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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열려라 하늘문
요한복음9장24~41절/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태어나면서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두 가지 복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는 자신이 맹인으로 태어난 이유가 자신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들은 복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이 비극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자신이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났습니다.
또 한 가지는 실제로 눈을 뜨게 된 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심으로써 맹인이 순종하여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보이게 하신 것은 적당한 기적이 아니라 확실한 기적입니다. 일시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 눈을 뜨게 하신 것이 아니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은 정신집중 현상이나 최면상태가 아니라, 확실한 기적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면서 맹인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인생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나면서 맹인이 된 것은 어느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실제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맹인이 육체의 눈을 뜨게 되었지만, 점진적으로 영적 눈도 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4단계를 거치고 있습니다.
첫째, 맹인은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난 뒤, 주님을 한 인간으로 이해했습니다.
11절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어떤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마음씨 좋고 긍휼이 많은 사람이 자신을 도와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둘째, 그는 예수님을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는 치유자로 이해했습니다.
15절에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이 말씀은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의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회생 불가능한 눈을 보게 하는 기적을 베푸는 치유자로 발전해 있습니다.
셋째, 치유자에서 선지자로 좀 더 발전했습니다.
17절에 “이에 맹인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맹인은 자신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을 너는 누구라 하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선지자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서 출발하여 기적을 베푸는 치유자에서 이제 하나님의 선지자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점차적으로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넷째, 그 사람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이 선지자라는 생각을 갖고 바리새인들과 언쟁을 벌리다가 ‘나의 눈을 뜨게 한 것을 보면, 그는 인간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33절)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맹인 되었던 사람의 부모를 불러서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맞는지, 그리고 어떻게 보게 되는지에 대하여 묻고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24~25절에 “이에 저희가 맹인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하고 맹인은 자신의 치유된 삶을 고백합니다.
13~23절까지가 맹인에 대한 1차 심문이었다면 24~34절까지는 맹인에 대한 2차 심문이었고, 그 내용과 결과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출교처분이 내려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적을 부인하려던 자신들의 의도가 이루어지지 않자 또 다시 맹인 되었던 사람을 불러 심문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진리를 적대시하는 마귀의 집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붙잡고 말을 하다가 통하지 않자, 그의 부모를 불러왔습니다. 부모와도 대화가 이뤄지지 않자, 다시 맹인을 불러왔습니다. 이제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강요하고 있습니다.
25~26절에 “대답하되 그가 죄인이지 아닌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눈을 뜨게 하였느냐”
예수가 죄인임을 알고 있다는 바리새인들의 말에 대한 치유 받는 자의 단호한 대답은 “나는 한 가지 일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한 가지 알고 있다는 말은 밀접한 관계를 통해서 확실하게 알았다는 말입니다. 간접적으로 아는 것, 즉 전해 듣거나 소문으로 아는 것은 부정확할 수 있지만 자신이 직접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가 죄인이라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만 말함으로써 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리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경험을 통해 얻어진 지식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론을 제기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힘이 있고 당당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지식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다시 반복되는 질문을 합니다. 그들은 이미 맹인이 눈을 뜨게 된 전말에 대해서 상세히 들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반복되는 질문은 순수하게 정보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 속에는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곤혹스러운 그들의 마음이 투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행하신 일, 즉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이 바르시고 실로망에 가서 씻으라(6~7절)고 말씀하신 그 동작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쩌면 이 반대 신문을 통해서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러한 행위를 하였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여전히 안식일 전통에 매여 있는 회중들의 지지를 얻고자 의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맹인이었던 사람이 변한 것을 보게 됩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하면 겁을 먹고 말을 바꾸던 그가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비겁자도 아니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눈치를 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소신을 갖고 자신의 주장을 말합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예수가 죄인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그 사람이 나의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이다’(25절) ‘당신들은 내가 말해도 듣지 않고 계속 질문하는 것을 보니 혹시 그 사람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것 아니냐?’(27절) 하며 도리어 힐문하고 있습니다. 그러자28절에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맹인은 자세히 알려준 사실에 대하여(15절) 반복하여 질문하자 고침을 받은 맹인은 이번에는 거침없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조소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가 던진 조소에 바리새인들은 견디기 힘든 수치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너는 예수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예수에게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아느냐’(29절) 맹인을 곤경에 몰아넣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전된 상황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협박하거나 야단치는 관계에서 서로 동등하게 토론하는 관계로 변해 있습니다. 예수가 없는 종교, 예수가 없는 권위는 비록 겉모양은 하려할지 몰라도 내용은 없으며 능력도 없습니다. 반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겉모양은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저들이 갖지 못한 능력을 갖춘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토론하다가 흥분하여 욕설까지 내뱉었습니다. 그러나 맹인이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의 궤변과 강요에 더는 밀리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예수를 인정하거나 옹호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적대시하고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22절)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계시하신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나 예수에 대하여는 이를 확인할 수 없다는 말로 예수님을 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조롱을 당하자 냉정을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자신들의 신분도 잊은 채 백성들에게 치부를 들어내고 말았습니다.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비인격적이거나 모욕적인 언사를 쓰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건은 가장된 것이었기 때문에 끝가지 경건함을 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모세,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갖지 않았으므로 예수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즉 그분이 하늘에서 오신 사실(요3;16; 6;46; 7;29)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였고, 설사 깨달았다 할지라도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그분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참된 영적지식은 예수와의 친밀하고도 적극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30절에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치유 받은 맹인의 마지막 발언은 이 말은 듣는 바리새인들의 영적 무지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내용과 더불어, 예수의 신적 신분을 추론하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모세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이 맹인이었던 자기의 눈을 뜨게 한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로서는 납득이 안 간다는 의미이나, 사실은 27절에 이어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을 행하신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이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주장이 거짓말이거나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론적으로 탐구하는 일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그분과 인격적인 사귐이 필요합니다. 