀에게 전가한 것처럼, 아담의 후예들은 모두 자신이 져야 할 책임조차도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부부사이에 문제가 일어나도 “당신 때문”이라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바쁩니다. 요즘 대구 지하철 등 굉장히 많은 곳에서 노사간에 갈등으로 파업을 하고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기에 바쁩니다. 노조는 사측에게 파업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사측은 노조측에 파업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내 잘못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는 책임의식이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달라야 합니다. 조상들의 죄도 내 죄처럼 회개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회개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조상들의 죄도, 오늘날 어려움을 겪는 것도 다 내 죄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고백이 있는 민족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든 고통의 수렁 속에 던져졌다 하더라도 반드시 일어설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우리 민족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잘해서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하나님에게 있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느헤미야와 같이 고백한다면 하나님은 분명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기도했습니다
8-10절의 기도가 바로 그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약속하신 그 약속을 기억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에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 강한 응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 약속을 붙잡고 ‘약속하신대로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거절하지 못하십니다. 당신이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순종하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약속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지 모릅니다. 그 말씀들을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큰 꿈을 가지고 열심히 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당신이 약속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붙잡고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시면서 하나님께 약속하신대로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달라고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하신 대로 주실 것입니다.
네 번째로 느헤미야는 자신을 일꾼으로 써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기도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꾼이 되도록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여기서 “이 사람”은 아닥사스다 왕을 가리킵니다. 왕 앞에 은혜를 입게 해 달라는 것은 자신이 조국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도록 왕으로부터 허락을 얻어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조국으로 가고 싶은데 왕이 허락해 주지 않으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는 왕의 신임을 얻고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이기에 왕이 보내주지 않으면 아무리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왕궁에서 왕의 신임을 받으며 높은 지위를 얻어 평안한 삶을 살고 있는데, 그 모든 지위와 안락함을 다 버리고 조국으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조국에 가는 것은 결코 형통하고 평안한 길이 아닙니다. 험난한 길입니다. 또 조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이 지위와 편안한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느헤미야는 조국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조국 이스라엘로 가는 길이 열렸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신앙인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만 하고 끝나서는 안 됩니다. 기도한 대로 내가 주님의 도구요 일꾼이 되어서 험난한 길이라 하더라도 가겠다는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나는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면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미약하나마 내가 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내가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내 가정을 사랑하여 기도했다면 어떻게 하면 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찾아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기도만 하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위선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처럼 위선적인 기도일 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59년 전에 우리 민족에게 해방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주셨습니다. 6.25전쟁으로 인해 공산국가가 될 위기에 빠졌을 때에도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 민족을 구해주셨습니다. 제2의 국치일이라고 말하던 IMF에서도 건져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한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느헤미야처럼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바로 이 민족의 희망둥이들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처럼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오늘의 어려움에서 해방의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우리 가정에, 직장이나 생업의 터전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느헤미야처럼 기도함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간구와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간구한대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느헤미야와 같은 기도의 일꾼들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우리 가정이나 생업의 터전에도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기도 하시고, 기도로 승리하시는 우리 교회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