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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문학성과 독자의 공감도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수필을 쓴다는 것은 수필을 쓰는 그 자체의 행위일 뿐이 아니라 ‘수필이란 무엇인가’, ‘수필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부단한 질문이기도 한 것이다. 수필창작은 곧 수필창작론의 탐구다. 이것은 엄밀히 따지면 동일행위이지만, 이중의 자각을 필요로 한다. 이런 수필 창작의 비밀을 아는 수필가가 얼마나 될까. 수필론에 대한 이해 없이 수필을 쓴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 수필을 쓴다는 것은? -
I. 열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문학은 표현 속에 존재한다. 수필을 씀에 있어서, 한 작품이 실존적 불안이나 죽음을 표현하든, 소시민적 생활의 애환을 그리든, 병든 사회에의 저항과 분노를 나타내든 간에, ‘문학성’ 속에 그 대상을 용해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문학성이란 말이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와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물론 공감도란 말은 질의 면에서 더 깊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수필의 문학성이란, 한 편의 작품을 문학적으로 만들어가는 구조적인, 형상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내심에 투영된 감정이나 정서가 세련되게 문학적 방식에 의해 표현된 것이다. 결국 예술의 '미'는 조형미다. 그러면 이 조형성을 구성하는 인자는 무엇이며, 그 경계를 이루는 핵심 요소는 뭘까. 전통적으로 진에 대한 탐구를 추구하는 것은 종교와 과학이고, 현실적인 선의 원칙을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고, 미래적 생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다. 적어도 한마디로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때, 수필미학은 존재의 토대를 얻게 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수필은 그 특유의 일상성, 무형식성, 평이성 등을 특색으로 하면서 비판적 문제제기보다는 공감의 영역을 지향하는 성과를 우리문학에서 만만치 않게 거두고 있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이란 시대와 사회의 구체적인 표출이어야 하고 그런 사회 속에서 인간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은 고대에도 있었지만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문학은 인생의 표현이요, 사회의 거울이라고 하는 것도 작품이 보여주는 내용이 작가의 주관으로 들어온 경험의 여과된 재현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수필가가 다루는 세계는 다양하다. 그러나 인간을 소재로 하는 수필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그 자체가 부분이지만 종합된 하나의 ‘세계’이며 ‘시대’이고 ‘사회사’이자 ‘인간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작품과 작가는 일치해야 한다. 수필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자신의 수필 속에 투영되는 경우가 좋은 수필이 되는 가장 지름길일 것이다. 수필 쓰기를 삶의 한 행위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수필이 정보나 사실의 나열이거나 말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나는 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철학하는 것을 가르친다’고 한 칸트의 말은 수필 창작에 그대로 원용해도 좋겠다. 문학성과 공감도란 제목으로 수필평을 쓰면서 한 가지 생각해 낸 것이 있다면, 삶의 진실과 수필의 진실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II. 펼치며
정성화의 <소올 푸드>은 문학성과 공감도의 측면에서 성공한 수필이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이고, 작가는 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하였다. 제목을 영어로 달았지만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견한 정성을 소재와 연결하여 인간화로 승화시키내는 수법이 발단부에서부터 빛을 발하는 수필이다. 시대의 밑그림을 그려보게 하면서 한국적 정서를 자극하는 도입부 전략이 독자의 눈길을 잡아두는 데 주효했다. 이 수필에서 작가는 정성의 중요성을 음식을 제재로 해서 전개하다가 마지막으로 가서 제재의 확산을 기하는 방식을 써서 주제 의미화를 이루고 있다. 어머니가 싸준 주먹밥에서 모성의 소리를 들으며, ‘식구’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구현해내고, 이것을 ‘제사’ 음식으로 연결시켜 삶을 견고히 하는 가치를 의미화해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우리들의 영혼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어디 음식뿐이랴.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좋은 음악이나 좋은 그림, 좋은 풍경, 그리고 좋은 인연들도,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잘 발효시키기만 한다면, 분명 좋은 ’소올 푸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진술을 통해서 작가는 음식을 사전적 의미에서 함축적 의미로 전환한다. 이런 방식으로 주제를 구체화하는 전략이 아주 수준급이다. 마지막 결말부에 공감의 감초라고 할 수 있는 자기 반성적 성찰 기법을 투입, 수필을 더한층 수필답게 맛나게 처리하였다.