주와 밀접하고 적극적인 관계가 전제됨이 없이는 바리새인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같은 모순을 들어냅니다. 신앙은 이론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통한 인격적인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31절에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견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이 말은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듣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24절에서 바리새인들이 말이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한 말에 전면적인 부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주장했듯이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하는 말과 일치하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고 가르쳐 유대 사회에 보편화되어있는, 이러한 지식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진리를 대적하는 그들은 논쟁이 길어질수록 헤어나기 힘든 수렁으로 계속 빠져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 받은 맹인이었던 사람의 주장은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절대 죄인이 아님은 물론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32~33절에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당신은 그가 죄인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죄인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베풀 수 있습니까? 창세 이후로 나면서 맹인 된 자가 눈을 떴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하늘에서 왔습니다. 하늘에서 온 자가 아니면 어떻게 나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자신의 체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이 확실한 증거로 주장하자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만하지 말고, 교회에 다닌다고 성경책을 낀 모습만 보이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야 합니다.
34절에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바리새인들의 궤변과 음모는 맹인이었던 사람의 확신에 찬 고백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확신에 찬 신앙고백 앞에 세상은 무너지고 맙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 가는 과정에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예수님의 정확한 인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여준다고 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한 순간에 번개 치듯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점진적 과정을 거치면서 차츰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은 처음에 예수를 한 인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난 뒤 기적을 베푸는 치유자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로 바뀌었다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았다면 이런 분이 존재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항상 말씀에 귀 기울어야합니다. 다음 주, 1달 후, 1년 후에 그 생각이 전적으로 변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맹인이었던 사람의 최종적인 이해에 도달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기적은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으며 거룩한 자를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예수가 나면서부터 맹인된 자신의 눈을 뜨게 했으니, 분명히 땅에서 태어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과 논쟁할 때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으면 예수님의 존재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논쟁을 거듭하다보면 자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점진적인 생각에 쐐기를 박는 결정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그가 바리새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쫓겨났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가 만나주신 사건입니다.
35~38절에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절하는지라”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습니다. 첫째는 머리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일 것이다. 그런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맙니다.
둘째는 직접 예수님을 만나 확인하는 믿음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맹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만나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 혼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의 눈을 뜨게 해주신 어떤 절대자다’라고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직접 만나주셨습니다. 여기에 말씀의 핵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직접 만나야 하는 대상입니다. 우리의 지식, 이성, 학문으로 이해하는 분이 아니라, 반드시 만나야 하는 분입니다.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과 만나서 확인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친히 그를 찾아가셔서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만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만남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만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이었던 사람을 만나자마자 물으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35절) 이것은 그가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면서 계속 고민하던 주제였습니다. 맹인은 겸손하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가 누구십니까? 제가 그를 믿고자 합니다.’(36절)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구도적 자세를 보시고 ‘내가 그로다’하고 확실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때 맹인은 아주 분명히 고백합니다. “내가 믿나이다.”(38절) 예수님께서 ‘내가 그로다’하고 분명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맹인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님께 경배합니다. 드디어 맹인이었던 사람의 두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의 가슴은 방망이질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눈을 뜬 사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이분이 정말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을 것입니다. 그는 직접 주님을 만났다는 감격으로 인해 ‘주여 내가 당신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절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여러 일들로 갈등하고, 때로 미숙한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종 결론으로 품게 되는 질문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 구원자인가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이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끊임없이 갈등하고 괴로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의 해답을 얻게 된다면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아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희망과 복을 주셨습니다.
39~4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디 우리도 맹인인가 가라사대 너희가 맹인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으니라”
예수님은 세상에 심판하기 위해 오셨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코자 하심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요3;16) 그러나 예수를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오심은 인류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일 뿐 아니라 심판의 경고이기도 한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는 태어나면서 맹인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보는 자는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앞을 보지 못하다가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곧 희망입니다. 나를 보게 하신 분을 만나는 것은 복입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희망과 복을 가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우리도 맹인인가? 하는 반문을 제기합니다. 이 말은 우리도 눈을 뜨기 위해서는 예수께로 가야하는 보지 못하는 자들인가? 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들이 영적 시각장애인일 리 없다는 반응입니다. 즉 자신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심각성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교만한 말을 내뱉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영적 무지로 자신을 돌이켜 볼 기회도 갖지 못하고, 예수님께 나아갈 기회도 얻지 못하므로 그들의 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