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왕이 된 남자, 강화도령 ‘철종’
발간일 2021.05.17 (월) 17:24
③ 강화읍(하) 용흥궁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강화도는 선사 시대 이래 우리나라 역사의 아이콘을 모두 품은 ‘보물섬’입니다. 고인돌, 고려궁지, 외규장각, 광성보, 천주교성지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엔 지금 반만년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뚜껑 없는 박물관, 역사의 보고. 강화도를 얘기할 때면 언제나처럼 거창한 수식어가 붙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죠. 봄맞이 개편과 함께 i-View가 새 연재를 시작하는 ‘길 위의 강화도’는 5000년 강화도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에피소드(episode) 중심으로 전개해 나갈 강화도의 신비로운 유적과 유물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
“임금이 살던 궁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거 아냐?” “그러게….”
4월의 어느 봄날 ‘용흥궁’(龍興宮)을 찾은 한 쌍의 젊은 남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화를 나눈다. 그들의 대화처럼 내전과 외전, 그리고 별전. 왕족이 기거하는 처소의 이름을 가진 세 개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소박하기 그지없다. 가옥의 규모로 봐선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를 갖춘 시골의 부잣집 정도로 보인다.
▲용흥궁은 조선 25대왕인 철종이 왕이 되기 전인 14살 때부터 19살 때까지 살던 자리에 지어진 집이다. 본래 초가집이었으나 나중에 기와집으로 다시 지었다.
지금으로부터 177년 전, 용흥궁에선 ‘원범’이란 이름을 가진 열네 살 ‘서울소년’이 짐을 풀었다. 조선 22대 왕인 정조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였다. 한양의 경행방 향교동(종로구 낙원동)에서 태어나 줄곧 한양에서 성장한 원범은 어째서 고향을 떠나 강화도로 왔던 것일까.
할아버지 은언군을 비롯해 원범의 가문은 대대로 역적으로 지목된 집안이었다. 증조부 사도세자를 비롯해 여러 명이 역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당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보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정조는 그나마 피붙이로 남은 이복동생 은언군에게 각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은언군이 살벌한 당쟁과 세도정치 속에서 그나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정조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눈을 감은 뒤 은언군과 그의 집안은 또다시 역적으로 몰려 점차 쇠락의 길을 걷는다. 이 과정에서 은언군의 손자인 원범도 14살이던 1844년(헌종10) 작은 형 이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된다.
고향에서 쫓겨나 따가운 눈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원범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인생역전’의 기회가 찾아든다. 그의 나이 19살이 되던 해였다. 1849년 6월7일 한양에서 온 고위관리들이 원범의 집에 들이닥친다.
▲용흥궁 전경. 용흥궁은 강화읍 주택가 좁은 골목길에 있다.
이 때 깜짝 놀란 원범은 자신을 잡아가기 위해 온 사람들인 줄로 잘 못 알고 산으로 도망쳤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한양의 관리들은 25대 국왕으로 책봉된 ‘강화도령’ 원범을 모시러 온 사람들이었다.
김경준 철종 연구가는 “당시 한양 관리의 인솔자였던 67세의 봉영대장 정원용이 원범의 집 앞에 도착해 집안에 있는 남자들은 다 나오라고 하니 원범이를 포함해 장가를 든 사촌형 등 남자 3명과 아녀자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용흥궁 문 앞 왼쪽엔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정기세 생묘비’이고 다른 하나는 ‘정원용 불망비’이다. 비석 사이에 놓여 있는 안내판은 ‘문충공 정원용(1783~1873)과 정기세(1814~1884)의 청렴한 덕행과 백성들을 아껴 준 공로와 은혜를 기리고자 1864년 3월에 강화유수부의 18개 면민들이 뜻을 모아 세웠다’고 소개하고 있다.
정원용은 봉영단 단장으로 원범을 한양으로 모셔간 관리이고 정기세는 원범이 왕이 된 후 초가집을 용흥궁으로 개축한 사람으로 이 둘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다. 산에서 나무를 베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댕기머리 총각 원범은 어떻게 왕으로 추대된 것일까.
▲용흥궁 내전(안채)
1849년 6월6일 조선 24대 왕인 헌종이 22세의 젊은 나이에 자식도 없이 죽자, 순조(23대)의 비인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력은 원범을 왕으로 지목한다. 왕의 핏줄을 가진 사람은 원범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는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 순원왕후와 안동 김 씨 세력은 철종을 왕으로 내세운 뒤 수렴청정에 들어간다.