좋은 수필이란 독자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작가가 발견하여 보여주는 데서 가치가 더해지는 법이다. 이 글의 문학성과 공감도는 한국적 정서를 바탕에 깔고서 인간애의 가치를 추구하는 주제 지향성을 모성의 원리와 성찰의 원리를 통해서 풀어내었기에 더욱 커졌다고 하겠다. 자기 성찰적인 귀결을 위해 제재를 다양한 가치들에서 사람으로 다시 압축하고, 이어서 ‘나는 과연 어떤 ’푸드‘일까’라는 말로 자신을 반성의 성찰대 위에 세우는 작가의 탁월한 형상화 능력은 신춘문예 출신다운 글 솜씨라 하겠다. 정성화는 오래 전부터 문학 수필을 써온 저력이 있는 작가다. 영혼의 만남이라는 개인 간의 소극적인 소통에서 세상을 살리는 적극적인 소통의 문제까지 언제나 그녀는 눈떠 있다. 종국에는 ‘내 안에는 걷어낼 수 없는 불순물이 너무나 많다’고 하는 작가의 반성문에 가슴에 와닿는 건 무엇 때문일까? ‘이 다음 내가 땅에 묻혔을 때 나로 인해 땅 속의 속이 더부룩해질 것 같은데 이를 어쩐다’라는 결말부는 생태적 합리성이란 대안을 촉구하는 진술로써 겸양의 자세가 독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음식의 맛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데 익숙한 민족이다. 혼이 있는 음식이 되기 위한 전제로써 ‘가슴 속에서 잘 발효시켜야 한다’는 조건이 절절한 공감을 자아낸다.
고한익의 <무료 일간지>는 배경이 지하철이다. 평소에는 지하철역 출입구로 가는 길목에서 무료일간지를 받아보는 것을 기피하던 작가가 아침마다 무료 일간지를 3개씩 넙죽넙죽 받게 된 사연을 통해서 ‘부끄러움’의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수필이다. 출근길 전동차 안에서 만난 한 노인과의 만남이 삶의 깨달음으로 번질 때까지 작가는 그늘진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버리지 못한다. 폐지를 주워 모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과 폐지를 주워 모우는 일이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드는 한 여학생의 모습에서 40여 년 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 시점부터 자신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놓고, 이야기는 고난 앞에서 당당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후회로 점철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삶의 현장에 나온 것도 세상을 향해 당당히 출사표를 내민 것이다. 중학생이던 당시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던 어머니를 부끄럽게 생각했던 자신을 처절하게 반성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진한 공감을 맛본다.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해 노동 현장에 서서 자식들을 위해 뼈빠지게 일만 하던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를 그 자식들은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존경했을까. 바쁘게 살다보니 자식에게 신경 쓸 수 없었던 부모를 원망하거나 노동판에 선 부모가 부끄러웠던 기억을 떠올린다. 작가는 두터운 벽 속에 자신을 감추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부터 꾸짖고,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당당함으로 세상에 맞서라고 외친다.
이 수필의 압권은 “그 노인은 삶의 질곡이 고스란이 밴 주름 가득한 얼굴에 걸음걸이조차 온전하지 못했는데 좁은 전동차 안을 누비면서 곱은 손으로 승객들이 선반에 올려두거나 좌석에 평개쳐둔 신문을 꼼꼼히도 찾아내어 생은 일회용이 아니라고, 삶은 더 이상 구겨지고 버림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몸으로 말씀하시면서 자루에 차곡차곡 담는 것이었다“라는 진술로 주제의식이 의미화된 부분이다. 이 문구는 작품의 주제를 상상화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손맛을 더해준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적절한 화제의 선택과 배열이다. 젊음과 늙음을 대립각으로 놓고, 과거와 현재를 대조법로 해서 ‘부끄러움’을 재해석해 낸 거도 좋았고, 솔직함을 무기로 자신의 과거사를 이야기에 끌어들여 주제 의미화를 돕는 자료로 활용한 것도 좋았다. 결구는 자발적인 이웃돕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짐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문학을 통해서 사회 현실을 선도해 나가는 역할 또한 작가에게 맡겨진 사명이라 할 수 있다. 당당한 삶의 자세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에 대해 공감한다. 수필이 존재하고 그 효용적 가치가 증대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삶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소명을 전제로 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삶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 다행스럽다.
김원순의 <적심>은 이 계절의 대표작이라 할 정도로 수작이다. 적심이란 줄기를 자르는 것을 말한다. 농장을 운영하는 작가가 딸을 보내는 어미의 심정으로 식물의 줄기를 잘라 한 분 한 분 옮겨 심어면서, 그 과정에서 느끼는 삶의 지혜를 수필화하였다. 적심을 하면서 친정 어머니를 생각하고 친정 어머니의 마음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작가가 줄기 짜르기를 통해서 얻는 삶의 교훈이 작가의 뛰어난 형상화 능력에 힘입어 우리에게 미적 쾌감으로 다가온다. 일상의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그친다면 참다운 의미에서 문학일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화분을 정리하면서 시집가는 딸을 위해 당부를 아끼지 않으시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머니에서 딸자식으로 이어지는 내리사랑의 아름다운 모습이 작가의 회상을 통해 아련하게 전해진다. 삽목상자 속의 줄기들에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세상살이가 아니냐며 이별 앞에 선 식물들과 동화를 이루고, 연약해 보이지만 결코 연약하지 않은 줄기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 하는 작가의 마음으로 손맛을 우려낸다. 적심을 해준 분들을 출발선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는 마라토너로 인식하고, 자신도 자신에게 남은 길을 끝까지 완주하는 멋진 마라토너가 되고 싶었다는 작가가 줄기를 짜르는 일에서 부여하고 발견하는 의미가 신선하기에 이 작품은 충분한 문학성을 확보하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삶이란 자르는 것으로 시작하여 자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는 성찰의 결과가 공감을 준다.
이 수필은 삶에 시달려 사느라 잊고 있었던 인생의 의미를 상기시켜주는 자상한 면모를 지닌다. ‘자른다는 것’에 대한 작가의 탁월한 인식이 돋보인다. 삶이 끝나는 날, 야속하고 막막한 내 손에 길러진 꽃들에 둘러싸여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소박한 작가의 사생관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이 글에는 속되지 않은 아름다움도 스며있다. “한 자루의 연필도 나무의 탯줄을 자르고 나왔듯이, 거미줄처럼 뒤엉킨 길과 터널들도 산과 언덕을 자르고 태어났던 것이다. 자르지 않고 존재할 수 없는 냉엄한 삶의 법칙 앞에서 그 무엇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름조차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적심을 통해 깨닫는 대목에서 이 수필의 호흡이 최고조에 이른다. 주제 의미화 단락 앞에 주제를 구체화하는 문장을 배치한 것은 주제의식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작가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인식과 형상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더욱 감동을 준다. 유한한 존재로서의 삶에 대한 인식은 진정으로 우리 삶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고 마음의 먼지와 욕심을 덜어내게 한다. 이 글은 이러한 것을 느끼게 하고, 보다 홀가분하게 하는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하기에 향기가 난다.