즉위 2년 뒤엔 결혼을 하고, 3년 뒤엔 친정에 들어간 철종은 삼정의 문란 등을 바로잡으려 노력을 하기는 한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들려오는 얘기가 있었으니 “전하, 저희가 알아서 하겠나이다.”란 말이었다. 철종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눌려 꼭두각시 왕으로 전락했고 재위 14년 만인 33세 요절하고 만다. 왕 아닌 왕이 된 혈기방장한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술과 여색에 빠지는 것 외엔 다른 길이 없었을 것이다.
본래 초가집이었던 용흥궁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철종이 왕이 된 이후이다. 원범은 왕이 된 지 4년 뒤인 1853년 4월 정원용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강화는 구경할 것이 많고 마을에서 생산되는 것도 풍부하고 읍내의 모양이 서울과 같아 참 좋다. 내가 살았던 집이 근래에 많이 허물어졌다고 하니 보수하는 것이 좋겠다.”(철종)
“강화유수가 살펴보니 과연 썩고 허물어진 곳이 많아 근래에 이엉으로 지붕을 이으려 한다고 합니다.”(정원용)
“이엉으로 지붕을 이는 것은 매번 이런 걱정을 하게 되니 기와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철종)
이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지금과 같은 집을 짓고 용흥궁이란 이름을 붙였다.
철종은 자신이 성장한 강화도에 애정을 갖고 있었다. 사람을 보내 70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경로잔치를 베푸는가 하면 특별과거를 치러 관리로 등용했다. 자신이 한 때 적을 두고 살았던 땅에 대한 ‘특혜’라면 특혜였다.
▲용흥궁 안에 있는 비석인 '철종조잠저구기'.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집이란 것을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용흥궁 안에는 ‘哲宗朝 潛邸舊基’(철종조 잠저구기) 비석이 안치된 비각이 있다. 잠저란 왕세자와 같이 정상적 법통이 아닌 다른 사정으로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집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잠저로는 태조의 함흥 본궁과 개성 경덕궁, 인조의 저경궁, 영조의 창의궁 등이 있다. 잠저는 대개 왕위에 오른 뒤에 다시 짓는 것이 관례였다.
역적의 집안으로 몰려, 평범한 백성으로 살다 하루아침에 왕이 된 강화도령 원범. 철종은 그러나 세도정치란 시대의 격랑 속에서 변변한 왕 노릇을 제대로 못 한 채 술과 여색에 빠져 30대 초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용흥궁 입구에 있는 정기세(사진 왼쪽). 정원용 불망비. 이 비석들은 철종 당대 강화유수 정기세와 그의 아버지인 영의정 정원용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철종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원범이 어린 시절 딛고 살았던 땅 위를 걸어 용흥궁을 빠져나오는데, 뒤뜰에 피어난 들꽃이 봄바람을 타고 천천히 흔들린다.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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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령 첫사랑길>
강화도령의 ‘이루지 못한 사랑’ 흐르는 길
자신을 모시러 온 영의정 일행을 보고 자신을 처단하러 온 것으로 잘 못 알아 “살려달라”고 울먹인 강화도령 원범의 풋풋한 사랑이야기가 흐르는 길이다. 강화도 처녀 봉이와 뛰어놀며 사랑을 나눈 사연이 굽이굽이 흐른다.
유배를 당하는 바람에 제 때 공부를 하지 못 한 채 왕위에 오른 원범 철종. 왕이 된 이후 살게 된 궁궐은 지옥이며 자신이 살던 강화도의 초가집이야말로 진정한 천국이란 사실을 깨달은 철종은 하루하루를 술과 여색에 빠져 지내다 33세에 눈을 감는다.
원범이 14살 때부터 19살 까지 살았던 용흥궁을 둘러보고 강화도 처녀 봉이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눈 청하동 약수터로 향한다. 남녀는 여기서부터 남장대를 지나 숲길을 걸어 찬우물약수터를 오가며 사랑을 나누었다고 전한다.
강화산성 남쪽 정상부에 있는 남장대는 조선시대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진무영에 속한 군사시설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허물어진 것을 복원했다. 소나무가 우거진 노적봉을 지나면 찬우물약수터가 나온다.
철종은 이따금 강화도로 사람을 보내 찬우물약수터로 빚은 막걸리와 순무, 젓국갈비 등을 궁궐로 가져와 강화도에 봉이에 대한 그림을 달랬다.
철종외가는 외숙인 염보길이 살던 집이다. 집 왼편에 철종의 외할아버지 염성화의 묘가 있다. 철종릉은 예릉으로 철인왕후 김씨와 나란히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에 있다.
▲'강화도령 첫사랑 길'은 용흥궁에서 남장대를 거쳐 철종외가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한 쌍의 남녀가 용흥궁 앞을 걷고 있다.
■강화도령 첫사랑길 코스(용흥궁~철종외가 11.7km, 소요시간 3시30분)
용흥궁->청하동 약수터->남장대->찬우물약수터->철종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