김나현의 <환승역에서>는 차분하게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에 젖게 하는 수필이다. 지하철의 환승역에서 전동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풍경을 보고 느끼는 작가의 심미적 체취가 공감을 준다. 아름다운 것을 느끼되 그 느낌이 모든 사람의 공감을 얻으면, 일단 성공이다. 수필은 발단의 문학이다. 김나현은 발단에서부터 한껏 수필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마디로 멋이 있다. 서두에서부터 특유의 언어적인 필치로 형상성과 함축성을 특성으로 해서 독자를 공감으로 이끌어 가는 데 성공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된 것에 공감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평의 원조인 칸트가 말한 ‘심미적 의무’를 작가 김나현은 정확히 독자들로 하여금 수행케 한다. ‘열차가 도착할 때마다 물고기가 산란을 하듯 한 무리를 쏟아내고, 새로운 먹이를 삼키곤 깜깜한 굴 속으로 꼬리를 감춘다’는 묘사는 수필의 손맛을 한껏 우려낸다. 지하철은 땅 속을 돌고 돌며 인생을 실어 나른다는 진술은 철학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 치밀한 관찰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김나현의 문장은 참신함과 연결되면서 예리한 미적 정서를 뽑아낸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부여하는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제재를 깊이 있게 관찰하고 탐구하여 그것이 암시하거나 숨기고 있는 본질을 찾아내어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는 측면에서 고급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그녀에게 지하철 환승역은 다양한 의미로 구체화된다. 여유를 가진 작가이기에 지하철 공간은 우선 뭔가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작가의 지하철 역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데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동한다. 수필의 태생적 구도가 문제 해결 구도요, 하강에서 상승으로 나아가는 해피엔딩 구조다. 이 수필 역시 그런 이원적 구도로 짜여진 수필로 어두운 데에서 밝은 데를 지향한다. 처음에 ‘마네킹’, ‘인스턴트’, ‘콘크리트’ 등의 언어로 대변되던 현대인들이 수필의 중간쯤에 오면 공동운명체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연극배우’로 변신한다. 정처있는 사람들이 밀물처럼 채워졌다 썰물처럼 쓸려나가는 ‘도심의 바다’라는 인식뿐만 아니라 어디선가에서 물려들어서 뿔뿔히 흩어지는 사람들을 각각의 떠도는 섬으로 의미화한 대목에서 이 수필은 절정을 이룬다. 멀리 철로 끝에서 불빛이 깜빡이면 작가의 가슴은 환한 불이 켜진다. 하나쯤 놓친 후 다음 열차를 기다려 보는 객기도 부릴만 하다는 진술에서 작가는 주제를 충분히 암시한다. 이 수필을 읽으면,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한지를 알려주는 삶의 원형, 삶의 진리를 파헤친 지혜서란 생각이 찾아든다. 그녀는 형이하학적 제재의 속성을 잘 파악하여 형이상적인 인간의 본질로 나아가는 데 참으로 익숙하다. 사람은 여유 속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한 걸음 뒤처졌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리 없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흠잡을 데 없이 좋은 수필이다.
박윤희의 <상락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 한국적 수필이다. ‘상락제’는 청도 한옥학교에서 학생들이 지은 황토방이름이다. 설명이 없이는 뜻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말이다. 이 수필의 발단부도 아늑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작가의 세련된 문장력이 처음부터 시선을 사로 잡는 데 성공한다. 국화 문양의 방문 고리의 온기에서 막 쉬어간 지친 햇살과 낮달을 떠올리는 작가의 상상력은 범상치 않다.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도 맞이할 임이 있어 지칠 줄 모른다. 작가의 눈과 마주치는 모든 것은 환한 생명력으로 되살아나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황토방 속에서 오직 시선만으로 한 편의 멋진 수필을 버물어내었다. 좋은 수필은 이런 발견과 묘사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수필적 요소라고 할까, 문학적 요소는 모든 것을 생명력의 의미체로, 나아가서 그것들을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의미화한 데서 그치지 않고, 작가는 전통적인 것에 힘껏 매료되어 우리 것의 가치를 드높이고자 하는 데 있다. 작가는 상락제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하늘을 닮고자 둥글게 지었을까. 모나지 않게 살고 싶어 동그랗게 꾸몄을까. 죽고 사는 것이 하나라고 기둥 같은 매듭을 없앤 것일까.’하며, 한국미를 대표하는 모나지 않음에 대해 사색한다. 작가가 얼마나 한국적 미학에 빠져 있는가 하는 것은 결말부 ‘돌멩이 하나, 들꽃 하나, 바람 한 줌에게도 입맞춤하고 싶은 그런 아침이란 말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 수필이 주는 또 하나의 맛은 연륜에서 풍기는 노련함이다. 글을 쓰는 작업은 자기 자신과의 진실한 대면을 도모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인간적 향내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수필은 제 물상에 인격을 부여하는 인간화 작업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향기를 내는 것이다. 삶은 객관적인 평가 기준에 의해서만 그 가치와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이나 불행은 주관적인 인식의 수용에 따른 결과이지, 객관적으로 그 우열을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세계관으로 살아가면서 사라져가는 전통 미학의 가치를 수필 작품을 통해서 드높이고 있는 작가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체험을 통해 느낀 정서를 생활일상에 역류시키거나 여과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솔직한 자기 관조 또는 반조로 나아가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작품은 주제화 전략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의미화하는가가 수필 창작에서 생명적이다. 이 글에서 높이 사야 할 점은 낯설게 하기를 통한 참신한 작가의 형상력이다. ‘군불 앞에는 덩치 큰 어둠도 있고, 나무에 안긴 바람, 새들의 잠꼬대, 눈에 불을 켠 고양이’ 아무런 이야기라도 도란도란 나누고 싶은 작가의 소망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가 얼마나 소통이 부족한지를 알 수 있다. 작가의 전통적 삶에 보내는 긍정적이며 따뜻한 시선은 독자들마저 따뜻하게 감싸안기에 우리에게 깊은 공감을 준다. 자연과의 합일을 향해 손길 뻗어가면서 인간적 향기만 품어내어도 수필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III. 닫으며
수필가는 수필의 주제와 관련된 형이하학적인 제재의 발견을 통해 우주나 삶에 대한 본질을 형이상학적으로 해명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논리 하에서 수필가는 진리의 발견을 위한 통섭과 지적 세계의 소통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수필을 쓴다는 것이 이야기의 나열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수필 창작 과정에 철학성이 요구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위에서 다룬 작품들은 ‘사람’과 ‘사물’을 재료로 하고 있는 수필들이다. 하나같이 인간을 사랑하는 정신과 인간성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인간을 둘러싼 사회를 그리면서, 작가나 독자를 구원하는 문학의 본질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당연한 결과다. 이들 수필가들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얻은 감동과 반성을 구체적 형상으로 제시하여 자기 발전의 초석으로 삼았다. 그래서 작은 감동을 준다.
간혹 수필은 ‘정의’를 내세우는데, 사람은 영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수필은 고고하나 사람이 글을 따르지 못하는 것을 종종 본다. 언행의 불일치다. 문학의 본질성에 대한 고뇌 없이 수필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고 사실을 단어로 나열해 놓는 사행심이 수필을 불행하게 만들고 수필을 사랑하는 독자를 실망시킨다. ‘인생은 살기 어려운데, 어찌 수필이 쉽게 쓰여질 수 있겠는가. 결코 자기 위로의 도구로 수필을 마치 복권을 사듯 마구 써서는 안 될 일이다. 수필가들이 내세우는 ’문학성‘이 각질 안에 움츠린 번데기와 같은, 자기의 생존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 작품은 굳이 발표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수필이 발표되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한 개인의 이야기일지라도 느낌을 문학적 형상화로 표현해서 독자와 함께 나누려는 데 있음을 우리 수필가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문학성이고 공감대가 아니겠는가.
이번 계간평은 수필을 독자와의 상호교섭 작용으로 이해하면서 공감도와 문학성의 차원에서 대체적으로 작품의 긍정적인 측면만 살펴보았다. 몸속의 틈을 나뭇잎의 잎맥과 같은 것으로 견주고 이를 형상미학으로 극대화시킨 김정임의 <어디론가 나도 모르게>, 자신의 이성과 무관하게 무당이 되어버린 동서의 사연을 수필화한 <무당이 된 동서>, 사색과 관조가 돋보인 김새록의 <이기대에서 듣는 피리> 감각적인 묘사로 자갈치 시장의 풍경을 그린 이수진의 <즐비한 삶의 향기> 등의 수필이나 지면 관계로 감상할 수 없었다. 이 작품들을 다루지 못한 원망은 고스란히 평자가 안아야 할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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